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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웅이 흉노를 복속하기 힘든 일에 대해 설명함

 
  • 국가흉노(匈奴)
지난 시기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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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武帝 때를 말한다.

라고 해서 어찌 헤아릴 수 없는 경비를 쏟아넣고 죄 없는 사람을 부리는 것을 즐기며, 봉화를 올려 적의 동태를 살피는 북녘 땅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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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서는 “狼望之北”이다. 顔師古는 “狼望”이 匈奴의 지명이라 했지만, 胡三省은 변방의 사람들이 봉화를 올리는 것을 “狼煙”이라 말하므로, “狼望”이란 그 “狼煙”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는 지역을 뜻한다고 하였다(『資治通鑑』 권34 : 1104). 胡三省의 주석을 따라 해석하였다.

에서 마음이 편하였겠습니까? 전력을 기울여 일하지 않은 사람은 오랫동안 편안할 수 없고, 잠시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영구한 안녕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백만의 군대를 굶주린 호랑이의 입 안으로 몰아넣고, 부고(府庫)의 재물을 옮겨 노산(盧山)의 구렁을 메우고도 참고 후회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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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喙”는 顔師古에 따르면 ‘입’을 말한다. 백만의 군대를 짐승의 입으로 몰아넣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盧山”은 匈奴 안의 산을 말한다고 하였다.

본시(本始) 연간(전73∼전70) 초기에 흉노는 불순한 마음을 품고 오손국을 침략하여 [오손으로 시집간 의] 공주를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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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가 烏孫國의 公主를 빼앗으려 한 것은 漢과 烏孫의 관계를 끊기 위해서였다. 漢은 武帝 元封 6년(전105)에 江都王建의 딸 劉細君을 公主로 삼아 烏孫의 昆莫에게 시집보냈다. 烏孫 昆莫은 공주를 右夫人으로 삼았다. 이후 細君이 사망하자, 漢은 다시 楚王 戊의 손녀인 解憂를 公主로 삼아 시집보냈다. 그런데 昭帝 때 公主는 上書하여 匈奴가 車師國과 동맹을 맺고 烏孫國을 침입한다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宣帝가 즉위한 뒤, 다시 上書하여 匈奴가 大軍을 내어 烏孫을 침략하였으며, 公主를 탈취하여 烏孫國과 漢의 관계를 단절시키려 한다며, 재차 구원병을 요청하였다(『漢書』 권96下 「西域傳」 : 3904∼3905).

이에 [은] 다섯 장수와 군사 15만을 징발하여 그 [오손의] 남쪽에서 말 타고 사냥하게 하고, 장라후(長羅侯) [상혜(常惠)]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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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始 2년(전72)의 匈奴 정벌에서 돌아온 뒤, 常惠는 長羅侯로 封해졌다(『漢書』 권94상 「匈奴傳」上 : 3786).

는 오손의 기병 5만으로 그 서쪽을 진동시켰는데, 모두 원래 약속했던 지역까지 갔다가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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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는 “至質”이라고 되어 있는데, 顔師古는 “質”은 “信”이며, 기약한 장소를 말한다고 하였다. 현대 한어본에서는 원래 정한 기한 안에 돌아왔다고 해석하였는데(安平秋, 2004 : 1902), 여기서는 顔師古의 해석에 따랐다.

돌아왔습니다.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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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2년(전72) 한은 關東 지역의 ‘輕銳士’를 대거 징발하고, 郡國의 吏 三百石 가운데 강건하며 말타기 활쏘기에 능한 사람을 군인으로 선발하였다. 그리고 御史大夫 田廣明을 祁連將軍으로 삼고 4만여 기를 이끌고 西河로 출동하고, 度遼將軍 范明友는 3만여 기를 이끌고 張掖으로 나가고, 前將軍 韓增은 3만여 기를 이끌고 雲中으로 나가고, 後將軍 趙充國은 蒲類將軍으로 삼아 3만여 기를 이끌고 酒泉으로 나가고, 雲中太守 田順은 虎牙將軍으로 삼아 3만여 기를 이끌고 五原으로 각각 나가도록 하였다. 모두 5명의 장군이 10여만의 기병을 이끌고 각각 2천여 리 가량 出塞하였다. 또한 校尉 常惠는 出使하여 公主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가 烏孫의 西域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烏孫의 昆彌도 스스로 翕侯 이하 5만여의 기병을 이끌고 西方으로부터 匈奴로 침입하였다. 그래서 다섯 將軍과 함께 무릇 20여만의 軍衆을 이루게 되었다(『漢書』 권94상 「匈奴傳」上 : 3785).

