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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을 한나라의 내제후와 같게 하고 왕과 왕태후를 입조하도록 함

 
  • 국가남월(南越)
태자인 조흥(趙興)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태후가 되었다. 그런데 태후는 영제의 희첩(姬妾)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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姬妾 : 『漢書』 「文帝本紀」 ‘薄姬’조에 대한 주에 如淳은 姬를 妾의 총칭으로 해석, 그 근거를 『漢官儀』의 ‘姬妾數百’과 「外戚傳」의 ‘幸姬戚夫人’을 들고 있다. 그런데 臣瓚은 姬를 내관으로 해석, 그 근거를 「漢祿祿令」과 「茂陵書」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姬의 秩祿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婕妤의 뒤이자 八子의 앞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顔師古는 姬는 본래 周의 姓에서 유래되어 夫人의 美稱이었는데, 뒤에 妾의 총칭으로 변하였다고 보고 「外戚傳」 어느곳에도 姬가 관직명으로 제시된 것이 없다고 하여 臣瓚이 주장한 內官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명에 따르면 영제가 장안에서 취한 규씨녀를 희첩의 신분으로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되기 전에 일찍이 패릉(霸陵)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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霸陵 : 縣名이다. 前漢 文帝 9년(전171) 芷陽縣을 霸陵縣으로 개명하였다(『漢書』 「地理志」, “霸陵, 故芷陽, 文帝更名”). 京兆尹 소속이다. 治所는 현재 陝西省 西安市 東新市村 부근이다. 孝文帝 劉恒의 陵墓인 霸陵에서 지역의 이름을 삼았다.

사람 안국소계(安國少季)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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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國少季 : 『索隱』에 의하면, 安國은 姓이고 少季는 이름이다.

와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영제가 죽은 뒤 원정(元鼎) 4년(전113)에 한(漢)안국 소계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왕과 왕태후에게 내제후처럼 입조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리고 변사(辯士)인 간대부(諫大夫)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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諫大夫 : 郎中令 소속으로 秩은 比八百石이며 정원은 없다. 諫大夫는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元狩 5년(119년)에 처음 설치하였다고 한다.

종군(終軍)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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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軍 : 終軍(전133 ~ 112)의 자는 子雲, 濟南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博聞强記하여 문필로 郡中에 이름이 나 18세에 博士弟子에 추천되었다. 長安에 도착한 뒤에는 匈奴로 갈 사신에 자원한 일을 계기로 武帝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남월 공략에도 자청하여 출사하였다. 이때의 南越 出使 때 呂嘉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의 사적에 대해서는, 『史記』에는 立傳되어 있지 않고, 『漢書』 「終軍傳」에 상세하다.

등에게는 직접 황제의 뜻을 말하도록 하고 용사(勇士)인 위신(魏臣) 등에게는 곁에서 신속히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돕도록 하였으며,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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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는 ‘輔其缺’, 즉 ‘부족한 부분을 돕도록’ 되어 있으나 『集解』에서 인용된 徐廣의 말처럼 어떤 곳은 缺이 ‘決’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漢書』에는 ‘決’로 되어 있어 顔師古注는 “助令決策也”, 즉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돕도록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부족한 부분을 돕도록 하였다는 것도 통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문맥상 南越國의 王과 신하들이 내속을 신속히 결정할 수 있게 부추겼다는 의미가 다분해서 顔師古의 주석을 따랐다.

위위(衛尉)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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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尉 : 漢代 황궁을 지키는 직관으로 원래 秦官이었다. 景帝 때 中大夫令으로 개칭된 적이 있으나 후에 다시 개명되었다. 본 직무는 衛士를 거느리고 황궁을 지키는 관직이나 유사시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파견나가기도 한다. 秩 中二千石으로 九卿 중의 하나이다.

