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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멸망한 후 조타(趙佗)가 남월왕에 즉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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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월(南粤)
남월왕(南粤)주 001
각주 001)
南粤 : 粤은 越과 통용자. 古音은 Wut, Wat, Wet으로 읽었다. 고대 강남 토착인들은 ‘人’이라는 말을 이렇게 발음하였다. 越은 즉 ‘人’이라는 뜻이다(黃現璠, 『壯族通史』, 廣西民族出版社, 1988). 『史記』에는 南越로 되어 있다. 원래는 族名이었는데, 뒤에 趙佗가 세운 國名되었다. 그 강역은 현재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郡, 南海郡, 象郡 3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고, 郡治는 番禺城이었다. 현재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 越秀區는 南海縣과 番禺縣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隋 開皇 10년에 番禺縣을 南海縣에 통합하였다가 唐 長安 3년에 다시 番禺縣을 회복시켰다. 이후 五代十國과 宋代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明代 鹿步巡檢司의 관할에 속하면서 같은 행정소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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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타(趙佗) 주 002
각주 002)
趙佗 : 『史記』에는 ‘尉佗’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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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진정(眞定)주 003
각주 003)
眞定 : 顔師古 『漢書』注(이하 顔師古注로 약칭)에 따르면 “眞定은 본래 趙나라의 縣이었다(眞定, 本趙國之縣也)”라고 한다. 또 『史記索隱』(이하 『索隱』으로 약칭)에 인용된 韋昭에 따르면, 처음에는 郡名이었는데, 뒤에 縣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前漢 초에 설치되었고 常山郡에 속하였다. 漢武帝 元鼎4년(전113)에 眞定國으로 바뀌었다. 治所는 현재 河北省 正定 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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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성은 조씨(趙氏)이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양월(揚粵) 주 004
각주 004)
揚粵 : 顔師古注에 따르면, 원래 揚州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揚粤이라 한다. 그런데 『史記』에는 楊越로 되어 있고 이에 대해 『史記正義』는 禹의 九州 중 楊州에 南越이 속해 있기 때문이라 하고 있는데(夏禹九州本屬楊州, 故云楊越), 楊州란 명칭은 『尙書』 「禹貢」에 “淮海惟楊州”라고 처음 보인다. 현재의 淮水, 黄海, 長江에 걸친 江蘇省, 安徽省, 江西省, 浙江省, 福建省 등을 포함한 지역이다. 현재의 揚州도 포함하는 지역이지만 똑같은 지역이라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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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략하여 평정하고 계림군(桂林郡) 주 005
각주 005)
桂林郡 : 秦始皇 33년(전214)에 설치되었다. 현재 廣西 대부분 지역을 포괄한다. 郡의 治所는 布山縣(현재의 廣西省 貴港市) 혹은 현재의 廣西省 桂平市 西南이라고 하여 불분명하다. 『索隱』은 『漢書』「地理志」(이하 「地理志」로 약칭)를 인용하여 桂林郡이 武帝 때 鬱林郡으로 개명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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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군(南海郡) 주 006
각주 006)
南海郡 : 秦始皇 33년(전214)에 설치되었다. 4개의 현(番禺, 四會, 博羅, 龍川) 또는 6개 현(番禺, 四會, 博羅, 龍川, 冽江, 揭揚)을 관할했다고 전한다. 郡의 治所는 番禺(현재의 廣州)였으며, 주요 관할지역은 현재 廣東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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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군(象郡) 주 007
각주 007)
象郡 : 『索隱』에 따르면, 秦始皇 33년(전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漢 昭帝 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地理志」)이 있다(李龍章, 「秦汉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재의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의 越南 維州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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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였다. 이곳에 죄를 지은 자들을 천사시켜[以適徙民]주 008
각주 008)
以適徙民 : 『史記』에는 ‘謫民’으로 되어 있다. 顔師古注에 따르면, 원문의 ‘適’은 ‘謫’, 즉 유배를 보내다는 의미로 읽어야 하므로 죄를 지은 자들을 월나라 땅에 옮겨 살게 해서 그 땅의 토착민과 서로 섞여 살게 하였다(適讀曰謫. 謫有罪者, 徙之於越地, 與其土人雜居)로 해석된다. 秦漢代 죄를 지어 형을 받은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거나 築城 등 노역에 동원하는 일이 많았는데, 秦始皇이 만리장성 축조에 刑徒를 동원한 일이나 漢武帝 때 이광리에게 죄수를 징발하여 대완을 정벌한 일(『漢書』 「武帝纪」, “遣貳師將軍 李廣利發天下讁民西征大宛.” 颜师古注, “庶人之有罪讁者也.”)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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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나라 사람과 섞여 살게 하였다. 그러기를 어언 13년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세가 즉위했을 즈음주 009
각주 009)
