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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야선우와 질지선우가 한나라에 입조하니 특별히 예우하고 재물을 풍부히 사여하였고 뒤에 사신도 입조함

  • 국가
    흉노(匈奴)
이듬해주 001
각주 001)
宣帝 : 甘露 2년(전5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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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야선우가 오원새(五原塞)주 002
각주 002)
五原塞 : 五原郡의 邊塞이다. 지금의 위치는 대략 內蒙古 包頭市의 서북쪽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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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두드려 [감로] 3년(전51) 정월에 입조(入朝)를 원했다. 은 거기도위(車騎都尉)주 003
각주 003)
車騎都尉 : 前漢 시기의 官名으로 車騎士들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常置되지는 않았다. 長家山漢墓竹簡 「秩律」에 따르면, 車騎都(尉)의 秩祿은 2千石이다(長家山漢墓竹簡[247號墓] 「秩律」 :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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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韓昌) 주 004
각주 004)
韓昌 : 宣帝시기 車騎都尉에 임명되었다. 甘露 3년(전51) 呼韓邪單于가 漢에 입조하였을 때, 單于를 영접하였다. 元帝 初元 2년(전47) 光祿大夫 張猛과 함께 單于의 侍子가 귀환할 때 호송하였다. 이때 單于庭에서 匈奴와 맹약을 맺고 상호 불가침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公卿들은 자의적인 맹약을 문제삼아 韓昌 등을 처벌하라고 주장하였으나 贖罪가 허용되었다. 후에 護軍都尉에 임명되었고 永光 2년(전42)에는 隴西의 屯田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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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영접하게 하였으며 지나가는 일곱 군(郡)에서 군마다 2천의 기병을 징발하여 길 위에 늘어서게 하였다. 선우는 정월에 감천궁(甘泉宮)주 005
각주 005)
甘泉宮 : 雲陽宮이라고도 불렀다. 陝西省 淳化縣 西北에 있는 甘泉山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에도 궁의 유지가 있다. 궁의 이름은 이 산에서 따온 것이다. 秦 二世 때에는 林光宮이었는데, 武帝 建元 1년(전140)에 확장 건축되었다. 궁의 주위 둘레는 45리이며 高光宮․長定宮․竹宮․通天臺․迎賓館․露寒館․儲胥館 등의 宮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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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천자에게 조하(朝賀)하였다.
은 특별한 예로 우대하여 [선우의] 지위를 제후왕 위로 하고주 006
각주 006)
漢에서는 匈奴 선우의 來降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하여 그를 어떻게 禮遇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특히 그 지위를 諸侯王보다 위에 둘 것인가 아니면 아래에 둘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었다. 당시 丞相 黃覇, 御史大夫 于定國 등은 單于에 대한 禮遇을 응당 ‘諸侯王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諸夏를 우선하고 夷狄을 뒤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蕭望之는 單于가 正朔을 받지 않는 敵國으로 응당 ‘不臣之禮’에 따라 대우하여 ‘諸侯王보다 위’로 예우해야 하며 그것이 곧 ‘羈縻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宣帝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單于의 位次를 諸侯王의 위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外夷를 羈縻의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漢初와 武帝代의 상이한 세계정책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절충적 선택으로서 향후 중국의 대외관계의 기초를 확립한 일로 그 역사적 의의가 강조된다(김한규, 1988 : 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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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에게] 배알할 때 신이라고 칭하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머리에 쓰는 갓과 허리에 두르는 띠 그리고 저고리와 치마, 황금으로 만든 도장[璽]과 여초(盭草)로 염색한 도장 끈,주 007
각주 007)
顔師古는 ‘盭’가 옛 ‘戾’자이고, 풀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 풀의 물로 도장 끈을 염색하는 것이 제후왕에 대한 예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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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으로 장식한 검주 008
각주 008)
원문 “玉具劍” 의미에 대하여 孟康은 칼날 밑(鐔)과 칼의 코끝(衞)이 모두 玉으로 된 칼이라고 풀이했다. 顔師古는 옆으로 튀어나온 劍口가 ‘鐔’, 칼의 코끝이 ‘衞’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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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허리에 차는 칼, 활 하나와 화살 네 묶음,주 009
각주 009)
원문 “矢四發”은 服虔과 韋昭의 주에 따르면, 한 묶음(發)은 12대의 화살을 말하니, 4묶음(發)은 화살 48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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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개로 싸여 있는 [의장용] 창 10자루, 의자가 달린 수레[安車] 1대,주 010
각주 010)
安車 : 고대의 수레는 서서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安車는 의자를 붙여 앉아서 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年老한 고급 관료나 貴婦人 등이 이용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賢人, 老人을 초빙할 때도 安車를 보내 각별한 예우를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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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안장과 고삐 한 세트, 말 15필, 황금 20근,주 011
각주 011)
前漢代 1斤은 지금의 248g에 해당된다(『漢語大詞典』 「中國歷代衡制演變測算簡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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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전, 의복 77벌, 수놓은 비단[錦繡]·고운 주름비단[綺穀] 등과 여러 종류의 비단[雜帛] 8천 필, 명주 솜 6천 근 등을 사여하였다.
