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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광(錫光)이 교지태수(交阯太守)가 되고 임연(任延)이 구진태수(九眞太守)가 된 뒤 농사, 교육 등을 가르침

  • 국가
    남월(南越)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하자, 석광(錫光) 주 001
각주 001)
錫光: 『後漢書』 卷17 「馮岑賈列傳」 岑彭條와 同書 권76 「循吏列傳第」 任延條에 따르면 錫光은 漢中 출신으로 前漢 平帝 때 交阯太守가 되었다. 그는 太守로 있으면서 관내의 漢人과 蠻夷들을 교화하고 예의로 이끌어 九眞太守 任延과 함께 훌륭한 정치라는 칭송을 받았다. 왕망의 실정으로 천하가 혼란해지자 그는 국경을 폐쇄하고 관내를 지키다가 光武帝가 증흥하자 建武初에 사절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光武帝는 그를 鹽水侯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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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지 태수가 되고, 임연(任延) 주 002
각주 002)
任延: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任延條에 따르면 任延의 자는 長孫으로 南陽 宛成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장안의 태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이미 이때부터 총명함으로 명성을 날렸다. 更始帝 때 會稽都尉가 되어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한말의 혼란을 피해 온 당대의 명사들과 교제하였다. 建武初에 九眞太守로 임명되었다. 당시 九眞郡의 백성들은 사냥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여 항상 식량이 부족했으며 혼인의 예절이나 부부관계, 부자지간의 도리 같은 예법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농기구를 주조하여 토지를 개간하게 하니 해마다 농지가 늘어나 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하게 되었다. 또한 나이 20에서 50세에 이르는 성인남자와 나이 15세에서 40세에 이르는 성인여자 2천여 명을 그 나이에 따라 혼인시켰는데, 가난하여 혼례를 치를 수 없는 경우에는 관리들의 봉록을 줄이고 남은 비용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성씨와 부부, 부자관계를 알게 되었다. 변경지역의 만이들은 그의 의로움을 사모하여 각자가 알아서 변경지역을 보호하니 척후를 담당하는 군대를 철수시킬 정도였다. 太守 재임 4년 만에 수도 洛陽으로 돌아왔는데 九眞郡의 관리와 백성들은 그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 사당을 지어 그의 공덕을 기렸다. 뒤에 武威太守가 되어 밖으로는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고, 안으로는 그 지역 豪强의 전횡을 억제하였으며 저수지를 준설하여 농사에 보탬이 되게 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장려하였다. 그 후 潁川太守를 거쳐 河內太守가 되었는데, 군에서 재직한 지 9년 만인 永平 11년(66)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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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진 태수가 되었는데, 이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상하의 신분질서를 제정하고,주 003
각주 003)
冠履: 字意로는 머리에 쓰는 관과 신발이지만, 이는 당시 신분표지로 그 자체로 신분의 구별을 의미한다. 『史記』 「儒林列傳」, “冠雖敝, 必加於首; 履雖新 必關於足. 何者, 上下之分也.”; 『楚辭』 「王逸」 〈九思·悼亂〉, “茅絲兮同綜, 冠屨兮失絇.” 原注: “上下無别.”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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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매파를 두어 남녀가 법식에 맞게 혼인하게 하고, 학교를 세워 예와 의(義)로 교육하였다.

  • 각주 001)
    錫光: 『後漢書』 卷17 「馮岑賈列傳」 岑彭條와 同書 권76 「循吏列傳第」 任延條에 따르면 錫光은 漢中 출신으로 前漢 平帝 때 交阯太守가 되었다. 그는 太守로 있으면서 관내의 漢人과 蠻夷들을 교화하고 예의로 이끌어 九眞太守 任延과 함께 훌륭한 정치라는 칭송을 받았다. 왕망의 실정으로 천하가 혼란해지자 그는 국경을 폐쇄하고 관내를 지키다가 光武帝가 증흥하자 建武初에 사절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光武帝는 그를 鹽水侯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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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任延: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任延條에 따르면 任延의 자는 長孫으로 南陽 宛成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장안의 태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이미 이때부터 총명함으로 명성을 날렸다. 更始帝 때 會稽都尉가 되어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한말의 혼란을 피해 온 당대의 명사들과 교제하였다. 建武初에 九眞太守로 임명되었다. 당시 九眞郡의 백성들은 사냥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여 항상 식량이 부족했으며 혼인의 예절이나 부부관계, 부자지간의 도리 같은 예법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농기구를 주조하여 토지를 개간하게 하니 해마다 농지가 늘어나 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하게 되었다. 또한 나이 20에서 50세에 이르는 성인남자와 나이 15세에서 40세에 이르는 성인여자 2천여 명을 그 나이에 따라 혼인시켰는데, 가난하여 혼례를 치를 수 없는 경우에는 관리들의 봉록을 줄이고 남은 비용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성씨와 부부, 부자관계를 알게 되었다. 변경지역의 만이들은 그의 의로움을 사모하여 각자가 알아서 변경지역을 보호하니 척후를 담당하는 군대를 철수시킬 정도였다. 太守 재임 4년 만에 수도 洛陽으로 돌아왔는데 九眞郡의 관리와 백성들은 그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 사당을 지어 그의 공덕을 기렸다. 뒤에 武威太守가 되어 밖으로는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고, 안으로는 그 지역 豪强의 전횡을 억제하였으며 저수지를 준설하여 농사에 보탬이 되게 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장려하였다. 그 후 潁川太守를 거쳐 河內太守가 되었는데, 군에서 재직한 지 9년 만인 永平 11년(66)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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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冠履: 字意로는 머리에 쓰는 관과 신발이지만, 이는 당시 신분표지로 그 자체로 신분의 구별을 의미한다. 『史記』 「儒林列傳」, “冠雖敝, 必加於首; 履雖新 必關於足. 何者, 上下之分也.”; 『楚辭』 「王逸」 〈九思·悼亂〉, “茅絲兮同綜, 冠屨兮失絇.” 原注: “上下無别.”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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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광무제(光武帝), 석광(錫光), 임연(任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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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광(錫光)이 교지태수(交阯太守)가 되고 임연(任延)이 구진태수(九眞太守)가 된 뒤 농사, 교육 등을 가르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