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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누중만(漊中蠻), 예중만(澧中蠻), 영릉만(零陽蠻)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벌함

  • 국가
    남만(南蠻)
화제(和帝) 주 001
각주 001)
和帝: 後漢 4대 황제 劉肇. 기원후 88~105년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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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永元) 4년(92) 누중과 예중만 담융(覃戎) 등이 반란을 일으켜, 우정(郵亭)주 002
각주 002)
郵亭: 漢代 문서전달과 관원투숙을 위해 일정한 거리마다 숙소나 연락처로 설치된 관아. 『漢書』 「薛宣傳」, 顔師古 注: “郵, 行書之舍, 亦如今之驛及行道館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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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불태우고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군병(郡兵)이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2년(115) 예중만(澧中蠻)이 군현의 요역과 조세가 공평성을 잃었다고 원한을 품고, 마침내 충중(充中)의 여러 종족 2,000여 인과 결합하여 성(城)을 공격하여 장리(長吏)를 죽였다. 주군(州郡)에는 오리만과 육정(六亭)의 병사를 모집하여 이들을 추격하여 격파하니, 모두 흩어지거나 항복하였다. 오리와 육정의 거수(渠帥)들에게 각각 등급별로 보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주 003
각주 003)
『後漢書』 卷5, 「安帝紀」, 元初 2년(116) 12월조, “武陵澧中蠻叛, 州郡擊破之.”의 李賢注에 “東觀記曰: 「蠻田山 高少等攻城, 殺長吏, 州郡募五里蠻夷 六亭兵追擊, 山等皆降. 賜五里 六亭渠率金帛各有差.」”로 되어 있다. 蠻의 지도자로 田山과 高少 등을 거론하고 있는데, 그들에 관한 다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현전본 『東觀漢記』에서는 이 내용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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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가을 누중(漊中)과 예중만(澧中蠻) 4,000여 인이 모두 도적이 되었다. 또 영릉만(零陵蠻) 양손(羊孫)진탕(陳湯) 등 천여 인이 적책(赤幘)을 차고 장군을 칭하면서주 004
각주 004)
‘著赤幘 稱將軍’: 赤幘은 붉은 두건으로, 고대 무사들이 위엄을 보이기 위해 착용하였다(『後漢書』 「輿服志」下, “武吏常赤幘, 成其威也.”). 武吏, 즉 하급지휘관이 赤幘을 착용하는 것으로, 이를 將軍을 칭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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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을 불사르고 백성들을 노략질하였다. 주군에서는 선량한 만들을 모병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 각주 001)
    和帝: 後漢 4대 황제 劉肇. 기원후 88~105년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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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郵亭: 漢代 문서전달과 관원투숙을 위해 일정한 거리마다 숙소나 연락처로 설치된 관아. 『漢書』 「薛宣傳」, 顔師古 注: “郵, 行書之舍, 亦如今之驛及行道館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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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後漢書』 卷5, 「安帝紀」, 元初 2년(116) 12월조, “武陵澧中蠻叛, 州郡擊破之.”의 李賢注에 “東觀記曰: 「蠻田山 高少等攻城, 殺長吏, 州郡募五里蠻夷 六亭兵追擊, 山等皆降. 賜五里 六亭渠率金帛各有差.」”로 되어 있다. 蠻의 지도자로 田山과 高少 등을 거론하고 있는데, 그들에 관한 다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현전본 『東觀漢記』에서는 이 내용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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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著赤幘 稱將軍’: 赤幘은 붉은 두건으로, 고대 무사들이 위엄을 보이기 위해 착용하였다(『後漢書』 「輿服志」下, “武吏常赤幘, 成其威也.”). 武吏, 즉 하급지휘관이 赤幘을 착용하는 것으로, 이를 將軍을 칭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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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화제(和帝), 담융(覃戎), 안제(安帝), 양손(羊孫), 진탕(陳湯)
지명
충중(充中),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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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중만(漊中蠻), 예중만(澧中蠻), 영릉만(零陽蠻)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벌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1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