이 당시 전리품으로 얻은 것이 거의 없었고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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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는 漢의 군대가 대거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약자가 다투어 도주하고, 畜産을 몰아 멀리 달아났다. 그래서 획득한 전리품은 적었다. 度遼將軍 范明友는 포로 700餘 級을 베고, 말과 소, 양 만여 마리를 얻었다. 前將軍 韓增은 포로의 목 100여 급과 말, 소, 양 2천여 마리를 얻었다. 蒲類將軍 趙充國은 單于의 使者 蒲陰王 이하 300여 급의 목을 얻고, 말, 소, 양 7천여 마리를 노획했다(『漢書』 권94상 「匈奴傳」上 : 3785∼3786).

단지 무위(武威)를 떨쳐 보여 의 군대가 마치 번개와 바람처럼 [무섭고 빠르다는 것을] 밝게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비록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만 그럼에도 두 명의 장군을 죽여야 했습니다.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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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의 장군 가운데, 祁連將軍 田廣明과 虎牙將軍 田順을 자살시킨 것을 말한다. 田廣明은 雞秩山에 匈奴의 군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앞에서 군대를 돌려 퇴각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또한 田順은 기한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노획물을 거짓으로 부풀렸다(『漢書』권94상 「匈奴傳」上 : 3786).

그래서 북적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잘 수 없는 것입니다.
원강(元康)과 신작(神爵) 연간(전65∼전58)에 이르러 크나큰 덕화가 성스럽게 밝고, 커다란 은혜가 두루 미쳤습니다. [주010]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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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 神爵 2년(전60) 가을, 匈奴 日逐王 先賢撣이 來降하였고, 처음 鄭吉을 都護로 임명하여 日逐王을 맞이하고, (흉노의 요충지인) 車師國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해부터 흉노 선우는 名王을 보내 天子에게 봉헌하고 정월에 朝賀하였다(『漢書』 권8 「宣帝紀」(262) 참조).

그리고 흉노에서는 내란이 발생하여 다섯 명의 선우가 다투어 일어났습니다. 일축선우호한야선우가 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귀화하여, [주011]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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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 권34(1104)에 인용된 揚雄의 상소에는 “歸化”가 아닌 “歸死”로 되어 있고 胡三省은 그 의미를 “歸死命於漢也”라고 풀이하였다.

엎드려 기면서 [주012]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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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文』에 “扶伏”이란 ‘포복(匍匐)’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春秋左氏傳』 昭公21년조 “扶伏而擊之”(楊伯峻 : 1429)도 그러하다.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미(羈縻)할 뿐, [신첩(臣妾)으로 삼아]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뒤로 조알하려는 자들은 막지 않았고, [조알을] 원하지 않는 자들은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외국 [사람들]은 천성이 사납고 거칠며, [주013]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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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鷙”의 의미를 顔師古는 ‘어그러진다’는 뜻의 “佷”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佷’은 ‘很’과 통하는 말로 보인다. 예를 들어 『史記』 권7(「項羽本紀」 : 305)에 나오는 “很如羊”이란 말은 『漢書』 권31(「陳勝項籍傳」 : 1802)에는 “佷如羊”으로 되어 있다. 또한 很은 ‘패려궂다(언행이 거칠다)’, ‘말을 듣지 않는다’, ‘거스르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문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다고 본다.

생김새가 크고 건장하며, 완력과 용기를 믿고 의지하니, 선(善)한 [방법으로는] 교화하기가 어렵고, 무력을 동원해야 따르게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주01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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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隷”란 “附屬”한다는 말이다. “惡”이란 “威”를 말한다. 원문의 해석은 顔師古에 따랐다. 하지만 『資治通鑑』에서는 원문의 “隷”를 “肄”로 적고 胡三省은 “肄”가 “習”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구절을 “言易習於爲惡也”(쉽게 惡行을 익히게 된다)라고 풀이하였다[『資治通鑑』 권34 : 1104).

