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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남도(南道)와 함께 북도(北道)를 보호하여 도호(都護)를 설치함

  • 국가
    서역(西域)
선제(宣帝) 주 001
각주 001)
宣帝 : 재위 전74~전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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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이르러 위사마(衛司馬)주 002
각주 002)
衛司馬 : 衛의 司馬라는 의미로, 衛尉의 지휘 아래 각 屯에 배치된 관리를 지칭한다. 『漢書』 卷70 「鄭吉傳」에는 “宣帝時에 이르러 鄭吉은 侍郞으로서 渠黎에서 屯田하여 積穀한 뒤, 諸國의 병사를 징발하여 車師를 攻破하고, 衛司馬를 옮겨서 鄯善 以西의 南道를 보호하도록 하였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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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어 선선(鄯善) 이서의 몇 나라를 감호하도록 했다. 고사(姑師)를 격파했지만 아직 진멸하지 못하여,주 003
각주 003)
未能盡并 : 顔注 : “비록 그 나라를 공파했으나 盡滅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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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전왕(車師前王)과 거사후왕(車師後王) 및 산북(山北)의 여섯 나라로 나뉘어졌다.주 004
각주 004)
姑師와 車師 : 嶋崎昌(1977 : 3-58)의 연구에 따르면 알타이어 계통으로서 姑師(혹은 車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집단이 언제부터인가 율두즈 계곡에서 바르쿨 방면에 걸친 천산산맥 동부지역에 살다가 점차 분열적 경향을 보이며 주변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中核은 투르판 분지와 그 북쪽의 천산산록에 있었고 그 위치가 서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한과 흉노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宣帝時에 이르러 한나라가 투르판 분지에 屯田을 실시함으로써 일단 그 지역을 영향권 하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흉노 측의 집요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車師屯田은 포기되고, 그곳의 車師人들은 渠犁로 이주되었다. 전67년 흉노는 車師王 兜莫을 내세워 山北의 車師人들을 東遷시키자, 한나라는 전63년경 軍宿을 車師王으로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車師前王과 車師後王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위의 본문에서 서술되듯이 廣義의 車師人들은 다시 나뉘어져 山北六國(蒲類前後國, 東西且彌國, 卑陸前後國)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흉노의 내분으로 日逐王이 투항하고 기원전 60년에 西域都護가 설치되면서, 渠犁로 이주했던 車師인들이 투르판 지역으로 돌아와 車師前王國이 형성되었고 흉노가 서역의 도시들에 徵稅를 위해 설치했던 童僕都尉도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漢은 元帝 初元元年 즉 전48년에 車師前王國의 交河(高昌壁)에 戊己校尉를 배치하고 屯田을 실시하며 흉노의 남하를 견제하도록 했다. 한편 匈奴도 東遷시킨 車師人들을 山北으로 다시 이주시켜 車師後王國을 형성하였다. 車師前王國의 王治는 交河城(현재 신강 투르판 西北의 交河故城址)이었고, 車師後王國의 王治는 務涂谷(현재 신강 吉木薩爾 南泉子街 일대)이었다. 일찍이 松田壽男은 務涂谷을 Jimsa 남쪽에 있는 Pa-no-p’a溪谷으로 비정했다(嶋崎昌, 1977 : 8). 또한 車師後王國의 四至轄境, 주요 城鎭(務涂谷, 金滿城, 疏勒城 등)의 方位, 國王의 世系와 주요 職官들, 漢과의 외교관계 및 왕국의 소멸과정 등에 관해서는 孟凡人(1985 : 19-48)의 상세한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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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나라는 오로지 남도만 보호했을 뿐 북도까지 모두 장악하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흉노는 스스로 불안해했다. 그 후 일축왕(日逐王)이 선우에게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 오니, 선선 이서[의 지역]을 감호하는 사자(使者)주 005
각주 005)
護鄯善以西使者 : 이 구절은 앞에 있는 ‘使護鄯善以西數國’이라는 표현에 조응하는 것이며, 『漢書』 卷70 「鄭吉傳」에는 ‘使護鄯善以西南道’라는 표현도 보이므로, 官職名이라기보다는 鄭吉의 직무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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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鄭吉)이 그를 맞이하였다. 그가 한나라에 오니 일축왕을 봉하여 귀덕후(歸德侯)로 삼고 정길안원후(安遠侯)로 삼았다. 그 해는 신작(神爵) 3년(전59)이었다.주 006
