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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위청 등을 다시 보내 흉노를 공격했으나 항복한 조신(趙信)의 계책으로 흉노가 상곡(上谷)에 쳐들어옴

 
  • 국가흉노(匈奴)
그 이듬해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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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武帝 元朔 6년(전123)이다.

한나라는 다시 대장군 위청을 보내 여섯 장군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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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의 장군은 中將軍 公孫敖, 左將軍 公孫賀, 前將軍 趙信, 右將軍 蘇建, 後將軍 李廣, 强弩將軍 李沮 등이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25).

과 군사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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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兵”이 없다.

십여 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에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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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仍”으로 되어 있다.

다시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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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青이 처음으로 定襄에서 출정한 것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단지 元朔 4年(전125) 여름에 匈奴가 代郡과 定襄을 공격하였을 때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定襄에서 다시 출정해 나갔다고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양(定襄)에서 수백 리 밖까지 나가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앞 뒤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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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앞뒤”, 즉 “前後”는 元朔 6年(전123) 봄 2월과 여름 4월에 두 차례 출격한 것을 말한다.

[두 차례의 출정으로] 대략 수급과 포로 만 9천 여를 얻었으나 한나라 역시 두 명의 장군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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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將軍 趙信과 右將軍 蘇建을 말한다. 趙信은 匈奴에 투항했고, 蘇建은 몸만 빠져 나왔다.

과 군사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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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軍”이 없다.

3천여 기병을 잃었다.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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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廣은 합쳐서 3천이었다고 하였다.

우장군 [주010]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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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後, 左, 右將軍 : 이런 장군 칭호는 늘 설치되는 것이 아닌 자리로 필요에 따라서 두어졌다. 그의 위상은 上卿 다음의 지위였다. 金印紫綬를 갖고 있었고 부대 내에서는 大將軍 또는 驃騎將軍 다음으로 車騎將軍 또는 衛將軍과 동렬이었다.

[소]건 [주011]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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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建 : 杜陵(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동남쪽) 사람으로 蘇武의 부친이다. 匈奴 토벌에 공을 세워 平陵侯에 봉해졌고 朔方城을 쌓았다. 匈奴와의 전쟁에서 군사를 잃고 패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속죄금을 물고 서민이 되었다가 후에 代郡의 太守가 되었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3).

은 단신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전(前)장군 흡후(翕侯) [주012]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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翕 : 지명으로 魏郡 內黃縣 북쪽(지금의 河南省 湯陽縣 동북 古城村)에 위치하였다.

조신(趙信)도 전세가 불리하자 흉노에 항복했다. 조신은 원래 흉노의 소왕(小王) [주013]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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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王 : 裨小王을 지칭한다(주543) 참조).

이었다가 한나라에 항복해 한나라에서 흡후로 책봉된 [주01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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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武帝 元光 4년(전131) 시월 12일의 일이다.

자로서 전장군과 우장군이 군대를 합해 [주력과] 나뉘어 가다가 [주015]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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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分行”은 ‘본진과 따로 움직였다.’는 의미이다. 『漢書』에는 “分行”이 없다.

홀로 선우의 군대를 만나 [주016]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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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介獨遇單于兵”으로 되어 있다.

전멸하고 말았다. 선우는 흡후를 사로잡아 [그를] 자차왕(自次王) [주017]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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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次王 : 匈奴 관직의 명칭으로 單于 다음 가는 지위를 가진 왕으로, ‘自次’는 匈奴語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으로 삼고 그의 누이를 처로 준 다음에 [그와] 함께 한나라 [공격] 모의했다. [조]신은 선우에게 좀더 북쪽으로 물러나 사막 [주018]
각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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幕 : ‘고비’, 즉 사막을 의미한다.

을 건너 한나라 군대를 유인해 지치게 한 다음에 극도로 지치면 취하되 [주019]
각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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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徼極而取之”는 “극도로 피곤하게 만든 다음에 취한다.”는 뜻이다.

국경이 있는 곳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알려 주었다. 선우는 그 계책을 따랐다. [주020]
각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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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單于從之”로 되어 있다.

그 이듬해 [주021]
각주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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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武帝 元狩 元年(전122)이다.

흉노의 기병 만 명이 [주022]
각주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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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胡數萬騎入上谷”으로 되어 있다.

상곡으로 쳐들어가 수백 명을 죽였다.

 

주 001
漢 武帝 元朔 6년(전123)이다.
주 002
여섯 명의 장군은 中將軍 公孫敖, 左將軍 公孫賀, 前將軍 趙信, 右將軍 蘇建, 後將軍 李廣, 强弩將軍 李沮 등이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25).
주 003
『漢書』에는 “兵”이 없다.
주 004
『漢書』에는 “仍”으로 되어 있다.
주 005
衛青이 처음으로 定襄에서 출정한 것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단지 元朔 4年(전125) 여름에 匈奴가 代郡과 定襄을 공격하였을 때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定襄에서 다시 출정해 나갔다고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주 006
여기에서 “앞뒤”, 즉 “前後”는 元朔 6年(전123) 봄 2월과 여름 4월에 두 차례 출격한 것을 말한다.
주 007
前將軍 趙信과 右將軍 蘇建을 말한다. 趙信은 匈奴에 투항했고, 蘇建은 몸만 빠져 나왔다.
주 008
『漢書』에는 “軍”이 없다.
주 009
徐廣은 합쳐서 3천이었다고 하였다.
주 010
前, 後, 左, 右將軍 : 이런 장군 칭호는 늘 설치되는 것이 아닌 자리로 필요에 따라서 두어졌다. 그의 위상은 上卿 다음의 지위였다. 金印紫綬를 갖고 있었고 부대 내에서는 大將軍 또는 驃騎將軍 다음으로 車騎將軍 또는 衛將軍과 동렬이었다.
주 011
蘇建 : 杜陵(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동남쪽) 사람으로 蘇武의 부친이다. 匈奴 토벌에 공을 세워 平陵侯에 봉해졌고 朔方城을 쌓았다. 匈奴와의 전쟁에서 군사를 잃고 패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속죄금을 물고 서민이 되었다가 후에 代郡의 太守가 되었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3).
주 012
翕 : 지명으로 魏郡 內黃縣 북쪽(지금의 河南省 湯陽縣 동북 古城村)에 위치하였다.
주 013
小王 : 裨小王을 지칭한다(주543) 참조).
주 014
漢 武帝 元光 4년(전131) 시월 12일의 일이다.
주 015
“軍分行”은 ‘본진과 따로 움직였다.’는 의미이다. 『漢書』에는 “分行”이 없다.
주 016
『漢書』에는 “介獨遇單于兵”으로 되어 있다.
주 017
自次王 : 匈奴 관직의 명칭으로 單于 다음 가는 지위를 가진 왕으로, ‘自次’는 匈奴語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주 018
幕 : ‘고비’, 즉 사막을 의미한다.
주 019
“徼極而取之”는 “극도로 피곤하게 만든 다음에 취한다.”는 뜻이다.
주 020
『漢書』에는 “單于從之”로 되어 있다.
주 021
漢 武帝 元狩 元年(전122)이다.
주 022
『漢書』에는 “胡數萬騎入上谷”으로 되어 있다.
 
이름
위청 , [소]건 , 조신(趙信) , 조신 , [조]신
지명
한나라 , 정양(定襄)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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