[그러니] 강제적인 방법으로는 굴복시키기가 어려우며 유화적인 방법으로는 [복종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미처 복속되지 않았을 때는 군대를 힘들게 부려 먼 곳까지 공격하느라, 나라를 기울여 재화를 탕진하고 죽어 넘어진 시체들에서 피가 흐르니, 굳센 [적의 진영]을 부수고 적을 쳐 없애기가 그처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에] 신복한 뒤에도 위로의 공물(供物)로 어루만져 따르게 하고, [사신들이] 교왕하며 만날 때에도 뇌물을 보내야 합니다. 위엄 있는 예의에 따라 거동 [주015]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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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 “威儀俯仰”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俯仰”은 ‘거동’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俯는 우러러보는 것이고, 仰은 굽어보는 행동으로 상반된 의미를 갖는데(『春秋左氏傳』 定公15년조), 두 글자가 합쳐지면, 一擧一動의 의미를 갖는다. “范睢 …… 先言外事, 以觀秦王之俯仰”에서의 “俯仰”도 같은 용례라고 할 수 있다(『史記』 권79 「范睢傳」 : 2409).

하면서 [신복을 유지하려면] 이처럼 구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 일찍이 대완(大宛)의 성을 도륙하고, [주016]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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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帝는 大宛에서 나는 명마를 얻고자 사신과 재물을 보냈으나, 大宛王이 따르지 않고 漢의 사신을 살해했다. 이에 武帝는 貳師將軍 李廣利로 하여금 군사 10여만을 이끌고 大宛을 정벌하게 했다. 宛人이 그의 왕을 목 베고, 말 3천 필을 보냈다(『漢書』 권96상 「西域傳」 : 3895). 武帝 太初 4년(전101) 貳師將軍 李廣利가 汗血馬을 얻어 귀환하였다(『漢書』 권6 「武帝紀」 : 202).

오환의 군영을 짓밟고, [주017]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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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의 冒頓선우가 東胡를 멸한 뒤, 나머지 부족들은 鮮卑山과 烏桓 등지에 산재하면서 匈奴의 지배를 받았다. 漢武帝 이래 匈奴가 쇠퇴하자 다시 그 세력이 커졌는데(『資治通鑑』 권23 : 769), 昭帝 치세기에 烏桓은 匈奴 單于의 무덤을 파헤쳐 冒頓單于에 대한 원한을 갚았다. 이에 匈奴가 大怒하여 烏桓을 공격 격파하였다. 이 사실을 안 大將軍 霍光은 度遼將軍 范明友에게 2만의 기병을 이끌고 匈奴 군대를 요격하도록 하였다. 范明友는 이후 재차 烏桓 지역에 진격하여 6천여 급을 베고, 3王의 머리를 가지고 귀환하였다(『後漢書』 권90 「烏桓傳」 : 2981).

[서남이(西南夷)] 고증(姑繒)의 울타리를 염탐하고, [주018]
각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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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姑繒”이 族名인지 地名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顔師古는 姑繒을 西南夷의 一種으로 보았다. 그런데 『漢書』 권7 「昭帝紀」에는 始元 1년(전86) “益州郡의 廉頭와 姑繒, 牂柯郡의 談指, 同並 등 24개의 邑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219)고 되어 있어 姑繒은 邑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蘇林은 이들이 모두 西南夷 別種의 이름이라고 하였고, 顔師古는 이 해석에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경과를 보면, 始元 1년 西南夷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漢은 水衡都尉를 보내 진압하였고, 3년 뒤, 다시 姑繒과 葉楡에서 반란이 일어나 益州太守를 살해하고 漢軍을 격파하자, 이듬해 軍正 王平 등이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때 蠻夷 5만여 급을 베고 畜産 10여만 마리를 획득하였다(『漢書』 권95 「西南夷傳」 : 3843).

