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한야선우와 질지선우가 한나라에 입조하니 특별히 예우하고 재물을 풍부히 사여하였고 뒤에 사신도 입조함
이듬해주 001
호한야선우가 오원새(五原塞)주 002를 두드려 [감로] 3년(전51) 정월에 입조(入朝)를 원했다. 한은 거기도위(車騎都尉)주 003
한창(韓昌)
주 004을 보내 영접하게 하였으며 지나가는 일곱 군(郡)에서 군마다 2천의 기병을 징발하여 길 위에 늘어서게 하였다. 선우는 정월에 감천궁(甘泉宮)주 005에서 천자에게 조하(朝賀)하였다.
한은 특별한 예로 우대하여 [선우의] 지위를 제후왕 위로 하고주 006
조례(朝禮)가 끝난 뒤, 사자로 하여금 선우보다 앞에 가면서 안내하게 하였다. [장안의 숙소로 가는 도중에] 장평(長平) 주 012에서 묵었다. 천자는 감천(甘泉)에서 [나와] 지양궁(池陽宮)주 013에서 숙박하였다. [이곳에서] 천자는 장평[의 산비탈]에 올라 선우는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렸다. [선우의] 좌우 당호(當戶) 등의 신료들은 모두 줄지어 서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여러 만이(蠻夷)의 군장, 왕후 등 수 만 명도 모두 위교(渭橋)주 014
선우가 [장안의] 집으로 가서 한 달 여간 체류하였으며 [천자는 그를] 귀국하도록 하였다. 선우는 자청하길 광록새(光祿塞)주 015아래 지역에 머물면서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한의 수항성(受降城) 주 016을 지킬 수 있길 원하였다.
한은 장락위위(長樂衞尉)주 017고창후(高昌侯) 동충(董忠) 주 018과 거기도위 한창을 보내 기병 1만 6천을 이끌고, 또한 변군의 병사와 말 수천을 징발하여 선우가 삭방[군]의 계록새(雞鹿塞)주 019밖으로 나가는 것을 호송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동충 등이 남아서 선우를 호위하면서 [선우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를 주살하는 데 조력하게 했다. 또한 변지의 곡물,주 020[도정한] 곡물, 건량 등을 앞뒤로 3만 4천 곡(斛)주 021을 [흉노 측에게] 보내 식량에 보태도록 하였다. 이해 질지선우 또한 사신을 보내 봉헌(奉獻)하였다. 한은 그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듬해주 022[호한야, 질지] 두 명의 선우가 모두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봉헌하였다. 한은 호한야의 사자를 대우할 때 더해 주는 것이 있었다.
이듬해주 023 호한야선우가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재물] 사여는 처음과 같았지만, 의복 110벌과 비단[錦帛] 9천 필, 명주 솜 8천 근을 더 주었다. [이미 파견된 흉노 지역] 주둔병이 있기 때문에 다시 기병을 내어 호송하지는 않았다.
한은 특별한 예로 우대하여 [선우의] 지위를 제후왕 위로 하고주 006
각주 006)
[천자에게] 배알할 때 신이라고 칭하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머리에 쓰는 갓과 허리에 두르는 띠 그리고 저고리와 치마, 황금으로 만든 도장[璽]과 여초(盭草)로 염색한 도장 끈,주 007옥으로 장식한 검주 008과 허리에 차는 칼, 활 하나와 화살 네 묶음,주 009덮개로 싸여 있는 [의장용] 창 10자루, 의자가 달린 수레[安車] 1대,주 010말안장과 고삐 한 세트, 말 15필, 황금 20근,주 01120만 전, 의복 77벌, 수놓은 비단[錦繡]·고운 주름비단[綺穀] 등과 여러 종류의 비단[雜帛] 8천 필, 명주 솜 6천 근 등을 사여하였다.漢에서는 匈奴 선우의 來降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하여 그를 어떻게 禮遇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특히 그 지위를 諸侯王보다 위에 둘 것인가 아니면 아래에 둘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었다. 당시 丞相 黃覇, 御史大夫 于定國 등은 單于에 대한 禮遇을 응당 ‘諸侯王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諸夏를 우선하고 夷狄을 뒤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蕭望之는 單于가 正朔을 받지 않는 敵國으로 응당 ‘不臣之禮’에 따라 대우하여 ‘諸侯王보다 위’로 예우해야 하며 그것이 곧 ‘羈縻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宣帝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單于의 位次를 諸侯王의 위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外夷를 羈縻의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漢初와 武帝代의 상이한 세계정책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절충적 선택으로서 향후 중국의 대외관계의 기초를 확립한 일로 그 역사적 의의가 강조된다(김한규, 1988 : 72∼73).
