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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의 반란이 지속되고 한나라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막아 이들을 물리침

  • 국가
    오환(烏桓)
순제(順帝) 주 001
각주 001)
順帝(115~144; 재위 125~144): 이름은 保이며, 安帝의 아들이다. 永寧元年(120)에 太子가 되었다가 延光 3년(124)에 濟陰王으로 폐위되었다. 다음해 安帝가 죽자 宦官 江京 등이 北鄕侯 劉懿를 옹립하였으나 곧 죽었다. 宦官 孫程 등이 江京을 죽이고 濟陰王을 皇帝로 옹립하여 孫程 등 19인은 宦官으로써 列侯에 봉해졌다. 外戚 梁商과 梁冀가 大將軍이 되어 朝政은 宦官과 外戚이 조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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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陽嘉) 4년(135) 겨울에 오환이 운중[군](雲中郡) 주 002
각주 002)
雲中郡: 戰國時代 趙 武靈王이 설치하였다. 秦代의 治所는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縣 東北 古城鄕 古城村 서쪽에 있는 古城이다. 관할구역은 지금 內蒙古 土黙特右旗 이동, 大靑山 이남, 卓資縣 이서, 黃河 南岸과 長城 이북의 땅이었다. 前漢시기에 관할구역이 축소되어 後漢시대에는 幷州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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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입하여 도로 위에서 상인주 003
각주 003)
원문은 “商賈”인데, ‘商’은 여기저기 다니며 물건을 파는 行商을, ‘賈’는 한 곳에 머물러 물건을 파는 坐商을 지칭한다. 본문에서는 합쳐서 상인이라고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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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우마차 천여 량(兩)주 004
각주 004)
원문의 兩은 수레, 혹은 수레를 세는 단위를 뜻하는 輛과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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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로채니 도료장군 경엽(耿曄) 주 005
각주 005)
耿曄: 右扶風 茂陵縣 사람이며, 字는 季遇이다. 그의 선조는 원래 鉅鹿郡 사람이었으나 武帝시기에 二千石 이상의 吏를 武陵으로 遷徙할 때 關中으로 옮겼다. 順帝 초기에 烏桓校尉가 되었는데, 鮮卑가 변방을 침입하여 代郡太守를 살해하자 耿曄은 烏桓과 諸郡의 卒을 이끌고 出擊하여 鮮卑를 大破하였다. 이에 鮮卑는 크게 놀랐고 數萬人이 遼東郡을 방문하여 항복하였다. 이후 耿曄은 자주 塞外로 나가 전공을 세웠다. 후에 度遼將軍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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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천여 인을 이끌고 [오환의 군대를] 추격했으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였지만, 또 사남[현](沙南縣) 주 006
각주 006)
沙南: 李賢注에 의하면 沙南은 雲中郡에 속하는 縣 이름이며, 境內에는 蘭池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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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싸워서 적의 머리 500급을 베었다. 오환은 드디어 경엽난지성(蘭池城)에서 포위하였다. 이때 적사사(積射士)주 007
각주 007)
積射士: 漢代에 추적하여 활을 쏘는 병사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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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인과 도료영(度遼營) 소속 1천 인을 징발하여 상군(上郡)에 나누어 배치해서 오환의 군대를 공격하니 오환의 군대는 물러갔다.주 008
각주 008)
원문은 “順帝陽嘉四年冬, 烏桓寇雲中, 遮截道上商賈車牛千餘兩, 度遼將軍耿曄率二千餘人追擊, 不利, 又戰於沙南, 斬首五百級. 烏桓遂圍曄於蘭池城, 於是發積射士二千人, 度遼營千人, 配上郡屯, 以討烏桓, 烏桓乃退.”인데, 『三國志』에서는 “至順帝時, 戎末廆率將王侯咄歸·去延等從烏丸校尉耿曄出塞擊鮮卑有功, 還皆拜爲率衆王, 賜束帛.”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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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永和) 5년(140)에 오환의 대인 아견(阿堅)강거(羌渠) 등이 남흉노(南匈奴) 좌부(左部)의 구룡[왕](句龍王)주 009
각주 009)
