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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왕과 왕태후, 한의 사자가 여가(呂嘉)를 주살하려는 모의가 실패한 뒤 여가가 반란을 꾀함

  • 국가
    남월(南粤)
[남월의] 상(相)주 001
각주 001)
相 : 앞에서 漢이 ‘丞相 呂嘉’에게 ‘銀印’을 하사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相’이라 하여 丞相을 相이라고 하였으니, 호칭도 고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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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呂嘉)는 나이가 많았는데, 삼대에 걸쳐 왕을 모셨기 때문에 그의 종족 중에는 벼슬길에 나가 장리(長吏)가 된 자가 70여 명이나 되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왕의 딸들과 결혼을 했으며 여자들은 왕의 자제들이나 종실과 혼인을 맺었다. 창오(蒼梧) 주 002
각주 002)
蒼梧 : 前漢 呂后 5년(전183)에 南越王 趙佗가 族弟 趙光을 蒼梧王에 임명하자 梧州에서 蒼梧王城을 흥건하였다. 前漢 元鼎 6년(전111)에 武帝가 嶺南을 정복한 뒤 廣信縣을 설치하자 蒼梧王城은 廣信縣城이 되었다. 廣信이라는 명칭은 『漢書』 「郡國志」에 의하면, “縣의 이름이 廣信인 것은 처음으로 粤땅을 개척하여 널리 [황제의] 은혜와 신의를 알린다”는 의미에 붙여졌다. 漢武帝는 南越國을 평정한 뒤 南海, 蒼梧 등 9군을 설치하였고 蒼梧郡에는 廣信 등 10縣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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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秦王) 주 003
각주 003)
秦王 : 顔師古注에 인용된 孟康에 따르면, “창오와 월 가운데 왕으로 스스로 진왕을 자처한 자이다. 連이란 혼인관계를 말한다(蒼梧, 越中王, 自名爲秦王 連, 親婚也)”라고 하였다. 또 晉灼에 따르면, “진왕은 바로 아래에서 말한 조광이다. 조씨는 본래 진과 동성이기 때문에 진왕이라고 한 것이다(秦王卽下趙光也. 趙本與秦同姓, 故曰秦王)”라고 하였다. 하지만 『史記會注考證』에 인용된 周壽昌에 따르면, “趙光이 창오지역에 근거하면서 멋대로 秦王을 칭한 것이지 秦과 趙氏가 同姓이기 때문이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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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 인척이었다. 나라 안에서 그의 신망은 매우 두터워 월나라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목이 되어 일하는 자들이 많아서 민심을 얻는 것이 왕을 넘어서고 있었다. 왕이 한(漢)에 상서하려고 할 때마다 여가는 여러 번 그를 만류했으나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여가는] 역심을 품고 자주 병을 핑계로 한나라 사신을 접견하지 않았다. 사자들은 모두 여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형세가 아직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왕과 왕태후 역시 여가 등이 먼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에주 004
각주 004)
『史記』에는 이 구절 다음에 ‘乃置酒’ 세 글자, 즉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漢書』에는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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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사자의 힘을 빌려[介漢使者權]주 005
각주 005)
介漢使者權 : 顔師古는 ‘介’를 ‘恃’, ‘믿고 의지하다’로 해석하였다. 『集解』에 인용된 韋昭도 “사자를 방패삼아 믿고” 정도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介’의 의미에 대해 『索隱』은 韋昭의 해석을 일단 긍정하면서도, 西晉시대 虞喜가 지은 『志林』에는 ‘介’를 ‘因’으로 보아 “사자를 매개로 임의대로 여가를 죽이려 하다”로 해석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索隱』은 虞喜의 해석도 일리가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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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등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하여 사자를 초청하고 대신들은 모두 곁에 앉아 술을 마셨다.주 006
각주 006)
『史記』에는 이 술자리를 생생하게 “사자들은 모두 동쪽을 향해 자리를 잡고 태후는 남쪽을 향해, 왕은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았다. 승상 여가와 대신들은 모두 서쪽을 향해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使者皆東鄕, 太后南鄕, 王北鄕, 相嘉․大臣皆西鄕, 侍坐飮)”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漢書』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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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呂嘉)의 동생은 장군이어서 병사를 이끌고 궁 밖에 머물고 있었다. 술이 한바퀴 돌자 태후가 여가에게 말하였다. “남월한나라에 내속하게 되면 나라에 이익이 될 터인데, 상군(相君)주 007
각주 007)
『史記』에는 ‘相’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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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는 어찌 그리 불편해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오?”라고 하여 한나라 사자들을 격노하게 하였다. 한나라 사자들은 머뭇거리며 서로 미루다가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여가(呂嘉)는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嘉見耳目非是]주 008
각주 008)
‘嘉見耳目非是’ : 顔師古는 이에 대해 “평상시와 다른 것(異於常也)”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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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태후는 화를 내며 직접 창으로 여가를 찌르려[鏦]주 009
각주 009)
‘鏦’을 顔師古는 “쳐서 찌르다(鏦謂撞刺之也)”라고 해석하였다. 『集解』 역시 韋昭를 인용하여 치다[撞]로 해석하고 있다. 『索隱』은 그 음이 칠(七)과 흉(凶)의 반절, 즉 총이라 하였고, 「吳王濞傳」의 “鏦殺吳王”과 같은 의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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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나 왕이 태후를 저지하였다. 여가는 마침내 [궁을] 빠져나와 동생 휘하의 병졸들을 무장시켜 [방어하며] 집으로 돌아갔다[介其弟兵就舍].주 010
각주 010)
介其弟兵就舍 : 顔師古注에 인용된 李奇는 “개는 입다(介, 被也)”로 해석하였고, 顔師古는 “개는 갑옷이다. 갑옷을 입고 스스로 방어한 것이다. 제병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동생인 장군이 밖에서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을 말한다(介, 甲也, 被甲而自衛也, 弟兵卽上所云弟將卒居外者)”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史記』에는 ‘介’가 ‘分’으로 되어 있다. 『索隱』은 이것을 ‘동생의 병사 일부를 거느리고 집으로 가다’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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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가는 병을 핑계로 왕과 사자들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밀리에 대신들과 반란을 꾀하였다. 왕은 본래 여가를 죽일 마음이 없었고, 여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개월 동안은 조용히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주 011
