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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만(長沙蠻), 영릉만(零陽蠻), 무릉만(武陵蠻)이 반역을 일으킴

  • 국가
    남만(南蠻)
영수(永壽) 3년(157, 후한 환제) 십일월 장사만(長沙蠻)이 반역을 일으켜 익양(益陽) 주 001
각주 001)
益陽: 長沙郡 益陽縣. 현 湖北省 益陽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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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연희(延熹) 3년(160) 가을에 이르러 드디어 군의 변경지역을 노략질하면서 무리가 만여인에 이르고 수령과 관리를 살상하였다. 또 영릉만이 장사에 들어왔다. 겨울에는 무릉만 6,000여 인이 강릉(江陵) 주 002
각주 002)
江陵: 南郡 江陵縣, 후에 南郡이 江陵郡으로 변경되었는데, 현재 湖北省 江陵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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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노략질하자, 형주자사 유도(劉度), 알자(謁者)주 003
각주 003)
謁者: 春秋時代부터 나타난 관직으로 황제의 명을 전달하거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謁者 馬睦은 荊州刺史 劉度를 督하여 만을 평정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後漢書』 卷38, 「度尙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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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목(馬睦), 남군태수 이숙(李肅)이 모두 도망가 버렸다. 이숙의 주부(主簿)주 004
각주 004)
主簿: 漢代 中央과 郡縣의 관청에서 文書를 관장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관리였는데, 魏晋時代에 이르러 군사를 통령하기 위해 幕府를 개설한 大臣의 府屬僚로 바뀌어 府의 樞要에 참여하고 府事를 總領하는 관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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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胡爽)이 말머리를 잡아당기며 간청하기를, “만이들이 군(郡)에서 방비를 하지 않는 것을 알고, 그 틈을 타서 진격한 것입니다. 명부(明府)주 005
각주 005)
明府: 원래는 大府, 官府를 칭하는 말이었지만, 漢魏시대 郡守나 牧, 尹 등 고위 지방 목민관의 존칭으로 ‘明府君’이 사용되면서 약칭하여 ‘明府’로 쓰였다(『後漢書』 「張湛傳」, “明府位尊德重, 不宜自輕.” 李賢注 “郡守所居曰府. 明者, 尊高之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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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는 나라의 대신으로서 성(城)을 따라 천 리에 모(旄)주 006
각주 006)
旄: 旄牛의 꼬리를 장대에 매단 깃발로, 오래 전부터 장수들의 의장용으로 사용되었는데, 旄牛의 꼬리는 西南夷의 貢物로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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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게양하고 북을 울리시면 이에 호응하는 자가 십만 명은 될 터인데, 어찌 부절(符節)을 받은 군태수의 막중한 책임을 팽개치고 도망치는 사람이 되시려 합니까?” 이숙이 칼을 빼들고 호상을 향하여 “조무래기주 007
각주 007)
掾: 官府에서 官長을 보좌하는 官屬을 統稱하는 의미인데, 대부분 官長의 辟召에 의해서 임명되기 때문에 官長과 私屬關係가 강하다. 여기서는 자신에 의해 임용된 자로서 太守 개인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 낮은 지위의 인물에게 私的관계를 강조하면서 쓰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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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꺼져라!, 태수가 지금 위급한 판에, 어찌 이따위 수작을 하느냐?” 호상은 말을 껴안고 극력 간언하였다. 이숙은 마침내 호상을 죽이고 도망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이숙을 잡아들여 기시(棄市)에 처하고, 유도마목은 감사일등(減死一等)주 008
각주 008)
減死一等: 漢初 刑法에서 형벌은 死, 肉, 流, 徒, 杖. 笞의 단계로 되어 있는데, 死刑에서 1등급을 내리는 것은 肉刑, 肉刑이 폐지된 후에는 流刑이다. ‘減死一等’은 死刑의 죄에 해당하나 流刑에 처한 것으로, 流刑이 갖는 경감기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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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처하였다. 호상 일가에는 요역과 부세를 면제하고, 가족 중 한 명을 랑(郞)주 009
각주 009)
郞: 전국시대부터 설치되었던 관직으로 秦漢시대에는 議郞·中郞·侍郞·郎中 등이 있었다. 정원 제한은 없으며, 前漢까지는 郎中令에 後漢代에는 光祿勳에 소속되었는데, 前漢까지는 궁중의 호위와 심부름 외에 수시로 정책을 건의하는 일을 담당하다가, 다른 관리로 발탁되는 지위였다. 그러나 後漢代에는 尙書臺가 실제적으로 행정의 중추가 되면서 각 曹별로 배속될 尙書郞이 되어 구체적인 實職을 갖게 되었다. 후에는 侍郞, 郎中, 員外郞 등의 요직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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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배수(拜授)하였다. 이에 우교령(右校令)주 010
