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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랑(白狼) 반목(槃木) 당추(唐菆) 등이 신하가 되기를 청하자 주보(朱輔)가 황제에게 상서를 올리고 이들의 악(樂)과 시(詩)를 보고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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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도이(窄都夷)
영평(永平, 58~75, 後漢 明帝) 중에 익주자사 양국(梁國) 출신 주보(朱輔)가 공명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열정적이었으며 원대한 방략을 갖추었다. 주자사로 몇 해를 지내면서, 왕조의 덕을 널리 보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夷)들을 위엄으로 회유하였다. 문산(汶山)의 서쪽은 이전에는 미치지 못하여 정삭(正朔)이 전해지지 못하였다.주 001
각주 001)
正朔: 曆法의 의미인데, 그것이 전해지지 못했다는 것은 풍속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며, 실제 직접적인 통제를 못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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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랑(白狼) 반목(槃木) 당추(唐菆) 등 백여 국 130만 호와 600만 이상의 구(口) 종족 전체가 공물을 받들어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주 002
각주 002)
이 사실은 『後漢書』 권2, 「明帝紀」에 의하면 永平 17년(74)의 일이다. 이들은 唐代 四川省 西南部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현재의 四川省 木里藏族自治縣과 鹽源縣, 그리고 雲南省 寧蒗顯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普米族의 祖光으로 알려져 있다(任乃强,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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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주보가 상서를 올렸다. “신이 듣기에 『시(詩)』에 ‘백성들이 기산(岐山)에 몰려 가니 청명한 정치가 행해지도다.’주 003
각주 003)
『詩經』 「周頌」 〈天作編〉이다. 현전하는 『詩經』과 자구상의 차이가 있는데, 현전본에는 “彼徂矣, 岐有夷之行”으로 되어 있다. 이 시는 周王이 선조 太王, 즉 古公亶父의 거주지인 岐山에 제사지내는 樂歌. ‘周’나라는 이곳 岐山에서 은나라를 공격하는 ‘翦商’́의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기리는 노래이다. ‘彼’는 周의 백성들을 가리키고, ‘徂’는 ‘往’의 의미이며, ‘夷’는 淸明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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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傳)주 004
각주 004)
『傳』은 『詩經』을 해설한 저작을 의미하는데, 원래에는 轅固, 申培, 韓嬰, 毛亭의 4家가 전해지고 있었으나, 後漢 이후에는 3家는 이미 亡失되고, 毛傳만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李賢注에서는 이 구절이 『韓詩』 「薛君傳」을 인용하고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韓詩薛君傳曰: “徂, 往也. 夷, 易也. 行, 道也. 彼百姓歸文王者, 皆曰岐有易道, 可往歸矣. 易道謂仁義之道而易行, 故岐道阻險而人不難.” (『韓詩』 「薛君傳」에 이르길, ‘徂’는 ‘가다’는 의미이고, ‘夷’는 ‘평이하다’를 의미하고, ‘行’은 ‘길’을 의미한다. 저 백성들로 文王에 귀의하는 자들이 모두 “기산에는 평이한 길이 있으니, 가히 가서 귀의할 만하다.”라고 말하였다. 평이한 길이란 仁義의 道가 있어서 평이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岐山의 길은 험준하지만 사람들이 어려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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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岐山으로 가는 길은 비록 멀고 후미지지만, 사람들은 멀다고 여기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인(詩人)이 노래를 부른 것은 그것으로 [사정 판단의]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백랑왕(白狼王) 당추(唐菆) 등이 교화를 그리워하여 귀의하면서 시(詩) 세 편을 지었습니다. [중국에 오는] 길이 공래대산(邛來大山)의 영고판(零高坂)주 005
각주 005)
邛來大山 零高坂: 『山海經』에 “崍山은 江水가 발원하는 곳이다. 郭璞注: 中江이 발원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華陽國志』에서는 “邛來山의 본명은 邛莋으로 옛날 邛人과 莋人의 경계에 있다. 바위로 가로막혀 있는데, 험준한 고개를 돌아가 굽이굽이 지나면 비로소 도착하게 된다. 산 위에 맺혀 있는 얼음은 여름에도 녹지 않으며 겨울이면 더욱 추워지는데, 왕양이 관할지역을 돌아보느라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간 것이다. 긴 가난과 채취의 고충, 八度와 같은 어려움이 있다. 陽母와 閎峻은 모두 고개의 이름이다”(山海經曰: “崍山, 江水出焉.” 郭璞曰: “中江所出也.” 華陽國志曰: “邛來山本名邛莋, 故邛人·莋人界也. 巖阻峻回, 曲折乃至. 山上凝冰夏結, 冬則劇寒, 王陽行部至此而退者也. 有長貧·苦採·八度之難. 陽母·閎峻並坂名.”)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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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나니, 가파르고 위험하며 험준하기가 岐山으로 가는 길보다 백 배나 더합니다.주 006
