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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누선장군(양복)과 복파장군(노박덕)이 월을 공격하고 이후 여가와 건덕을 사로잡음

  • 국가
    남월(南越)
원정(元鼎) 6년(전111) 겨울 누선장군이 정예병사를 이끌고 먼저 심협(尋陝) 주 001
각주 001)
尋陝 : 『索隱』은 姚氏의 말을 인용하여 尋陝은 始興 서쪽 300리에 위치하며 連口에 가깝다고 하였다(索隱姚氏云 : 「尋陝在始興西三百里, 近連口也). 『考證』의 丁謙에 의하면, 尋陜은 곧 韶州 英德縣 남쪽에 있는 湞陽峽을 말한다. 또, 『方輿紀要』 권101 淸遠縣 ‘峽山’條에 “觀亭山在縣東三十五里. 一名觀峽山. 或云卽峽山之支麓, 或謂之尋陜”이라고 하였다. 현재 위치로는 廣東省 淸遠市 동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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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함락시키고 석문(石門) 주 002
각주 002)
石門 : 『索隱』은 石門에 대해 『廣州記』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番禺縣 북쪽 30리에 있다. 옛날 여가가 한에 대항하여 싸울 때 돌을 쌓아 강을 메워서 석문이라 이름을 붙였다. 또, 세속에서는 石門水를 ‘탐천(貪泉)’이라 하였는데, 그 물을 마시면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吳隱之가 石門에 이르러 그 물을 떠서 마시고 곧바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索隱按 : 廣州記 「在番禺縣北三十里. 昔呂嘉拒漢, 積石鎭江, 名曰石門. 又俗云石門水名曰 『貪泉』, 飮之則令人變. 故吳隱之至石門, 酌水飮, 乃爲之歌云也」)” 또, 『方輿紀要』 권101 廣州府를 보면 石門山은 “두 산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문과 같다(兩山對峙如門).”이라 하여 石門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의 廣東省 廣州市 西北 30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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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격파하였다. 남월 배의 군량미를 노획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전진하여 남월의 선봉을 꺾고,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파(伏波)장군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복파장군은 죄수들을 거느린데다 [행군한] 거리가 너무 멀어 약속한 기일에 늦게 되었다. 누선장군과 만났을 때에는 겨우 천여 명 정도의 군사가 있었고 마침내 [합류하여] 함께 행진하였다. 누선장군이 앞장을 서서 번우에 이르렀다. 건덕(建德)여가(呂嘉)는 모두 성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누선장군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여 동남쪽에 진을 쳤고, 복파장군은 서북쪽에 진을 치게 되었다. 때마침 날이 저물자 누선장군이 월나라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성을 불태워 버렸다. 남월 사람들은 평소 복파장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게다가 날이 저물자 그의 병사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복파장군은 곧바로 영루를 세워 사자를 보내 항복해 오는 자들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인(印)을 하사하고는 다시 풀어 줘 항복한 자들을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누선장군이 전력을 다해 적을 공격하고 성을 불태운 것이 오히려 남월 사람들을 복파장군 진영으로 몰아간 꼴이 되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犂旦]주 003
각주 003)