[강족(羌族)] 탕저(蕩姐)의 마당을 밟고, [주019]
각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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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蕩姐”는 羌族에 속한 族名으로 보인다. “籍”은 “蹈”의 의미이다. 胡三省은 “元帝 永光 3년에 ‘隴西羌彡姐反’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어찌 이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蕩姐가 彡姐와 같다고 보았으며 그가 살던 시대에도 西羌에 그 姓이 남아 있다고 한다(『資治通鑑』 권28 : 920). 「馮奉世傳」에 따르면, 永光 2년(전42) 隴西 羌族의 彡姐 旁種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신료들은 당시 四方에 饑饉이 들어 아무런 대책을 내지 못하였다. 오직 右將軍 馮奉世가 4만의 군사를 동원하면 1개월 이내에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1만 2천의 군대를 가지고 出征하였다. 이후 출병한 군사의 수는 계속 증가되어 6만에 이르렀다(『漢書』 권79 「馮奉世傳」 : 3296∼3299).

조선의 깃발[旃]을 끊어 버리고, [주020]
각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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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艾”란 顔師古에 따르면 ‘끊어 버린다[絶]’는 의미이다. 武帝 元封 3년(전108) 한의 원정군이 조선왕 右渠의 목을 베고, 그 지역에 樂浪, 臨屯, 玄菟, 眞番 등 4郡을 설치하였다(『漢書』권6 「武帝紀」 : 194). 이 정벌군은 수군 5만을 거느린 樓船將軍 楊僕과 遼東의 육로를 이용한 左將軍 荀彘가 지휘하였다.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는 『漢書』 권95 「朝鮮傳」(3865∼3867) 참조.

양월(兩越)의 깃발[旗]은 뽑아버렸습니다. [주021]
각주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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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三省은 武帝 元鼎 6년(전111)의 일이라 하였다(『資治通鑑』 권34 : 1105). 元鼎 5년 秋 伏波將軍 路博德과 樓船將軍 楊僕 등이 南越國을 공격하고 이듬해 겨울 火攻으로 番禹를 함락시키고 反漢세력의 우두머리인 呂嘉를 생포하였다. 그 뒤 越地에 南海郡 등 9개 군을 설치하였다. 같은 해 가을 東越王 餘善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橫海將軍 韓說 등이 출격하여 진압하였다. 황제는 軍吏에게 조서를 내려 東越 지역의 民을 모두 江淮之間으로 옮기고 東越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였다(『漢書』 권95 「兩粤傳」 : 3857∼3863).

짧게는 열흘에서 한 달을 [주022]
각주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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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旬月之役”이다. “旬月”은 10일에서 1개월 사이의 비교적 짧은 기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後漢書』권54 「楊震傳」에 “旬月之閒, 並各拔擢”(1780)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章惠康 등의 『後漢書』 今注今譯本에는 “10일이나 혹은 1개월 간 공부를 한 뒤, 모두 각각 발탁되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章惠康․易孟醇, 1998 : 1453).

넘기지 않는 전투와 길게 걸리더라도 6개월 이상 걸리지 않는 [주023]
각주 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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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離二時”에 대하여 顔師古는 “離’가 “歷’이고 一時는 3개월의 기간을 뜻한다고 하였다.

고생만 하고서도, 반드시 [오랑캐의] 앞마당을 경작하고 그 마을을 비로 쓸어 낸 다음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니, 마치 구름이 사라지고 자리를 말아 올리는 것처럼 [그 과정이 신속하고 완전하여], 뒷날 재해가 발생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주024]
각주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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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菑”는 “災”의 古字이다.

[하지만] 오로지 북적만은 그러지 못했으니, 진실로 중국의 강고한 적입니다. [북을 제외한 동·서·남] 세 변방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현격하고 과거에 [황제들께서도 [주025]
각주 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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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帝들이란 표현은 현대 한어본에 따라 넣었다(安平秋, 2004 : 1903).

