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의 반란이 지속되고 한나라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막아 이들을 물리침
순제(順帝)
주 001양가(陽嘉) 4년(135) 겨울에 오환이 운중[군](雲中郡)
주 002을 침입하여 도로 위에서 상인주 003들의 우마차 천여 량(兩)주 004을 가로채니 도료장군 경엽(耿曄)
주 005이 2천여 인을 이끌고 [오환의 군대를] 추격했으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였지만, 또 사남[현](沙南縣)
주 006에서 싸워서 적의 머리 500급을 베었다. 오환은 드디어 경엽을 난지성(蘭池城)에서 포위하였다. 이때 적사사(積射士)주 0072천 인과 도료영(度遼營) 소속 1천 인을 징발하여 상군(上郡)에 나누어 배치해서 오환의 군대를 공격하니 오환의 군대는 물러갔다.주 008
영화(永和) 5년(140)에 오환의 대인 아견(阿堅)과 강거(羌渠) 등이 남흉노(南匈奴) 좌부(左部)의 구룡[왕](句龍王)주 009
환제(桓帝) 주 012영수(永壽) 년간(155~157)에 삭방오환(朔方烏桓)주 013과 휴저도각(休著屠各)주 014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중랑장 장환(張奐) 주 015
영화(永和) 5년(140)에 오환의 대인 아견(阿堅)과 강거(羌渠) 등이 남흉노(南匈奴) 좌부(左部)의 구룡[왕](句龍王)주 009
각주 009)
오사(吾斯)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가자, 중랑장(中郞將)주 010句龍王: 『資治通鑑』에는 “南匈奴句龍王吾斯”라고 기록하였는데, 본문과 대조해 보면 “句龍” 뒤에 ‘王’字가 첨가되었다(『資治通鑑』 卷52 「漢紀44」 〈順帝 永和五年(140)條〉: 1686, “南匈奴句龍王吾斯·車紐等反, 寇西河.”). 護雅夫는 匈奴의 官制를 분석하면서 王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첫째, 東胡王 등의 용례처럼 種族·部族·氏族의 명칭 뒤에 王이 붙는 경우인데, 이는 부족공동체의 수장의 뜻을 지닌다. 둘째, 左右賢王·左右谷蠡王·左右日逐王처럼 單于가 임명하는 官名으로 사용되었다(護雅夫, 1997: 122~ 138). 여기서 句龍王은 둘째 부류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첫째의 용례에 해당한다. 즉 句龍王은 南匈奴 左部에 속하는 句龍이란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각주 010)
장탐(張耽)이 이들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참하니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항복하였다.주 011
中郞將: 秦漢時代 禁中의 警衛를 관장한 郎中令 휘하에 설치된 中郞을 관리하기 위해 五官署· 左署·右署에 두어진 장관의 명칭이다. 秩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將軍의 아래이고 합쳐서 五官中郞將이라 칭했다. 虎賁郞에 설치한 中郞將은 虎賁中郞將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中郞將은 모두 皇帝의 侍衛를 통솔하여 좌우를 隨從하며 어떤 경우에는 禁軍을 통솔하였다. 後漢時代에는 五官中郞將 1인을 두었는데, 秩은 比二千石이었고 五官郞을 관장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五官中郞(比六百石), 五官侍郞(比四百石), 五官郎中(比三百石)을 두었다. 또 左中郞將·右中郞將·虎賁中郞將·羽林中郞將·使匈奴中郞將 등을 두었는데, 모두 光祿勳(前漢의 郎中令)에 속하였다. 後漢末에 東西南北의 四中郞將을 두었는데,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환제(桓帝) 주 012영수(永壽) 년간(155~157)에 삭방오환(朔方烏桓)주 013과 휴저도각(休著屠各)주 014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중랑장 장환(張奐) 주 015
각주 015)
이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연희(延熹) 9년(166) 여름에 오환은 다시 선비 및 남흉노와 함께 변방의 9개 군을 침입하여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장환이 이들을 토벌하자 [오환·선비·남흉노] 모두 새외(塞外)로 달아났다.주 016
