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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위세가 확대되면서 반란이 자주 일어나니 마침내 주애군(珠崖郡)을 철폐함

  • 국가
    남월(南越)
초나라가 패자(覇者)를 칭하자,주 001
각주 001)
楚莊王 시기의 상황. 莊王은 기원전 613년에서 기원전 591년까지 재위하였는데, 즉위하고 나서 3년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쾌락에만 탐닉했다. 그러나 대부인 오거, 소종의 간언을 듣고 태도를 고쳐 국정에 전념하니 이로써 초나라는 다시 일약 강국이 되었다. 장왕 8년(전606)에는 주나라를 침범한 戎狄을 물리치고 洛邑 교외에서 열병식을 거행함으로써 초나라는 비로소 패자를 일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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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이 조공하였다. 진(秦)이 천하를 겸병하고 만이를 위세로 복종시키자, 비로소 영외(嶺外)지역주 002
각주 002)
嶺外: 五嶺의 밖이라는 의미로, ‘嶺南’, ‘嶺表’라고도 한다. 五嶺은 일반적으로 大庾嶺과 始安의 越城嶺, 桂陽의 騎田嶺, 臨賀의 萌渚嶺, 九貞의 都龐嶺을 말한다. 현재의 廣東 廣西와 湖南 江西와의 경계로서, 揚子江과 朱江의 水系 구분이기도 하다. 이는 『史記』 「張耳傳」에서 “北有長城之役, 南有五嶺之戍.”라는 구절에서 보듯 漢代부터 시작된 지역관념인데, 『漢書』 「張耳傳」에서 顔師古가 鄧德明의 『南康記』를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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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렸고, 남해(南海), 계림(桂林), 상군(象郡)을 설치하였다.주 003
각주 003)
南海·桂林·象郡: 『史記』 권6 「秦始皇本紀」에 따르면 진시황 33년(전214)에 범죄자와 천민들로 구성된 군대로 남방을 평정하여 桂林·象郡·南海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지키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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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들어서자, 위타(尉佗)가 자립하여 남월왕(南越王)이 되어 5대에 걸쳐 이어졌다.주 004
각주 004)
자세한 사항은 『史記』 권113 「南越列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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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원정(元鼎) 5년(전112)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멸망시키고 분할하여 9군을 설치하여주 005
각주 005)
여기서의 9郡은 『漢書』 권6 「武帝紀」에 따르면 元鼎 6년 겨울 10월 南越을 평정하고, 그 지역에 설치한 南海, 蒼梧, 鬱林, 合浦, 交阯, 九眞, 日南, 珠崖, 瞻耳郡을 말한다. 南越의 평정을 원문에서는 元鼎 5년이라고 했고 本紀에서는 6년으로 되어 있어 양자의 기록이 서로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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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자사의 통령을 받도록 하였다.주 006
각주 006)
刺史라는 관직은 前漢 惠帝 3년(전193) 京畿지역의 訟事를 담당하고 이를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파견한 御史監이라는 관직에서 유래하였다. 그 뒤에 監察御使로 바뀌어 모든 州에 설치했는데, 武帝 元封 5년(전106) 이를 혁파하고 12州에 部刺史를 두어 각 州의 사정을 감찰하게 하였다. 감찰의 대상은 해당지역의 2천석 관리, 즉 지방장관인 郡太守의 근무실태와 그 일가의 행실로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刺史는 상주하는 치소가 없었고 일정기간 (대략 8개월) 동안 해당지역을 순찰하고 난 후 중앙에 올라와 수집한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 책무였다. 그러던 것이 光武帝 建武 18년(43) 12州에 다시 刺史를 설치하였는데, 일정지역에 상주하면서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더욱이 前漢代까지 자사는 감찰결과를 중앙의 三公에 보고하고 결과에 따른 처분은 三公이 담당하였으나 光武帝 때는 이러한 三公의 권한을 회수함으로써 刺史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지방에서 刺史의 권력이 郡太守를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빨라도 後漢代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後漢末 지방에서 반란이 빈발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九卿 출신의 대신을 都督과 持節을 가지고 將軍府를 설치할 수 있는 刺史로 파견하면서 刺史의 존재는 완전히 郡太守를 압도하여 실질적인 최고의 행정과 군사장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따라서, 武帝때 交州刺史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尉陀를 