북방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셨으니, [폐하께서도] 가볍게 대해도 좋다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 001
漢武帝 때를 말한다.
주 002
원문에서는 “狼望之北”이다. 顔師古는 “狼望”이 匈奴의 지명이라 했지만, 胡三省은 변방의 사람들이 봉화를 올리는 것을 “狼煙”이라 말하므로, “狼望”이란 그 “狼煙”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는 지역을 뜻한다고 하였다(『資治通鑑』 권34 : 1104). 胡三省의 주석을 따라 해석하였다.
주 003
원문 “喙”는 顔師古에 따르면 ‘입’을 말한다. 백만의 군대를 짐승의 입으로 몰아넣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盧山”은 匈奴 안의 산을 말한다고 하였다.
주 004
匈奴가 烏孫國의 公主를 빼앗으려 한 것은 漢과 烏孫의 관계를 끊기 위해서였다. 漢은 武帝 元封 6년(전105)에 江都王建의 딸 劉細君을 公主로 삼아 烏孫의 昆莫에게 시집보냈다. 烏孫 昆莫은 공주를 右夫人으로 삼았다. 이후 細君이 사망하자, 漢은 다시 楚王 戊의 손녀인 解憂를 公主로 삼아 시집보냈다. 그런데 昭帝 때 公主는 上書하여 匈奴가 車師國과 동맹을 맺고 烏孫國을 침입한다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宣帝가 즉위한 뒤, 다시 上書하여 匈奴가 大軍을 내어 烏孫을 침략하였으며, 公主를 탈취하여 烏孫國과 漢의 관계를 단절시키려 한다며, 재차 구원병을 요청하였다(『漢書』 권96下 「西域傳」 : 3904∼3905).
주 005
本始 2년(전72)의 匈奴 정벌에서 돌아온 뒤, 常惠는 長羅侯로 封해졌다(『漢書』 권94상 「匈奴傳」上 : 3786).
주 006
원문에는 “至質”이라고 되어 있는데, 顔師古는 “質”은 “信”이며, 기약한 장소를 말한다고 하였다. 현대 한어본에서는 원래 정한 기한 안에 돌아왔다고 해석하였는데(安平秋, 2004 : 1902), 여기서는 顔師古의 해석에 따랐다.
주 007
본시 2년(전72) 한은 關東 지역의 ‘輕銳士’를 대거 징발하고, 郡國의 吏 三百石 가운데 강건하며 말타기 활쏘기에 능한 사람을 군인으로 선발하였다. 그리고 御史大夫 田廣明을 祁連將軍으로 삼고 4만여 기를 이끌고 西河로 출동하고, 度遼將軍 范明友는 3만여 기를 이끌고 張掖으로 나가고, 前將軍 韓增은 3만여 기를 이끌고 雲中으로 나가고, 後將軍 趙充國은 蒲類將軍으로 삼아 3만여 기를 이끌고 酒泉으로 나가고, 雲中太守 田順은 虎牙將軍으로 삼아 3만여 기를 이끌고 五原으로 각각 나가도록 하였다. 모두 5명의 장군이 10여만의 기병을 이끌고 각각 2천여 리 가량 出塞하였다. 또한 校尉 常惠는 出使하여 公主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가 烏孫의 西域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烏孫의 昆彌도 스스로 翕侯 이하 5만여의 기병을 이끌고 西方으로부터 匈奴로 침입하였다. 그래서 다섯 將軍과 함께 무릇 20여만의 軍衆을 이루게 되었다(『漢書』 권94상 「匈奴傳」上 : 3785).
주 008
匈奴는 漢의 군대가 대거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약자가 다투어 도주하고, 畜産을 몰아 멀리 달아났다. 그래서 획득한 전리품은 적었다. 度遼將軍 范明友는 포로 700餘 級을 베고, 말과 소, 양 만여 마리를 얻었다. 前將軍 韓增은 포로의 목 100여 급과 말, 소, 양 2천여 마리를 얻었다. 蒲類將軍 趙充國은 單于의 使者 蒲陰王 이하 300여 급의 목을 얻고, 말, 소, 양 7천여 마리를 노획했다(『漢書』 권94상 「匈奴傳」上 : 3785∼3786).
주 009
5명의 장군 가운데, 祁連將軍 田廣明과 虎牙將軍 田順을 자살시킨 것을 말한다. 田廣明은 雞秩山에 匈奴의 군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앞에서 군대를 돌려 퇴각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또한 田順은 기한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노획물을 거짓으로 부풀렸다(『漢書』권94상 「匈奴傳」上 : 3786).