『史記』에는 “以謫徙民, 與越雜處十三歲. 佗, 秦時用爲南海龍川令. 至二世時”라고 하여 ‘十三歲’와 ‘至二世時’ 사이에 ‘佗, 秦時用爲南海龍川令’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漢書』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고, 中華書局 標點本에서는 ‘十三歲, 至二世時’로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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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위(南海尉)주 100
각주 100)
南海尉 : 『史記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이때까지는 아직 都尉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都尉로 개칭된 것은 前漢 景帝 中元 2년(전14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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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던 임오(任囂) 주 011
각주 011)
任囂 : 任囂의 ‘囂’자에는 ‘떠들썩하다’는 의미의 ‘효’와 ‘거만하다’는 의미의 ‘오’라는 두 가지 음이 있다. 이에 대해 顔師古注는 “음이 敖(囂音敖)”라고 하였기에 이것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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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해서 당시 용천령(龍川令)주 012
각주 012)
龍川令 : 顔師古注는 “龍川은 南海郡 소속의 縣으로, 현재 순주(龍川, 南海之縣也, 卽今之循州)”라고 하였다.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史記正義』에 인용)에,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龍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史記』「主父偃傳」에 따르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閩越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전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권34) ‘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龍川故城在縣東北水路一百七十五里, 秦龍川縣也. 秦南海尉任囂疾, 召龍川令趙佗, 授之以政, 即此處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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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타(趙佗)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들으니 진승(陳勝) 주 013
각주 013)
陳勝 : 陳涉을 말하며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의 영수이다. 司馬遷은 이를 특별히 世家에 포함시켜 18번째 「陳涉世家」를 만들었다. 진섭은 자립해서 왕이라 칭한 것은 불과 6개월뿐이었고 영토도 부여받지 못했지만 이처럼 司馬遷이 世家에 포함시킨 것은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漢初 공신들인 彭越, 黥布, 韓信 등을 世家에서 제외하고 진섭을 세가에 포함시킨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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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오.주 014
각주 014)
『史記』에는 이 구절 다음에 “秦爲無道, 天下苦之, 項羽․劉季․陳勝․吳廣等州郡各共興軍聚衆, 虎爭天下, 中國擾亂, 未知所安”라는 구절이 있는데, 『漢書』에서 생략되어 있다. ‘聞陳勝等作亂’ 이하 50자의 내용은 중복되고 있어 『漢書』에는 ‘聞陳勝等作亂, 豪傑叛秦相立’ 12字로 수정하고 있다.(瀧川資言, 『史記會注考證』, 北岳文藝出版社, 1998년, 제9卷 「南越列傳」, 4649쪽. 이하 『史記會注考證』의 인용은 책명과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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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호걸들은 진(秦)에게서 등을 돌려 잇달아 독립하고 있소. 남해군(南海郡)은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치우쳐 있다 하나, 도적떼 같은 저들의 군대가 언제 이곳까지 쳐들어올지 알 수가 없소. 그래서 나는 군사를 일으켜 신도(新道)주 015
각주 015)
新道 : 顔師古注에 따르면, “진이 개척한 월로 통하는 도로(秦所開越道也)”이다. 즉 秦이 嶺南에 개척한 南海郡 등 3郡과 연결된 도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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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끊고 스스로 방비하여 제후들이 일으킨 변고에 대비코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이 들어 이처럼 깊어지게 되었소. 우리 번우(番禺)는 뒤로는 험한 산세를 등지고 있고[負山險阻],주 016
각주 016)
負山險阻 : 顔師古注는 “背는 등지다(負, 偝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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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 동서로 수천 리에 걸쳐 뻗어 있소.주 017
각주 017)
『史記』에는 『漢書』의 ‘南北’이 ‘南海’로 되어 있고 구두가 ‘且番禺負山險, 阻南海, 東西數千里’라고 되어 있어 『漢書』와는 다르다. 周壽昌에 따르면, 南北이라고 하면 ‘南北東西數千里’가 되어 南越의 강역에 부합되지 않는다(『史記會注考證』, 46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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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적지 않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고 있으니 이 또한 한 주(州)주 018
각주 018)
州 : 여기에서 말하는 ‘州’는 이른바 천하의 통치지역을 상징하는 九州의 하나를 의미한다. 九州의 9는 실제 9개의 州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영역을 총칭한 개념이다. 예를 들면 前漢 武帝 때 전통적인 『禹貢』의 九州에 새로이 편입된 남월지역에 交阯자사를 두고 雍州를 나눠 朔方자사를 두는 등 천하를 13州로 구획하고 州刺史를 설치한 데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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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세울 만하오. 군에 있는 장리(長吏)주 019