각주 006)
『漢書』 「宣帝紀」에는 神爵 2년(전60) 가을에 匈奴 日逐王 先賢撣이 人衆 萬餘名을 이끌고 來降하자, 都護騎都尉 鄭吉로 하여금 車師를 攻破하도록 했고, 日逐王과 鄭吉 모두 列侯로 봉했다는 기사가 보이며, 「鄭吉傳」에도 日逐王의 투항으로 車師가 고립되자 鄭吉이 車師의 兜訾城을 공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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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길로 하여금 북도도 함께 보호하라고 했고, 그런 연유로 ‘도호’(都護)주 007
각주 007)
都護 : 顔注 : “都는 總과 같은 뜻이며, [都護는] 南北之道를 總護한다는 의미이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西域都護, 加官, 宣帝地節二年(전68)初置, 以騎都尉․諫大夫使護西域三十六國”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都護의 秩은 比二千石이고, 治所는 烏壘城이었으며, 屬官으로는 丞 1人, 司馬․侯․千人 각 2인이 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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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도호의 시초는 정길에서부터 두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동복도위는 폐지되고 흉노는 더욱 약해져서 서역에 가까이 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둔전민을 이주시켜 북서건(北胥鞬)주 008
각주 008)
胥鞬(siwo-kien) : 여기에서만 한번 언급될 뿐이며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다. 神爵 3년(전61) 漢은 渠犁의 屯田民을 胥鞬으로 이주시켜 車師後部를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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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경작토록 하고 사차의 땅을 나누어주 009
각주 009)
顔注 : “披는 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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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다]. 둔전교위(屯田校尉)가 처음으로 도호에 소속하게 되었다. 도호는 오손강거와 여러 외국의 동정을 독찰(督察)주 010
각주 010)
顔注 : “督은 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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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변고가 생기면 보고했다. 평안으로 다스릴 수 있으면 평안으로 다스리고[安輯],주 011
각주 011)
顔注 : “輯과 集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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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할 만하면 공격했다.주 012
각주 012)
여기서는 都護의 임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都護가 관할하는 범위가 烏孫과 같은 天山 以北의 유목민은 물론, 康居와 같이 蔥嶺 以西의 주민들까지 포괄하고 있어 매우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漢書』 「西域傳」에 따르면 西域都護에게 ‘屬’하는 나라는 모두 48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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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의 치소는 오루성(烏壘城)이었는데,주 013
각주 013)
烏壘城 : 新疆 輪臺縣 동쪽 策達雅[Chadir]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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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에서 2,738리 떨어져 있고 거리(渠犁)의 전관(田官)과는 서로 가까웠다.주 014
각주 014)
뒤에서 渠犁는 都護의 治所인 烏壘城 남쪽 혹은 동남쪽으로 330리(132km) 떨어져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渠犁의 동북으로 가면 尉犁에 이른다는 기록으로 볼 때, 渠犁의 위치는 현재 輪臺에서 동남쪽으로 120~1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喀爾曲朶 혹은 阿瓦提 부근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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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비옥하고 서역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니, 이런 연유로 도호의 치소가 [그곳에] 두어진 것이다.