각주 010)
右校令: 『後漢書志』 권27 「百官」4에 따르면 右校令은 종묘, 궁실, 능원 등의 토목공사및 도로의 정비를 담당하는 丈作臺의 屬官으로, 俸秩은 六百石이고 공사장인들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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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度尙)형주자사로 삼아 장사(長沙)의 적들을 토벌하게 하니, 평정되었다. 또 거기장군(車騎將軍) 풍곤(馮緄) 주 011
각주 011)
馮緄: 蠻夷 토벌에 대해서는 『後漢書』 권38, 「馮緄傳」에 상세하다. 당시 荊州刺史와 南郡太守가 도망하자, 馮緄이 車騎將軍으로 군사 10만여 명을 이끌고 나아가 토벌하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 천하에는 기근이 들고 재정은 궁핍한데 사방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으므로 공경백관의 녹봉을 줄이고 제후왕이 받던 세금을 임시로 끌어다가 군자금으로 충당하게 할 정도였다. 그가 長沙에 도착하여 武陵蠻夷를 격파하고 적의 수급 4천여 급을 베고 10만여 무리의 항복을 받아내니 형주는 평정되었다. 그는 상서를 통해 應奉에게 그 공을 미루었는데 당시 應奉은 從事中郞으로 從軍하여 만이 평정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대가 회군한 틈을 타 장사의 만이가 다시 일어나 계양, 무릉을 공격하자 군대를 돌려 이들을 다시 평정하였다. 그 후 조정으로 돌아와 廷尉가 되었는데, 黨錮事件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 뻔하였으나 응봉의 상소로 이를 면하고 뒤에 다시 복직되어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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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무릉만을 토벌케 하니, 모두 항복하거나 해산하였다.주 012
각주 012)
『後漢書』 「桓帝紀」에 따르면 延熹 3년 겨울 무릉만이 강릉을 약탈하자 車騎將軍 馮緄이 이를 토벌하였으며, 형주자사 度尙이 長沙蠻을 평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延熹 5년 4월, 5월, 10월에 걸쳐 만이의 반란 기사가 보이며, 특히 10월의 경우 당시 南郡太守 李肅이 도망쳤다가 처벌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後漢書』 권38 馮緄과 度尙의 열전 기록에 따르면 荊州刺史 劉度와 馬睦 등이 패하여 도망치고 度尙이 조정의 논의에서 형주자사로 임명된 것은 연희 5년의 일로서, 본기와 열전의 기록이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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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귀환하자 적들은 다시 계양(桂陽)을 노략질하였는데, 태수 요석(廖析)이 도망가 버렸다. 무릉만이 다시 군의 치소를 공격하였는데, 태수 진봉(陳奉)이 관리들을 이끌고 이를 격파하였다. 참수된 자가 3천여 급이고, 항복한 자가 2천여 인이 되었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3년(186) 무릉만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 지역을 노략질하니 주군(州郡)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 각주 001)
    益陽: 長沙郡 益陽縣. 현 湖北省 益陽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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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江陵: 南郡 江陵縣, 후에 南郡이 江陵郡으로 변경되었는데, 현재 湖北省 江陵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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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謁者: 春秋時代부터 나타난 관직으로 황제의 명을 전달하거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謁者 馬睦은 荊州刺史 劉度를 督하여 만을 평정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後漢書』 卷38, 「度尙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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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主簿: 漢代 中央과 郡縣의 관청에서 文書를 관장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관리였는데, 魏晋時代에 이르러 군사를 통령하기 위해 幕府를 개설한 大臣의 府屬僚로 바뀌어 府의 樞要에 참여하고 府事를 總領하는 관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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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明府: 원래는 大府, 官府를 칭하는 말이었지만, 漢魏시대 郡守나 牧, 尹 등 고위 지방 목민관의 존칭으로 ‘明府君’이 사용되면서 약칭하여 ‘明府’로 쓰였다(『後漢書』 「張湛傳」, “明府位尊德重, 不宜自輕.” 李賢注 “郡守所居曰府. 