주 010
선제 神爵 2년(전60) 가을, 匈奴 日逐王 先賢撣이 來降하였고, 처음 鄭吉을 都護로 임명하여 日逐王을 맞이하고, (흉노의 요충지인) 車師國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해부터 흉노 선우는 名王을 보내 天子에게 봉헌하고 정월에 朝賀하였다(『漢書』 권8 「宣帝紀」(262) 참조).
주 011
『資治通鑑』 권34(1104)에 인용된 揚雄의 상소에는 “歸化”가 아닌 “歸死”로 되어 있고 胡三省은 그 의미를 “歸死命於漢也”라고 풀이하였다.
주 012
『釋文』에 “扶伏”이란 ‘포복(匍匐)’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春秋左氏傳』 昭公21년조 “扶伏而擊之”(楊伯峻 : 1429)도 그러하다.
주 013
원문 “鷙”의 의미를 顔師古는 ‘어그러진다’는 뜻의 “佷”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佷’은 ‘很’과 통하는 말로 보인다. 예를 들어 『史記』 권7(「項羽本紀」 : 305)에 나오는 “很如羊”이란 말은 『漢書』 권31(「陳勝項籍傳」 : 1802)에는 “佷如羊”으로 되어 있다. 또한 很은 ‘패려궂다(언행이 거칠다)’, ‘말을 듣지 않는다’, ‘거스르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문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다고 본다.
주 014
원문 “隷”란 “附屬”한다는 말이다. “惡”이란 “威”를 말한다. 원문의 해석은 顔師古에 따랐다. 하지만 『資治通鑑』에서는 원문의 “隷”를 “肄”로 적고 胡三省은 “肄”가 “習”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구절을 “言易習於爲惡也”(쉽게 惡行을 익히게 된다)라고 풀이하였다[『資治通鑑』 권34 : 1104).
주 015
원문에 “威儀俯仰”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俯仰”은 ‘거동’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俯는 우러러보는 것이고, 仰은 굽어보는 행동으로 상반된 의미를 갖는데(『春秋左氏傳』 定公15년조), 두 글자가 합쳐지면, 一擧一動의 의미를 갖는다. “范睢 …… 先言外事, 以觀秦王之俯仰”에서의 “俯仰”도 같은 용례라고 할 수 있다(『史記』 권79 「范睢傳」 : 2409).
주 016
武帝는 大宛에서 나는 명마를 얻고자 사신과 재물을 보냈으나, 大宛王이 따르지 않고 漢의 사신을 살해했다. 이에 武帝는 貳師將軍 李廣利로 하여금 군사 10여만을 이끌고 大宛을 정벌하게 했다. 宛人이 그의 왕을 목 베고, 말 3천 필을 보냈다(『漢書』 권96상 「西域傳」 : 3895). 武帝 太初 4년(전101) 貳師將軍 李廣利가 汗血馬을 얻어 귀환하였다(『漢書』 권6 「武帝紀」 : 202).
주 017
匈奴의 冒頓선우가 東胡를 멸한 뒤, 나머지 부족들은 鮮卑山과 烏桓 등지에 산재하면서 匈奴의 지배를 받았다. 漢武帝 이래 匈奴가 쇠퇴하자 다시 그 세력이 커졌는데(『資治通鑑』 권23 : 769), 昭帝 치세기에 烏桓은 匈奴 單于의 무덤을 파헤쳐 冒頓單于에 대한 원한을 갚았다. 이에 匈奴가 大怒하여 烏桓을 공격 격파하였다. 이 사실을 안 大將軍 霍光은 度遼將軍 范明友에게 2만의 기병을 이끌고 匈奴 군대를 요격하도록 하였다. 范明友는 이후 재차 烏桓 지역에 진격하여 6천여 급을 베고, 3王의 머리를 가지고 귀환하였다(『後漢書』 권90 「烏桓傳」 : 2981).
주 018