각주 019)
長吏 : 지위가 높은 관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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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는 이런 일을 함께 의논할 수가 없어 공을 불러 이야기하는 것이오.” 그리고는 조타에게 조서를 주어[被佗書]주 101
각주 101)
被佗書 : 『集解』와 『索隱』 모두 韋昭를 인용하여 ‘被之以書’ 즉 ‘조타에게 조서를 쓰게 하다’로 해석하였으나 顔師古注는 “被, 加也” 즉 ‘조타에게 조서를 주다’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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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위(南海尉)의 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주 021
각주 021)
『索隱』에 인용된 服虔에 따르면, 任囂가 거짓으로 조서를 작성해서 南海尉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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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가 죽자 조타는 곧바로 횡포관(橫浦關)주 022
각주 022)
橫浦關 : 현재의 廣東省 南雄縣 동북에서 江西省 大餘縣 西南 大庾嶺 위에 있는 梅關을 말하며 秦關이라고도 한다. 대유령에서 횡포관으로 이어지는 關道는 江西와 廣東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이하 『中國歷史地名大辭典』으로 약칭) 『索隱』에 인용된 『南康記』에 따르면, 南野縣 大庾嶺 30 리에서 橫浦에 이르는 사이에 秦代 설치된 關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아래 지방 사람들은 이를 ‘塞上’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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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관(陽山關)주 023
각주 023)
陽山關 : 『索隱』에 인용된 「地理志」에 따르면, 揭陽郡에 陽山縣이 있는데, 이 縣 상류 백여 리쯤에 있다는 騎田嶺이 바로 陽山關이라고 한다. 현재의 廣東省 陽山 서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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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계관(湟谿關)주 024
각주 024)
湟谿關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황계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안사고주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 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 [南粵傳] 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실제로 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된다. 첫째, 지금 河南省 陳平縣 서쪽과 鄧縣 東越河이고, 둘째, 지금의 山西省 武鄕縣 서쪽이며, 셋째, 지금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이다. 남월과 관련해서는 세 번째가 가장 유력한데,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의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청대 전조망은 용천이 날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이하 『中國歷史地名大辭典』으로 약칭). 황수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는데, 첫째, 하남성 공의시 서쪽, 둘째, 洭水로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 셋째, 洛都水, 樂都水 또는 西寧河로 靑海省 동부의 황하 상류의 지류이다. 이중 남월과 비교적 근접한 것은 두 번째 洭水로 여기에서 말하는 湟谿關은 廣東 連州시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中國歷史地名大辭典』, 26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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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격문을 돌려 포고하기를, “도적떼 같은 군대가 장차 들이닥칠 터이니 빨리 도로를 끊고 병사들을 소집하여 각자 지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진(秦)이 임명한 관리들 [吏]주 025
각주 025)
吏 : 『史記』에는 長吏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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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법망에 얽어 죽여 없애고 자신의 일당을 수(守) 또는 가(假)로 삼았다[守假].주 026
각주 026)
守假 : 『史記』에는 ‘假守’로 되어 있고 『索隱』은 趙佗가 자기의 친당을 郡縣의 職 혹은 假守에 임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漢書』에는 ‘守假’로 되어 있고 顔師古는 “군현의 직무를 행하도록 하였는데, 혹은 守 혹은 假로 임명하다(令爲郡縣之職, 或守或假也)”로 해석하였다. 『史記會注考證』은 ‘假守’와 ‘守假’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보았다(『考證』, 4650쪽) 여기에서는 顔師古注를 따라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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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이 멸망하자 조타는 곧바로 계림군(桂林郡)상군(象郡)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스스로 남월 무왕(武王) 주 027
각주 027)
武王 : 『集解』에 인용된 韋昭는 살아서 ‘武’라는 호를 쓴 것은 옛 제도를 살피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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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즉위하였다.