노박덕(路博德)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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路博德 : 生卒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西河 平州(현재의 山西省 离石) 사람이다. 武帝 元狩 4년(전119)에 霍去病을 따라 匈奴 원정에 나서 공을 세워 邳離侯에 봉해졌다. 元鼎 6년(전111)에 伏波將軍에 임명되어 남월을 평정하였고, 다음해인 기원전 110년 海南島를 공격하여 이곳에 珠崖郡과 儋耳郡 2郡을 설치함으로써 해남 통치의 서막을 열었다. 『史記』 「衛將軍驃騎列傳」에는 强弩都尉가 되어 居延에 주둔하다가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계양(桂陽)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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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陽 : 桂陽郡을 말하며 治所는 郴縣(현재의 湖南省 郴州)이다.

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사자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왕이 어린데다가 태후가 중국인이었고 또 안국소계와 정을 통한 사이라 그가 사신으로 오자 다시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대부분 태후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후는 나라에 난이 일어날까 두려웠고, 또 한(漢)의 위세를 빌리려고 여러 번 왕과 신하들에게 에 내속할 수 있도록 청하라고 권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사신을 통해 상서하여 내제후가 하듯 삼 년에 한 번 입조하고 변방에 설치된 관을 철폐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천자는 이를 허락하고 승상(丞相) [주010]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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丞相 : 漢初 諸侯王國의 丞相은 처음에는 ‘相國’이라 하였다가 惠帝 元年 제후국의 相國法을 폐지하고 丞相으로 개명되었다. 또, 景帝 中原 5년에는 丞相을 ‘相’으로 개칭하였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왕국 승상의 직책은 “統衆官”, 즉 왕의 보좌역할로 그 권한이 막대하였다. 『漢官儀』에는 “帝子爲王. 王國置太傅, 相, 中尉各一人, 秩二千石, 以輔王.……皆官如漢官官吏”라고 하였다. 그 秩祿은 賈誼 『新書』 「等齊」에 의하면, “天子之相, 號爲丞相, 黃金之印;諸侯之相, 號爲丞相, 黃金之印, 而尊無異等, 秩加二千石之上”이라고 하여 천자나 제후의 경우 똑같이 丞相이라 하고 金印을 사용하며 秩祿은 二千石 이상이라 하였다. 이것을 보면 文帝 때까지는 王國 丞相의 秩祿과 지위는 天子의 丞相과 차이가 없었는데, 景帝 때 吳楚七國의 난 이후 諸侯王國의 丞相을 相으로, 金印을 銀印으로, 秩祿은 二千石 이상에서 二千石으로 강등조치를 취하였다(吳榮曾, 「西漢王國官制考實」, 『北京大學學報』, 1990年第3期 참조). 이 구절에서 南越의 丞相인 呂嘉에게 銀印을 下賜하였다고 하였으니, 景帝 이후에도 南越에서는 적어도 호칭과 印綬 등을 변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가(呂嘉)에게 은인(銀印)을 하사하고 내사(內史) [주011]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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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史 :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王國 內史의 주요 職掌은 “治國民”이다. 王國의 內史는 王國내의 民의 호적을 관장하고 지방관인 縣令과 직접 종속관계에 있다. 王國의 內史는 또한 刑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王國의 內史는 漢 조정의 內史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즉, 漢의 內史는 京師의 內治를 담당하여 丞相과 御史가 중추를 담당한 것과 달리 王國의 內史는 漢의 丞相과 御史와 같이 왕을 보좌하는 관리였다.(吳榮曾, 앞의 글) 『漢官儀』에 의하면, 秩祿은 二千石이고, 成帝 綏和 元年(전8)때 內史를 폐지하고 相이 太守처럼 治國을 담당하게 되었다.

와 중위(中尉) [주012]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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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尉 : 王國의 中尉는 軍事를 담당, 왕국의 軍吏는 모두 中尉에 의해 통속되었다. 따라서, 왕국에서 출병할 때 將軍은 언제나 中尉에서 담당하였다. 이처럼 中尉는 王國 내에서는 相과 內史 다음으로 중요한 요직이었다(吳榮曾, 앞의 글). 秩祿은 相, 太傅와 함께 二千石이다.