“姑繒”이 族名인지 地名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顔師古는 姑繒을 西南夷의 一種으로 보았다. 그런데 『漢書』 권7 「昭帝紀」에는 始元 1년(전86) “益州郡의 廉頭와 姑繒, 牂柯郡의 談指, 同並 등 24개의 邑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219)고 되어 있어 姑繒은 邑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蘇林은 이들이 모두 西南夷 別種의 이름이라고 하였고, 顔師古는 이 해석에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경과를 보면, 始元 1년 西南夷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漢은 水衡都尉를 보내 진압하였고, 3년 뒤, 다시 姑繒과 葉楡에서 반란이 일어나 益州太守를 살해하고 漢軍을 격파하자, 이듬해 軍正 王平 등이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때 蠻夷 5만여 급을 베고 畜産 10여만 마리를 획득하였다(『漢書』 권95 「西南夷傳」 : 3843).
주 019
“蕩姐”는 羌族에 속한 族名으로 보인다. “籍”은 “蹈”의 의미이다. 胡三省은 “元帝 永光 3년에 ‘隴西羌彡姐反’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어찌 이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蕩姐가 彡姐와 같다고 보았으며 그가 살던 시대에도 西羌에 그 姓이 남아 있다고 한다(『資治通鑑』 권28 : 920). 「馮奉世傳」에 따르면, 永光 2년(전42) 隴西 羌族의 彡姐 旁種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신료들은 당시 四方에 饑饉이 들어 아무런 대책을 내지 못하였다. 오직 右將軍 馮奉世가 4만의 군사를 동원하면 1개월 이내에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1만 2천의 군대를 가지고 出征하였다. 이후 출병한 군사의 수는 계속 증가되어 6만에 이르렀다(『漢書』 권79 「馮奉世傳」 : 3296∼3299).
주 020
“艾”란 顔師古에 따르면 ‘끊어 버린다[絶]’는 의미이다. 武帝 元封 3년(전108) 한의 원정군이 조선왕 右渠의 목을 베고, 그 지역에 樂浪, 臨屯, 玄菟, 眞番 등 4郡을 설치하였다(『漢書』권6 「武帝紀」 : 194). 이 정벌군은 수군 5만을 거느린 樓船將軍 楊僕과 遼東의 육로를 이용한 左將軍 荀彘가 지휘하였다.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는 『漢書』 권95 「朝鮮傳」(3865∼3867) 참조.
주 021
胡三省은 武帝 元鼎 6년(전111)의 일이라 하였다(『資治通鑑』 권34 : 1105). 元鼎 5년 秋 伏波將軍 路博德과 樓船將軍 楊僕 등이 南越國을 공격하고 이듬해 겨울 火攻으로 番禹를 함락시키고 反漢세력의 우두머리인 呂嘉를 생포하였다. 그 뒤 越地에 南海郡 등 9개 군을 설치하였다. 같은 해 가을 東越王 餘善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橫海將軍 韓說 등이 출격하여 진압하였다. 황제는 軍吏에게 조서를 내려 東越 지역의 民을 모두 江淮之間으로 옮기고 東越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였다(『漢書』 권95 「兩粤傳」 : 3857∼3863).
주 022
원문은 “旬月之役”이다. “旬月”은 10일에서 1개월 사이의 비교적 짧은 기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後漢書』권54 「楊震傳」에 “旬月之閒, 並各拔擢”(1780)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章惠康 등의 『後漢書』 今注今譯本에는 “10일이나 혹은 1개월 간 공부를 한 뒤, 모두 각각 발탁되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章惠康․易孟醇, 1998 : 1453).
주 023
“不離二時”에 대하여 顔師古는 “離’가 “歷’이고 一時는 3개월의 기간을 뜻한다고 하였다.
주 024
원문 “菑”는 “災”의 古字이다.
주 025
皇帝들이란 표현은 현대 한어본에 따라 넣었다(安平秋, 2004 : 1903).
 
이름
상혜(常惠) , 일축선우 , 호한야선우
지명
노산(盧山) , , , , , 대완(大宛)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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