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주나라(周) 이후 전국시대 때까지 중원국가와 융적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관계

  • 국가
    흉노(匈奴)
유왕(幽王) 주 001
각주 001)
幽王(재위 전781~전771) : 이름이 姬宮湦이다. 宣王의 아들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총희 襃姒를 웃기기 위하여 가끔 거짓 烽火를 올리게 하여 諸侯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때문에 犬戎이 침공하였을 때 봉화를 올렸으나 諸侯들이 응하지 않아 驪山 기슭에서 패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사후 아들 平王이 수도를 洛陽으로 옮겨 西周時代는 끝났다(『史記』 권4 「周本紀」 : 145).
닫기
에 이르러 [그는] 포사(襃姒) 주 002
각주 002)
襃姒 : 襃는 나라이름이고, 姒는 姓이다.
닫기
라는 총희(寵姬)로 인해 신후(申侯) 주 003
각주 003)
申侯 : 西周 말기 申의 諸侯로서 幽王의 后 申氏의 아버지이다. 幽王이 襃姒를 총애하여 申後와 태자 宜臼를 폐하자, 申侯가 犬戎과 연합하여 幽王을 살해하고 宜臼를 平王으로 옹립하였다(『史記』 권4 「周本紀」 : 147~149). 申侯의 封邑은 申城으로 지금 河南 南陽市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닫기
와 틈이 생기게 되었다. 신후는 화가 나서 견융과 함께 쳐들어와 주나라 유왕여산(麗山) 주 004
각주 004)
麗山 : 지금의 陝西省 臨潼縣 동남쪽에 있다. 이곳은 『史記』에서 ‘驪山’으로 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이렇게 풀이된다.
닫기
기슭에서 죽이고 마침내 주나라 땅을 취하였다. [견융이 땅을] 노획하여주 005
각주 005)
“鹵獲”은 노획하다는 의미인데, 『史記』에는 지명인 ‘焦穫’으로 되어 있다.
닫기
경수(涇水)위수(渭水) 주 006
각주 006)
渭水 : 甘肅省 渭源縣에서 발원하여 陝西省 중부를 지나가는 黃河의 支流이다. 지금의 西安과 咸陽을 가로지른다.
닫기
사이에 머물러 살면서 중국을 침범하였다. [한편] 진(秦)나라 양공(襄公) 주 007
각주 007)
秦 襄公(재위 전781~전771) : 秦나라의 開國始祖로 周 平王을 도와 동천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로 말미암아 諸侯로 책봉되었다(『史記』 권5 「秦本紀」 : 178~195).
닫기
주나라를 구원하였으므로 이에 주나라 평왕(平王) 주 008
각주 008)
平王(재위 전770~전720) : 幽王의 아들로 이름은 姬宜臼이다. 어머니는 申侯의 딸인 申后이다. 처음에 태자에서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하였다. 西方의 異民族이 강성해져 周나라 영토를 침공하자 전 770년에 鎬京을 버리고 동쪽의 洛邑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 洛邑에서 즉위하여 전720년까지 재위하였다. 그가 東遷한 이후의 시대를 일반적으로 ‘春秋時代’라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49~150).
닫기
풍호를 떠나 동쪽 낙읍으로 옮겨 갔다. 당시에주 009
각주 009)
周 桓王 14년(전706)의 일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50).
닫기
진나라 양공이 [견]융을 쳐서 기[산]주 010
각주 010)
저본에는 “”로 되어 있는데, 이는 “岐”의 古字로 원문을 ‘岐’로 바꾸었다(주49) 참조).
닫기
이르게 되어 비로소 제후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주 011
각주 011)
秦 襄公이 周를 구한 공이 있어 平王이 東遷한 다음에 그의 故地인 酆鄗를 秦襄公에게 주었다. 이때가 襄公 7년(전771)이다.
닫기
이후 65년이 지나주 012
각주 012)
東周가 건국된 뒤 65년이 지난 전706년의 일이다.
