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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이 흉노에게 패하자 한(漢)이 이 틈을 타 오환을 격파하니 이후 항복하여 귀부함

  • 국가
    오환(烏桓)
소제(昭帝) 주 001
각주 001)
昭帝(전94~전74; 재위 전87~전74): 이름은 弗陵이며, 武帝의 少子이고 어머니는 趙倢伃이다. 武帝 後元 2년(전87)에 武帝가 임종하기 전에 太子로 삼았으며, 다음날 즉위하였다. 나이가 겨우 8세였기 때문에 霍光·上官桀·金日磾·桑弘羊이 遺詔를 받아 輔政하였다. 즉위 후 정치를 霍光에게 위임하였다. 당시 민생이 피폐했기 때문에 與民休息 정책을 취하고 徭賦을 경감하고 貧民에게 公田을 빌려 주고 流民을 招撫하였다. 始元 6년(전81)에 郡國의 賢良文學을 모아 鹽鐵회의를 열었고, 곧 榷酤를 罷하였다. 또 匈奴와 화친을 회복하였다.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고 사회·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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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주 002
각주 002)
『三國志』에서는 “至匈奴壹衍鞮單于時”라고 하였다. 『漢書』권94上 「匈奴傳」에 따르면 이 사건은 壹(壺)衍鞮單于가 즉위한 지 5년째인 전80년에 발생하였다(『漢書』권94上 「匈奴傳」: 3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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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은 점차로 강해졌고주 003
각주 003)
원문은 “烏丸漸彊”인데, 『三國志』에서는 ‘漸’字 대신 ‘轉’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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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오환은 흉노 선우의 무덤을 파헤쳐서주 004
각주 004)
원문은 “乃發匈奴單于冢墓”인데, 『三國志』에서는 “發掘匈奴單于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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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특 [선우에게 당한]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주 005
각주 005)
원문은 “以報冒頓之怨”인데, 『三國志』에서는 “發掘匈奴單于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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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주 006
각주 006)
『三國志』에서는 “匈奴” 대신 “壹衍鞮單于”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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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알고] 크게 노하여 동쪽으로 오환을 공격하여 무찔렀다.주 007
각주 007)
원문은 “乃東擊破烏桓”인데, 『三國志』에서는 “發二萬騎以擊烏丸”이라 하였다. 『漢書』권94上 「匈奴傳」에 따르면 이 사건은 壺衍鞮單于가 즉위한 지 5년째인 전80년에 발생하였다(『漢書』권94上 「匈奴傳」: 3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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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大將軍)주 008
각주 008)
大將軍: 武官名이며 戰國時代에 처음 보인다. 漢代에는 가장 높은 將軍의 칭호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漢武帝 때 大司馬와 領尙書事를 겸하여 中朝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後漢시대에는 大將軍이 三公의 위에 있었으며, 대부분 外戚이 임명되었다. 三國時代부터 南北朝時代까지 大臣이 執政하면 大將軍을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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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광(霍光) 주 009
각주 009)
霍光(?~전68): 前漢시대 河東郡시대 平陽縣 사람이며 字는 子孟이며, 霍去病의 異母弟이다. 젊어서 郞이 되었으며, 후에 諸曹侍中, 奉車都尉 光祿大夫를 역임하였다. 20여 년간 禁闥에 출입하면서 조심하고 근신하여 武帝의 신임을 얻었다. 武帝 사후 大司馬大將軍에 임명되고 博陸侯에 봉해졌으며, 金日磾·上官桀·桑弘羊과 함께 遺詔를 받아 昭帝를 보좌하였다. 후에 燕王 旦과 함께 모반했다는 죄명으로 上官桀 등을 제거하고 朝政을 혼자서 처리하였다. 昭帝 사후 昌邑王 劉賀를 皇帝로 옹립했다가 다시 폐하고 宣帝를 옹립하였다. 20년간 정권을 잡아 徭賦를 경감하고 與民休息정책을 취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점차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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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 소식을 듣고 도료장군(度遼將軍)주 010