, 태부(太傅) [주013]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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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傅 : 王國의 太傅는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왕의 보좌를 담당, 王國에서 그 지위는 중요하므로, 문헌 상에는 傅와 相이 항상 병칭되고 있다. 傅는 王의 師傅로서 왕을 지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漢 조정은 傅를 통해 諸侯王을 통제하려 했는데, 왕이 잘못을 행할 경우 바로잡는 직무였다. 秩祿은 二千石이다.

에게 인(印)을 하사하였으며 나머지 관직은 직접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01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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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師古에 의하면, 丞相, 內史, 中尉, 太傅 이외의 관은 모두 南越國 자체적으로 선발하고 漢의 印綬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考證』, 4656쪽). 여기에서 內史, 中尉, 太傅에게 하사한 印은 丞相 呂嘉가 銀印을 하사받았으므로 銅印이었을 것이다.

월나라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경형(黥刑) [주015]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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黥刑 : 일명 ‘墨刑’이라고 하는 신체형인 육형의 하나이다. 죄인의 이마에 먹물을 새겨 넣어 범죄자임을 표시하는 형벌이다. 春秋戰國시대 제자백가 중 墨家는 이와 같은 형벌을 받고 수공업에 종사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으며, 秦末 漢初 군웅 중의 하나인 英布는 일찍이 墨刑을 받은 자이었기 때문에 ‘黥布’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漢書』 「刑法志」에 의하면, 文帝 때 형벌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肉刑이 정식으로 폐지되었는데, 이때 黥刑도 폐지되었다.

과 의형(劓刑) [주016]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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劓刑 : 周代 ‘五刑’(墨刑, 劓刑, 宮刑, 刖刑, 死刑)의 하나이다. 의형은 『周禮』 「秋官-司刑」 鄭康成注에 “劓, 截其鼻也”라고 하여, 코를 베는 형벌이다. 劓刑은 墨刑보다는 重刑에 속하고 刖刑보다는 輕刑에 속하는 형벌로, 商鞅이 변법을 실시했을 때 처음 법을 어긴 公子虔을 의형에 처했다고 한다. 文帝 때 肉刑을 폐지하는 대신에 劓刑은 笞刑 300대로 대체하였다.

을 폐지하고 한나라 법을 채용하여 내제후와 같게 하였다. 또한 사신들은 모두 그대로 머물며 정세를 장악하고, 왕과 왕태후는 행장과 예물을 준비하여 입조할 채비를 하였다.

 