각주 006)
李賢注에서는 “詩人이 비록 기산으로 가는 길의 험준함을 탄식하였으나 문왕의 도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평이하게 여긴 것이다. 오늘날의 邛來는 매우 가파르고 험준하기가 기산보다 더하다(言詩人雖歎岐道之阻, 但以文王之道, 人以爲夷易, 今邛來峭危, 甚於岐.).”고 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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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어린아이를 강보에 싸서 엎고 오는 것이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에 귀의하는 것 같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이족(夷族)들의 말은 옳게 알아 듣기가 어렵고, 초목과 조수(鳥獸)도 다른 종류입니다. 건위군(犍爲郡)의 속리인 전공(田恭)이 그들과 친숙하여 그들의 말을 자못 알아듣기에, 신(臣)이 급히 그들의 풍속을 조사하고 그들의 말을 번역하라고 시켰습니다. 지금 종사(從事)의 서기 이릉(李陵)전공을 시켜 그들을 호송하여 궁궐로 보내고, 아울러 그들 악(樂)과 시(詩)를 보고합니다. 옛날 성인 황제가 계실 때에 사이(四夷)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하였습니다.주 007
각주 007)
李賢注에는 「陳禪傳」에 그 사실이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後漢書』 「陳禪傳」에 西南夷 撣國王이 樂과 幻人을 奉獻하여 安帝가 元會에서 이를 관람하였는데, 당시 陳禪이 帝王의 조정에서 夷狄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尙書 陳忠이 고래에도 合歡의 樂舞나 四夷의 樂도 조정에서 연주된 적이 있다고 반박하여 陳禪은 좌천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安帝 永寧 2년(121) 正會에서의 일이고, 朱輔가 上書를 올린 것은 明帝 永平 17년(74)이다. 따라서, 朱輔가 陳禪의 일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였다고 볼 수 없다. 시기를 착각한 오류이다. 아마도 前漢初 巴渝舞를 두고 한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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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보고하는 것으로, 그 중 하나가 갖추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황제는 가상하다고 하여 사정내용을 사관(史官)에 내려보내 그 노래를 기록하도록 하였다.주 008
각주 008)
李賢注에서는 『東觀漢記』에는 그 노래와 함께 南蠻 사람의 언어를 기재하였으며 또한 다시 번역을 거쳐 음과 훈을 달아 漢語로 바꾸었는데, 지금 范曄의 『後漢書』에 실려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東觀漢記』에 있는 南夷 사람의 언어를 기록하여 이 장구에 주석을 붙였다고 하고 있다(東觀記載其歌, 幷載夷人本語, 並重譯訓詁爲華言, 今范史所載者是也. 今錄東觀夷言, 以爲此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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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正朔: 曆法의 의미인데, 그것이 전해지지 못했다는 것은 풍속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며, 실제 직접적인 통제를 못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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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이 사실은 『後漢書』 권2, 「明帝紀」에 의하면 永平 17년(74)의 일이다. 이들은 唐代 四川省 西南部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현재의 四川省 木里藏族自治縣과 鹽源縣, 그리고 雲南省 寧蒗顯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普米族의 祖光으로 알려져 있다(任乃强,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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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詩經』 「周頌」 〈天作編〉이다. 현전하는 『詩經』과 자구상의 차이가 있는데, 현전본에는 “彼徂矣, 岐有夷之行”으로 되어 있다. 