조례(朝禮)가 끝난 뒤, 사자로 하여금 선우보다 앞에 가면서 안내하게 하였다. [장안의 숙소로 가는 도중에] 장평(長平) 주 012
각주 012)
長平 : 京師 부근의 언덕을 부르는 이름이다. 宣帝 本紀의 ‘長平阪’에 대하여 如淳은 “阪名이다. 池陽縣의 남쪽이다. 上原의 阪에는 長平觀이 있다. 長安에서 15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顔師古는 “涇水의 남쪽 언덕이다. 지금은 眭城坂이라고 한다.”고 하였다(『漢書』 권8「宣帝紀」 : 271). 현재 陝西省 涇陽縣 西南쪽 涇水 부근의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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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묵었다. 천자는 감천(甘泉)에서 [나와] 지양궁(池陽宮)주 013
각주 013)
池陽宮 : 현재 陝西省 涇陽縣 서북쪽에 있다. 漢代에 건축되었고 池陽縣의 남쪽에 있었다. 顧炎武의 『歷代宅京記』 권4에 “池陽宮 在池陽之南”이라고 되어 있다. 李吉甫의 『元和郡縣志』 권2에는 “漢池陽宮 在(涇陽)縣西北八里”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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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숙박하였다. [이곳에서] 천자는 장평[의 산비탈]에 올라 선우는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렸다. [선우의] 좌우 당호(當戶) 등의 신료들은 모두 줄지어 서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여러 만이(蠻夷)의 군장, 왕후 등 수 만 명도 모두 위교(渭橋)주 014
각주 014)
渭橋 : 漢代 渭水에는 다리가 세 개가 있었으며 가운데 자리한 것이 中渭橋이다. 『三輔舊事』에 따르면 秦代 渭水의 남쪽에 興樂宮이 있고, 북쪽에 咸陽宮이 있었는데, 이 둘을 잇기 위해 秦昭王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길이는 380步이고, 다리 북쪽 물속의 壘石에는 忖神의 神像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물 밖에 있었지만, 魏太祖의 말이 보고 놀란 뒤로 물 안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15). 그 밖에 동쪽에는 東渭橋가 있는데 景帝 5년에 건축되었고, 서쪽의 西渭橋는 武帝 建元 3년에 축조되었다. 西渭橋는 便門과 마주하고 있어 便橋 혹은 便門橋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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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천자를] 영접하였다. [이들은]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늘어섰다. 황제가 위교에 올라서자 모두 만세를 외쳤다.
선우가 [장안의] 집으로 가서 한 달 여간 체류하였으며 [천자는 그를] 귀국하도록 하였다. 선우는 자청하길 광록새(光祿塞)주 015
각주 015)
光祿塞 : 武帝는 太初 3년(전102)에 光祿勳 徐自爲를 보내 五原塞 외부에 城을 줄지어 축조하였는데 서북쪽으로 匈奴 땅 盧朐에 이르렀다(『漢書』 권6 「武帝紀」 : 201). 光祿勳이 축조하였기 때문에 光祿塞 혹은 光祿城이라고 불렀다. 성터는 현재 內蒙古 包頭市 서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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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지역에 머물면서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수항성(受降城) 주 016
각주 016)
受降城 : 武帝 太初 1년(전104) 武帝는 因杅將軍 公孫敖를 보내 塞外에 受降城을 쌓게 하였다(『漢書』 권6 「武帝紀」 : 200). 이곳은 현재 內蒙古 오이라트 안의 後聯合旗 동쪽, 陰山의 북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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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킬 수 있길 원하였다.
