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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이사장군 등이 대완정벌의 불가능함을 설명하였으나 천자는 다시 원정을 준비하라고 명령함

  • 국가
    대하(大夏)
이사장군의 군대가 서쪽으로 가서 염수를 지나자 연도의 소국들이 두려워하며 각자 성곽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면서 식량을 주기를 거부했다. 그들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함락할 경우 식량을 얻었지만 함락하지 못할 경우에는 며칠만에 떠났다. 욱성에 다다랐을 때 병사들 가운데 도착한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고, 모두 굶주림에 지쳐 버렸다. 욱성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욱성이 그들을 크게 격파하여 사상자가 아주 많이 발생했다. 이사장군과 이치·조시성 등이 함께 헤아리기를 “욱성에 이르러 이것도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 [나라의] 왕도는 어떻겠는가?”라고 하며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오고 가는 데 2년이 걸렸다. 돈황에 돌아왔을 때 [남은] 병사들은 열 명에 한두 명을 넘지 못했다. [이사장군은] 사신을 보내 글을 올리며 “길은 멀고 식량은 크게 부족할 뿐 아니라, 병사들은 싸울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릴 것을 걱정합니다. 인원도 적어서 대완을 함락하기에는 충분치 못합니다. 바라건대 일단 군대를 해산하되 더 많은 군사를 징발해서 다시 가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천자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 옥문관을 닫게 하고 “군인들 가운데 감히 들어오려는 자가 있으면 즉시 베어 버려라!”고 말했다. 이사[장군]이 두려워하여 돈황에 머물렀다. 그 해 여름 한나라착야후의 군대 2만여 명을 흉노[와의 전투]에서 잃어버리자,주 001
각주 001)
『集解』는 徐廣을 인용하여 “太初 2年(전103)에 趙破奴가 浚稽將軍이 되어 二萬騎로써 匈奴를 공격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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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公卿)들과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대완원정군을 해체하고 오랑캐를 공격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천자는 이미 대완에 원정군을 보냈는데, 대완이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정벌하지 못했으니 대하 등과 같은 나라가 한나라를 가벼이 여길 것이고, 대완의 좋은 말도 끊겨 오지 않을 것이며, 오손과 윤두(侖頭) 주 002
각주 002)
侖頭 : 쿠차 부근에 있던 도시국가이며 『漢書』에 輪臺로 표기된 것과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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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한나라 사신을 쉽사리 괴롭힐 것이니, 외국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에 [천자는] 대완을 정벌하는 것이 매우 적절치 못하다고 말했던 등광(鄧光) 주 003
각주 003)
鄧光 : 이 사건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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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조사하도록 하고, 형도(囚徒)와 재관(材官)주 004
각주 004)
材官 : 秦漢代에 처음 설치된 下位軍職으로 ‘材士’라 칭해지기도 한다. 材官引强·材官蹶張 등의 명칭이 시사하듯이 능히 강한 활을 당기거나 발로 쇠뇌를 당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秦代에는 여러 郡에 두어졌으나, 漢代에는 邊郡에 설치되지 않았다. 23세 이상이 되는 사람들은 材官·騎士로 1년간 근무하고 활을 잘 쏘면 步戰에도 활용되었다. 이들은 평시에 농사를 짓고 살지만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다가, 전쟁이 발생하면 징집되어 京師나 邊方의 방위에 배치된다. 그러나 『漢書』 卷61의 같은 구절에는 材官에 대한 언급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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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사면하고 더욱 많은 수의 불량배들과 변방의 기병들을 동원하여, 1년 남짓 지나서 돈황을 나서는 자가 6만 명을 헤아렸는데, [스스로 경비를] 부담하고 사사로이 따르는 사람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소가 10만 두, 말이 3만여 필, 나귀와 노새와 낙타가 만 필을 헤아렸다. 식량을 많이 가져갔고 병사와 장비도 단단히 준비했다. 천하가 시끌법석했고 대완원정[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전달한 교위(校尉)들이 대략 50여 명에 달했다. 대완의 왕성 안에는 우물이 없어 모두 성 바깥에 흐르는 물을 끌어서 쓰는데, 이에 수공(水工)을 보내서 그 성 아래의 수로를 바꾸어 그 성의 물을 고갈케 하였다.주 005
각주 005)
“대완의 왕성 안에는……”부터 시작되는 이 문장은 사실 다음 단락에 나오는 大宛의 國都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장면에 삽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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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병사 18만 명을 더 징발하여 주천장액(張液) 주 006
각주 006)
張掖 : 漢武帝가 武威郡을 나누어 설치한 郡名으로 ‘張國臂掖(나라의 팔과 겨드랑이를 펼친다.)’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治所는 觻得縣(현재의 감숙성 張掖市 西北)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감숙성 高臺縣 以東, 弱水 上流, 內蒙古 額濟納(에치나)旗 지역이었다. 一說에 의하면 酒泉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며, 轄境은 보다 후에 설치된 武威郡의 관할구역까지 포함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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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에 주둔케 하고, 거연(居延) 주 007
각주 007)
居延 : 내몽골 에치나[額濟納]旗 東南에 위치. 張掖郡에 소속되었으며 郡都尉의 治所가 있었다. 張掖의 북쪽으로 흐르는 居延河(額濟納河, Etsin Gol)이 모여서 형성된 호수 居延海가 부근에 있는데, 漢代에는 ‘居延澤’이라 불리웠다. 1930년 居延河 兩岸과 부근의 黑城(Qaraqoto)에서 西北科學考察團이 1만여 매의 漢簡을 발견했고, 1972 ~ 76년에 다시 2만여 매에 가까운 簡牘資料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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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도(休屠) 주 008
각주 008)
休屠 : 匈奴의 休屠王이라는 명칭에서 기원한 것이며, 이에 관해서는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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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현]을 설치하여 주천을 방위하도록 하였다.주 009
각주 009)