평정한 것은 기원전 112년의 일이고 12주 자사가 설치된 것은 기원전 106년의 일이므로 交州刺史로 9군을 통솔하게 했다는 본문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아마도 刺史가 최고의 행정장관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된 劉宋代에 范曄이 『後漢書』를 찬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시대 刺史가 갖는 권한과 지위를 전한의 상황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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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주애(珠崖)담이(儋耳) 주 007
각주 007)
珠崖, 儋耳: 珠崖郡은 오늘날의 海南島 동북지역으로 朱崖라고도 하며 치소는 曋都縣(海南省 海口市)이다. 이 지역에서는 진주가 산더미처럼 산출되기 때문에 ‘珠崖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儋耳郡은 오늘날 해남도 서부지역으로, 海南省 儋州市 서북쪽 南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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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군은 바다의 큰 섬에 있었는데, 동서로 천리이고, 남북으로 5백리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기다란 귀불을 존귀하다고 여겼다. [귀불에] 구멍을 뚫고 장식을 걸었는데, 어깨에서 3촌(寸)까지 늘어뜨렸다.주 008
각주 008)
『後漢書』 「明帝紀」 劉召注에서 인용된 楊浮의 『異物志』에서는 儋耳는 남방의 만이이다. 이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뺨을 찢어 뺨가죽을 귓가에 걸리게 하고 여러 가닥으로 나누는데 그 형상이 마치 닭의 내장과 같다. 여러 겹으로 만들어서 어깨까지 늘어뜨린다. 『漢書』 권64하 「賈捐之傳」에 따르면 賈捐之는 이 지역 사람들을 ‘駱越之民’이라고 하면서 父子가 함께 목욕을 하고 코로 물을 마신다는 점을 예로 들어 이들이 금수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史記索隱』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珠崖와 儋耳지역의 사람들을 ‘甌人’이라고 하였으며 이 지역을 통틀어 ‘甌越’이라고도 불렀다. 周나라 때는 交阯를 ‘駱越’이라고 하였고, 戰國 秦나라 때는 이를 ‘西甌’라고 하였으니, 실제로 駱越, 西甌, 甌越 등은 모두 다름 아닌 交阯를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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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말년에 주애태수인 회계 출신 손행(孫幸)이 광폭의 포(布)를 공물로 헌납하도록 하였는데, 만들이 그 역(役)을 감당하지 못하여, 마침내 군을 공격하여 손행을 살해하였다. 손행의 아들 손표(孫豹)가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다시 그들을 격파하고, 스스로 군을 통령하여주 009
각주 009)
‘自領郡事’: 州 刺史나 朝廷으로부터 정식 임용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郡府와 郡의 행정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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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무리를 토벌하니, 몇 해가 계속되자 평정되어 갔다. 손표는 사자를 보내 인수(印綏)를 반납하면서주 485
각주 485)
‘封還印綏’: 『漢書』 권89上 「百官公卿」과 『後漢書志』 권30 「輿服志」下에 관리들에게 사여하는 印綏가 규정되어 있다. 宗室 列侯와 三公 등은 金印紫綬를, 三公을 제외한 二千石의 관직, 즉 중앙의 경우는 九卿, 지방은 郡太守는 銀印靑綏를 쓰며, 一千石 이하 六百石 이상의 관직은 銅印黑綏를, 六百石 이하 二百石 이상의 관직은 銅印黃綏를 쓴다. 漢代의 관제와 의례의 연혁 및 시행상황 등을 상세히 기록한 衛宏의 『漢舊儀』에 따르면 金印紫綬는 황금으로 만들고, 인장의 손잡이는 거북이의 형상을 조각하였으며, ‘某侯之印’이라는 문구를 새기고 붉은 인끈을 드리운다. 銀印靑綏는 재질은 銀이며 손잡이는 거북이의 형상으로 만든다. 인장에 새기는 문구를 章이라 하는데, ‘某官之章’이라 새기고 푸른 인끈을 드리운다. 銅印의 경우에는 별다른 형상을 새기지 않고 단지 인끈을 통과시킬 구멍만을 인장의 등부분에 만들며, 인장에 새기는 문구를 印이라 하는데 ‘某官之印’이라 새긴다. 그리고 열후로 책봉된 자가 2천석 급에 해당하는 관직을 맡을 경우에는 두 개의 金印紫綬를 수여받는다. 官職을 마칠 때는 이를 반납하게 되는데, 孫豹는 자신이 공식적으로 太守의 직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부친 孫幸의 印綏를 반납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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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를 올려 사태의 전말을 설명하니, 제조(制詔)주 011
각주 011)
