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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呂嘉)가 반란을 일으키고 건덕(建德)을 왕으로 세우자 천자가 토벌을 명함

  • 국가
    남월(南粤)
천자는 이 소식을 듣고 사자가 나약해 결단하지 못했다고 죄를 주었다.주 001
각주 001)
이 구절에서도 『史記』는 “여가가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왕과 왕태후는 약하고 고립되어 이를 제압할 수 없는데다(嘉不聽王, 王․王太后弱孤不能制)”라는 내용이 있는데, 『漢書』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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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왕과 왕태후는 이미 한(漢)에 귀속하기로 했는데 여가(呂嘉) 홀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장삼(莊參)에게 이천의 군사를 주어 남월에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삼이, “친선을 위해 간다면 두세 사람이면 충분합니다만, 정벌하러 간다면 이천 명으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면서 불가하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천자는 장삼의 군사를 파면하였다.주 002
각주 002)
『史記』에는 ‘天子罷參也’라고 ‘兵’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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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협현(郟縣) 주 003
각주 003)
郟縣 : 顔師古注에 따르면, 郟의 음은 협(夾)이라 하였다. 또한 郟縣은 潁川郡 소속이다. 郟縣은 秦代 설치되었고 그 治所는 지금의 河南省 郟縣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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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장사(壯士)이자 이전에 제북국(濟北國) 주 004
각주 004)
濟北國 : 濟北國의 治所는 盧縣(현재의 山東省 長淸縣 동남쪽에 위치)에 있다. 그런데 『史記』 「李陵傳」에는 韓千秋가 濟北相이 아니라 濟南相으로 되어 있다(成安侯者, 穎川人, 父韓千秋, 故濟南相, 奮擊南越戰死, 武帝封子延年爲侯, 以校尉隨陵). 濟北國은 孝文帝 元年(전179)에 처음 설치된 이래 잠깐 폐지되었다가 孝文帝 15년(전165)에 다시 설치된 후 孝宣帝 地節 3년(전67) 平原郡과 泰山郡으로 분리되어 폐지되었다. 한편 濟南國은 文帝 16년(전164)에 濟南郡을 國으로 개칭하고 劉肥의 아들 辟光을 濟南王에 임명 東平陵(지금 山東省 章丘市 서쪽)에 도읍하였다. 景帝 3년(전154)에 吳楚七國의 亂에 참가하여 郡으로 강등되었다. 武帝 이후에는 南部가 泰山郡에 소속됨으로써 관할지역이 더욱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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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상(相)을 지냈던 한천추(韓千秋) 주 005
각주 005)
韓千秋 : 郟縣(현재의 河南省 郟縣) 사람으로 『史記』 「南越列傳」과 『漢書』 「李陵傳」에 그 이름이 부분적으로 보이며 그 내용은 「南越列傳」에 서술된 바와 같이 南越 공격을 자청하여 출정하였다가 여가의 유인 작전에 빠져 전사하고 말았다. 武帝는 뒤에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 그의 아들 韓延年을 成安侯에 봉하였다.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에는 “以校尉韓千秋擊南越死事. 子侯”라고 韓千秋가 校尉의 신분으로 南越을 공격하다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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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서서 말하기를, “조그만 월나라인데다가 왕이 안에서 호응하고 있고 오직 여가 주 006
각주 006)
『史記』에는 呂嘉 앞에 ‘相’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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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문제인데, 용맹한 병사 삼백주 007
각주 007)
『史記』에는 ‘二百’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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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 반드시 여가의 목을 바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천자는 한천추를 파견함주 008
각주 008)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校尉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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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동시에 왕태후의 동생인 규악(摎樂)에게 이천의 군사를 이끌고 가게 하였다.주 009
각주 009)
『漢書』中華書局本은 『史記』와 달리 여기에서 구두를 찍어 문장을 끝냈다. 이것을 따라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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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사가] 남월의 국경에 진입하자 여가 등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온 나라에 영을 내려 말하기를, “왕의 춘추 아직 어린데다가 태후는 중국인이다. 게다가 의 사자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면서 오로지 에 내속하려 하고 있다. 선왕의 귀중한 보물을 가져다가 몽땅 천자에게 바쳐 아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장안(長安)에 데리고 가서 노비로 팔아버리려 하고 있다. 스스로 한때의 화를 모면하려는 이익만 취하려 할 뿐 조씨(趙氏) 사직을 돌보아 만세의 대책을 강구할 생각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동생과 병졸들을 이끌고 공격하여 왕과 태후 그리고 의 사자를 죽였다. 창오(蒼梧)진왕(秦王)과 소속 군현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명왕(明王) 주 010
각주 010)
明王 : 趙嬰齊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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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장남으로 월인(粤人) 아내가 낳은 술양후(術陽侯) 주 011
