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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홍(公孫弘)이 서남이의 경영대신 흉노문제에 전력하는게 좋다고 하자 황제가 서이(西夷) 경영을 포기함

  • 국가
    서남이(西南夷)
이때에 이르러 파(巴)촉(蜀)의 4군(郡)주 001
각주 001)
『集解』에서徐廣이 말하기를, “(그 4郡은) 漢中郡, 巴郡, 廣漢郡, 蜀郡이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漢中, 巴郡, 廣漢, 蜀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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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서이도(西夷道)와 남이도(南夷道)의 개통을 위해 수자리 보낼 병사들을 [도로 개착 공사에] 돌리고 그 군량을 제공하였다. 몇 해가 지나도 길이 통하지 않자, 병사 중에 고달프고 굶주려 유리하거나, 습한 기운 때문에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주 002
각주 002)
『考證』은 위 문장을 『한서』와 비교하여, 『漢書』에서는 “戍”를 “載”라 적었고, “離” 위에 “餧”字가 있으며, “溼” 위에 “暑”字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正義』本에는 ‘溼’을 ‘漯’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고증』이 말하는 『정의』본의 注는 三家本에는 없는 것이다. 이 『正義』 注는 “漯의 音은 溫이며, 士卒이 여름의 열기 때문에 죽는 경우가 많음을 말한다(漊, 音溫. 言士卒歷暑熱氣而死者衆多也).”라고 하였다. 『雲南史料叢刊』의 徐文德은 이 조는 黃本·殿本 및 標點本에 모두 없다고 하였다(方國瑜, 1998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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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이(西南夷) 또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대를 동원하여 쳤으나, 비용만 소모할 뿐 공(功)이 없었다. 상(上)이 이 사태를 걱정하여, 공손홍(公孫弘) 주 003
각주 003)
公孫弘 : 전200 ~ 전121. 漢代 武帝時 丞相을 지냈다. 淄川國 薛縣(지금의 山東 滕州 南部) 사람으로 출신이 貧寒하였다. 젊을 때 옥리가 되었다가, 죄를 얻어 면직되어, 돼지치기로 생업을 삼았다. 40여 세에 『春秋』雜說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漢武帝 때에 賢良과 文學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淄川國의 추천을 얻어 현량으로 박사에 임용되었다. 나중에 흉노에 사신으로 간 일로 무제의 뜻을 거슬러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元光 5年(전130)에 다시 현량문학으로 천거되었는데, 대책에서 일등으로 뽑혀 博士에 제수되고 待詔金馬門에 임명되었다. 元朔 3年(전126)에 御史大夫로 승진하였으며, 5年에 丞相이 되었다. 한초에는 늘 공신열후 혹은 그 후사가 승상에 임명되었는데, 공손홍은 布衣로서 승상의 위에 발탁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따라서, 武帝는 특별히 詔를 내려 그를 平津侯로 封하였고, 이후 승상을 열후에 봉하는 것은 常制가 되었다. 元狩 2年(전121)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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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가서 조사하여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는 돌아와 대답하여 그 불리함을 말하였다. 공손홍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을 때, 마침 삭방군(朔方郡) 주 004
각주 004)
朔方郡 : 西漢 元朔 2년(전127)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朔方縣(內蒙古 杭錦旗 북 什拉召 일대)에 있었다. 그 강역은 오늘날의 內蒙古 伊克昭盟 西北部 및 巴彦淖尒盟 后套지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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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성(城)을 쌓고 황하를 경계로 호(胡)주 005
각주 005)
여기에서의 ‘胡’는 匈奴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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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축출하려 하였다. 공손홍은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서남이 경영의 해(害)를 말하였는데, 장차 [서남이 경영을] 포기하고 흉노(匈奴) 문제에 전력(專力)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황제가 서이(西夷) 경영은 포기하였으며, 오직 남이(南夷)야랑(夜郞) 두 현(縣)에 도위 하나만 설치하여 두고,주 006
각주 006)
『集解』에서徐廣이 말하기를, “元光 6年(前129)에 南夷에 비로소 郵와 亭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元光六年, 南夷始置郵亭」). 이것이 사실이라면, 수년간의 남이도 공사에 어느 정도의 진척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서이도 경영이 완전히 포기된 데 비하여, 남이도 경영은 잠정 보류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선에서 정리된 듯하다. 『考證』은 이 부분 문장 중 다른 판본 및 『한서』와 다른 부분을 지적하여, “罷” 위에, 楓·三本에는 “許” 자가 있고, 『漢書』에는 “許之” 두 字가 있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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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건위군으로 하여금 스스로 지키고 [군현을] 이루어가도록 하였다.주 007
각주 007)