制詔: 秦의 통일 이후 皇帝의 권력과 위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황제의 言詞를 ‘制’라고 칭하고, 구체적인 臣民이 告誡를 받는 경우를 ‘詔’라고 칭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秦代부터 법정의 문서 종류가 규정되어 漢代에 계속되는데, 이때 詔와 制가 문서의 종류로 정착된다. 이 외에 ‘策’과 ‘誡’가 있는데, ‘制詔’로서 太守에 임명하였다는 것은 文書를 통해 공식적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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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표를 주애태수로 임명하였다. [ 조정의] 위세와 통치가 크게 확대되면서, 공물을 헌납하면서 명을 받드는 사자가 해마다 도착하였다. 중국주 012
각주 012)
中國: ‘中國’은 戰國末 中原地方의 諸國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秦漢시대 이후에는 異民族과 대비되어 조정이 장악하고 있는 전체를 포괄하는 인식을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朝廷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州郡에서의 활동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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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그 진기한 보물을 탐하여 점점 제멋대로 침탈하니 몇 년마다 한 번씩 반란이 일어났다.주 013
각주 013)
『漢書』 卷64下 「賈捐之傳」에 따르면 珠崖郡을 설치(전 112년에서 110년 사이)하고 나서부터 昭帝 始元 원년(전86)까지 약 20여 년 동안 6차례의 반란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始元 5년(전82) 儋耳郡을 혁파하고 이를 珠崖郡과 합쳤다. 宣帝 神爵 3년(전58)에 다시 珠崖郡 소속의 3현에서 반란이 발생했고, 7년 후인 甘露 원년(전53)에는 珠崖郡의 9현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元帝 初元 원년(전48) 珠崖郡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 또다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여러 현에서 자꾸 반란이 발생하여 결국 初元 3년까지도 완전히 평정할 수가 없었다. 당시 丞相으로 있던 于定國에 따르면 지난 수년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護軍都尉나 校尉 같은 군지휘관이 모두 11명인데, 그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이는 2인에 불과하고 전사한 병사들의 숫자도 1만이 넘었으며, 여기에 소모된 비용은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였으나 끝내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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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元帝) 초원(初元) 3년(전44) 마침내 주애군을 철폐하였다.주 014
각주 014)
初元 3년(전46) 珠崖郡 山南縣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대규모의 토벌군을 파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待詔의 벼슬에 있던 賈捐之는 대군을 보내면서까지 珠崖郡을 고수할 경제적인 이익은 없으므로 이를 포기하고 내지인 關東을 휩쓸고 있는 기근을 구제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승상 于定國도 같은 취지의 의견을 내니 황제 역시 이에 동의하여 마침내 珠崖郡을 혁파하였다(『漢書』 卷64下 「賈捐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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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군을 세운지 65년만이다.주 015
각주 015)
『漢書』 卷6, 「武帝紀」에서는 元鼎 6년(전111)에 南越을 평정하여 9군을 설치했다고 했고, 본문에서는 元鼎 5년(기원전 112)에 남월을 평정하여 9군을 설치했다고 했으니 서로 기록이 어긋난다. 『漢書』 권64下 「賈捐之傳」에 따르면 儋耳, 珠崖 2군의 설치는 元封 원년(전110)의 일로 되어 있다. 본문의 기록대로 원정 5년에 군을 설치했다면 군을 설치하고 나서부터 혁파하기까지는 65년이 아니라 67년이 걸린 셈이다. 결국 군의 설치 및 혁파시기와 관련된 본문의 서술은 『漢書』 본기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본문 내용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고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언급한 군의 설치시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漢書』 本紀와 『漢書』 「賈捐之傳」 사이의 불일치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아마도 武帝 때 한 해의 시점이 겨울 10월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즉, 武帝 때는 겨울 10월부터 한 해가 시작하며 그 이듬해 겨울 10월이 와야 한 해가 지났던 것이다. 「武帝紀」에 따르면 武帝는 봄에 남월 평정의 소식을 들었고, 9군의 설치는 봄에서 가을 사이에 이루어졌다. 