각주 011)
『史記』에는 “太后有淫行, 國人不附(그 후에도 태후의 음란한 행위는 계속되어 남월국 사람들이 더 이상 그녀를 믿지 않게 되자)”라는 구절이 있는데, 『漢書』에는 생략되었다. 문맥상 앞 구절과 중복이 되어 『漢書』처럼 생략해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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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가 독자적으로 여가 등을 없애려고 해도 세력이 약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각주 001)
    相 : 앞에서 漢이 ‘丞相 呂嘉’에게 ‘銀印’을 하사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相’이라 하여 丞相을 相이라고 하였으니, 호칭도 고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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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蒼梧 : 前漢 呂后 5년(전183)에 南越王 趙佗가 族弟 趙光을 蒼梧王에 임명하자 梧州에서 蒼梧王城을 흥건하였다. 前漢 元鼎 6년(전111)에 武帝가 嶺南을 정복한 뒤 廣信縣을 설치하자 蒼梧王城은 廣信縣城이 되었다. 廣信이라는 명칭은 『漢書』 「郡國志」에 의하면, “縣의 이름이 廣信인 것은 처음으로 粤땅을 개척하여 널리 [황제의] 은혜와 신의를 알린다”는 의미에 붙여졌다. 漢武帝는 南越國을 평정한 뒤 南海, 蒼梧 등 9군을 설치하였고 蒼梧郡에는 廣信 등 10縣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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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秦王 : 顔師古注에 인용된 孟康에 따르면, “창오와 월 가운데 왕으로 스스로 진왕을 자처한 자이다. 連이란 혼인관계를 말한다(蒼梧, 越中王, 自名爲秦王 連, 親婚也)”라고 하였다. 또 晉灼에 따르면, “진왕은 바로 아래에서 말한 조광이다. 조씨는 본래 진과 동성이기 때문에 진왕이라고 한 것이다(秦王卽下趙光也. 趙本與秦同姓, 故曰秦王)”라고 하였다. 하지만 『史記會注考證』에 인용된 周壽昌에 따르면, “趙光이 창오지역에 근거하면서 멋대로 秦王을 칭한 것이지 秦과 趙氏가 同姓이기 때문이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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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史記』에는 이 구절 다음에 ‘乃置酒’ 세 글자, 즉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漢書』에는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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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介漢使者權 : 顔師古는 ‘介’를 ‘恃’, ‘믿고 의지하다’로 해석하였다. 『集解』에 인용된 韋昭도 “사자를 방패삼아 믿고” 정도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介’의 의미에 대해 『索隱』은 韋昭의 해석을 일단 긍정하면서도, 西晉시대 虞喜가 지은 『志林』에는 ‘介’를 ‘因’으로 보아 “사자를 매개로 임의대로 여가를 죽이려 하다”로 해석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索隱』은 虞喜의 해석도 일리가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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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史記』에는 이 술자리를 생생하게 “사자들은 모두 동쪽을 향해 자리를 잡고 태후는 남쪽을 향해, 왕은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았다. 승상 여가와 대신들은 모두 서쪽을 향해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使者皆東鄕, 太后南鄕, 王北鄕, 相嘉․大臣皆西鄕, 侍坐飮)”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漢書』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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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史記』에는 ‘相’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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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嘉見耳目非是’ : 顔師古는 이에 대해 “평상시와 다른 것(異於常也)”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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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鏦’을 顔師古는 “쳐서 찌르다(鏦謂撞刺之也)”라고 해석하였다. 『集解』 역시 韋昭를 인용하여 치다[撞]로 해석하고 있다. 『索隱』은 그 음이 칠(七)과 흉(凶)의 반절, 즉 총이라 하였고, 「吳王濞傳」의 “鏦殺吳王”과 같은 의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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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介其弟兵就舍 : 顔師古注에 인용된 李奇는 “개는 입다(介, 被也)”로 해석하였고, 顔師古는 “개는 갑옷이다. 갑옷을 입고 스스로 방어한 것이다. 제병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동생인 장군이 밖에서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을 말한다(介, 甲也, 被甲而自衛也, 弟兵卽上所云弟將卒居外者)”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史記』에는 ‘介’가 ‘分’으로 되어 있다. 『索隱』은 이것을 ‘동생의 병사 일부를 거느리고 집으로 가다’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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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史記』에는 “太后有淫行, 國人不附(그 후에도 태후의 음란한 행위는 계속되어 남월국 사람들이 더 이상 그녀를 믿지 않게 되자)”라는 구절이 있는데, 『漢書』에는 생략되었다. 문맥상 앞 구절과 중복이 되어 『漢書』처럼 생략해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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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여가(呂嘉), 진왕(秦王), 여가, 여가, 여가, 여가, 여가, 여가(呂嘉), 여가, 여가(呂嘉), 여가, 여가, 여가, 여가, 여가, 여가
지명
남월, 창오(蒼梧), 월나라, 한(漢), 한나라, 한나라, 남월,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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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태후, 한의 사자가 여가(呂嘉)를 주살하려는 모의가 실패한 뒤 여가가 반란을 꾀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5_0020_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