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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촉군이 점차 교화되었으나 이(夷)들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옹척(雍陟)을 사로잡으니 이옹(李顒)과 방지(龐芝)를 보내 격파하고 평정함

  • 국가
    전왕(滇王)
숙종(肅宗) 원화(元和)연간(84~86)에 촉군왕추(王追)가 태수가 되어 다스림과 교화가 더욱 뛰어나자, 신마(神馬) 네 필이 전지(滇池)에서 출현하였고, 감로(甘露)가 내리고 백조(白鳥)가 나타났으며, 비로소 학교가 흥기하자 그 풍속이 점차 교화되어 갔다. 영제(靈帝) 희평(熹平) 5년(176) 여러 이(夷)들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옹척(雍陟)을 사로잡았다. 어사중승 주구(朱龜)를 보내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조정의 의론에서 이들 군은 변방에 있어 만이(蠻夷)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니, 군사들을 수고롭게 멀리 파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포기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태위연(太尉掾)인 파군 출신의 이옹(李顒) 주 001
각주 001)
李顒: 그는 무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經學과 관련된 많은 저술이 있었다. 다만, 巴郡 출신으로서 西南夷의 정벌을 적극 주장한 관계로 益州郡 太守로 임명하여 征伐을 담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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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토벌하자는 대책을 건의하자, 그를 익주 태수로 배수(拜受)하니, 자사(刺史) 방지(龐芝)와 함께 판순만을 징발하여주 002
각주 002)
太守와 刺史: 여기서 보면 중앙관이었던 李顒을 태수로 삼아 현지에 파견하여 刺史 龐芝와 함께 蠻夷의 토벌을 맡기고 있다. 당시 刺史는 俸秩이 七百石으로 중앙에서 파견한 감찰관에서 서서히 지방에 상주하는 관직으로 변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太守가 上位職으로서 정벌의 책임자는 益州太守 李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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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蠻夷를] 격파하고 평정하여 옹척을 귀환시켰다. 이옹이 죽자 이인(夷人)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니, 광한(廣漢) 출신의 경의(景毅)를 태수로 삼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경의가 처음 군에 도착하였을 때 미(米)가 1곡(斛)에 일만 전이었는데, 점차 인자하고 은혜롭게 통치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미(米)가 1곡에 수십 전이 되었다고 한다.

  • 각주 001)
    李顒: 그는 무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經學과 관련된 많은 저술이 있었다. 다만, 巴郡 출신으로서 西南夷의 정벌을 적극 주장한 관계로 益州郡 太守로 임명하여 征伐을 담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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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太守와 刺史: 여기서 보면 중앙관이었던 李顒을 태수로 삼아 현지에 파견하여 刺史 龐芝와 함께 蠻夷의 토벌을 맡기고 있다. 당시 刺史는 俸秩이 七百石으로 중앙에서 파견한 감찰관에서 서서히 지방에 상주하는 관직으로 변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太守가 上位職으로서 정벌의 책임자는 益州太守 李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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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숙종(肅宗), 왕추(王追), 영제(靈帝), 옹척(雍陟), 주구(朱龜), 이옹(李顒), 방지(龐芝), 옹척, 이옹, 경의(景毅), 경의
지명
촉군, 전지(滇池), 파군, 광한(廣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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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군이 점차 교화되었으나 이(夷)들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옹척(雍陟)을 사로잡으니 이옹(李顒)과 방지(龐芝)를 보내 격파하고 평정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7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