犂旦 : 원문은 ‘犂旦’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集解』는 徐廣을 인용하여 ‘犂’를 ‘ ~ 까지 이어지다, 미치다’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漢書』도 ‘犂旦’이 ‘遲旦’으로 되어 있어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때를 말하고 있다. 『索隱』은 ‘犂’의 의미를 검다[黑]로 해석, 날이 미처 밝기 전 어두운 때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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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성안 사람들 모두 복파장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여가건덕은 이미 밤을 타서 자신의 일속 백여 명을 데리고 도망쳐 바다로 들어가 배를 타고 서쪽으로 사라졌다. 복파장군은 또한 항복해 온 자들 중 귀인(貴人)들에게 여가가 도망친 곳이 어디인지를 물어본 다음 사람을 시켜 그 뒤를 추적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교위(校尉)의 사마(司馬)주 004
각주 004)
故校尉司馬 : 『考證』은 朱一新의 말을 인용하여 ‘故校尉司馬’를 ‘이 때문에 校尉였다가 이제 軍司馬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漢書』에는 ‘故其校司馬’로 되어 있고, 顔師古는 “校의 司馬이다. 지금의 행군총관사마이다(校之司馬, 若今行軍總管司馬也).”라고 해석하였다. 「功臣表」에 蘇弘은 伏波司馬로 南越王 建德侯를 잡았다고 되어 있어, 이것을 참조하면 顔師古의 해석처럼 伏波장군 휘하 校尉의 司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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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홍(蘇弘) 주 005
각주 005)
蘇弘 :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 ‘海常侯’조에 의하면, 伏波司馬로 南越王 乾德을 잡은 공으로 侯가 되었고, 元封 6년 7월 乙酉일에 莊侯 蘇弘의 원년이 되었으며, 太初 元年에 蘇弘이 사망하고 후사가 없어 國이 폐지되었다. 「高祖功臣侯者年表」의 『索隱』에 의하면, ‘莊侯’는 項籍을 참한 五侯에게 내려진 시호인데, 「建元以來侯者年表」에는 南越王 建德을 잡은 蘇弘과 東越의 循北將軍을 잡은 轅終古 외에는 莊侯의 시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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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덕을 잡은 공로로 해상후(海常侯) 주 006
각주 006)
海常侯 : 『集解』의 徐廣에 의하면 東萊에 있다. 食邑이 東萊郡에 있다는 말인데, 東萊郡의 郡治는 지금 山東省 掖縣에 있다. 일설에는 그 食邑이 琅邪郡에 있다고도 하는데, 琅邪郡의 郡治는 山東省 諸縣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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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봉해졌고, 의 랑(郞)주 007
각주 007)
越郞 : 『集解』의 徐廣에 의하면 南越의 郎官을 말한다. 郞은 본래 王宮을 지키는 衛士였는데, 前漢 때에는 이미 직장이 명문화되어 황제 혹은 왕국의 막료로 충당되었다. 한조정과 마찬가지로 王國의 郎官은 郎中과 中郞, 侍郞이 있었으며, 『漢官儀』에 의하면, 秩祿은 이백 석이었다. 「百官公卿表」에는 “景帝中五年令諸侯王不得復治國, 天子爲置吏, …… 郎諸官長丞皆損其員”이라고 하여, 景帝 中元 5년에 王國의 郎官의 숫자를 감축했다고 전한다(吳榮曾, 앞의 글,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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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都稽) 주 008
각주 008)
都稽 : 『漢書』 「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는 孫都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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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를 잡은 공로로 임채후(臨蔡侯) 주 009
각주 009)
臨蔡侯 :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에는 실려 있지 않고, 『漢書』 「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臨蔡侯는 河內郡 소속이며, 식읍이 千戶로 되어 있다. 河內郡의 治所는 懷縣, 즉 현재의 河南省 武陟縣 서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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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봉해졌다.

