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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황제 14년(전 166) 흉노가 한나라를 자주 공격하자 한나라가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냄

  • 국가
    흉노(匈奴)
한나라 효문황제 14년(전166)주 001
각주 001)
文帝가 즉위 후 3년(전177) 오월에 匈奴가 北地, 河南 등을 첫 번째로 공격하자 丞相 灌嬰을 시켜 막게 했다. 11년(전169) 여름에는 匈奴가 두 번째로 狄道를 공격하였다. 14년(전166) 겨울에는 文帝 즉위 이후 세 번째로 공격을 하였다. 14년의 대규모 침입 원인은 匈奴 인구의 中國으로의 유출을 유인하는 漢나라의 정책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漢나라의 招納政策은 20년 정도 중단되었다(熊貴平·王擴建, 2005 :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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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흉노 선우 기병 14만이 조나(朝那), 소관(蕭關) 주 002
각주 002)
蕭關 : 關門의 명칭으로, 지금의 寧夏回族自治區 古原縣 동남쪽에 위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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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입해 북지[군] 도위(都尉)주 003
각주 003)
都尉 : 武官 명칭으로, 秦代에는 ‘郡尉’라고 했다. 漢 景帝시기에는 명칭을 都尉로 바꾸었다. 郡守를 군사적인 면에서 보좌하면서 郡守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 모두 銀印剖符를 받았고 秩이 比二千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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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앙(孫卬) 주 004
각주 004)
卬 : 孫卬을 말한다. 그는 공을 많이 세워 文帝 10년(전170) 삼월 丁巳(26일)에 그의 자손인 單이 缾侯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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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죽이고 백성과 가축을 많이 노략질하여 마침내 팽양(彭陽) 주 005
각주 005)
彭陽 : 현의 명칭으로 지금의 甘肅省 鎭原縣 동남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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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다. 돌격 기병(奇兵)이주 006
각주 006)
奇兵 : 『漢書』에는 “騎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돌격 기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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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회중궁(回中宮)주 007
각주 007)
回中宮 : 宮闕의 명칭으로 北地, 즉 지금의 陝西省 隴縣 서북쪽에 있는 岐山 雍縣 서쪽 4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武帝가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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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불태웠고, 척후 기병대[候騎] 옹(雍) 주 008
각주 008)
雍 : 지칭으로 지금의 陝西省 鳳翔縣이었다. 이곳에 戰國時代 秦의 國都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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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감천[궁](甘泉宮)주 009
각주 009)
甘泉 : 지명으로 雲陽을 지칭하는데, 지금 陝西省 渟化縣 서북쪽에 있었다. 雲陽의 서북쪽에 甘泉山이 있고, 그 위에 甘泉宮이 있었다. 이것이 秦나라의 林光宮이었다. (주145), 주1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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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이르렀다. 이에 효문제는 중위(中尉)주 010
각주 010)
中尉 : 관직의 명칭이다. 이것은 이미 戰國時代부터 존재했는데, 漢나라가 秦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계속 존재했다. 武帝 太初 元年(전104)에 명칭을 바꾸어 執金吾라고 했다. 中尉는 수도의 수비[掌徼循京師]를 담당하는 장관으로서 皇帝가 출행할 때에 그를 護衛, 儀仗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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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周舍) 주 011
각주 011)
周舍 : 景帝시대에 御史大夫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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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낭중령(郞中令)주 012
각주 012)
郞中令 : 관직의 명칭으로 秦나라 시기에 설치되었다. 武帝시대에는 명칭을 光祿勳으로 바꾸었다. 주로 宮殿의 門戶을 담당하였으나 실제 그 권력이 아주 막강하였다. 皇帝禁內에서 皇帝를 侍從, 護衛, 顧問하는 중요한 관직으로 九卿의 하나였다. 武帝시대에는 李廣과 李敢 父子가 이 자리를 맡았다. 文帝가 代王일 때에는 張武가 郎中令을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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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張武)를 장군주 013
각주 013)
將軍 : 고급 무관의 통칭이다. 고급 문관을 ‘卿’이라고 통칭한 것과 비슷하다. 전쟁터에서는 부대의 작전을 지휘 통솔하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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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아 전차 천 대주 014
각주 014)
古代의 戰車 전술에서는 甲車 1乘에 甲士 3명, 步卒 72명, 말 4匹을 하나의 단위로 구성했다. ‘千乘’이라고 하면 甲士가 3,000명, 步卒이 72,000명, 馬가 4,000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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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병 십만을 일으켜 장안 근방에 포진시킴으로써 흉노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창후(昌侯) 노경(盧卿) 주 015
