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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곽거병(霍去病 ), 공손오(公孫敖), 장건(張騫) 등을 출정시켜 흉노와 전투를 벌임

  • 국가
    흉노(匈奴)
이듬해 봄에주 001
각주 001)
漢 武帝 元狩 2년(전12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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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표기장군(票騎將軍)주 002
각주 002)
票騎將軍 : 『史記』에는 “驃騎將軍”으로 되어 있는데, 관직의 명칭으로 前漢 초기 중앙에 설치한 최고급 武官이다. 그 지위는 丞相 다음에 위치하고 大將軍과 동급이었다. 秩은 萬石이었다. 이후에 ‘大司馬’라는 칭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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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霍去病) 주 003
각주 003)
霍去病(전140~전117) : 河東 平陽 사람으로 大將軍 衛靑의 누이 衛少兒의 아들이다. 18살에 侍中이 되고 元朔 6년(전123)에 驃騎校尉가 되어 大將軍을 따라 匈奴를 격파하여 공을 세워 冠軍侯가 되었다. 元狩 2년(전121) 봄에 驃騎將軍이 되었다. 霍去病은 萬騎를 이끌고 隴西에서 나아가 匈奴를 격파하고 여름에는 대규모로 匈奴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匈奴 토벌에 나간 일이 여섯 차례였는데, 정예부대를 이끌고 大軍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을 썼다. 漢나라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워 衛靑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으나 그 권세는 衛靑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불과 24세에 죽자 武帝는 크게 슬퍼하여 長安 근교의 茂陵에 무덤을 지어 주었다. 일찍이 霍去病이 대승리를 거둔 祁連山의 형상을 따게 하여 그의 무공을 기렸다. 그의 무덤 앞에는 匈奴를 밟고 선 石馬가 있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列傳」 : 2478~2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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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농서군에서 출정하도록 하자 [그는] 연지산(焉耆山) 주 004
각주 004)
焉耆山 : 음은 ‘연지산’이다. 다르게는 ‘燕支山’ 또는 ‘胭脂山’이라고도 불린다. 지금의 甘肅省 永昌縣 서쪽, 山丹縣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史記』에는 “焉支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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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나 천여 리 [나아가 흉노를 공격해]주 005
각주 005)
『史記』에는 “擊匈奴”가 있는데 저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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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수급과 포로 8천여주 006
각주 006)
『史記』에는 “萬八千餘級”으로 되어 있어 萬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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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잡고 휴도왕(休屠王)주 007
각주 007)
休屠王 : 匈奴의 관직 명칭으로 單于庭의 우측(서쪽)에 있는 休屠部(지금의 甘肅省 武威市 일대)를 다스리는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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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격파해]주 008
각주 008)
『史記』에는 “破得”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본에는 “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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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황금상[祭天金人]주 009
각주 009)
匈奴가 祭天을 하는 곳이 본래 雲陽 甘泉山 아래에 있었다. 秦나라가 공격하여 그 땅을 빼앗아 버렸는데 이후에 休屠王의 오른쪽 땅을 옮겨서 休屠가 祭天金人像을 갖게 되었다. 顔師古는 金人을 天神之主으로 만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 佛像을 그것의 遺制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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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었다. 그 여름주 010
각주 010)
漢 武帝 元狩 2년(전123)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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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장군이 다시 합기후(合騎侯) [공손오]와 함께 수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농서, 북지에서 이천 리를 나가 흉노를 쳤다. 거연(居延) 주 011
각주 011)
居延 : 縣 명칭으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額濟納旗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河西지역과 漠北 사이의 교통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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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나 기련산(祁連山) 주 012
각주 012)
祁連山 : 산의 명칭으로 ‘白山’, ‘雪山’, ‘天山’, ‘祁連天山’ 등으로 불린다. 祁連은 匈奴語로, 의미는 하늘[天]이다. 지금의 甘肅省 酒泉市 이남에 있는 산을 말한다. 과거에 祁連山은 남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북은 新疆 지역에 있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서 말하는 祁連山은 남쪽에 있는 것을 말한다. 張掖과 酒泉 사이에 있는데 동서로 이백여 리가 되고 나무와 풀이 잘 우거져 있어 목축에 적당하였다. 匈奴가 이 산을 잃고 큰 타격을 입었다(高榮, 2004 : 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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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흉노를] 공격해 흉노의 수급과 포로 3만 여주 013
각주 013)