衛酒泉’ 『集解』는 如淳을 인용하여 “二縣을 세워서 변방을 보위하였다. 혹은 二部都尉를 두어서 酒泉을 방위하였다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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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천하의 7종류의 죄인들[七科適]주 010
각주 010)
七科適 : 『正義』는 張晏을 인용하여 “죄지은 吏가 하나요, 亡命者가 둘이요, 贅壻가 셋이요, 賈人이 넷이요, 市籍者가 다섯이요, 父母가 市籍者인 경우가 여섯이요, 大父母가 市籍者인 경우가 일곱이니, [이것들이] 七科이다. 武帝 天漢 4年(전97)에 天下의 七科讁을 징발하여 朔方으로 내보냈다.”라고 설명했다. 市籍者를 이 가운데 포함시킨 것은 商人으로서 市籍에 등록된 사람들을 罪人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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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징발하여 식량을 싣고 이사에게 공급하도록 했다. 운반하는 수레와 사람들이 서로 연이어 돈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말에 익숙한 사람 2명을 집구교위(執驅校尉)주 011
각주 011)
執驅校尉 : 여기 이외에는 다른 용례가 보이지 않으나, 문자 그대로 馬匹을 관장하는 校尉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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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명하여, 대완을 정벌한 뒤 그 선마를 선택하여 취할 것에 대비하였다.

  • 각주 001)
    『集解』는 徐廣을 인용하여 “太初 2年(전103)에 趙破奴가 浚稽將軍이 되어 二萬騎로써 匈奴를 공격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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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侖頭 : 쿠차 부근에 있던 도시국가이며 『漢書』에 輪臺로 표기된 것과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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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鄧光 : 이 사건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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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材官 : 秦漢代에 처음 설치된 下位軍職으로 ‘材士’라 칭해지기도 한다. 材官引强·材官蹶張 등의 명칭이 시사하듯이 능히 강한 활을 당기거나 발로 쇠뇌를 당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秦代에는 여러 郡에 두어졌으나, 漢代에는 邊郡에 설치되지 않았다. 23세 이상이 되는 사람들은 材官·騎士로 1년간 근무하고 활을 잘 쏘면 步戰에도 활용되었다. 이들은 평시에 농사를 짓고 살지만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다가, 전쟁이 발생하면 징집되어 京師나 邊方의 방위에 배치된다. 그러나 『漢書』 卷61의 같은 구절에는 材官에 대한 언급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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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대완의 왕성 안에는……”부터 시작되는 이 문장은 사실 다음 단락에 나오는 大宛의 國都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장면에 삽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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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張掖 : 漢武帝가 武威郡을 나누어 설치한 郡名으로 ‘張國臂掖(나라의 팔과 겨드랑이를 펼친다.)’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治所는 觻得縣(현재의 감숙성 張掖市 西北)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감숙성 高臺縣 以東, 弱水 上流, 內蒙古 額濟納(에치나)旗 지역이었다. 一說에 의하면 酒泉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며, 轄境은 보다 후에 설치된 武威郡의 관할구역까지 포함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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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居延 : 내몽골 에치나[額濟納]旗 東南에 위치. 張掖郡에 소속되었으며 郡都尉의 治所가 있었다. 張掖의 북쪽으로 흐르는 居延河(額濟納河, Etsin Gol)이 모여서 형성된 호수 居延海가 부근에 있는데, 漢代에는 ‘居延澤’이라 불리웠다. 1930년 居延河 兩岸과 부근의 黑城(Qaraqoto)에서 西北科學考察團이 1만여 매의 漢簡을 발견했고, 1972 ~ 76년에 다시 2만여 매에 가까운 簡牘資料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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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休屠 : 匈奴의 休屠王이라는 명칭에서 기원한 것이며, 이에 관해서는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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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衛酒泉’ 『集解』는 如淳을 인용하여 “二縣을 세워서 변방을 보위하였다. 혹은 二部都尉를 두어서 酒泉을 방위하였다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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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七科適 : 『正義』는 張晏을 인용하여 “죄지은 吏가 하나요, 亡命者가 둘이요, 贅壻가 셋이요, 賈人이 넷이요, 市籍者가 다섯이요, 父母가 市籍者인 경우가 여섯이요, 大父母가 市籍者인 경우가 일곱이니, [이것들이] 七科이다. 武帝 天漢 4年(전97)에 天下의 七科讁을 징발하여 朔方으로 내보냈다.”라고 설명했다. 市籍者를 이 가운데 포함시킨 것은 商人으로서 市籍에 등록된 사람들을 罪人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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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執驅校尉 : 여기 이외에는 다른 용례가 보이지 않으나, 문자 그대로 馬匹을 관장하는 校尉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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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이치, 조시성, 착야후, 등광(鄧光)
지명
염수, 욱성, 욱성, 욱성, 욱성, 돈황, 대완, 돈황, 한나라, 대완, 대완, 한나라, 대완, 윤두(侖頭), 한나라, 대완, 돈황, 대완, 주천, 장액(張液), 거연(居延), 휴도(休屠), 주천, 돈황, 대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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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군 등이 대완정벌의 불가능함을 설명하였으나 천자는 다시 원정을 준비하라고 명령함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80_0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