닫기
산융주 013
각주 013)
山戎은 기원전 8세기 이후 燕나라가 遼寧지역으로 계속 진출하자 遼西에 거주하던 여러 종족이 이에 맞서 燕나라와 山東半島 일대까지 침입하면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山戎은 주로 燕나라의 북쪽, 즉 지금의 遼西지역 내지는 內蒙古 등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기초로 문헌에 등장하는 여러 종족의 문화적인 특징을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山戎의 주요 거주지인 遼西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田廣金, 2005 : 365~369). 특히 遼西地域 靑銅器文化, 즉 夏家店上層文化와 大凌河 동쪽에 분포하는 遼寧式 銅劍文化를 어느 집단의 문화로 보느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遼西地域의 靑銅器文化 담당자를 古朝鮮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東胡냐 山戎이냐를 놓고 논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송호정, 2003 : 100)(주6) 참조).
닫기
연(燕)나라 주 014
각주 014)
燕 : 武王의 동생인 召公 奭에게 봉해진 나라이다. 河北省으로부터 점차 동북쪽으로 발전하여 戰國時代에 七雄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의 河北省 북부와 遼寧省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후 전222년에 秦나라에 병합되었다.
닫기
를 넘어 제(齊)나라 주 015
각주 015)
齊 : 周나라 武王이 太公望에게 봉해 준 나라이다. 지금의 山東省 북부와 동부에 위치하였다. 齊나라의 영역은 산과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고 도읍지인 臨淄(지금의 濟南) 부근은 커다란 상업도시로 번창하였다. 春秋 初期에 桓公이 管仲의 내정개혁 정책에 힘입어 국력을 키워서 覇主가 될 수 있었다. 靈公 때에는 萊를 멸망시켜 나라를 山東省 동부까지 확장하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닫기
를 공격하니 제나라 희공(釐公) 주 016
각주 016)
齊 釐公(재위 전730~전698) : 이름이 姜祿甫이다. ‘釐’는 통상 ‘禧’와 통한다고 보아서 ‘희’로 읽는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2~1483).
닫기
이 [산융과] 제나라의 국경에서 싸웠다. 이후 44년이 지나주 017
각주 017)
『左傳』에 의하면, 魯 莊公 30년(전664)에 齊가 燕을 괴롭히던 山戎을 쳤다. 따라서 이해는 앞서 설명한 山戎이 齊나라를 공격한 시점(전706년)으로부터 43년 뒤의 일이다.
닫기
산융이 연나라를 쳤다. 연나라는 위급함을 제나라에 알렸고, 제나라 환공(桓公) 주 018
각주 018)
齊 桓公(재위 전685~전643) : 이름은 姜小白으로, 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란으로 형 襄公이 살해된 후, 이복동생 糾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鮑叔牙의 진언으로 糾의 옛 신하인 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그 후 管仲의 협력으로 諸侯와 종종 會盟하여 신뢰를 얻었다. 특히 葵丘에서의 회맹으로 覇者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또 山戎을 쳐서 燕나라를 구하고, 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다. 인근 종족들의 침임으로 멸망한 邢을 夷儀로, 衛를 楚丘로 옮겨 부흥시켰다. 內政에서는 군사적 강화와 상업․수공업의 육성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管仲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에 추방한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으나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6~1494).
닫기
이 북쪽으로 산융을 공격하니 산융이 도망갔다.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나 융적(戎翟)주 019
각주 019)
『史記』에는 “戎狄”으로 되어 있다. ‘翟’과 ‘狄’은 서로 통용하면서 쓴다.
닫기
낙읍까지 와서 주나라 양왕(襄王) 주 020
각주 020)
周 襄王(재위 전651~전619) : 이름은 姬鄭이었다. 襄王은 惠王의 아들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52~154).
닫기
을 치니주 021
각주 021)
周 襄王 16년(전636)의 일이다.
닫기
, 양왕이 나와 정(鄭)나라 주 022
각주 022)
鄭 : 전806년 周나라 宣王의 아우 桓公이 세운 周나라의 封國이다. 처음 鄭(지금의 陝西省 華縣 동쪽)에 있다가 이후에 河南省 新鄭縣으로 옮겨 발전했다. 전375년 韓나라 哀侯에게 망하였다.
닫기
범읍(氾邑) 주 023
각주 023)
氾邑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襄城縣에 있었다. 潁川의 襄城인데, 일찍이 襄王이 그곳에 머물러서 襄城이라 불리게 되었다.