조례(朝禮)가 끝난 뒤, 사자로 하여금 선우보다 앞에 가면서 안내하게 하였다. [장안의 숙소로 가는 도중에] 장평(長平) 주 012에서 묵었다. 천자는 감천(甘泉)에서 [나와] 지양궁(池陽宮)주 013에서 숙박하였다. [이곳에서] 천자는 장평[의 산비탈]에 올라 선우는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렸다. [선우의] 좌우 당호(當戶) 등의 신료들은 모두 줄지어 서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여러 만이(蠻夷)의 군장, 왕후 등 수 만 명도 모두 위교(渭橋)주 014
각주 014)
아래에서 [천자를] 영접하였다. [이들은]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늘어섰다. 황제가 위교에 올라서자 모두 만세를 외쳤다.渭橋 : 漢代 渭水에는 다리가 세 개가 있었으며 가운데 자리한 것이 中渭橋이다. 『三輔舊事』에 따르면 秦代 渭水의 남쪽에 興樂宮이 있고, 북쪽에 咸陽宮이 있었는데, 이 둘을 잇기 위해 秦昭王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길이는 380步이고, 다리 북쪽 물속의 壘石에는 忖神의 神像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물 밖에 있었지만, 魏太祖의 말이 보고 놀란 뒤로 물 안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15). 그 밖에 동쪽에는 東渭橋가 있는데 景帝 5년에 건축되었고, 서쪽의 西渭橋는 武帝 建元 3년에 축조되었다. 西渭橋는 便門과 마주하고 있어 便橋 혹은 便門橋로도 불렸다.
선우가 [장안의] 집으로 가서 한 달 여간 체류하였으며 [천자는 그를] 귀국하도록 하였다. 선우는 자청하길 광록새(光祿塞)주 015아래 지역에 머물면서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한의 수항성(受降城) 주 016을 지킬 수 있길 원하였다.
한은 장락위위(長樂衞尉)주 017고창후(高昌侯) 동충(董忠) 주 018과 거기도위 한창을 보내 기병 1만 6천을 이끌고, 또한 변군의 병사와 말 수천을 징발하여 선우가 삭방[군]의 계록새(雞鹿塞)주 019밖으로 나가는 것을 호송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동충 등이 남아서 선우를 호위하면서 [선우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를 주살하는 데 조력하게 했다. 또한 변지의 곡물,주 020[도정한] 곡물, 건량 등을 앞뒤로 3만 4천 곡(斛)주 021을 [흉노 측에게] 보내 식량에 보태도록 하였다. 이해 질지선우 또한 사신을 보내 봉헌(奉獻)하였다. 한은 그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듬해주 022[호한야, 질지] 두 명의 선우가 모두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봉헌하였다. 한은 호한야의 사자를 대우할 때 더해 주는 것이 있었다.
이듬해주 023 호한야선우가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재물] 사여는 처음과 같았지만, 의복 110벌과 비단[錦帛] 9천 필, 명주 솜 8천 근을 더 주었다. [이미 파견된 흉노 지역] 주둔병이 있기 때문에 다시 기병을 내어 호송하지는 않았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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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漢에서는 匈奴 선우의 來降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하여 그를 어떻게 禮遇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특히 그 지위를 諸侯王보다 위에 둘 것인가 아니면 아래에 둘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었다. 당시 丞相 黃覇, 御史大夫 于定國 등은 單于에 대한 禮遇을 응당 ‘諸侯王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諸夏를 우선하고 夷狄을 뒤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蕭望之는 單于가 正朔을 받지 않는 敵國으로 응당 ‘不臣之禮’에 따라 대우하여 ‘諸侯王보다 위’로 예우해야 하며 그것이 곧 ‘羈縻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宣帝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單于의 位次를 諸侯王의 위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外夷를 羈縻의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漢初와 武帝代의 상이한 세계정책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절충적 선택으로서 향후 중국의 대외관계의 기초를 확립한 일로 그 역사적 의의가 강조된다(김한규, 1988 : 72∼73).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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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渭橋 : 漢代 渭水에는 다리가 세 개가 있었으며 가운데 자리한 것이 中渭橋이다. 『三輔舊事』에 따르면 秦代 渭水의 남쪽에 興樂宮이 있고, 북쪽에 咸陽宮이 있었는데, 이 둘을 잇기 위해 秦昭王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길이는 380步이고, 다리 북쪽 물속의 壘石에는 忖神의 神像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물 밖에 있었지만, 魏太祖의 말이 보고 놀란 뒤로 물 안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15). 그 밖에 동쪽에는 東渭橋가 있는데 景帝 5년에 건축되었고, 서쪽의 西渭橋는 武帝 建元 3년에 축조되었다. 西渭橋는 便門과 마주하고 있어 便橋 혹은 便門橋로도 불렸다.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020)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색인어
- 이름
- 호한야선우, 한창(韓昌), 동충(董忠), 한창, 동충, 질지선우, 호한야, 질지, 호한야, 호한야선우
- 지명
- 한, 한, 장안, 장평(長平), 감천(甘泉), 장평, 장안, 한, 수항성(受降城), 한, 삭방[군], 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