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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이 두 곤미로 분립한 뒤에도 분쟁이 계속되어 한나라가 편안한 해가 없음

  • 국가
    오손국(烏孫國)
애제 원수(元壽) 2년(전1) 대곤미 이질미가 선우와 함께 조정에 왔고 한나라는 이를 큰 성과라고 여겼다.주 001
각주 001)
『漢書』 「哀帝紀」에 따르면 元壽 2년 春正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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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元始) 연간에 이르러 비원치오일령을 죽이고 스스로 투항해 와서 한나라는 그를 귀의후(歸義侯)로 봉하였다.주 002
각주 002)
歸義侯 : 異民族의 지도자들 가운데 漢에 투항하여 이 작위를 받은 경우가 여럿 보인다. 예를 들어 『漢書』 卷6 「武帝紀」(187쪽) ; 「衛青霍去病傳」(2487쪽) ; 4上 「匈奴傳․上」(3780, 3793쪽) 등. 비원치가 오일령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귀의한 사건은 元始元年(후1)의 일로 추정된다(袁延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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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곤미가 모두 약하여 비원치가 침범하니, 도호 손건(孫建) 주 003
각주 003)
孫建 :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哀帝 元壽 2년(전1), 護軍都尉였던 孫建이 執金吾가 되고 3개월 후에는 右將軍이 되었으며, 平帝 元始2년(후2)에는 左將軍이 되었다. 또한 『漢書』 「外戚恩澤侯表」에는 그가 元始 5년(후5) 閏6월에 强弩將軍으로서 적을 제압한(折衝) 위세를 떨쳐 成武侯에 봉해졌다. 余太山(2005 : 177)은 前漢代에 將軍의 직책을 가지면서 都護에 임명받은 경우는 없기 때문에, 위의 본문에서 孫建이 이미 將軍이 된 元始年間에 ‘都護’로서 비원치를 습살했다는 것은 잘못이며, 아마 과거의 도호의 칭호를 소급해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懸泉漢簡에 근거한 한 연구는 후8~15년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하고 있다(袁延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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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를 습격하여 죽였다. 오손이 두 곤미로 분립한 이후 한나라는 걱정과 노고[憂勞]주 004
각주 004)
憂勞 : 顔注는 이 말을 “혹은 鎮撫하고 혹은 威制하기도 했으니 다사다난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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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해가 없었다.주 005
각주 005)
漢이 烏孫을 大小 두 昆彌로 나눈 것은 分治의 효과를 거두기 위함이었다. 즉 翁歸靡(=肥王)가 漢家의 여자인 解憂公主와의 사이에서 낳은 元貴靡를 大昆彌로 삼고, 匈奴에서 온 胡婦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烏就屠를 小昆彌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烏孫 세력의 兩分은 오히려 主導權을 둘러싼 內紛을 격화시키고, 한과 흉노의 개입과 간섭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한나라 조정은 赤谷에 屯田을 설치하고, 己校를 姑墨으로 이주시키거나, 혹은 戊己校尉의 병사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재물과 인장과 봉작을 내려서 위무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해결되지 못하고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하거나 사신을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段會宗의 4차에 걸친 出使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가 “걱정과 노고(憂勞)”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는 평가는 결코 지나친 폄하라고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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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漢書』 「哀帝紀」에 따르면 元壽 2년 春正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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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歸義侯 : 異民族의 지도자들 가운데 漢에 투항하여 이 작위를 받은 경우가 여럿 보인다. 예를 들어 『漢書』 卷6 「武帝紀」(187쪽) ; 「衛青霍去病傳」(2487쪽) ; 4上 「匈奴傳․上」(3780, 3793쪽) 등. 비원치가 오일령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귀의한 사건은 元始元年(후1)의 일로 추정된다(袁延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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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孫建 :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哀帝 元壽 2년(전1), 護軍都尉였던 孫建이 執金吾가 되고 3개월 후에는 右將軍이 되었으며, 平帝 元始2년(후2)에는 左將軍이 되었다. 또한 『漢書』 「外戚恩澤侯表」에는 그가 元始 5년(후5) 閏6월에 强弩將軍으로서 적을 제압한(折衝) 위세를 떨쳐 成武侯에 봉해졌다. 余太山(2005 : 177)은 前漢代에 將軍의 직책을 가지면서 都護에 임명받은 경우는 없기 때문에, 위의 본문에서 孫建이 이미 將軍이 된 元始年間에 ‘都護’로서 비원치를 습살했다는 것은 잘못이며, 아마 과거의 도호의 칭호를 소급해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懸泉漢簡에 근거한 한 연구는 후8~15년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하고 있다(袁延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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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憂勞 : 顔注는 이 말을 “혹은 鎮撫하고 혹은 威制하기도 했으니 다사다난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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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漢이 烏孫을 大小 두 昆彌로 나눈 것은 分治의 효과를 거두기 위함이었다. 즉 翁歸靡(=肥王)가 漢家의 여자인 解憂公主와의 사이에서 낳은 元貴靡를 大昆彌로 삼고, 匈奴에서 온 胡婦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烏就屠를 小昆彌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烏孫 세력의 兩分은 오히려 主導權을 둘러싼 內紛을 격화시키고, 한과 흉노의 개입과 간섭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한나라 조정은 赤谷에 屯田을 설치하고, 己校를 姑墨으로 이주시키거나, 혹은 戊己校尉의 병사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재물과 인장과 봉작을 내려서 위무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해결되지 못하고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하거나 사신을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段會宗의 4차에 걸친 出使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가 “걱정과 노고(憂勞)”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는 평가는 결코 지나친 폄하라고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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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애제, 이질미, 비원치, 오일령, 귀의후(歸義侯), 비원치, 손건(孫建)
지명
한나라, 한나라, 오손,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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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이 두 곤미로 분립한 뒤에도 분쟁이 계속되어 한나라가 편안한 해가 없음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310_0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