닫기
으로 달아났다. 이전에 주나라 양왕정나라를 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융]적 [추장의] 딸을 왕후로 맞아들여주 024
각주 024)
周 襄王 15년(전637)의 일이다.
닫기
[융]적의 군사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양왕이 적후(翟后)를주 025
각주 025)
『史記』에는 “狄后”로 되어 있다.
닫기
멀리하게 되자 적후가 왕을 원망하게 되었다.주 026
각주 026)
周 襄王 16년(전636)의 일이다.
닫기
그런데 양왕의 계모를 혜후(惠后)라고 하였는데, [그에게는] 자대(子帶)라는 아들이 있어 그를 [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혜후가 적후, 자대와 함께 [몰래 융적과] 내통해 융적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융적은 [도성 안으로] 들어와 [결국] 양왕을 격파하고 내쫓은 다음에 자대를 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융적이 더러 육혼(陸渾) 주 027
각주 027)
陸渾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嵩縣 서남쪽에 있었다. 伊闕의 남쪽에 있는 陸渾山川이다.
닫기
에 살게 되면서 동쪽으로는 위(衛)나라 주 028
각주 028)
衛 : 周나라에서 商나라의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周公의 아우 康叔을 商나라의 옛 도읍 朝歌에 봉해 준 나라이다. 西周 말년, 제8대 頃侯 때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周나라의 幽王 살해되었을 때에 제11대 武公이 周나라 왕실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春秋時代에 이르러서는 齊, 晉, 宋, 魯 등에게서 압박을 받아 점차 쇠퇴하였다. 전600년에는 狄의 침략을 받아 한때 국토를 잃기도 하였다. 교통의 요지를 점유하고 있어 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戰國時代에는 秦과 魏 사이에 끼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전209년 제46대 君角 때 秦나라의 2世 皇帝에게 병합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북부에 있었다.
닫기
에까지 이르러 중국을 침입해 약탈하는 것이 더욱 심하게 되었다. 주나라 양왕은 도성 밖에서 4년이나 살다가주 029
각주 029)
周 襄王이 都城 밖에서 산 것은 사실 단지 1년뿐이다. 즉위 16년(전636)에 나와 鄭에 머물다 17년 삼월 都城으로 돌아와 복위하였다.
닫기
, 사신을 진(晉)나라 주 030
각주 030)
晉 : 周나라의 封國으로 전1106년경 일어나 文公이 楚나라를 격파하고 周나라를 도와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전376년에 韓, 魏, 趙의 세 나라로 분리되었다. 지금의 山西省 지역에 있었다.
닫기
에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당시] 진(晉)나라 문공(文公) 주 031
각주 031)
晉 文公(재위 전636~전628) : 이름이 姬重耳로서 春秋五覇의 두 번째 인물로 이름이 높다(『史記』 권5 「秦本紀」 : 190).
닫기
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패업(覇業)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융적을 쳐서 내쫓은 다음 자대를 죽이고 양왕을 맞아들여주 032
각주 032)
‘内’는 ‘纳’과 통하는데, 晉 文公이 襄王을 맞아들인 것은 文公 2년(전635) 삼월이다.
닫기
낙읍에 살게 하였다.

  • 각주 001)
    幽王(재위 전781~전771) : 이름이 姬宮湦이다. 宣王의 아들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총희 襃姒를 웃기기 위하여 가끔 거짓 烽火를 올리게 하여 諸侯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때문에 犬戎이 침공하였을 때 봉화를 올렸으나 諸侯들이 응하지 않아 驪山 기슭에서 패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사후 아들 平王이 수도를 洛陽으로 옮겨 西周時代는 끝났다(『史記』 권4 「周本紀」 : 145).