주 001
姬妾 : 『漢書』 「文帝本紀」 ‘薄姬’조에 대한 주에 如淳은 姬를 妾의 총칭으로 해석, 그 근거를 『漢官儀』의 ‘姬妾數百’과 「外戚傳」의 ‘幸姬戚夫人’을 들고 있다. 그런데 臣瓚은 姬를 내관으로 해석, 그 근거를 「漢祿祿令」과 「茂陵書」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姬의 秩祿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婕妤의 뒤이자 八子의 앞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顔師古는 姬는 본래 周의 姓에서 유래되어 夫人의 美稱이었는데, 뒤에 妾의 총칭으로 변하였다고 보고 「外戚傳」 어느곳에도 姬가 관직명으로 제시된 것이 없다고 하여 臣瓚이 주장한 內官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명에 따르면 영제가 장안에서 취한 규씨녀를 희첩의 신분으로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주 002
霸陵 : 縣名이다. 前漢 文帝 9년(전171) 芷陽縣을 霸陵縣으로 개명하였다(『漢書』 「地理志」, “霸陵, 故芷陽, 文帝更名”). 京兆尹 소속이다. 治所는 현재 陝西省 西安市 東新市村 부근이다. 孝文帝 劉恒의 陵墓인 霸陵에서 지역의 이름을 삼았다.
주 003
安國少季 : 『索隱』에 의하면, 安國은 姓이고 少季는 이름이다.
주 004
諫大夫 : 郎中令 소속으로 秩은 比八百石이며 정원은 없다. 諫大夫는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元狩 5년(119년)에 처음 설치하였다고 한다.
주 005
終軍 : 終軍(전133 ~ 112)의 자는 子雲, 濟南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博聞强記하여 문필로 郡中에 이름이 나 18세에 博士弟子에 추천되었다. 長安에 도착한 뒤에는 匈奴로 갈 사신에 자원한 일을 계기로 武帝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남월 공략에도 자청하여 출사하였다. 이때의 南越 出使 때 呂嘉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의 사적에 대해서는, 『史記』에는 立傳되어 있지 않고, 『漢書』 「終軍傳」에 상세하다.
주 006
원문에는 ‘輔其缺’, 즉 ‘부족한 부분을 돕도록’ 되어 있으나 『集解』에서 인용된 徐廣의 말처럼 어떤 곳은 缺이 ‘決’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漢書』에는 ‘決’로 되어 있어 顔師古注는 “助令決策也”, 즉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돕도록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부족한 부분을 돕도록 하였다는 것도 통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문맥상 南越國의 王과 신하들이 내속을 신속히 결정할 수 있게 부추겼다는 의미가 다분해서 顔師古의 주석을 따랐다.
주 007
衛尉 : 漢代 황궁을 지키는 직관으로 원래 秦官이었다. 景帝 때 中大夫令으로 개칭된 적이 있으나 후에 다시 개명되었다. 본 직무는 衛士를 거느리고 황궁을 지키는 관직이나 유사시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파견나가기도 한다. 秩 中二千石으로 九卿 중의 하나이다.
주 008
路博德 : 生卒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西河 平州(현재의 山西省 离石) 사람이다. 武帝 元狩 4년(전119)에 霍去病을 따라 匈奴 원정에 나서 공을 세워 邳離侯에 봉해졌다. 元鼎 6년(전111)에 伏波將軍에 임명되어 남월을 평정하였고, 다음해인 기원전 110년 海南島를 공격하여 이곳에 珠崖郡과 儋耳郡 2郡을 설치함으로써 해남 통치의 서막을 열었다. 『史記』 「衛將軍驃騎列傳」에는 强弩都尉가 되어 居延에 주둔하다가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주 009
桂陽 : 桂陽郡을 말하며 治所는 郴縣(현재의 湖南省 郴州)이다.
주 010