  • 각주 001)
    宣帝 : 재위 전74~전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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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衛司馬 : 衛의 司馬라는 의미로, 衛尉의 지휘 아래 각 屯에 배치된 관리를 지칭한다. 『漢書』 卷70 「鄭吉傳」에는 “宣帝時에 이르러 鄭吉은 侍郞으로서 渠黎에서 屯田하여 積穀한 뒤, 諸國의 병사를 징발하여 車師를 攻破하고, 衛司馬를 옮겨서 鄯善 以西의 南道를 보호하도록 하였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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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未能盡并 : 顔注 : “비록 그 나라를 공파했으나 盡滅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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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姑師와 車師 : 嶋崎昌(1977 : 3-58)의 연구에 따르면 알타이어 계통으로서 姑師(혹은 車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집단이 언제부터인가 율두즈 계곡에서 바르쿨 방면에 걸친 천산산맥 동부지역에 살다가 점차 분열적 경향을 보이며 주변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中核은 투르판 분지와 그 북쪽의 천산산록에 있었고 그 위치가 서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한과 흉노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宣帝時에 이르러 한나라가 투르판 분지에 屯田을 실시함으로써 일단 그 지역을 영향권 하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흉노 측의 집요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車師屯田은 포기되고, 그곳의 車師人들은 渠犁로 이주되었다. 전67년 흉노는 車師王 兜莫을 내세워 山北의 車師人들을 東遷시키자, 한나라는 전63년경 軍宿을 車師王으로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車師前王과 車師後王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위의 본문에서 서술되듯이 廣義의 車師人들은 다시 나뉘어져 山北六國(蒲類前後國, 東西且彌國, 卑陸前後國)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흉노의 내분으로 日逐王이 투항하고 기원전 60년에 西域都護가 설치되면서, 渠犁로 이주했던 車師인들이 투르판 지역으로 돌아와 車師前王國이 형성되었고 흉노가 서역의 도시들에 徵稅를 위해 설치했던 童僕都尉도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漢은 元帝 初元元年 즉 전48년에 車師前王國의 交河(高昌壁)에 戊己校尉를 배치하고 屯田을 실시하며 흉노의 남하를 견제하도록 했다. 한편 匈奴도 東遷시킨 車師人들을 山北으로 다시 이주시켜 車師後王國을 형성하였다. 車師前王國의 王治는 交河城(현재 신강 투르판 西北의 交河故城址)이었고, 車師後王國의 王治는 務涂谷(현재 신강 吉木薩爾 南泉子街 일대)이었다. 일찍이 松田壽男은 務涂谷을 Jimsa 남쪽에 있는 Pa-no-p’a溪谷으로 비정했다(嶋崎昌, 1977 : 8). 또한 車師後王國의 四至轄境, 주요 城鎭(務涂谷, 金滿城, 疏勒城 등)의 方位, 國王의 世系와 주요 職官들, 漢과의 외교관계 및 왕국의 소멸과정 등에 관해서는 孟凡人(1985 : 19-48)의 상세한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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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護鄯善以西使者 : 이 구절은 앞에 있는 ‘使護鄯善以西數國’이라는 표현에 조응하는 것이며, 『漢書』 卷70 「鄭吉傳」에는 ‘使護鄯善以西南道’라는 표현도 보이므로, 官職名이라기보다는 鄭吉의 직무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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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書』 「宣帝紀」에는 神爵 2년(전60) 가을에 匈奴 日逐王 先賢撣이 人衆 萬餘名을 이끌고 來降하자, 都護騎都尉 鄭吉로 하여금 車師를 攻破하도록 했고, 日逐王과 鄭吉 모두 列侯로 봉했다는 기사가 보이며, 「鄭吉傳」에도 日逐王의 투항으로 車師가 고립되자 鄭吉이 車師의 兜訾城을 공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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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都護 : 顔注 : “都는 總과 같은 뜻이며, [都護는] 南北之道를 總護한다는 의미이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西域都護, 加官, 宣帝地節二年(전68)初置, 以騎都尉․諫大夫使護西域三十六國”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都護의 秩은 比二千石이고, 治所는 烏壘城이었으며, 屬官으로는 丞 1人, 司馬․侯․千人 각 2인이 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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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胥鞬(siwo-kien) : 여기에서만 한번 언급될 뿐이며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다. 神爵 3년(전61) 漢은 渠犁의 屯田民을 胥鞬으로 이주시켜 車師後部를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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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顔注 : “披는 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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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顔注 : “督은 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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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顔注 : “輯과 集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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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여기서는 都護의 임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都護가 관할하는 범위가 烏孫과 같은 天山 以北의 유목민은 물론, 康居와 같이 蔥嶺 以西의 주민들까지 포괄하고 있어 매우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漢書』 「西域傳」에 따르면 西域都護에게 ‘屬’하는 나라는 모두 48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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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烏壘城 : 新疆 輪臺縣 동쪽 策達雅[Chadir]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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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뒤에서 渠犁는 都護의 治所인 烏壘城 남쪽 혹은 동남쪽으로 330리(132km) 떨어져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渠犁의 동북으로 가면 尉犁에 이른다는 기록으로 볼 때, 渠犁의 위치는 현재 輪臺에서 동남쪽으로 120~1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喀爾曲朶 혹은 阿瓦提 부근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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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선제(宣帝), 정길(鄭吉), 귀덕후(歸德侯), 정길, 안원후(安遠侯), 정길, 정길
지명
선선(鄯善), 고사(姑師), 한나라, 선선, 한나라, 사차, 오손, 강거, 오루성(烏壘城), 거리(渠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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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남도(南道)와 함께 북도(北道)를 보호하여 도호(都護)를 설치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01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