각주 010)
度遼將軍: 後漢時代 度遼營을 관장하는 將軍을 지칭한다. 원래 前漢 武帝시기 范明友를 度遼將軍으로 임명하였고, 後漢 明帝初 南匈奴의 單于와 새로 항복한 자들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으나 常設 관직은 아니었다. 安帝 元初元年(114)에 처음으로 常設하였다. 銀印靑綬이고 秩은 二千石이었다. 屬官인 長史와 司馬는 六百石이었다. 주둔지역은 五原郡 曼柏縣(현재 內蒙古 東勝의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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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명우(范明友) 주 011
각주 011)
范明友: 출신지역은 未詳이다. 校尉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氐를 격파하였다. 후에 中郞將을 거쳐 霍光의 추천으로 將軍이 되어 烏丸을 공격하여 王을 생포하고 6,200개의 수급을 얻었으며, 이 공으로 平陵侯에 봉해졌다. 후에 霍光과 함께 宣帝를 옹립하는데 공을 세워 食邑의 戶數가 2,900戶에 이르렀다. 本始 2년(전72)에 3萬騎를 이끌고 張掖郡에서 匈奴를 공격하기 위해 遠征에 나섰다. 후에 度遼將軍 未央衛尉와 光祿勳을 역임하였다. 霍光의 아들 大將軍 霍禹, 霍光의 아내 郭顯, 郭雲, 鄧廣漢, 任勝, 趙平 등과 大逆을 모의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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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2만 명의 기병(騎)을 거느리고 요동[군]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요격하게 하였으나,주 012
각주 012)
원문은 “因遣度遼將軍范明友將二萬騎出遼東邀匈奴”인데, 『三國志』에서는 ‘因’字를 생략했으며, “二萬” 대신 “三萬”으로, ‘邀’字 대신 “追擊”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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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虜]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가 버렸다.주 013
각주 013)
원문은 “而虜已引去”인데, 『三國志』에서는 “匈奴已引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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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명우는 오환이 갓 패전한 [상황을] 틈타서 앞으로 나아가 오환을 격파하여주 014
각주 014)
원문은 “明友乘烏桓新敗, 遂進擊之”인데, 『三國志』에서는 “烏丸新被匈奴兵, 乘其衰弊, 遂進擊烏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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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군의 머리 6천여 급을 참하고, 세 명의 오환 왕(王)의 수급을 얻은 후에 돌아왔다.주 015
각주 015)
원문은 “獲其三王首而還”인데, 『三國志』에서는 “獲三王首還”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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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오환은 다시 유주(幽州) 주 016
각주 016)
幽州: 前漢 13 刺史部의 하나였으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後漢時代 감찰구역에서 지방최고 행정구역으로 바뀐 후 薊縣(현재 北京城 서남쪽 모퉁이)에 治所를 두었다. 後漢時代의 관할구역은 서쪽으로 오늘날 山西省 陽高縣, 남쪽은 대략 戰國 燕의 남쪽 경계, 북쪽은 현재 河北省 承德市와 遼寧省 建昌縣 이북, 동쪽으로는 遼寧省 寬甸縣과 撫順市 以東지역에 해당하였다. 西晉時代에는 오늘날의 遼寧省 일대를 나누어 平州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 유주는 현재의 北京과 天津, 河北 境內의 7개 郡國을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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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으나,주 017
각주 017)