  • 각주 001)
    南粤 : 粤은 越과 통용자. 古音은 Wut, Wat, Wet으로 읽었다. 고대 강남 토착인들은 ‘人’이라는 말을 이렇게 발음하였다. 越은 즉 ‘人’이라는 뜻이다(黃現璠, 『壯族通史』, 廣西民族出版社, 1988). 『史記』에는 南越로 되어 있다. 원래는 族名이었는데, 뒤에 趙佗가 세운 國名되었다. 그 강역은 현재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郡, 南海郡, 象郡 3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고, 郡治는 番禺城이었다. 현재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 越秀區는 南海縣과 番禺縣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隋 開皇 10년에 番禺縣을 南海縣에 통합하였다가 唐 長安 3년에 다시 番禺縣을 회복시켰다. 이후 五代十國과 宋代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明代 鹿步巡檢司의 관할에 속하면서 같은 행정소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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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趙佗 : 『史記』에는 ‘尉佗’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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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眞定 : 顔師古 『漢書』注(이하 顔師古注로 약칭)에 따르면 “眞定은 본래 趙나라의 縣이었다(眞定, 本趙國之縣也)”라고 한다. 또 『史記索隱』(이하 『索隱』으로 약칭)에 인용된 韋昭에 따르면, 처음에는 郡名이었는데, 뒤에 縣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前漢 초에 설치되었고 常山郡에 속하였다. 漢武帝 元鼎4년(전113)에 眞定國으로 바뀌었다. 治所는 현재 河北省 正定 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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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揚粵 : 顔師古注에 따르면, 원래 揚州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揚粤이라 한다. 그런데 『史記』에는 楊越로 되어 있고 이에 대해 『史記正義』는 禹의 九州 중 楊州에 南越이 속해 있기 때문이라 하고 있는데(夏禹九州本屬楊州, 故云楊越), 楊州란 명칭은 『尙書』 「禹貢」에 “淮海惟楊州”라고 처음 보인다. 현재의 淮水, 黄海, 長江에 걸친 江蘇省, 安徽省, 江西省, 浙江省, 福建省 등을 포함한 지역이다. 현재의 揚州도 포함하는 지역이지만 똑같은 지역이라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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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桂林郡 : 秦始皇 33년(전214)에 설치되었다. 현재 廣西 대부분 지역을 포괄한다. 郡의 治所는 布山縣(현재의 廣西省 貴港市) 혹은 현재의 廣西省 桂平市 西南이라고 하여 불분명하다. 『索隱』은 『漢書』「地理志」(이하 「地理志」로 약칭)를 인용하여 桂林郡이 武帝 때 鬱林郡으로 개명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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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南海郡 : 秦始皇 33년(전214)에 설치되었다. 4개의 현(番禺, 四會, 博羅, 龍川) 또는 6개 현(番禺, 四會, 博羅, 龍川, 冽江, 揭揚)을 관할했다고 전한다. 郡의 治所는 番禺(현재의 廣州)였으며, 주요 관할지역은 현재 廣東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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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象郡 : 『索隱』에 따르면, 秦始皇 33년(전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漢 昭帝 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地理志」)이 있다(李龍章, 「秦汉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재의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의 越南 維州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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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以適徙民 : 『史記』에는 ‘謫民’으로 되어 있다. 顔師古注에 따르면, 원문의 ‘適’은 ‘謫’, 즉 유배를 보내다는 의미로 읽어야 하므로 죄를 지은 자들을 월나라 땅에 옮겨 살게 해서 그 땅의 토착민과 서로 섞여 살게 하였다(適讀曰謫. 謫有罪者, 徙之於越地, 與其土人雜居)로 해석된다. 秦漢代 죄를 지어 형을 받은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거나 築城 등 노역에 동원하는 일이 많았는데, 秦始皇이 만리장성 축조에 刑徒를 동원한 일이나 漢武帝 때 이광리에게 죄수를 징발하여 대완을 정벌한 일(『漢書』 「武帝纪」, “遣貳師將軍 李廣利發天下讁民西征大宛.” 颜师古注, “庶人之有罪讁者也.”)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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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史記』에는 “以謫徙民, 與越雜處十三歲. 佗, 秦時用爲南海龍川令. 