句龍王: 『資治通鑑』에는 “南匈奴句龍王吾斯”라고 기록하였는데, 본문과 대조해 보면 “句龍” 뒤에 ‘王’字가 첨가되었다(『資治通鑑』 卷52 「漢紀44」 〈順帝 永和五年(140)條〉: 1686, “南匈奴句龍王吾斯·車紐等反, 寇西河.”). 護雅夫는 匈奴의 官制를 분석하면서 王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첫째, 東胡王 등의 용례처럼 種族·部族·氏族의 명칭 뒤에 王이 붙는 경우인데, 이는 부족공동체의 수장의 뜻을 지닌다. 둘째, 左右賢王·左右谷蠡王·左右日逐王처럼 單于가 임명하는 官名으로 사용되었다(護雅夫, 1997: 122~ 138). 여기서 句龍王은 둘째 부류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첫째의 용례에 해당한다. 즉 句龍王은 南匈奴 左部에 속하는 句龍이란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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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吾斯)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가자, 중랑장(中郞將)주 010
각주 010)
中郞將: 秦漢時代 禁中의 警衛를 관장한 郎中令 휘하에 설치된 中郞을 관리하기 위해 五官署· 左署·右署에 두어진 장관의 명칭이다. 秩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將軍의 아래이고 합쳐서 五官中郞將이라 칭했다. 虎賁郞에 설치한 中郞將은 虎賁中郞將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中郞將은 모두 皇帝의 侍衛를 통솔하여 좌우를 隨從하며 어떤 경우에는 禁軍을 통솔하였다. 後漢時代에는 五官中郞將 1인을 두었는데, 秩은 比二千石이었고 五官郞을 관장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五官中郞(比六百石), 五官侍郞(比四百石), 五官郎中(比三百石)을 두었다. 또 左中郞將·右中郞將·虎賁中郞將·羽林中郞將·使匈奴中郞將 등을 두었는데, 모두 光祿勳(前漢의 郎中令)에 속하였다. 後漢末에 東西南北의 四中郞將을 두었는데,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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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탐(張耽)이 이들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참하니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항복하였다.주 011
각주 011)
『三國志』에는 번역문 “영화(永和) 5년(140)에 ~모두 항복하였다”에 해당하는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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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제(桓帝) 주 012
각주 012)
桓帝(132~167; 재위 146~167): 이름은 劉志이며, 章帝의 증손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蠡吾侯가 되었다. 本初元年(146)에 質帝 사후 梁太后와 大將軍 梁冀의 옹립으로 15세의 나이에 帝位에 올랐다. 재위기간 梁太后가 臨朝稱制하고 梁冀가 전횡하여 朝政은 혼란하고 민생이 불안하였다. 延熹 2년(159)에 宦官 單超 등과 함께 모의하여 梁氏를 멸하고 單超 등 환관을 縣侯로 봉하여, 이후 권력이 宦官에게 돌아갔다. 말년에 黨錮의 禍를 일으켜 많은 관리와 지식인을 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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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永壽) 년간(155~157)에 삭방오환(朔方烏桓)주 013
각주 013)
朔方烏桓: 朔方郡 인근으로 이주해 살던 烏桓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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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휴저도각(休著屠各)주 014
각주 014)
休著屠各: 休屠·屠各·休屠各·休著各 등으로도 불렸다. 匈奴의 지배를 받았던 유목민 집단이었다. 후에 前漢 武帝 이후 五郡故塞之地로 옮겨 살았다. 涼州의 河西回廊 일대와 隴西·隴東, 渭北에 분포하였다(唐長孺, 1955: 38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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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중랑장 장환(張奐) 주 015
각주 015)
張奐: 燉煌郡 淵泉縣 사람이며, 字는 然明이다. 太尉 朱寵을 師事하여 歐陽尙書를 배웠으며 후에 大將軍 梁冀에게 辟召되었고, 賢良에 천거되어 議郞에 임명되었다. 安定屬國都尉·使匈奴中郞將을 역임하며 南匈奴와 烏桓 문제를 처리하였다. 후에 梁冀가 주살되자 梁冀의 故吏였다는 이유로 免官되어 禁錮되었다. 후에 복직하여 撫慰태수·大司農에 임명되었고 鮮卑가 변방을 침입하자 護匈奴中郞將에 임명되니 匈奴와 烏桓 등이 이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 張奐은 우두머리만 주살하고 나머지는 慰撫하고 받아들였다. 후에 少府·大司農·太常을 역임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禁錮되었다. 저서에는 『尙書記難』30餘萬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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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연희(延熹) 9년(166) 여름에 오환은 다시 선비 및 남흉노와 함께 변방의 9개 군을 침입하여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장환이 이들을 토벌하자 [오환·선비·남흉노] 모두 새외(塞外)로 달아났다.주 016