『正義』에서는 ‘稍令犍爲自葆就’를 “犍爲에게 스스로 지키게 하고, 점차 (기반을) 닦아 그 郡縣을 이루도록 하였다.”라고 해석하였다(令犍爲自葆守, 而漸修成其郡縣也). 『考證』은 ‘葆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漢書』에서는 葆를 保로 적었다. 王念孫이 말하기를, “‘葆就’는 ‘保聚’와 같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7). 『考證』본의 『史記』는 ‘葆就’를 ‘夷就’라고 적고 있지만, 『고증』의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건대, 단순한 실수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雲南史料叢刊』의 徐文德은 각 판본이 모두 “葆就”로 적고 있는데, 오직 『會證』본만이 “夷就”로 적고 있는데, 아마도 잘못인 것 같다고 했다(方國瑜, 1998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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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集解』에서徐廣이 말하기를, “(그 4郡은) 漢中郡, 巴郡, 廣漢郡, 蜀郡이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漢中, 巴郡, 廣漢, 蜀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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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考證』은 위 문장을 『한서』와 비교하여, 『漢書』에서는 “戍”를 “載”라 적었고, “離” 위에 “餧”字가 있으며, “溼” 위에 “暑”字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正義』本에는 ‘溼’을 ‘漯’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고증』이 말하는 『정의』본의 注는 三家本에는 없는 것이다. 이 『正義』 注는 “漯의 音은 溫이며, 士卒이 여름의 열기 때문에 죽는 경우가 많음을 말한다(漊, 音溫. 言士卒歷暑熱氣而死者衆多也).”라고 하였다. 『雲南史料叢刊』의 徐文德은 이 조는 黃本·殿本 및 標點本에 모두 없다고 하였다(方國瑜, 1998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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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公孫弘 : 전200 ~ 전121. 漢代 武帝時 丞相을 지냈다. 淄川國 薛縣(지금의 山東 滕州 南部) 사람으로 출신이 貧寒하였다. 젊을 때 옥리가 되었다가, 죄를 얻어 면직되어, 돼지치기로 생업을 삼았다. 40여 세에 『春秋』雜說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漢武帝 때에 賢良과 文學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淄川國의 추천을 얻어 현량으로 박사에 임용되었다. 나중에 흉노에 사신으로 간 일로 무제의 뜻을 거슬러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元光 5年(전130)에 다시 현량문학으로 천거되었는데, 대책에서 일등으로 뽑혀 博士에 제수되고 待詔金馬門에 임명되었다. 元朔 3年(전126)에 御史大夫로 승진하였으며, 5年에 丞相이 되었다. 한초에는 늘 공신열후 혹은 그 후사가 승상에 임명되었는데, 공손홍은 布衣로서 승상의 위에 발탁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따라서, 武帝는 특별히 詔를 내려 그를 平津侯로 封하였고, 이후 승상을 열후에 봉하는 것은 常制가 되었다. 元狩 2年(전121)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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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朔方郡 : 西漢 元朔 2년(전127)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朔方縣(內蒙古 杭錦旗 북 什拉召 일대)에 있었다. 그 강역은 오늘날의 內蒙古 伊克昭盟 西北部 및 巴彦淖尒盟 后套지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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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여기에서의 ‘胡’는 匈奴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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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集解』에서徐廣이 말하기를, “元光 6年(前129)에 南夷에 비로소 郵와 亭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元光六年, 南夷始置郵亭」). 이것이 사실이라면, 수년간의 남이도 공사에 어느 정도의 진척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서이도 경영이 완전히 포기된 데 비하여, 남이도 경영은 잠정 보류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선에서 정리된 듯하다. 『考證』은 이 부분 문장 중 다른 판본 및 『한서』와 다른 부분을 지적하여, “罷” 위에, 楓·三本에는 “許” 자가 있고, 『漢書』에는 “許之” 두 字가 있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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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正義』에서는 ‘稍令犍爲自葆就’를 “犍爲에게 스스로 지키게 하고, 점차 (기반을) 닦아 그 郡縣을 이루도록 하였다.”라고 해석하였다(令犍爲自葆守, 而漸修成其郡縣也). 『考證』은 ‘葆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漢書』에서는 葆를 保로 적었다. 王念孫이 말하기를, “‘葆就’는 ‘保聚’와 같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7). 『考證』본의 『史記』는 ‘葆就’를 ‘夷就’라고 적고 있지만, 『고증』의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건대, 단순한 실수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雲南史料叢刊』의 徐文德은 각 판본이 모두 “葆就”로 적고 있는데, 오직 『會證』본만이 “夷就”로 적고 있는데, 아마도 잘못인 것 같다고 했다(方國瑜, 1998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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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공손홍(公孫弘), 공손홍, 공손홍
지명
파(巴), 촉(蜀), 삭방군(朔方郡), 황하, 남이(南夷), 야랑(夜郞), 건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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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홍(公孫弘)이 서남이의 경영대신 흉노문제에 전력하는게 좋다고 하자 황제가 서이(西夷) 경영을 포기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6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