  • 각주 001)
    尋陝 : 『索隱』은 姚氏의 말을 인용하여 尋陝은 始興 서쪽 300리에 위치하며 連口에 가깝다고 하였다(索隱姚氏云 : 「尋陝在始興西三百里, 近連口也). 『考證』의 丁謙에 의하면, 尋陜은 곧 韶州 英德縣 남쪽에 있는 湞陽峽을 말한다. 또, 『方輿紀要』 권101 淸遠縣 ‘峽山’條에 “觀亭山在縣東三十五里. 一名觀峽山. 或云卽峽山之支麓, 或謂之尋陜”이라고 하였다. 현재 위치로는 廣東省 淸遠市 동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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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石門 : 『索隱』은 石門에 대해 『廣州記』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番禺縣 북쪽 30리에 있다. 옛날 여가가 한에 대항하여 싸울 때 돌을 쌓아 강을 메워서 석문이라 이름을 붙였다. 또, 세속에서는 石門水를 ‘탐천(貪泉)’이라 하였는데, 그 물을 마시면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吳隱之가 石門에 이르러 그 물을 떠서 마시고 곧바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索隱按 : 廣州記 「在番禺縣北三十里. 昔呂嘉拒漢, 積石鎭江, 名曰石門. 又俗云石門水名曰 『貪泉』, 飮之則令人變. 故吳隱之至石門, 酌水飮, 乃爲之歌云也」)” 또, 『方輿紀要』 권101 廣州府를 보면 石門山은 “두 산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문과 같다(兩山對峙如門).”이라 하여 石門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의 廣東省 廣州市 西北 30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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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犂旦 : 원문은 ‘犂旦’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集解』는 徐廣을 인용하여 ‘犂’를 ‘ ~ 까지 이어지다, 미치다’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漢書』도 ‘犂旦’이 ‘遲旦’으로 되어 있어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때를 말하고 있다. 『索隱』은 ‘犂’의 의미를 검다[黑]로 해석, 날이 미처 밝기 전 어두운 때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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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故校尉司馬 : 『考證』은 朱一新의 말을 인용하여 ‘故校尉司馬’를 ‘이 때문에 校尉였다가 이제 軍司馬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漢書』에는 ‘故其校司馬’로 되어 있고, 顔師古는 “校의 司馬이다. 지금의 행군총관사마이다(校之司馬, 若今行軍總管司馬也).”라고 해석하였다. 「功臣表」에 蘇弘은 伏波司馬로 南越王 建德侯를 잡았다고 되어 있어, 이것을 참조하면 顔師古의 해석처럼 伏波장군 휘하 校尉의 司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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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蘇弘 :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 ‘海常侯’조에 의하면, 伏波司馬로 南越王 乾德을 잡은 공으로 侯가 되었고, 元封 6년 7월 乙酉일에 莊侯 蘇弘의 원년이 되었으며, 太初 元年에 蘇弘이 사망하고 후사가 없어 國이 폐지되었다. 「高祖功臣侯者年表」의 『索隱』에 의하면, ‘莊侯’는 項籍을 참한 五侯에게 내려진 시호인데, 「建元以來侯者年表」에는 南越王 建德을 잡은 蘇弘과 東越의 循北將軍을 잡은 轅終古 외에는 莊侯의 시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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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海常侯 : 『集解』의 徐廣에 의하면 東萊에 있다. 食邑이 東萊郡에 있다는 말인데, 東萊郡의 郡治는 지금 山東省 掖縣에 있다. 일설에는 그 食邑이 琅邪郡에 있다고도 하는데, 琅邪郡의 郡治는 山東省 諸縣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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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越郞 : 『集解』의 徐廣에 의하면 南越의 郎官을 말한다. 郞은 본래 王宮을 지키는 衛士였는데, 前漢 때에는 이미 직장이 명문화되어 황제 혹은 왕국의 막료로 충당되었다. 한조정과 마찬가지로 王國의 郎官은 郎中과 中郞, 侍郞이 있었으며, 『漢官儀』에 의하면, 秩祿은 이백 석이었다. 「百官公卿表」에는 “景帝中五年令諸侯王不得復治國, 天子爲置吏, …… 郎諸官長丞皆損其員”이라고 하여, 景帝 中元 5년에 王國의 郎官의 숫자를 감축했다고 전한다(吳榮曾, 앞의 글,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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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都稽 : 『漢書』 「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는 孫都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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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臨蔡侯 : 『史記』 「建元以來侯子年表」에는 실려 있지 않고, 『漢書』 「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臨蔡侯는 河內郡 소속이며, 식읍이 千戶로 되어 있다. 河內郡의 治所는 懷縣, 즉 현재의 河南省 武陟縣 서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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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여가, 건덕, 여가, 소홍(蘇弘), 건덕, 해상후(海常侯), 도계(都稽), 여가, 임채후(臨蔡侯)
지명
심협(尋陝), 석문(石門), 남월, 남월, 번우, 건덕(建德), 여가(呂嘉), 월나라, 남월, 남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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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선장군(양복)과 복파장군(노박덕)이 월을 공격하고 이후 여가와 건덕을 사로잡음 자료번호 : jo.k_0001_0113_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