『史記』에는 “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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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비소왕 이하 70여 명을 얻었다. 이때주 014
각주 014)
漢 武帝 元狩 2년(전123) 여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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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역시 대군, 안문[군]으로 들어와 수백 명을 죽이고 잡아갔다. 한나라에서는 박망후(博望侯)주 015
각주 015)
博望侯 : 張騫(?~전114)을 가리킨다. 그는 武帝의 명을 받고 匈奴를 협공하기 위해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의 일리강 유역에 있던 大月氏와 동맹하려고 建元 2년(전139)경 長安을 출발하였다. 도중에 匈奴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大宛․康居를 거쳐 이미 아무다리아 북안으로 옮긴 大月氏에 도착하였다(전129년경). 그러나 그는 大月氏가 匈奴를 칠 의사가 없어 동맹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중 다시 匈奴의 포로가 되었다가 元朔 3년(전126)에 귀국하였다. 元狩 2년(전121)에 다시 烏孫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가 파견한 副使들이 西域諸國의 사절과 隊商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으로 西域의 지리, 종족, 물산 등에 관한 지식이 中國으로 유입되어 東西간의 교역과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소위 ‘실크로드’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史記』 권123 「大宛列傳」 : 3157~3179 ; 『漢書』 권61 「張騫列傳」 : 2687~2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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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과 이장군 을 시켜 우북평군주 016
각주 016)
右北平 : 郡의 명칭으로 지금의 河北省의 東北部에 해당한다. 郡의 治所는 前漢시대에 河北 平泉縣이었고, 後漢시대에는 河北 玉田縣에 있었다(주1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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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나가 흉노 좌현왕을 공격하게 했다. 좌현왕이 이광을 포위하니, [이]광의 군대 4천 명 중에 죽은 자가 반을 넘고주 017
각주 017)
『史記』에는 “左賢王圍李將軍, 卒可四千人, 且盡”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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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거나 잡힌 것 또한 [이쪽의 희생을] 넘어섰다. 마침 박망후의 군대가 구하러 왔기 때문에 이장군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그의 군대를 모두 잃었다.주 018
각주 018)
『史記』에는 “漢失亡數千人”으로 『漢書』와 달리 표점되어 “이 장군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한나라의 손실도 수천명이었는데”로 번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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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후가 표기장군과 [약속한] 날짜를 지나쳐 박망후[와 함께]주 019
각주 019)
『史記』에는 “及與”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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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마땅하나 속전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 각주 001)
    漢 武帝 元狩 2년(전12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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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票騎將軍 : 『史記』에는 “驃騎將軍”으로 되어 있는데, 관직의 명칭으로 前漢 초기 중앙에 설치한 최고급 武官이다. 그 지위는 丞相 다음에 위치하고 大將軍과 동급이었다. 秩은 萬石이었다. 이후에 ‘大司馬’라는 칭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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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霍去病(전140~전117) : 河東 平陽 사람으로 大將軍 衛靑의 누이 衛少兒의 아들이다. 18살에 侍中이 되고 元朔 6년(전123)에 驃騎校尉가 되어 大將軍을 따라 匈奴를 격파하여 공을 세워 冠軍侯가 되었다. 元狩 2년(전121) 봄에 驃騎將軍이 되었다. 霍去病은 萬騎를 이끌고 隴西에서 나아가 匈奴를 격파하고 여름에는 대규모로 匈奴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匈奴 토벌에 나간 일이 여섯 차례였는데, 정예부대를 이끌고 大軍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을 썼다. 漢나라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워 衛靑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으나 그 권세는 衛靑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불과 24세에 죽자 武帝는 크게 슬퍼하여 長安 근교의 茂陵에 무덤을 지어 주었다. 일찍이 霍去病이 대승리를 거둔 祁連山의 형상을 따게 하여 그의 무공을 기렸다. 그의 무덤 앞에는 匈奴를 밟고 선 石馬가 있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列傳」 : 2478~2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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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焉耆山 : 음은 ‘연지산’이다. 다르게는 ‘燕支山’ 또는 ‘胭脂山’이라고도 불린다. 