張奐: 燉煌郡 淵泉縣 사람이며, 字는 然明이다. 太尉 朱寵을 師事하여 歐陽尙書를 배웠으며 후에 大將軍 梁冀에게 辟召되었고, 賢良에 천거되어 議郞에 임명되었다. 安定屬國都尉·使匈奴中郞將을 역임하며 南匈奴와 烏桓 문제를 처리하였다. 후에 梁冀가 주살되자 梁冀의 故吏였다는 이유로 免官되어 禁錮되었다. 후에 복직하여 撫慰태수·大司農에 임명되었고 鮮卑가 변방을 침입하자 護匈奴中郞將에 임명되니 匈奴와 烏桓 등이 이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 張奐은 우두머리만 주살하고 나머지는 慰撫하고 받아들였다. 후에 少府·大司農·太常을 역임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禁錮되었다. 저서에는 『尙書記難』30餘萬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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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句龍王: 『資治通鑑』에는 “南匈奴句龍王吾斯”라고 기록하였는데, 본문과 대조해 보면 “句龍” 뒤에 ‘王’字가 첨가되었다(『資治通鑑』 卷52 「漢紀44」 〈順帝 永和五年(140)條〉: 1686, “南匈奴句龍王吾斯·車紐等反, 寇西河.”). 護雅夫는 匈奴의 官制를 분석하면서 王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첫째, 東胡王 등의 용례처럼 種族·部族·氏族의 명칭 뒤에 王이 붙는 경우인데, 이는 부족공동체의 수장의 뜻을 지닌다. 둘째, 左右賢王·左右谷蠡王·左右日逐王처럼 單于가 임명하는 官名으로 사용되었다(護雅夫, 1997: 122~ 138). 여기서 句龍王은 둘째 부류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첫째의 용례에 해당한다. 즉 句龍王은 南匈奴 左部에 속하는 句龍이란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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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中郞將: 秦漢時代 禁中의 警衛를 관장한 郎中令 휘하에 설치된 中郞을 관리하기 위해 五官署· 左署·右署에 두어진 장관의 명칭이다. 秩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將軍의 아래이고 합쳐서 五官中郞將이라 칭했다. 虎賁郞에 설치한 中郞將은 虎賁中郞將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中郞將은 모두 皇帝의 侍衛를 통솔하여 좌우를 隨從하며 어떤 경우에는 禁軍을 통솔하였다. 後漢時代에는 五官中郞將 1인을 두었는데, 秩은 比二千石이었고 五官郞을 관장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五官中郞(比六百石), 五官侍郞(比四百石), 五官郎中(比三百石)을 두었다. 또 左中郞將·右中郞將·虎賁中郞將·羽林中郞將·使匈奴中郞將 등을 두었는데, 모두 光祿勳(前漢의 郎中令)에 속하였다. 後漢末에 東西南北의 四中郞將을 두었는데,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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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5)
張奐: 燉煌郡 淵泉縣 사람이며, 字는 然明이다. 太尉 朱寵을 師事하여 歐陽尙書를 배웠으며 후에 大將軍 梁冀에게 辟召되었고, 賢良에 천거되어 議郞에 임명되었다. 安定屬國都尉·使匈奴中郞將을 역임하며 南匈奴와 烏桓 문제를 처리하였다. 후에 梁冀가 주살되자 梁冀의 故吏였다는 이유로 免官되어 禁錮되었다. 후에 복직하여 撫慰태수·大司農에 임명되었고 鮮卑가 변방을 침입하자 護匈奴中郞將에 임명되니 匈奴와 烏桓 등이 이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 張奐은 우두머리만 주살하고 나머지는 慰撫하고 받아들였다. 후에 少府·大司農·太常을 역임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禁錮되었다. 저서에는 『尙書記難』30餘萬言이 있다.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순제(順帝), 경엽(耿曄), 경엽, 아견(阿堅), 강거(羌渠), 오사(吾斯), 장탐(張耽), 환제(桓帝), 장환(張奐), 장환
- 지명
- 운중[군](雲中郡), 사남[현](沙南縣), 난지성(蘭池城), 상군(上郡), 삭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