각주 016)
『三國志』에는 “환제 영수 년간에 …(중략)… 새외로 달아났다”에 해당하는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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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順帝(115~144; 재위 125~144): 이름은 保이며, 安帝의 아들이다. 永寧元年(120)에 太子가 되었다가 延光 3년(124)에 濟陰王으로 폐위되었다. 다음해 安帝가 죽자 宦官 江京 등이 北鄕侯 劉懿를 옹립하였으나 곧 죽었다. 宦官 孫程 등이 江京을 죽이고 濟陰王을 皇帝로 옹립하여 孫程 등 19인은 宦官으로써 列侯에 봉해졌다. 外戚 梁商과 梁冀가 大將軍이 되어 朝政은 宦官과 外戚이 조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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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雲中郡: 戰國時代 趙 武靈王이 설치하였다. 秦代의 治所는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縣 東北 古城鄕 古城村 서쪽에 있는 古城이다. 관할구역은 지금 內蒙古 土黙特右旗 이동, 大靑山 이남, 卓資縣 이서, 黃河 南岸과 長城 이북의 땅이었다. 前漢시기에 관할구역이 축소되어 後漢시대에는 幷州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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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원문은 “商賈”인데, ‘商’은 여기저기 다니며 물건을 파는 行商을, ‘賈’는 한 곳에 머물러 물건을 파는 坐商을 지칭한다. 본문에서는 합쳐서 상인이라고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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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원문의 兩은 수레, 혹은 수레를 세는 단위를 뜻하는 輛과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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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耿曄: 右扶風 茂陵縣 사람이며, 字는 季遇이다. 그의 선조는 원래 鉅鹿郡 사람이었으나 武帝시기에 二千石 이상의 吏를 武陵으로 遷徙할 때 關中으로 옮겼다. 順帝 초기에 烏桓校尉가 되었는데, 鮮卑가 변방을 침입하여 代郡太守를 살해하자 耿曄은 烏桓과 諸郡의 卒을 이끌고 出擊하여 鮮卑를 大破하였다. 이에 鮮卑는 크게 놀랐고 數萬人이 遼東郡을 방문하여 항복하였다. 이후 耿曄은 자주 塞外로 나가 전공을 세웠다. 후에 度遼將軍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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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沙南: 李賢注에 의하면 沙南은 雲中郡에 속하는 縣 이름이며, 境內에는 蘭池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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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積射士: 漢代에 추적하여 활을 쏘는 병사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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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원문은 “順帝陽嘉四年冬, 烏桓寇雲中, 遮截道上商賈車牛千餘兩, 度遼將軍耿曄率二千餘人追擊, 不利, 又戰於沙南, 斬首五百級. 烏桓遂圍曄於蘭池城, 於是發積射士二千人, 度遼營千人, 配上郡屯, 以討烏桓, 烏桓乃退.”인데, 『三國志』에서는 “至順帝時, 戎末廆率將王侯咄歸·去延等從烏丸校尉耿曄出塞擊鮮卑有功, 還皆拜爲率衆王, 賜束帛.”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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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句龍王: 『資治通鑑』에는 “南匈奴句龍王吾斯”라고 기록하였는데, 본문과 대조해 보면 “句龍” 뒤에 ‘王’字가 첨가되었다(『資治通鑑』 卷52 「漢紀44」 〈順帝 永和五年(140)條〉: 1686, “南匈奴句龍王吾斯·車紐等反, 寇西河.”). 護雅夫는 匈奴의 官制를 분석하면서 王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첫째, 東胡王 등의 용례처럼 種族·部族·氏族의 명칭 뒤에 王이 붙는 경우인데, 이는 부족공동체의 수장의 뜻을 지닌다. 둘째, 左右賢王·左右谷蠡王·左右日逐王처럼 單于가 임명하는 官名으로 사용되었다(護雅夫, 1997: 122~ 138). 여기서 句龍王은 둘째 부류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첫째의 용례에 해당한다. 