至二世時”라고 하여 ‘十三歲’와 ‘至二世時’ 사이에 ‘佗, 秦時用爲南海龍川令’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漢書』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고, 中華書局 標點本에서는 ‘十三歲, 至二世時’로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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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南海尉 : 『史記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이때까지는 아직 都尉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都尉로 개칭된 것은 前漢 景帝 中元 2년(전14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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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任囂 : 任囂의 ‘囂’자에는 ‘떠들썩하다’는 의미의 ‘효’와 ‘거만하다’는 의미의 ‘오’라는 두 가지 음이 있다. 이에 대해 顔師古注는 “음이 敖(囂音敖)”라고 하였기에 이것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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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龍川令 : 顔師古注는 “龍川은 南海郡 소속의 縣으로, 현재 순주(龍川, 南海之縣也, 卽今之循州)”라고 하였다.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史記正義』에 인용)에,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龍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史記』「主父偃傳」에 따르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閩越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전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권34) ‘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龍川故城在縣東北水路一百七十五里, 秦龍川縣也. 秦南海尉任囂疾, 召龍川令趙佗, 授之以政, 即此處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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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陳勝 : 陳涉을 말하며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의 영수이다. 司馬遷은 이를 특별히 世家에 포함시켜 18번째 「陳涉世家」를 만들었다. 진섭은 자립해서 왕이라 칭한 것은 불과 6개월뿐이었고 영토도 부여받지 못했지만 이처럼 司馬遷이 世家에 포함시킨 것은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漢初 공신들인 彭越, 黥布, 韓信 등을 世家에서 제외하고 진섭을 세가에 포함시킨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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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史記』에는 이 구절 다음에 “秦爲無道, 天下苦之, 項羽․劉季․陳勝․吳廣等州郡各共興軍聚衆, 虎爭天下, 中國擾亂, 未知所安”라는 구절이 있는데, 『漢書』에서 생략되어 있다. ‘聞陳勝等作亂’ 이하 50자의 내용은 중복되고 있어 『漢書』에는 ‘聞陳勝等作亂, 豪傑叛秦相立’ 12字로 수정하고 있다.(瀧川資言, 『史記會注考證』, 北岳文藝出版社, 1998년, 제9卷 「南越列傳」, 4649쪽. 이하 『史記會注考證』의 인용은 책명과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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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新道 : 顔師古注에 따르면, “진이 개척한 월로 통하는 도로(秦所開越道也)”이다. 즉 秦이 嶺南에 개척한 南海郡 등 3郡과 연결된 도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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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負山險阻 : 顔師古注는 “背는 등지다(負, 偝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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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史記』에는 『漢書』의 ‘南北’이 ‘南海’로 되어 있고 구두가 ‘且番禺負山險, 阻南海, 東西數千里’라고 되어 있어 『漢書』와는 다르다. 周壽昌에 따르면, 南北이라고 하면 ‘南北東西數千里’가 되어 南越의 강역에 부합되지 않는다(『史記會注考證』, 46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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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州 : 여기에서 말하는 ‘州’는 이른바 천하의 통치지역을 상징하는 九州의 하나를 의미한다. 九州의 9는 실제 9개의 州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영역을 총칭한 개념이다. 예를 들면 前漢 武帝 때 전통적인 『禹貢』의 九州에 새로이 편입된 남월지역에 交阯자사를 두고 雍州를 나눠 朔方자사를 두는 등 천하를 13州로 구획하고 州刺史를 설치한 데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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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長吏 : 지위가 높은 관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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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1)