각주 011)
術陽侯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元鼎 4년에 南越王의 형인 越을 高昌侯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또 『索隱』의 韋昭는 漢에서 책봉한 이름이라 하고, 「功臣表」에 따르면, 術陽은 下邳郡(지금 江蘇省 水濘縣 서북) 소속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에는 元鼎4년(전113)에 建德을 侯에 봉하였고 이듬해 元鼎 5년(전112)에 죄를 지어 廢國되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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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덕(建德)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자 한천추의 병사들이 들어와 몇몇 작은 읍들을 쳤다. 남월은 단지 길을 열어 먹을 것을 제공하면서 [유인하다가 한천추의]주 012
각주 012)
顔師古는 그 이유를 “깊숙이 들어오게 내버려두었다가 뒤에 모조리 없애버리기(縱之令深入, 然後誅滅之)”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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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번우성(番禺城)에서 40리쯤에 못 미쳤을 때, 남월은 군사를 일으켜 한천추 등을 공격하여 전멸하였다. 사람을 시켜 의 사자가 가지고 있던 부절(符節)을 함에 봉해서 국경의 요새 위에 두게 하고주 013
각주 013)
『索隱』은 漢의 사자의 부절을 함에 봉해서 새 위에 두었다(函封漢使節置塞上)고 하여 단순히 국경의 요새로 해석하고 있다. 동시에 『南康記』가 이 ‘塞上’은 오령의 하나인 大庾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한 것을 들어(索隱函封漢使節置塞上. 案 : 南康記以爲大庾名‘塞上’也.) 특정 지명으로 볼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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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듯한 말[謾辭]주 014
각주 014)
‘謾辭’를 顔師古는 속이다, 유혹하다[誑]로 해석하여, 여기에서는 ‘그럴듯한 말’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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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사죄의 뜻을 표하는 한편, 군사를 동원하여 요충지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천자는 “한천추(韓千秋)는 비록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군의 선봉으로서는 으뜸이었다”라고 하며, 그의 아들인 한연년(韓延年)성안후(成安侯) 주 015
각주 015)
成安侯 : 『索隱』은 「功臣表」를 인용하여 成安은 郟縣 소속이라 하였다(索隱案功臣表, 成安屬郟). 治所는 현재의 河南省 汝州市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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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봉하였다. 규악(摎樂)은 그의 누이가 왕태후이고 제일 먼저 한에 내속하길 청하였으므로 규악의 아들인 광덕(廣德)용후(龒侯) 주 016
각주 016)
龒侯 : 『史記』에는 ‘龍亢侯’로 되어 있다. 『索隱』에 인용된 服虔에 따르면 ‘龒’의 음은 공(卭)이며, 晉灼는 옛 ‘龍’字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晉灼설을 따라 용후라 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安徽省 懷遠縣 서북 龍亢鎭에 해당한다.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에 따르면, 元鼎 5년(전112)에 廣德은 龍亢侯에 책봉되었다가 元封 6년(전105)에 죄를 지어 처벌되고 폐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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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봉하였다. 그리고 사면을 내려, “천자의 권위가 미약하여주 017
각주 017)
『史記』에는 단지 ‘天子微’로만 되어 있는데, 『漢書』는 뒤에 ‘弱’자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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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들이 서로 힘으로 다툴 때, 신하된 자로서 난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을 『춘추(春秋)』에서는 나무랐다.주 018
각주 018)
顔師古注에 따르면, “역정이란 군사력으로 서로 경쟁함을 말한다. 신하가 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을 나무란 것은 춘추의 뜻이다(力政謂以兵力相加也. 譏臣不討賊者, 春秋之義)”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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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가(呂嘉)건덕(建德)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여 태연자약하고 있다.주 019
각주 019)
顔師古는 이 구절을 “자립하여 마음대로 관직을 두면서도 마음이 편안하여 두려운 바가 없음을 말한다(言自相置立, 而心安泰無恐懼)”라고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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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과 장강(長江)회수(淮水) 주 020
각주 020)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淮는 어떤 곳에는 ‘匯’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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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의 누선(樓船)주 021
각주 021)
『集解』에 인용된 應劭에 따르면, 당시 남월을 치려면 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대선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樓船이라고 한 것은 배 위에 망루를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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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병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라”라고 하였다.