은 장락위위(長樂衞尉)주 017
각주 017)
長樂衛尉 : 前漢시기 설치된 관직으로 長樂宮 衛士를 지휘하였다. 상설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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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후(高昌侯) 동충(董忠) 주 018
각주 018)
董忠(?∼전48) : 潁川郡 陽翟縣 사람이다. 材力이 있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武帝代 期門으로 給事하였고, 宣帝代에는 張章․楊惲 등과 함께 霍光의 아들인 霍禹의 모반 사실을 고발하였다. 그 공으로 地節 4년(전66)에 高昌侯로 봉해졌다. 神爵 2년(전60)에는 衛尉로 임명되었다. 甘露 3년(전51) 車騎都尉 韓昌 등과 함께 호한야선우를 장안에서 漠南으로 호송하였다. 19년간 高昌侯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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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거기도위 한창을 보내 기병 1만 6천을 이끌고, 또한 변군의 병사와 말 수천을 징발하여 선우가 삭방[군]의 계록새(雞鹿塞)주 019
각주 019)
雞鹿塞 : 顔師古에 따르면 漢代 朔方郡 窳渾縣에 있었던 邊塞이다. 현재 內蒙古 古杭錦 後期의 서남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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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는 것을 호송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동충 등이 남아서 선우를 호위하면서 [선우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를 주살하는 데 조력하게 했다. 또한 변지의 곡물,주 020
각주 020)
원문은 “米”인데, 껍질을 벗긴 곡물 알맹이를 말한다. 孫詒讓은 『周禮正義』(권31 : 1233)에서 “已舂者爲米, 未舂者爲粟”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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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한] 곡물, 건량 등을 앞뒤로 3만 4천 곡(斛)주 021
각주 021)
전한시기 1斛은 지금의 200리터에 해당된다(『漢語大詞典』 「中國歷代量制演變測算簡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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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흉노 측에게] 보내 식량에 보태도록 하였다. 이해 질지선우 또한 사신을 보내 봉헌(奉獻)하였다. 은 그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듬해주 022
각주 022)
宣帝 甘露 4년(전5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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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야, 질지] 두 명의 선우가 모두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봉헌하였다. 호한야의 사자를 대우할 때 더해 주는 것이 있었다.
이듬해주 023
각주 023)
宣帝 黃龍 1년(전4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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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야선우가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재물] 사여는 처음과 같았지만, 의복 110벌과 비단[錦帛] 9천 필, 명주 솜 8천 근을 더 주었다. [이미 파견된 흉노 지역] 주둔병이 있기 때문에 다시 기병을 내어 호송하지는 않았다.

  • 각주 001)
    宣帝 : 甘露 2년(전5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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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五原塞 : 五原郡의 邊塞이다. 지금의 위치는 대략 內蒙古 包頭市의 서북쪽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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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車騎都尉 : 前漢 시기의 官名으로 車騎士들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常置되지는 않았다. 長家山漢墓竹簡 「秩律」에 따르면, 車騎都(尉)의 秩祿은 2千石이다(長家山漢墓竹簡[247號墓] 「秩律」 :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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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韓昌 : 宣帝시기 車騎都尉에 임명되었다. 甘露 3년(전51) 呼韓邪單于가 漢에 입조하였을 때, 單于를 영접하였다. 元帝 初元 2년(전47) 光祿大夫 張猛과 함께 單于의 侍子가 귀환할 때 호송하였다. 이때 單于庭에서 匈奴와 맹약을 맺고 상호 불가침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公卿들은 자의적인 맹약을 문제삼아 韓昌 등을 처벌하라고 주장하였으나 贖罪가 허용되었다. 후에 護軍都尉에 임명되었고 永光 2년(전42)에는 隴西의 屯田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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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甘泉宮 : 雲陽宮이라고도 불렀다. 陝西省 淳化縣 西北에 있는 甘泉山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에도 궁의 유지가 있다. 궁의 이름은 이 산에서 따온 것이다. 秦 二世 때에는 林光宮이었는데, 武帝 建元 1년(전140)에 확장 건축되었다. 궁의 주위 둘레는 45리이며 高光宮․長定宮․竹宮․通天臺․迎賓館․露寒館․儲胥館 등의 宮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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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에서는 匈奴 선우의 來降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하여 그를 어떻게 禮遇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특히 그 지위를 諸侯王보다 위에 둘 것인가 아니면 아래에 둘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었다. 당시 丞相 黃覇, 御史大夫 于定國 등은 單于에 대한 禮遇을 응당 ‘諸侯王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諸夏를 우선하고 夷狄을 뒤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蕭望之는 單于가 正朔을 받지 않는 敵國으로 응당 ‘不臣之禮’에 따라 대우하여 ‘諸侯王보다 위’로 예우해야 하며 그것이 곧 ‘羈縻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宣帝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單于의 位次를 諸侯王의 위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外夷를 羈縻의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漢初와 武帝代의 상이한 세계정책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절충적 선택으로서 향후 중국의 대외관계의 기초를 확립한 일로 그 역사적 의의가 강조된다(김한규, 1988 : 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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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顔師古는 ‘盭’가 옛 ‘戾’자이고, 풀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 풀의 물로 도장 끈을 염색하는 것이 제후왕에 대한 예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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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원문 “玉具劍” 의미에 대하여 孟康은 칼날 밑(鐔)과 칼의 코끝(衞)이 모두 玉으로 된 칼이라고 풀이했다. 