     바로가기
  • 각주 002)
    襃姒 : 襃는 나라이름이고, 姒는 姓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申侯 : 西周 말기 申의 諸侯로서 幽王의 后 申氏의 아버지이다. 幽王이 襃姒를 총애하여 申後와 태자 宜臼를 폐하자, 申侯가 犬戎과 연합하여 幽王을 살해하고 宜臼를 平王으로 옹립하였다(『史記』 권4 「周本紀」 : 147~149). 申侯의 封邑은 申城으로 지금 河南 南陽市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麗山 : 지금의 陝西省 臨潼縣 동남쪽에 있다. 이곳은 『史記』에서 ‘驪山’으로 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이렇게 풀이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鹵獲”은 노획하다는 의미인데, 『史記』에는 지명인 ‘焦穫’으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渭水 : 甘肅省 渭源縣에서 발원하여 陝西省 중부를 지나가는 黃河의 支流이다. 지금의 西安과 咸陽을 가로지른다.
     바로가기
  • 각주 007)
    秦 襄公(재위 전781~전771) : 秦나라의 開國始祖로 周 平王을 도와 동천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로 말미암아 諸侯로 책봉되었다(『史記』 권5 「秦本紀」 : 178~195).
     바로가기
  • 각주 008)
    平王(재위 전770~전720) : 幽王의 아들로 이름은 姬宜臼이다. 어머니는 申侯의 딸인 申后이다. 처음에 태자에서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하였다. 西方의 異民族이 강성해져 周나라 영토를 침공하자 전 770년에 鎬京을 버리고 동쪽의 洛邑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 洛邑에서 즉위하여 전720년까지 재위하였다. 그가 東遷한 이후의 시대를 일반적으로 ‘春秋時代’라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49~150).
     바로가기
  • 각주 009)
    周 桓王 14년(전706)의 일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50).
     바로가기
  • 각주 010)
    저본에는 “”로 되어 있는데, 이는 “岐”의 古字로 원문을 ‘岐’로 바꾸었다(주49)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1)
    秦 襄公이 周를 구한 공이 있어 平王이 東遷한 다음에 그의 故地인 酆鄗를 秦襄公에게 주었다. 이때가 襄公 7년(전771)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2)
    東周가 건국된 뒤 65년이 지난 전706년의 일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3)
    山戎은 기원전 8세기 이후 燕나라가 遼寧지역으로 계속 진출하자 遼西에 거주하던 여러 종족이 이에 맞서 燕나라와 山東半島 일대까지 침입하면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山戎은 주로 燕나라의 북쪽, 즉 지금의 遼西지역 내지는 內蒙古 등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기초로 문헌에 등장하는 여러 종족의 문화적인 특징을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山戎의 주요 거주지인 遼西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田廣金, 2005 : 365~369). 특히 遼西地域 靑銅器文化, 즉 夏家店上層文化와 大凌河 동쪽에 분포하는 遼寧式 銅劍文化를 어느 집단의 문화로 보느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遼西地域의 靑銅器文化 담당자를 古朝鮮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東胡냐 山戎이냐를 놓고 논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송호정, 2003 : 100)(주6)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4)
    燕 : 武王의 동생인 召公 奭에게 봉해진 나라이다. 河北省으로부터 점차 동북쪽으로 발전하여 戰國時代에 七雄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의 河北省 북부와 遼寧省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후 전222년에 秦나라에 병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齊 : 周나라 武王이 太公望에게 봉해 준 나라이다. 지금의 山東省 북부와 동부에 위치하였다. 齊나라의 영역은 산과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고 도읍지인 臨淄(지금의 濟南) 부근은 커다란 상업도시로 번창하였다. 春秋 初期에 桓公이 管仲의 내정개혁 정책에 힘입어 국력을 키워서 覇主가 될 수 있었다. 靈公 때에는 萊를 멸망시켜 나라를 山東省 동부까지 확장하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6)
    齊 釐公(재위 전730~전698) : 이름이 姜祿甫이다. ‘釐’는 통상 ‘禧’와 통한다고 보아서 ‘희’로 읽는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2~1483).
     바로가기
  • 각주 017)
    『左傳』에 의하면, 魯 莊公 30년(전664)에 齊가 燕을 괴롭히던 山戎을 쳤다. 따라서 이해는 앞서 설명한 山戎이 齊나라를 공격한 시점(전706년)으로부터 43년 뒤의 일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8)
    齊 桓公(재위 전685~전643) : 이름은 姜小白으로, 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란으로 형 襄公이 살해된 후, 이복동생 糾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鮑叔牙의 진언으로 糾의 옛 신하인 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그 후 管仲의 협력으로 諸侯와 종종 會盟하여 신뢰를 얻었다. 특히 葵丘에서의 회맹으로 覇者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또 山戎을 쳐서 燕나라를 구하고, 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다. 인근 종족들의 침임으로 멸망한 邢을 夷儀로, 衛를 楚丘로 옮겨 부흥시켰다. 內政에서는 군사적 강화와 상업․수공업의 육성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管仲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에 추방한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으나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6~1494).