이 시는 周王이 선조 太王, 즉 古公亶父의 거주지인 岐山에 제사지내는 樂歌. ‘周’나라는 이곳 岐山에서 은나라를 공격하는 ‘翦商’́의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기리는 노래이다. ‘彼’는 周의 백성들을 가리키고, ‘徂’는 ‘往’의 의미이며, ‘夷’는 淸明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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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傳』은 『詩經』을 해설한 저작을 의미하는데, 원래에는 轅固, 申培, 韓嬰, 毛亭의 4家가 전해지고 있었으나, 後漢 이후에는 3家는 이미 亡失되고, 毛傳만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李賢注에서는 이 구절이 『韓詩』 「薛君傳」을 인용하고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韓詩薛君傳曰: “徂, 往也. 夷, 易也. 行, 道也. 彼百姓歸文王者, 皆曰岐有易道, 可往歸矣. 易道謂仁義之道而易行, 故岐道阻險而人不難.” (『韓詩』 「薛君傳」에 이르길, ‘徂’는 ‘가다’는 의미이고, ‘夷’는 ‘평이하다’를 의미하고, ‘行’은 ‘길’을 의미한다. 저 백성들로 文王에 귀의하는 자들이 모두 “기산에는 평이한 길이 있으니, 가히 가서 귀의할 만하다.”라고 말하였다. 평이한 길이란 仁義의 道가 있어서 평이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岐山의 길은 험준하지만 사람들이 어려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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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邛來大山 零高坂: 『山海經』에 “崍山은 江水가 발원하는 곳이다. 郭璞注: 中江이 발원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華陽國志』에서는 “邛來山의 본명은 邛莋으로 옛날 邛人과 莋人의 경계에 있다. 바위로 가로막혀 있는데, 험준한 고개를 돌아가 굽이굽이 지나면 비로소 도착하게 된다. 산 위에 맺혀 있는 얼음은 여름에도 녹지 않으며 겨울이면 더욱 추워지는데, 왕양이 관할지역을 돌아보느라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간 것이다. 긴 가난과 채취의 고충, 八度와 같은 어려움이 있다. 陽母와 閎峻은 모두 고개의 이름이다”(山海經曰: “崍山, 江水出焉.” 郭璞曰: “中江所出也.” 華陽國志曰: “邛來山本名邛莋, 故邛人·莋人界也. 巖阻峻回, 曲折乃至. 山上凝冰夏結, 冬則劇寒, 王陽行部至此而退者也. 有長貧·苦採·八度之難. 陽母·閎峻並坂名.”)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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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李賢注에서는 “詩人이 비록 기산으로 가는 길의 험준함을 탄식하였으나 문왕의 도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평이하게 여긴 것이다. 오늘날의 邛來는 매우 가파르고 험준하기가 기산보다 더하다(言詩人雖歎岐道之阻, 但以文王之道, 人以爲夷易, 今邛來峭危, 甚於岐.).”고 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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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李賢注에는 「陳禪傳」에 그 사실이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後漢書』 「陳禪傳」에 西南夷 撣國王이 樂과 幻人을 奉獻하여 安帝가 元會에서 이를 관람하였는데, 당시 陳禪이 帝王의 조정에서 夷狄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尙書 陳忠이 고래에도 合歡의 樂舞나 四夷의 樂도 조정에서 연주된 적이 있다고 반박하여 陳禪은 좌천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安帝 永寧 2년(121) 正會에서의 일이고, 朱輔가 上書를 올린 것은 明帝 永平 17년(74)이다. 따라서, 朱輔가 陳禪의 일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였다고 볼 수 없다. 시기를 착각한 오류이다. 아마도 前漢初 巴渝舞를 두고 한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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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李賢注에서는 『東觀漢記』에는 그 노래와 함께 南蠻 사람의 언어를 기재하였으며 또한 다시 번역을 거쳐 음과 훈을 달아 漢語로 바꾸었는데, 지금 范曄의 『後漢書』에 실려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東觀漢記』에 있는 南夷 사람의 언어를 기록하여 이 장구에 주석을 붙였다고 하고 있다(東觀記載其歌, 幷載夷人本語, 並重譯訓詁爲華言, 今范史所載者是也. 今錄東觀夷言, 以爲此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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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明帝, 주보(朱輔), 주보, 전공(田恭), 이릉(李陵), 전공
지명
後漢, 익주, 양국(梁國), , 문산(汶山), 백랑(白狼), 반목(槃木), 당추(唐菆), 기산(岐山), 岐山, 백랑, 당추(唐菆), 공래대산(邛來大山), 岐山, 건위군(犍爲郡)
서명
시(詩, 전(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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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랑(白狼) 반목(槃木) 당추(唐菆) 등이 신하가 되기를 청하자 주보(朱輔)가 황제에게 상서를 올리고 이들의 악(樂)과 시(詩)를 보고하고자 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10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