顔師古는 옆으로 튀어나온 劍口가 ‘鐔’, 칼의 코끝이 ‘衞’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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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원문 “矢四發”은 服虔과 韋昭의 주에 따르면, 한 묶음(發)은 12대의 화살을 말하니, 4묶음(發)은 화살 48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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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安車 : 고대의 수레는 서서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安車는 의자를 붙여 앉아서 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年老한 고급 관료나 貴婦人 등이 이용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賢人, 老人을 초빙할 때도 安車를 보내 각별한 예우를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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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前漢代 1斤은 지금의 248g에 해당된다(『漢語大詞典』 「中國歷代衡制演變測算簡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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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長平 : 京師 부근의 언덕을 부르는 이름이다. 宣帝 本紀의 ‘長平阪’에 대하여 如淳은 “阪名이다. 池陽縣의 남쪽이다. 上原의 阪에는 長平觀이 있다. 長安에서 15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顔師古는 “涇水의 남쪽 언덕이다. 지금은 眭城坂이라고 한다.”고 하였다(『漢書』 권8「宣帝紀」 : 271). 현재 陝西省 涇陽縣 西南쪽 涇水 부근의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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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池陽宮 : 현재 陝西省 涇陽縣 서북쪽에 있다. 漢代에 건축되었고 池陽縣의 남쪽에 있었다. 顧炎武의 『歷代宅京記』 권4에 “池陽宮 在池陽之南”이라고 되어 있다. 李吉甫의 『元和郡縣志』 권2에는 “漢池陽宮 在(涇陽)縣西北八里”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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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渭橋 : 漢代 渭水에는 다리가 세 개가 있었으며 가운데 자리한 것이 中渭橋이다. 『三輔舊事』에 따르면 秦代 渭水의 남쪽에 興樂宮이 있고, 북쪽에 咸陽宮이 있었는데, 이 둘을 잇기 위해 秦昭王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길이는 380步이고, 다리 북쪽 물속의 壘石에는 忖神의 神像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물 밖에 있었지만, 魏太祖의 말이 보고 놀란 뒤로 물 안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15). 그 밖에 동쪽에는 東渭橋가 있는데 景帝 5년에 건축되었고, 서쪽의 西渭橋는 武帝 建元 3년에 축조되었다. 西渭橋는 便門과 마주하고 있어 便橋 혹은 便門橋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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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光祿塞 : 武帝는 太初 3년(전102)에 光祿勳 徐自爲를 보내 五原塞 외부에 城을 줄지어 축조하였는데 서북쪽으로 匈奴 땅 盧朐에 이르렀다(『漢書』 권6 「武帝紀」 : 201). 光祿勳이 축조하였기 때문에 光祿塞 혹은 光祿城이라고 불렀다. 성터는 현재 內蒙古 包頭市 서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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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受降城 : 武帝 太初 1년(전104) 武帝는 因杅將軍 公孫敖를 보내 塞外에 受降城을 쌓게 하였다(『漢書』 권6 「武帝紀」 : 200). 이곳은 현재 內蒙古 오이라트 안의 後聯合旗 동쪽, 陰山의 북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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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長樂衛尉 : 前漢시기 설치된 관직으로 長樂宮 衛士를 지휘하였다. 상설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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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董忠(?∼전48) : 潁川郡 陽翟縣 사람이다. 材力이 있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武帝代 期門으로 給事하였고, 宣帝代에는 張章․楊惲 등과 함께 霍光의 아들인 霍禹의 모반 사실을 고발하였다. 그 공으로 地節 4년(전66)에 高昌侯로 봉해졌다. 神爵 2년(전60)에는 衛尉로 임명되었다. 甘露 3년(전51) 車騎都尉 韓昌 등과 함께 호한야선우를 장안에서 漠南으로 호송하였다. 19년간 高昌侯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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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雞鹿塞 : 顔師古에 따르면 漢代 朔方郡 窳渾縣에 있었던 邊塞이다. 현재 內蒙古 古杭錦 後期의 서남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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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원문은 “米”인데, 껍질을 벗긴 곡물 알맹이를 말한다. 孫詒讓은 『周禮正義』(권31 : 1233)에서 “已舂者爲米, 未舂者爲粟”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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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전한시기 1斛은 지금의 200리터에 해당된다(『漢語大詞典』 「中國歷代量制演變測算簡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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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宣帝 甘露 4년(전5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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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宣帝 黃龍 1년(전4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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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호한야선우, 한창(韓昌), 동충(董忠), 한창, 동충, 질지선우, 호한야, 질지, 호한야, 호한야선우
지명
, , 장안, 장평(長平), 감천(甘泉), 장평, 장안, , 수항성(受降城), , 삭방[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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