     바로가기
  • 각주 019)
    『史記』에는 “戎狄”으로 되어 있다. ‘翟’과 ‘狄’은 서로 통용하면서 쓴다.
     바로가기
  • 각주 020)
    周 襄王(재위 전651~전619) : 이름은 姬鄭이었다. 襄王은 惠王의 아들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52~154).
     바로가기
  • 각주 021)
    周 襄王 16년(전636)의 일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2)
    鄭 : 전806년 周나라 宣王의 아우 桓公이 세운 周나라의 封國이다. 처음 鄭(지금의 陝西省 華縣 동쪽)에 있다가 이후에 河南省 新鄭縣으로 옮겨 발전했다. 전375년 韓나라 哀侯에게 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3)
    氾邑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襄城縣에 있었다. 潁川의 襄城인데, 일찍이 襄王이 그곳에 머물러서 襄城이라 불리게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24)
    周 襄王 15년(전637)의 일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5)
    『史記』에는 “狄后”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6)
    周 襄王 16년(전636)의 일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7)
    陸渾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嵩縣 서남쪽에 있었다. 伊闕의 남쪽에 있는 陸渾山川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8)
    衛 : 周나라에서 商나라의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周公의 아우 康叔을 商나라의 옛 도읍 朝歌에 봉해 준 나라이다. 西周 말년, 제8대 頃侯 때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周나라의 幽王 살해되었을 때에 제11대 武公이 周나라 왕실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春秋時代에 이르러서는 齊, 晉, 宋, 魯 등에게서 압박을 받아 점차 쇠퇴하였다. 전600년에는 狄의 침략을 받아 한때 국토를 잃기도 하였다. 교통의 요지를 점유하고 있어 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戰國時代에는 秦과 魏 사이에 끼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전209년 제46대 君角 때 秦나라의 2世 皇帝에게 병합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북부에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29)
    周 襄王이 都城 밖에서 산 것은 사실 단지 1년뿐이다. 즉위 16년(전636)에 나와 鄭에 머물다 17년 삼월 都城으로 돌아와 복위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30)
    晉 : 周나라의 封國으로 전1106년경 일어나 文公이 楚나라를 격파하고 周나라를 도와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전376년에 韓, 魏, 趙의 세 나라로 분리되었다. 지금의 山西省 지역에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31)
    晉 文公(재위 전636~전628) : 이름이 姬重耳로서 春秋五覇의 두 번째 인물로 이름이 높다(『史記』 권5 「秦本紀」 : 190).
     바로가기
  • 각주 032)
    ‘内’는 ‘纳’과 통하는데, 晉 文公이 襄王을 맞아들인 것은 文公 2년(전635) 삼월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유왕(幽王), 포사(襃姒), 신후(申侯), 신후, 유왕, 양공(襄公), 평왕(平王), 양공, 희공(釐公), 환공(桓公), 양왕(襄王), 양왕, 양왕, 양왕, 양왕, 혜후(惠后), 자대(子帶), 혜후, 자대, 양왕, 자대, 양왕, 문공(文公), 자대, 양왕
지명
주나라, 여산(麗山), 주나라, 경수(涇水), 위수(渭水), 진(秦)나라, 주나라, 주나라, 풍호, 낙읍, 진나라, 기[산], 연(燕)나라, 제(齊)나라, 제나라, 제나라, 연나라, 연나라, 제나라, 제나라, 낙읍, 주나라, 정(鄭)나라, 범읍(氾邑), 주나라, 정나라, 정나라, 육혼(陸渾), 위(衛)나라, 주나라, 진(晉)나라, 진(晉)나라, 낙읍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주나라(周) 이후 전국시대 때까지 중원국가와 융적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관계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