丞相 : 漢初 諸侯王國의 丞相은 처음에는 ‘相國’이라 하였다가 惠帝 元年 제후국의 相國法을 폐지하고 丞相으로 개명되었다. 또, 景帝 中原 5년에는 丞相을 ‘相’으로 개칭하였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왕국 승상의 직책은 “統衆官”, 즉 왕의 보좌역할로 그 권한이 막대하였다. 『漢官儀』에는 “帝子爲王. 王國置太傅, 相, 中尉各一人, 秩二千石, 以輔王.……皆官如漢官官吏”라고 하였다. 그 秩祿은 賈誼 『新書』 「等齊」에 의하면, “天子之相, 號爲丞相, 黃金之印;諸侯之相, 號爲丞相, 黃金之印, 而尊無異等, 秩加二千石之上”이라고 하여 천자나 제후의 경우 똑같이 丞相이라 하고 金印을 사용하며 秩祿은 二千石 이상이라 하였다. 이것을 보면 文帝 때까지는 王國 丞相의 秩祿과 지위는 天子의 丞相과 차이가 없었는데, 景帝 때 吳楚七國의 난 이후 諸侯王國의 丞相을 相으로, 金印을 銀印으로, 秩祿은 二千石 이상에서 二千石으로 강등조치를 취하였다(吳榮曾, 「西漢王國官制考實」, 『北京大學學報』, 1990年第3期 참조). 이 구절에서 南越의 丞相인 呂嘉에게 銀印을 下賜하였다고 하였으니, 景帝 이후에도 南越에서는 적어도 호칭과 印綬 등을 변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주 011
內史 :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王國 內史의 주요 職掌은 “治國民”이다. 王國의 內史는 王國내의 民의 호적을 관장하고 지방관인 縣令과 직접 종속관계에 있다. 王國의 內史는 또한 刑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王國의 內史는 漢 조정의 內史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즉, 漢의 內史는 京師의 內治를 담당하여 丞相과 御史가 중추를 담당한 것과 달리 王國의 內史는 漢의 丞相과 御史와 같이 왕을 보좌하는 관리였다.(吳榮曾, 앞의 글) 『漢官儀』에 의하면, 秩祿은 二千石이고, 成帝 綏和 元年(전8)때 內史를 폐지하고 相이 太守처럼 治國을 담당하게 되었다.
주 012
中尉 : 王國의 中尉는 軍事를 담당, 왕국의 軍吏는 모두 中尉에 의해 통속되었다. 따라서, 왕국에서 출병할 때 將軍은 언제나 中尉에서 담당하였다. 이처럼 中尉는 王國 내에서는 相과 內史 다음으로 중요한 요직이었다(吳榮曾, 앞의 글). 秩祿은 相, 太傅와 함께 二千石이다.
주 013
太傅 : 王國의 太傅는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왕의 보좌를 담당, 王國에서 그 지위는 중요하므로, 문헌 상에는 傅와 相이 항상 병칭되고 있다. 傅는 王의 師傅로서 왕을 지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漢 조정은 傅를 통해 諸侯王을 통제하려 했는데, 왕이 잘못을 행할 경우 바로잡는 직무였다. 秩祿은 二千石이다.
주 014
顔師古에 의하면, 丞相, 內史, 中尉, 太傅 이외의 관은 모두 南越國 자체적으로 선발하고 漢의 印綬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考證』, 4656쪽). 여기에서 內史, 中尉, 太傅에게 하사한 印은 丞相 呂嘉가 銀印을 하사받았으므로 銅印이었을 것이다.
주 015
黥刑 : 일명 ‘墨刑’이라고 하는 신체형인 육형의 하나이다. 죄인의 이마에 먹물을 새겨 넣어 범죄자임을 표시하는 형벌이다. 春秋戰國시대 제자백가 중 墨家는 이와 같은 형벌을 받고 수공업에 종사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으며, 秦末 漢初 군웅 중의 하나인 英布는 일찍이 墨刑을 받은 자이었기 때문에 ‘黥布’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漢書』 「刑法志」에 의하면, 文帝 때 형벌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肉刑이 정식으로 폐지되었는데, 이때 黥刑도 폐지되었다.
주 016
劓刑 : 周代 ‘五刑’(墨刑, 劓刑, 宮刑, 刖刑, 死刑)의 하나이다. 의형은 『周禮』 「秋官-司刑」 鄭康成注에 “劓, 截其鼻也”라고 하여, 코를 베는 형벌이다. 劓刑은 墨刑보다는 重刑에 속하고 刖刑보다는 輕刑에 속하는 형벌로, 商鞅이 변법을 실시했을 때 처음 법을 어긴 公子虔을 의형에 처했다고 한다. 文帝 때 肉刑을 폐지하는 대신에 劓刑은 笞刑 300대로 대체하였다.
 
이름
조흥(趙興) , 영제 , 안국소계(安國少季) , 영제 , 안국 소계 , 종군(終軍) , 위신(魏臣) , 노박덕(路博德) , 안국소계 , 여가(呂嘉)
지명
패릉(霸陵) , 한(漢) , 계양(桂陽) , 한(漢) , , 월나라 ,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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