    被佗書 : 『集解』와 『索隱』 모두 韋昭를 인용하여 ‘被之以書’ 즉 ‘조타에게 조서를 쓰게 하다’로 해석하였으나 顔師古注는 “被, 加也” 즉 ‘조타에게 조서를 주다’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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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索隱』에 인용된 服虔에 따르면, 任囂가 거짓으로 조서를 작성해서 南海尉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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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橫浦關 : 현재의 廣東省 南雄縣 동북에서 江西省 大餘縣 西南 大庾嶺 위에 있는 梅關을 말하며 秦關이라고도 한다. 대유령에서 횡포관으로 이어지는 關道는 江西와 廣東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이하 『中國歷史地名大辭典』으로 약칭) 『索隱』에 인용된 『南康記』에 따르면, 南野縣 大庾嶺 30 리에서 橫浦에 이르는 사이에 秦代 설치된 關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아래 지방 사람들은 이를 ‘塞上’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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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陽山關 : 『索隱』에 인용된 「地理志」에 따르면, 揭陽郡에 陽山縣이 있는데, 이 縣 상류 백여 리쯤에 있다는 騎田嶺이 바로 陽山關이라고 한다. 현재의 廣東省 陽山 서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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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湟谿關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황계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안사고주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 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 [南粵傳] 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실제로 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된다. 첫째, 지금 河南省 陳平縣 서쪽과 鄧縣 東越河이고, 둘째, 지금의 山西省 武鄕縣 서쪽이며, 셋째, 지금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이다. 남월과 관련해서는 세 번째가 가장 유력한데,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의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청대 전조망은 용천이 날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이하 『中國歷史地名大辭典』으로 약칭). 황수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는데, 첫째, 하남성 공의시 서쪽, 둘째, 洭水로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 셋째, 洛都水, 樂都水 또는 西寧河로 靑海省 동부의 황하 상류의 지류이다. 이중 남월과 비교적 근접한 것은 두 번째 洭水로 여기에서 말하는 湟谿關은 廣東 連州시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中國歷史地名大辭典』, 26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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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吏 : 『史記』에는 長吏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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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守假 : 『史記』에는 ‘假守’로 되어 있고 『索隱』은 趙佗가 자기의 친당을 郡縣의 職 혹은 假守에 임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漢書』에는 ‘守假’로 되어 있고 顔師古는 “군현의 직무를 행하도록 하였는데, 혹은 守 혹은 假로 임명하다(令爲郡縣之職, 或守或假也)”로 해석하였다. 『史記會注考證』은 ‘假守’와 ‘守假’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보았다(『考證』, 4650쪽) 여기에서는 顔師古注를 따라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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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武王 : 『集解』에 인용된 韋昭는 살아서 ‘武’라는 호를 쓴 것은 옛 제도를 살피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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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조타(趙佗), 임오(任囂), 조타(趙佗), 진승(陳勝), 조타, 임오, 조타, 조타, 무왕(武王)
지명
진(秦), 양월(揚粵), 계림군(桂林郡), 남해군(南海郡), 상군(象郡), 월나라, 진(秦), 남해군(南海郡), 번우(番禺), 진(秦), ,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남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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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멸망한 후 조타(趙佗)가 남월왕에 즉위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5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