  • 각주 001)
    이 구절에서도 『史記』는 “여가가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왕과 왕태후는 약하고 고립되어 이를 제압할 수 없는데다(嘉不聽王, 王․王太后弱孤不能制)”라는 내용이 있는데, 『漢書』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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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史記』에는 ‘天子罷參也’라고 ‘兵’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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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郟縣 : 顔師古注에 따르면, 郟의 음은 협(夾)이라 하였다. 또한 郟縣은 潁川郡 소속이다. 郟縣은 秦代 설치되었고 그 治所는 지금의 河南省 郟縣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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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濟北國 : 濟北國의 治所는 盧縣(현재의 山東省 長淸縣 동남쪽에 위치)에 있다. 그런데 『史記』 「李陵傳」에는 韓千秋가 濟北相이 아니라 濟南相으로 되어 있다(成安侯者, 穎川人, 父韓千秋, 故濟南相, 奮擊南越戰死, 武帝封子延年爲侯, 以校尉隨陵). 濟北國은 孝文帝 元年(전179)에 처음 설치된 이래 잠깐 폐지되었다가 孝文帝 15년(전165)에 다시 설치된 후 孝宣帝 地節 3년(전67) 平原郡과 泰山郡으로 분리되어 폐지되었다. 한편 濟南國은 文帝 16년(전164)에 濟南郡을 國으로 개칭하고 劉肥의 아들 辟光을 濟南王에 임명 東平陵(지금 山東省 章丘市 서쪽)에 도읍하였다. 景帝 3년(전154)에 吳楚七國의 亂에 참가하여 郡으로 강등되었다. 武帝 이후에는 南部가 泰山郡에 소속됨으로써 관할지역이 더욱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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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韓千秋 : 郟縣(현재의 河南省 郟縣) 사람으로 『史記』 「南越列傳」과 『漢書』 「李陵傳」에 그 이름이 부분적으로 보이며 그 내용은 「南越列傳」에 서술된 바와 같이 南越 공격을 자청하여 출정하였다가 여가의 유인 작전에 빠져 전사하고 말았다. 武帝는 뒤에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 그의 아들 韓延年을 成安侯에 봉하였다.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에는 “以校尉韓千秋擊南越死事. 子侯”라고 韓千秋가 校尉의 신분으로 南越을 공격하다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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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史記』에는 呂嘉 앞에 ‘相’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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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史記』에는 ‘二百’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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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校尉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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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漢書』中華書局本은 『史記』와 달리 여기에서 구두를 찍어 문장을 끝냈다. 이것을 따라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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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明王 : 趙嬰齊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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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術陽侯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元鼎 4년에 南越王의 형인 越을 高昌侯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또 『索隱』의 韋昭는 漢에서 책봉한 이름이라 하고, 「功臣表」에 따르면, 術陽은 下邳郡(지금 江蘇省 水濘縣 서북) 소속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에는 元鼎4년(전113)에 建德을 侯에 봉하였고 이듬해 元鼎 5년(전112)에 죄를 지어 廢國되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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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顔師古는 그 이유를 “깊숙이 들어오게 내버려두었다가 뒤에 모조리 없애버리기(縱之令深入, 然後誅滅之)”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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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索隱』은 漢의 사자의 부절을 함에 봉해서 새 위에 두었다(函封漢使節置塞上)고 하여 단순히 국경의 요새로 해석하고 있다. 동시에 『南康記』가 이 ‘塞上’은 오령의 하나인 大庾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한 것을 들어(索隱函封漢使節置塞上. 案 : 南康記以爲大庾名‘塞上’也.) 특정 지명으로 볼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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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謾辭’를 顔師古는 속이다, 유혹하다[誑]로 해석하여, 여기에서는 ‘그럴듯한 말’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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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成安侯 : 『索隱』은 「功臣表」를 인용하여 成安은 郟縣 소속이라 하였다(索隱案功臣表, 成安屬郟). 治所는 현재의 河南省 汝州市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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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龒侯 : 『史記』에는 ‘龍亢侯’로 되어 있다. 『索隱』에 인용된 服虔에 따르면 ‘龒’의 음은 공(卭)이며, 晉灼는 옛 ‘龍’字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晉灼설을 따라 용후라 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安徽省 懷遠縣 서북 龍亢鎭에 해당한다.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에 따르면, 元鼎 5년(전112)에 廣德은 龍亢侯에 책봉되었다가 元封 6년(전105)에 죄를 지어 처벌되고 폐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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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史記』에는 단지 ‘天子微’로만 되어 있는데, 『漢書』는 뒤에 ‘弱’자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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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顔師古注에 따르면, “역정이란 군사력으로 서로 경쟁함을 말한다. 신하가 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을 나무란 것은 춘추의 뜻이다(力政謂以兵力相加也. 譏臣不討賊者, 春秋之義)”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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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顔師古는 이 구절을 “자립하여 마음대로 관직을 두면서도 마음이 편안하여 두려운 바가 없음을 말한다(言自相置立, 而心安泰無恐懼)”라고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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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淮는 어떤 곳에는 ‘匯’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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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集解』에 인용된 應劭에 따르면, 당시 남월을 치려면 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대선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樓船이라고 한 것은 배 위에 망루를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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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여가(呂嘉), 장삼(莊參), 장삼, 장삼, 한천추(韓千秋), 여가, 여가, 한천추, 규악(摎樂), 여가, 진왕(秦王), 명왕(明王), 술양후(術陽侯), 건덕(建德), 한천추, 한천추, 한천추, 한천추(韓千秋), 한연년(韓延年), 성안후(成安侯), 규악(摎樂), 규악, 광덕(廣德), 용후(龒侯), 여가(呂嘉), 건덕(建德)
지명
한(漢), 협현(郟縣), 제북국(濟北國), 월나라, 남월, , , 장안(長安), , 창오(蒼梧), 남월, 번우성(番禺城), 남월, , 장강(長江), 회수(淮水)
서명
춘추(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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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呂嘉)가 반란을 일으키고 건덕(建德)을 왕으로 세우자 천자가 토벌을 명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5_002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