武帝 때의 달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직 겨울 10월이 되지 않았으므로 해를 넘기지 않은 것이지만 봄의 정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계산하는 방식에 따른다면 武帝의 9군 설치는 이미 해를 넘기고 난 뒤에 이루어진 셈이다. 따라서, 『漢書』의 찬자가 본기의 경우에는 武帝 당시의 역법에 따라 사실을 기록하되 열전에서는 봄을 정월로 설정하고 연대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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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楚莊王 시기의 상황. 莊王은 기원전 613년에서 기원전 591년까지 재위하였는데, 즉위하고 나서 3년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쾌락에만 탐닉했다. 그러나 대부인 오거, 소종의 간언을 듣고 태도를 고쳐 국정에 전념하니 이로써 초나라는 다시 일약 강국이 되었다. 장왕 8년(전606)에는 주나라를 침범한 戎狄을 물리치고 洛邑 교외에서 열병식을 거행함으로써 초나라는 비로소 패자를 일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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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嶺外: 五嶺의 밖이라는 의미로, ‘嶺南’, ‘嶺表’라고도 한다. 五嶺은 일반적으로 大庾嶺과 始安의 越城嶺, 桂陽의 騎田嶺, 臨賀의 萌渚嶺, 九貞의 都龐嶺을 말한다. 현재의 廣東 廣西와 湖南 江西와의 경계로서, 揚子江과 朱江의 水系 구분이기도 하다. 이는 『史記』 「張耳傳」에서 “北有長城之役, 南有五嶺之戍.”라는 구절에서 보듯 漢代부터 시작된 지역관념인데, 『漢書』 「張耳傳」에서 顔師古가 鄧德明의 『南康記』를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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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南海·桂林·象郡: 『史記』 권6 「秦始皇本紀」에 따르면 진시황 33년(전214)에 범죄자와 천민들로 구성된 군대로 남방을 평정하여 桂林·象郡·南海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지키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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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자세한 사항은 『史記』 권113 「南越列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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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여기서의 9郡은 『漢書』 권6 「武帝紀」에 따르면 元鼎 6년 겨울 10월 南越을 평정하고, 그 지역에 설치한 南海, 蒼梧, 鬱林, 合浦, 交阯, 九眞, 日南, 珠崖, 瞻耳郡을 말한다. 南越의 평정을 원문에서는 元鼎 5년이라고 했고 本紀에서는 6년으로 되어 있어 양자의 기록이 서로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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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刺史라는 관직은 前漢 惠帝 3년(전193) 京畿지역의 訟事를 담당하고 이를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파견한 御史監이라는 관직에서 유래하였다. 그 뒤에 監察御使로 바뀌어 모든 州에 설치했는데, 武帝 元封 5년(전106) 이를 혁파하고 12州에 部刺史를 두어 각 州의 사정을 감찰하게 하였다. 감찰의 대상은 해당지역의 2천석 관리, 즉 지방장관인 郡太守의 근무실태와 그 일가의 행실로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刺史는 상주하는 치소가 없었고 일정기간 (대략 8개월) 동안 해당지역을 순찰하고 난 후 중앙에 올라와 수집한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 책무였다. 그러던 것이 光武帝 建武 18년(43) 12州에 다시 刺史를 설치하였는데, 일정지역에 상주하면서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더욱이 前漢代까지 자사는 감찰결과를 중앙의 三公에 보고하고 결과에 따른 처분은 三公이 담당하였으나 光武帝 때는 이러한 三公의 권한을 회수함으로써 刺史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지방에서 刺史의 권력이 郡太守를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빨라도 後漢代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後漢末 지방에서 반란이 빈발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九卿 출신의 대신을 都督과 持節을 가지고 將軍府를 설치할 수 있는 刺史로 파견하면서 刺史의 존재는 완전히 郡太守를 압도하여 실질적인 최고의 행정과 군사장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따라서, 武帝때 交州刺史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尉陀를 평정한 것은 기원전 112년의 일이고 12주 자사가 설치된 것은 기원전 106년의 일이므로 交州刺史로 9군을 통솔하게 했다는 본문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아마도 刺史가 최고의 행정장관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된 劉宋代에 范曄이 『後漢書』를 찬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시대 刺史가 갖는 권한과 지위를 전한의 상황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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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珠崖, 儋耳: 珠崖郡은 오늘날의 海南島 동북지역으로 朱崖라고도 하며 치소는 曋都縣(海南省 海口市)이다. 