지금의 甘肅省 永昌縣 서쪽, 山丹縣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史記』에는 “焉支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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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史記』에는 “擊匈奴”가 있는데 저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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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史記』에는 “萬八千餘級”으로 되어 있어 萬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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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休屠王 : 匈奴의 관직 명칭으로 單于庭의 우측(서쪽)에 있는 休屠部(지금의 甘肅省 武威市 일대)를 다스리는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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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史記』에는 “破得”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본에는 “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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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匈奴가 祭天을 하는 곳이 본래 雲陽 甘泉山 아래에 있었다. 秦나라가 공격하여 그 땅을 빼앗아 버렸는데 이후에 休屠王의 오른쪽 땅을 옮겨서 休屠가 祭天金人像을 갖게 되었다. 顔師古는 金人을 天神之主으로 만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 佛像을 그것의 遺制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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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漢 武帝 元狩 2년(전123)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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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居延 : 縣 명칭으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額濟納旗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河西지역과 漠北 사이의 교통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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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祁連山 : 산의 명칭으로 ‘白山’, ‘雪山’, ‘天山’, ‘祁連天山’ 등으로 불린다. 祁連은 匈奴語로, 의미는 하늘[天]이다. 지금의 甘肅省 酒泉市 이남에 있는 산을 말한다. 과거에 祁連山은 남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북은 新疆 지역에 있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서 말하는 祁連山은 남쪽에 있는 것을 말한다. 張掖과 酒泉 사이에 있는데 동서로 이백여 리가 되고 나무와 풀이 잘 우거져 있어 목축에 적당하였다. 匈奴가 이 산을 잃고 큰 타격을 입었다(高榮, 2004 : 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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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史記』에는 “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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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漢 武帝 元狩 2년(전123) 여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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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博望侯 : 張騫(?~전114)을 가리킨다. 그는 武帝의 명을 받고 匈奴를 협공하기 위해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의 일리강 유역에 있던 大月氏와 동맹하려고 建元 2년(전139)경 長安을 출발하였다. 도중에 匈奴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大宛․康居를 거쳐 이미 아무다리아 북안으로 옮긴 大月氏에 도착하였다(전129년경). 그러나 그는 大月氏가 匈奴를 칠 의사가 없어 동맹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중 다시 匈奴의 포로가 되었다가 元朔 3년(전126)에 귀국하였다. 元狩 2년(전121)에 다시 烏孫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가 파견한 副使들이 西域諸國의 사절과 隊商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으로 西域의 지리, 종족, 물산 등에 관한 지식이 中國으로 유입되어 東西간의 교역과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소위 ‘실크로드’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史記』 권123 「大宛列傳」 : 3157~3179 ; 『漢書』 권61 「張騫列傳」 : 2687~2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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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右北平 : 郡의 명칭으로 지금의 河北省의 東北部에 해당한다. 郡의 治所는 前漢시대에 河北 平泉縣이었고, 後漢시대에는 河北 玉田縣에 있었다(주1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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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史記』에는 “左賢王圍李將軍, 卒可四千人, 且盡”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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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史記』에는 “漢失亡數千人”으로 『漢書』와 달리 표점되어 “이 장군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한나라의 손실도 수천명이었는데”로 번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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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史記』에는 “及與”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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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곽]거병(霍去病), 공손오, 장건, , 이광, [이]광
지명
한나라, 농서군, 연지산(焉耆山), 농서, 북지, 거연(居延), 기련산(祁連山), 대군, 안문[군],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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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곽거병(霍去病 ), 공손오(公孫敖), 장건(張騫) 등을 출정시켜 흉노와 전투를 벌임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