즉 句龍王은 南匈奴 左部에 속하는 句龍이란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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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中郞將: 秦漢時代 禁中의 警衛를 관장한 郎中令 휘하에 설치된 中郞을 관리하기 위해 五官署· 左署·右署에 두어진 장관의 명칭이다. 秩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將軍의 아래이고 합쳐서 五官中郞將이라 칭했다. 虎賁郞에 설치한 中郞將은 虎賁中郞將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中郞將은 모두 皇帝의 侍衛를 통솔하여 좌우를 隨從하며 어떤 경우에는 禁軍을 통솔하였다. 後漢時代에는 五官中郞將 1인을 두었는데, 秩은 比二千石이었고 五官郞을 관장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五官中郞(比六百石), 五官侍郞(比四百石), 五官郎中(比三百石)을 두었다. 또 左中郞將·右中郞將·虎賁中郞將·羽林中郞將·使匈奴中郞將 등을 두었는데, 모두 光祿勳(前漢의 郎中令)에 속하였다. 後漢末에 東西南北의 四中郞將을 두었는데,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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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三國志』에는 번역문 “영화(永和) 5년(140)에 ~모두 항복하였다”에 해당하는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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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桓帝(132~167; 재위 146~167): 이름은 劉志이며, 章帝의 증손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蠡吾侯가 되었다. 本初元年(146)에 質帝 사후 梁太后와 大將軍 梁冀의 옹립으로 15세의 나이에 帝位에 올랐다. 재위기간 梁太后가 臨朝稱制하고 梁冀가 전횡하여 朝政은 혼란하고 민생이 불안하였다. 延熹 2년(159)에 宦官 單超 등과 함께 모의하여 梁氏를 멸하고 單超 등 환관을 縣侯로 봉하여, 이후 권력이 宦官에게 돌아갔다. 말년에 黨錮의 禍를 일으켜 많은 관리와 지식인을 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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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朔方烏桓: 朔方郡 인근으로 이주해 살던 烏桓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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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休著屠各: 休屠·屠各·休屠各·休著各 등으로도 불렸다. 匈奴의 지배를 받았던 유목민 집단이었다. 후에 前漢 武帝 이후 五郡故塞之地로 옮겨 살았다. 涼州의 河西回廊 일대와 隴西·隴東, 渭北에 분포하였다(唐長孺, 1955: 38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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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張奐: 燉煌郡 淵泉縣 사람이며, 字는 然明이다. 太尉 朱寵을 師事하여 歐陽尙書를 배웠으며 후에 大將軍 梁冀에게 辟召되었고, 賢良에 천거되어 議郞에 임명되었다. 安定屬國都尉·使匈奴中郞將을 역임하며 南匈奴와 烏桓 문제를 처리하였다. 후에 梁冀가 주살되자 梁冀의 故吏였다는 이유로 免官되어 禁錮되었다. 후에 복직하여 撫慰태수·大司農에 임명되었고 鮮卑가 변방을 침입하자 護匈奴中郞將에 임명되니 匈奴와 烏桓 등이 이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 張奐은 우두머리만 주살하고 나머지는 慰撫하고 받아들였다. 후에 少府·大司農·太常을 역임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禁錮되었다. 저서에는 『尙書記難』30餘萬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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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三國志』에는 “환제 영수 년간에 …(중략)… 새외로 달아났다”에 해당하는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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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순제(順帝), 경엽(耿曄), 경엽, 아견(阿堅), 강거(羌渠), 오사(吾斯), 장탐(張耽), 환제(桓帝), 장환(張奐), 장환
지명
운중[군](雲中郡), 사남[현](沙南縣), 난지성(蘭池城), 상군(上郡), 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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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의 반란이 지속되고 한나라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막아 이들을 물리침 자료번호 : jo.k_0003_0120_0010_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