원문은 “由是烏桓復寇幽州”인데, 『三國志』에서는 “後數復犯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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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명우는 곧 오환의 군대를 격파하였다.주 018
각주 018)
원문은 “明友輒破之”인데, 『三國志』에서는 “輒破”를 “征破”라고 적었다. 『漢書』昭帝紀에 의한 遼東烏桓이 元鳳 3년(전78) 겨울에 반란을 일으켰고(『漢書』卷7 昭帝紀 元鳳三年條: 229, “冬, 遼東烏桓反, 以中郞將范明友爲度遼將軍, 將北邊七郡郡二千騎擊之.”), 烏桓이 元鳳 5년(전76)에 漢의 변방을 犯하였으나(『漢書』卷7 昭帝紀 元鳳五年條: 232, “烏桓復犯塞, 遣度遼將軍范明友擊之.”), 모두 范明友에게 격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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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宣帝) 주 019
각주 019)
宣帝(전92~전49; 재위 전68~전49): 字는 次卿, 이름은 病已, 즉위 후 이름은 詢이다. 戾太子의 손자로 어려서 巫蠱의 화를 당해 민간에서 자랐다. 元平元年(전74)에 霍光과 대신들이 昌邑王 賀를 폐위한 후 옹립되어 帝位에 올랐다. 地節 2년(전68)에 霍光 사후 親政을 시작하였고, 2년 뒤 大司馬 霍禹의 모반을 적발하여 皇后 霍氏를 폐하고 霍氏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法令政策에 익숙한 文法吏를 중용하였고, 治書侍御史와 廷尉平을 설치하여 형량의 경중을 가리게 하였으며 가혹한 법을 없애고 법률의 정당한 행사를 유지하였다. 流亡을 招撫하고 民에게 公田을 대여하였으며 常平倉을 설치하고 租賦를 면제하거나 삭감하는 등 民生을 안정시켰다. 神爵 3년(전59)에 西域都護를 두어 西域에 政令을 반포하였으며, 서역 경영에 유리하게 하였다. 甘露 3년(전51)에 유학자들을 불러 五經의 異同을 논하게 하고 친히 이를 듣고 결정하였다. 廟號는 中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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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점차 북변을 지키고 [안정되자 오환은 한나라에] 항복하여 귀부(歸附)하였다.주 020
각주 020)
『三國志』에는 번역문의 “선제 시기에 …(중략)…귀부하였다”에 해당하는 구절이나 내용이 없다. 『漢書』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漢書』권94上 「匈奴傳」: 3784, “漢復得匈奴降者, 言烏桓嘗發先單于冢, 匈奴怨之, 方發二萬騎擊烏桓. 大將軍霍光欲發兵邀擊之, 以問護軍都尉趙充國. 充國以爲‘烏桓間數犯塞, 今匈奴擊之, 於漢便. 又匈奴希寇盜, 北邊幸無事. 蠻夷自相攻擊, 而發兵要之, 招寇生事, 非計也.’ 光更問中郞將范明友, 明友言可擊. 於是拜明友爲度遼將軍, 將二萬騎出遼東. 匈奴聞漢兵至, 引去. 初, 光誠明友: ‘兵不空出, 卽後匈奴, 遂擊烏桓.’ 烏桓時新中匈奴兵, 明友旣後匈奴, 因乘烏桓敝, 擊之, 斬首六千餘級, 獲三王首, 還, 封爲平陵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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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昭帝(전94~전74; 재위 전87~전74): 이름은 弗陵이며, 武帝의 少子이고 어머니는 趙倢伃이다. 武帝 後元 2년(전87)에 武帝가 임종하기 전에 太子로 삼았으며, 다음날 즉위하였다. 나이가 겨우 8세였기 때문에 霍光·上官桀·金日磾·桑弘羊이 遺詔를 받아 輔政하였다. 즉위 후 정치를 霍光에게 위임하였다. 당시 민생이 피폐했기 때문에 與民休息 정책을 취하고 徭賦을 경감하고 貧民에게 公田을 빌려 주고 流民을 招撫하였다. 始元 6년(전81)에 郡國의 賢良文學을 모아 鹽鐵회의를 열었고, 곧 榷酤를 罷하였다. 또 匈奴와 화친을 회복하였다.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고 사회·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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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三國志』에서는 “至匈奴壹衍鞮單于時”라고 하였다. 『漢書』권94上 「匈奴傳」에 따르면 이 사건은 壹(壺)衍鞮單于가 즉위한 지 5년째인 전80년에 발생하였다(『漢書』권94上 「匈奴傳」: 3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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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원문은 “烏丸漸彊”인데, 『三國志』에서는 ‘漸’字 대신 ‘轉’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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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원문은 “乃發匈奴單于冢墓”인데, 『三國志』에서는 “發掘匈奴單于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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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원문은 “以報冒頓之怨”인데, 『三國志』에서는 “發掘匈奴單于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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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三國志』에서는 “匈奴” 대신 “壹衍鞮單于”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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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원문은 “乃東擊破烏桓”인데, 『三國志』에서는 “發二萬騎以擊烏丸”이라 하였다. 『漢書』권94上 「匈奴傳」에 따르면 이 사건은 壺衍鞮單于가 즉위한 지 5년째인 전80년에 발생하였다(『漢書』권94上 「匈奴傳」: 3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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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大將軍: 武官名이며 戰國時代에 처음 보인다. 漢代에는 가장 높은 將軍의 칭호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漢武帝 때 大司馬와 領尙書事를 겸하여 中朝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後漢시대에는 大將軍이 三公의 위에 있었으며, 대부분 外戚이 임명되었다. 三國時代부터 南北朝時代까지 大臣이 執政하면 大將軍을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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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霍光(?~전68): 前漢시대 河東郡시대 平陽縣 사람이며 字는 子孟이며, 霍去病의 異母弟이다. 젊어서 郞이 되었으며, 후에 諸曹侍中, 奉車都尉 光祿大夫를 역임하였다. 20여 년간 禁闥에 출입하면서 조심하고 근신하여 武帝의 신임을 얻었다. 武帝 사후 大司馬大將軍에 임명되고 博陸侯에 봉해졌으며, 金日磾·上官桀·桑弘羊과 함께 遺詔를 받아 昭帝를 보좌하였다. 후에 燕王 旦과 함께 모반했다는 죄명으로 上官桀 등을 제거하고 朝政을 혼자서 처리하였다. 昭帝 사후 昌邑王 劉賀를 皇帝로 옹립했다가 다시 폐하고 宣帝를 옹립하였다. 20년간 정권을 잡아 徭賦를 경감하고 與民休息정책을 취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점차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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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度遼將軍: 後漢時代 度遼營을 관장하는 將軍을 지칭한다. 원래 前漢 武帝시기 范明友를 度遼將軍으로 임명하였고, 後漢 明帝初 南匈奴의 單于와 새로 항복한 자들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으나 常設 관직은 아니었다. 安帝 元初元年(114)에 처음으로 常設하였다. 銀印靑綬이고 秩은 二千石이었다. 屬官인 長史와 司馬는 六百石이었다. 주둔지역은 五原郡 曼柏縣(현재 內蒙古 東勝의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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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范明友: 출신지역은 未詳이다. 校尉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氐를 격파하였다. 후에 中郞將을 거쳐 霍光의 추천으로 將軍이 되어 烏丸을 공격하여 王을 생포하고 6,200개의 수급을 얻었으며, 이 공으로 平陵侯에 봉해졌다. 후에 霍光과 함께 宣帝를 옹립하는데 공을 세워 食邑의 戶數가 2,900戶에 이르렀다. 本始 2년(전72)에 3萬騎를 이끌고 張掖郡에서 匈奴를 공격하기 위해 遠征에 나섰다. 후에 度遼將軍 未央衛尉와 光祿勳을 역임하였다. 霍光의 아들 大將軍 霍禹, 霍光의 아내 郭顯, 郭雲, 鄧廣漢, 任勝, 趙平 등과 大逆을 모의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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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원문은 “因遣度遼將軍范明友將二萬騎出遼東邀匈奴”인데, 『三國志』에서는 ‘因’字를 생략했으며, “二萬” 대신 “三萬”으로, ‘邀’字 대신 “追擊”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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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원문은 “而虜已引去”인데, 『三國志』에서는 “匈奴已引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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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원문은 “明友乘烏桓新敗, 遂進擊之”인데, 『三國志』에서는 “烏丸新被匈奴兵, 乘其衰弊, 遂進擊烏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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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원문은 “獲其三王首而還”인데, 『三國志』에서는 “獲三王首還”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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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幽州: 前漢 13 刺史部의 하나였으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後漢時代 감찰구역에서 지방최고 행정구역으로 바뀐 후 薊縣(현재 北京城 서남쪽 모퉁이)에 治所를 두었다. 後漢時代의 관할구역은 서쪽으로 오늘날 山西省 陽高縣, 남쪽은 대략 戰國 燕의 남쪽 경계, 북쪽은 현재 河北省 承德市와 遼寧省 建昌縣 이북, 동쪽으로는 遼寧省 寬甸縣과 撫順市 以東지역에 해당하였다. 西晉時代에는 오늘날의 遼寧省 일대를 나누어 平州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 유주는 현재의 北京과 天津, 河北 境內의 7개 郡國을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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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원문은 “由是烏桓復寇幽州”인데, 『三國志』에서는 “後數復犯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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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원문은 “明友輒破之”인데, 『三國志』에서는 “輒破”를 “征破”라고 적었다. 『漢書』昭帝紀에 의한 遼東烏桓이 元鳳 3년(전78) 겨울에 반란을 일으켰고(『漢書』卷7 昭帝紀 元鳳三年條: 229, “冬, 遼東烏桓反, 以中郞將范明友爲度遼將軍, 將北邊七郡郡二千騎擊之.”), 烏桓이 元鳳 5년(전76)에 漢의 변방을 犯하였으나(『漢書』卷7 昭帝紀 元鳳五年條: 232, “烏桓復犯塞, 遣度遼將軍范明友擊之.”), 모두 范明友에게 격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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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宣帝(전92~전49; 재위 전68~전49): 字는 次卿, 이름은 病已, 즉위 후 이름은 詢이다. 戾太子의 손자로 어려서 巫蠱의 화를 당해 민간에서 자랐다. 元平元年(전74)에 霍光과 대신들이 昌邑王 賀를 폐위한 후 옹립되어 帝位에 올랐다. 地節 2년(전68)에 霍光 사후 親政을 시작하였고, 2년 뒤 大司馬 霍禹의 모반을 적발하여 皇后 霍氏를 폐하고 霍氏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法令政策에 익숙한 文法吏를 중용하였고, 治書侍御史와 廷尉平을 설치하여 형량의 경중을 가리게 하였으며 가혹한 법을 없애고 법률의 정당한 행사를 유지하였다. 流亡을 招撫하고 民에게 公田을 대여하였으며 常平倉을 설치하고 租賦를 면제하거나 삭감하는 등 民生을 안정시켰다. 神爵 3년(전59)에 西域都護를 두어 西域에 政令을 반포하였으며, 서역 경영에 유리하게 하였다. 甘露 3년(전51)에 유학자들을 불러 五經의 異同을 논하게 하고 친히 이를 듣고 결정하였다. 廟號는 中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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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三國志』에는 번역문의 “선제 시기에 …(중략)…귀부하였다”에 해당하는 구절이나 내용이 없다. 『漢書』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漢書』권94上 「匈奴傳」: 3784, “漢復得匈奴降者, 言烏桓嘗發先單于冢, 匈奴怨之, 方發二萬騎擊烏桓. 大將軍霍光欲發兵邀擊之, 以問護軍都尉趙充國. 充國以爲‘烏桓間數犯塞, 今匈奴擊之, 於漢便. 又匈奴希寇盜, 北邊幸無事. 蠻夷自相攻擊, 而發兵要之, 招寇生事, 非計也.’ 光更問中郞將范明友, 明友言可擊. 於是拜明友爲度遼將軍, 將二萬騎出遼東. 匈奴聞漢兵至, 引去. 初, 光誠明友: ‘兵不空出, 卽後匈奴, 遂擊烏桓.’ 烏桓時新中匈奴兵, 明友旣後匈奴, 因乘烏桓敝, 擊之, 斬首六千餘級, 獲三王首, 還, 封爲平陵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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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소제(昭帝), 묵특, 곽광(霍光), 범명우(范明友), 범명우, 범명우, 선제(宣帝)
지명
요동[군], 유주(幽州),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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