이 지역에서는 진주가 산더미처럼 산출되기 때문에 ‘珠崖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儋耳郡은 오늘날 해남도 서부지역으로, 海南省 儋州市 서북쪽 南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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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後漢書』 「明帝紀」 劉召注에서 인용된 楊浮의 『異物志』에서는 儋耳는 남방의 만이이다. 이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뺨을 찢어 뺨가죽을 귓가에 걸리게 하고 여러 가닥으로 나누는데 그 형상이 마치 닭의 내장과 같다. 여러 겹으로 만들어서 어깨까지 늘어뜨린다. 『漢書』 권64하 「賈捐之傳」에 따르면 賈捐之는 이 지역 사람들을 ‘駱越之民’이라고 하면서 父子가 함께 목욕을 하고 코로 물을 마신다는 점을 예로 들어 이들이 금수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史記索隱』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珠崖와 儋耳지역의 사람들을 ‘甌人’이라고 하였으며 이 지역을 통틀어 ‘甌越’이라고도 불렀다. 周나라 때는 交阯를 ‘駱越’이라고 하였고, 戰國 秦나라 때는 이를 ‘西甌’라고 하였으니, 실제로 駱越, 西甌, 甌越 등은 모두 다름 아닌 交阯를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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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自領郡事’: 州 刺史나 朝廷으로부터 정식 임용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郡府와 郡의 행정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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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封還印綏’: 『漢書』 권89上 「百官公卿」과 『後漢書志』 권30 「輿服志」下에 관리들에게 사여하는 印綏가 규정되어 있다. 宗室 列侯와 三公 등은 金印紫綬를, 三公을 제외한 二千石의 관직, 즉 중앙의 경우는 九卿, 지방은 郡太守는 銀印靑綏를 쓰며, 一千石 이하 六百石 이상의 관직은 銅印黑綏를, 六百石 이하 二百石 이상의 관직은 銅印黃綏를 쓴다. 漢代의 관제와 의례의 연혁 및 시행상황 등을 상세히 기록한 衛宏의 『漢舊儀』에 따르면 金印紫綬는 황금으로 만들고, 인장의 손잡이는 거북이의 형상을 조각하였으며, ‘某侯之印’이라는 문구를 새기고 붉은 인끈을 드리운다. 銀印靑綏는 재질은 銀이며 손잡이는 거북이의 형상으로 만든다. 인장에 새기는 문구를 章이라 하는데, ‘某官之章’이라 새기고 푸른 인끈을 드리운다. 銅印의 경우에는 별다른 형상을 새기지 않고 단지 인끈을 통과시킬 구멍만을 인장의 등부분에 만들며, 인장에 새기는 문구를 印이라 하는데 ‘某官之印’이라 새긴다. 그리고 열후로 책봉된 자가 2천석 급에 해당하는 관직을 맡을 경우에는 두 개의 金印紫綬를 수여받는다. 官職을 마칠 때는 이를 반납하게 되는데, 孫豹는 자신이 공식적으로 太守의 직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부친 孫幸의 印綏를 반납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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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制詔: 秦의 통일 이후 皇帝의 권력과 위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황제의 言詞를 ‘制’라고 칭하고, 구체적인 臣民이 告誡를 받는 경우를 ‘詔’라고 칭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秦代부터 법정의 문서 종류가 규정되어 漢代에 계속되는데, 이때 詔와 制가 문서의 종류로 정착된다. 이 외에 ‘策’과 ‘誡’가 있는데, ‘制詔’로서 太守에 임명하였다는 것은 文書를 통해 공식적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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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中國: ‘中國’은 戰國末 中原地方의 諸國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秦漢시대 이후에는 異民族과 대비되어 조정이 장악하고 있는 전체를 포괄하는 인식을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朝廷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州郡에서의 활동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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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漢書』 卷64下 「賈捐之傳」에 따르면 珠崖郡을 설치(전 112년에서 110년 사이)하고 나서부터 昭帝 始元 원년(전86)까지 약 20여 년 동안 6차례의 반란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始元 5년(전82) 儋耳郡을 혁파하고 이를 珠崖郡과 합쳤다. 