明者, 尊高之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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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旄: 旄牛의 꼬리를 장대에 매단 깃발로, 오래 전부터 장수들의 의장용으로 사용되었는데, 旄牛의 꼬리는 西南夷의 貢物로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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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掾: 官府에서 官長을 보좌하는 官屬을 統稱하는 의미인데, 대부분 官長의 辟召에 의해서 임명되기 때문에 官長과 私屬關係가 강하다. 여기서는 자신에 의해 임용된 자로서 太守 개인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 낮은 지위의 인물에게 私的관계를 강조하면서 쓰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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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減死一等: 漢初 刑法에서 형벌은 死, 肉, 流, 徒, 杖. 笞의 단계로 되어 있는데, 死刑에서 1등급을 내리는 것은 肉刑, 肉刑이 폐지된 후에는 流刑이다. ‘減死一等’은 死刑의 죄에 해당하나 流刑에 처한 것으로, 流刑이 갖는 경감기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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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郞: 전국시대부터 설치되었던 관직으로 秦漢시대에는 議郞·中郞·侍郞·郎中 등이 있었다. 정원 제한은 없으며, 前漢까지는 郎中令에 後漢代에는 光祿勳에 소속되었는데, 前漢까지는 궁중의 호위와 심부름 외에 수시로 정책을 건의하는 일을 담당하다가, 다른 관리로 발탁되는 지위였다. 그러나 後漢代에는 尙書臺가 실제적으로 행정의 중추가 되면서 각 曹별로 배속될 尙書郞이 되어 구체적인 實職을 갖게 되었다. 후에는 侍郞, 郎中, 員外郞 등의 요직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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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右校令: 『後漢書志』 권27 「百官」4에 따르면 右校令은 종묘, 궁실, 능원 등의 토목공사및 도로의 정비를 담당하는 丈作臺의 屬官으로, 俸秩은 六百石이고 공사장인들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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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馮緄: 蠻夷 토벌에 대해서는 『後漢書』 권38, 「馮緄傳」에 상세하다. 당시 荊州刺史와 南郡太守가 도망하자, 馮緄이 車騎將軍으로 군사 10만여 명을 이끌고 나아가 토벌하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 천하에는 기근이 들고 재정은 궁핍한데 사방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으므로 공경백관의 녹봉을 줄이고 제후왕이 받던 세금을 임시로 끌어다가 군자금으로 충당하게 할 정도였다. 그가 長沙에 도착하여 武陵蠻夷를 격파하고 적의 수급 4천여 급을 베고 10만여 무리의 항복을 받아내니 형주는 평정되었다. 그는 상서를 통해 應奉에게 그 공을 미루었는데 당시 應奉은 從事中郞으로 從軍하여 만이 평정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대가 회군한 틈을 타 장사의 만이가 다시 일어나 계양, 무릉을 공격하자 군대를 돌려 이들을 다시 평정하였다. 그 후 조정으로 돌아와 廷尉가 되었는데, 黨錮事件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 뻔하였으나 응봉의 상소로 이를 면하고 뒤에 다시 복직되어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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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後漢書』 「桓帝紀」에 따르면 延熹 3년 겨울 무릉만이 강릉을 약탈하자 車騎將軍 馮緄이 이를 토벌하였으며, 형주자사 度尙이 長沙蠻을 평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延熹 5년 4월, 5월, 10월에 걸쳐 만이의 반란 기사가 보이며, 특히 10월의 경우 당시 南郡太守 李肅이 도망쳤다가 처벌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後漢書』 권38 馮緄과 度尙의 열전 기록에 따르면 荊州刺史 劉度와 馬睦 등이 패하여 도망치고 度尙이 조정의 논의에서 형주자사로 임명된 것은 연희 5년의 일로서, 본기와 열전의 기록이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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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환제, 유도(劉度), 마목(馬睦), 이숙(李肅), 이숙, 호상(胡爽), 이숙, 호상, 호상, 이숙, 호상, 이숙, 유도, 마목, 호상, 도상(度尙), 형주, 풍곤(馮緄), 요석(廖析), 진봉(陳奉), 영제(靈帝)
지명
후한, 장사, 익양(益陽), 영릉, 장사, 무릉, 강릉(江陵), 장사(長沙), 무릉, 계양(桂陽), 무릉, 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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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만(長沙蠻), 영릉만(零陽蠻), 무릉만(武陵蠻)이 반역을 일으킴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1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