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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가 태자 조영제(趙嬰齊)를 한에 입조시켰으나 이후 병을 핑계대며 자신은 천자를 알현하지 않음

 
  • 국가남월(南越)
천자가 장조(莊助)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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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助 : 嚴助라고도 한다. 嚴助는 後漢의 明帝 劉莊을 忌諱하여 莊을 嚴으로 고친 것이다. 莊助(? ~ 전122)는 자가 詳이고 會稽 吳人이다. 漢武帝 建元 3년에 吳王의 아들 劉駒의 부추김을 받아 민월이 동구를 공격했을 때 장조는 회계군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구를 구원하였고, 建元 6년(전 135)에 閩越이 南越을 공격하자 南越의 구원 요청으로 사신으로 파견되어 남방을 안정시켰다. 그 공으로 會稽太守에 임명되었다가 淮南王 劉安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를 보내 남월왕에게 한(漢)의 뜻을 알리자 조호(趙胡)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천자께서 신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 민월을 토벌하셨으니, 죽어도 그 은덕을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태자 조영제(趙嬰齊)를 입조(入朝)시켜 천자를 숙위(宿衛)하도록 하였다. 조호장조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적에게 침략당한 지 이제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사신은 먼저 돌아가시오. 저 는 가까운 시일 내에 행장을 꾸려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토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조가 떠나자 남월의 대신들이 조호에게 간언하기를, “이 군사를 일으켜 영(郢)을 주살하여 놀랐는데, 또다시 [왕께서] 입조하기 위해 한(漢)에 간다면 이 역시 남월에는 경천동지할 일입니다.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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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證』(4654쪽)은 “漢興兵誅郢, 亦行以驚動南越”의 ‘行’ 뒤에 구두를 찍어 한이 군사를 일으켜 영을 주살한 것과 남월왕의 행차 모두 남월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 선왕(先王)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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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왕 趙佗를 말한다.

께서 옛적에 하신 말씀이, 천자를 섬기되 예를 잃지 않도록 힘쓸 뿐이라 하셨습니다. 요컨대, 사신의 달콤한 말에 기꺼워하며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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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索隱』은 ‘說’을 ‘悅’이라 하여 “悅好語入見”으로 해석하였다. 또, ‘悅’이 『漢書』에는 ‘怵’로 되어 있는데, 韋昭는 이것을 “誘怵好語”, 즉 듣기 좋은 말로 꾀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입조하여 알현할 것까지는 없다는 말입니다.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하러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니 이는 망국의 지름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호는 병을 핑계삼아 결국 입조해 천자를 알현하지 않았다. 그 후 10여 년이 흘러 조호는 진짜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태자인 영제가 귀국을 청하였다. 조호가 죽자[薨] 그 시호(諡號)를 문왕(文王)이라 하였다.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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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예법에는 등급에 따라 죽음도 구별했는데, 제후가 죽었을 때 薨이라 한다. 『禮記』 「曲禮下」에 “天子死曰崩, 諸侯曰薨, 大夫曰卒, 士曰不祿, 庶人曰死”라고 하였다. 趙胡의 묘가 1983년 6월 현재 廣州市 象崗山에서 발견되었는데, 수천 건에 달하는 부장품이 출토되었고 그 중에 ‘文帝行璽’라고 새겨진 龍紐金印이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남월왕이 국내에서는 여전히 帝號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출토기물에 새겨진 명문은 묘주가 趙眜이라고 되어 있는데, 麥英豪, 黃展岳 등 다수 학자들이 趙眜이 『史記』의 趙胡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혹자는 이를 부정하고 있어(吳海貴, 「象崗南越王墓主新考」, 『考古與文物』 2000-3) 아직 정론은 없는 실정이다. 남월왕묘 발굴현황에 대해서는 廣州象崗漢墓發掘隊, 「西漢南越王墓發掘初步報告」, 『考古』 1984-3를 참조.



 

주 001
莊助 : 嚴助라고도 한다. 嚴助는 後漢의 明帝 劉莊을 忌諱하여 莊을 嚴으로 고친 것이다. 莊助(? ~ 전122)는 자가 詳이고 會稽 吳人이다. 漢武帝 建元 3년에 吳王의 아들 劉駒의 부추김을 받아 민월이 동구를 공격했을 때 장조는 회계군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구를 구원하였고, 建元 6년(전 135)에 閩越이 南越을 공격하자 南越의 구원 요청으로 사신으로 파견되어 남방을 안정시켰다. 그 공으로 會稽太守에 임명되었다가 淮南王 劉安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주 002
『考證』(4654쪽)은 “漢興兵誅郢, 亦行以驚動南越”의 ‘行’ 뒤에 구두를 찍어 한이 군사를 일으켜 영을 주살한 것과 남월왕의 행차 모두 남월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주 003
남월왕 趙佗를 말한다.
주 004
『索隱』은 ‘說’을 ‘悅’이라 하여 “悅好語入見”으로 해석하였다. 또, ‘悅’이 『漢書』에는 ‘怵’로 되어 있는데, 韋昭는 이것을 “誘怵好語”, 즉 듣기 좋은 말로 꾀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주 005
고대 예법에는 등급에 따라 죽음도 구별했는데, 제후가 죽었을 때 薨이라 한다. 『禮記』 「曲禮下」에 “天子死曰崩, 諸侯曰薨, 大夫曰卒, 士曰不祿, 庶人曰死”라고 하였다. 趙胡의 묘가 1983년 6월 현재 廣州市 象崗山에서 발견되었는데, 수천 건에 달하는 부장품이 출토되었고 그 중에 ‘文帝行璽’라고 새겨진 龍紐金印이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남월왕이 국내에서는 여전히 帝號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출토기물에 새겨진 명문은 묘주가 趙眜이라고 되어 있는데, 麥英豪, 黃展岳 등 다수 학자들이 趙眜이 『史記』의 趙胡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혹자는 이를 부정하고 있어(吳海貴, 「象崗南越王墓主新考」, 『考古與文物』 2000-3) 아직 정론은 없는 실정이다. 남월왕묘 발굴현황에 대해서는 廣州象崗漢墓發掘隊, 「西漢南越王墓發掘初步報告」, 『考古』 1984-3를 참조.
 
이름
장조(莊助) , 조호(趙胡) , 조영제(趙嬰齊) , 조호 , 장조 , , 장조 , 조호 , 영(郢) , 조호 , 조호 , 영제 , 조호 , 문왕(文王)
지명
한(漢) , 남월 , , 한(漢) , 남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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