宣帝 神爵 3년(전58)에 다시 珠崖郡 소속의 3현에서 반란이 발생했고, 7년 후인 甘露 원년(전53)에는 珠崖郡의 9현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元帝 初元 원년(전48) 珠崖郡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 또다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여러 현에서 자꾸 반란이 발생하여 결국 初元 3년까지도 완전히 평정할 수가 없었다. 당시 丞相으로 있던 于定國에 따르면 지난 수년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護軍都尉나 校尉 같은 군지휘관이 모두 11명인데, 그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이는 2인에 불과하고 전사한 병사들의 숫자도 1만이 넘었으며, 여기에 소모된 비용은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였으나 끝내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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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初元 3년(전46) 珠崖郡 山南縣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대규모의 토벌군을 파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待詔의 벼슬에 있던 賈捐之는 대군을 보내면서까지 珠崖郡을 고수할 경제적인 이익은 없으므로 이를 포기하고 내지인 關東을 휩쓸고 있는 기근을 구제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승상 于定國도 같은 취지의 의견을 내니 황제 역시 이에 동의하여 마침내 珠崖郡을 혁파하였다(『漢書』 卷64下 「賈捐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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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漢書』 卷6, 「武帝紀」에서는 元鼎 6년(전111)에 南越을 평정하여 9군을 설치했다고 했고, 본문에서는 元鼎 5년(기원전 112)에 남월을 평정하여 9군을 설치했다고 했으니 서로 기록이 어긋난다. 『漢書』 권64下 「賈捐之傳」에 따르면 儋耳, 珠崖 2군의 설치는 元封 원년(전110)의 일로 되어 있다. 본문의 기록대로 원정 5년에 군을 설치했다면 군을 설치하고 나서부터 혁파하기까지는 65년이 아니라 67년이 걸린 셈이다. 결국 군의 설치 및 혁파시기와 관련된 본문의 서술은 『漢書』 본기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본문 내용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고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언급한 군의 설치시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漢書』 本紀와 『漢書』 「賈捐之傳」 사이의 불일치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아마도 武帝 때 한 해의 시점이 겨울 10월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즉, 武帝 때는 겨울 10월부터 한 해가 시작하며 그 이듬해 겨울 10월이 와야 한 해가 지났던 것이다. 「武帝紀」에 따르면 武帝는 봄에 남월 평정의 소식을 들었고, 9군의 설치는 봄에서 가을 사이에 이루어졌다. 武帝 때의 달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직 겨울 10월이 되지 않았으므로 해를 넘기지 않은 것이지만 봄의 정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계산하는 방식에 따른다면 武帝의 9군 설치는 이미 해를 넘기고 난 뒤에 이루어진 셈이다. 따라서, 『漢書』의 찬자가 본기의 경우에는 武帝 당시의 역법에 따라 사실을 기록하되 열전에서는 봄을 정월로 설정하고 연대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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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타(尉佗), 무제, 무제, 손행(孫幸), 손행, 손행, 손표(孫豹), 손표, 손표, 원제(元帝)
지명
초나라, 진(秦), 남해(南海), 계림(桂林), 상군(象郡), 한나라, 남월왕(南越王), 교주, 주애(珠崖), 담이(儋耳), 회계, , 주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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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위세가 확대되면서 반란이 자주 일어나니 마침내 주애군(珠崖郡)을 철폐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