각주 015)
盧卿 : 高祖시대의 功臣이다. 본래는 齊나라의 장군으로 “昌圉侯 旅卿”으로 기록되었다(『漢書』 권16 「高惠高后文功臣表」). 漢王 4年에 韓信을 따라 齊를 정벌하고 項羽를 격파했고, 그 다음에 韓王 信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代郡에서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昌圉侯로 봉해졌다. 그는 上郡에 군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上郡將軍이라 불렸다. 아래 北地將軍, 隴西將軍 등도 將軍이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던 지역에 따라 붙은 명칭이다. ‘盧’는 달리 ‘玈’로도 표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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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상군장군으로, 영후(甯侯) 위속(魏遫) 주 016
각주 016)
魏遫 : 高祖시기의 공신이다. 漢에 들어가 都尉가 되어 臧荼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高祖 8년(전199) 4월 寧遠侯로 봉해졌다. 文帝 14년(전166)에 魏遫가 北地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北地將軍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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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북지장군, 융려후(隆慮侯) 주조(周竈) 주 017
각주 017)
周竈 : 高祖시기의 功臣이다. 連敖(楚官)로 漢에 들어가 長鉟都尉로서 項籍을 격파하여 高祖 6년(전201) 正月에 隆慮克侯로 봉해졌다. 그의 군대가 隴西에 있었기 때문에 隴西將軍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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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농서장군,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 주 018
각주 018)
張相如 : 高祖 6년(전201)에 中大夫가 되었고 河間守로 陳豨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高祖 11년(전196) 12월에 東陽武侯로 봉해졌는데, 1,300호를 받았다(『漢書』 권50 「張馮汲鄭傳」 :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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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대장군주 019
각주 019)
大將軍 : 부대 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칭하는 명칭이다. 그의 지위는 丞相 다음에 해당하였고, 그에 대한 예의가 아주 깍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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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후(成侯) 동혁(董赤) 주 020
각주 020)
董赤 : 음은 ‘동혁’이다. 高祖시대의 功臣으로 侯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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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전장군주 021
각주 021)
前將軍 : 부대 내의 고급 장군의 명칭으로, 前, 後, 左, 右將軍 중의 하나였다. 그 위치는 大將軍과 車騎將軍 다음으로 衛將軍과 동급이었다. 그 지위는 上卿 다음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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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명하고, 전차와 기병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흉노를 공격해 가도록 했다.주 022
각주 022)
이상과 같은 장군 임명 이외에도 內史 欒布 역시 將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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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국경 장성 안에서 한 달쯤 머물다가 물러나주 023
각주 023)
『漢書』에는 “乃去”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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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니 한나라 군대는 [그를 뒤쫓아] 장성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으나 [적을] 죽일 수 없었다. 흉노가 날로 교만해져주 024
각주 024)
『漢書』에는 “匈奴日以驕”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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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변경지대를 [침범해] 들어와 백성들과 가축들을주 025
각주 025)
『漢書』에는 “畜産”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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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노략질한 것이 아주 많았는데, [그 중에서] 운중요동이 가장 심했고 [그 피해는] 대군에서주 026
각주 026)
『漢書』에는 “代”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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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여 명에 이르렀다.주 027
각주 027)
『漢書』에는 “郡萬餘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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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이를] 걱정하여주 028
각주 028)
『漢書』에는 “漢甚患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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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사신을 시켜 편지를 보냈다. 선우도 또한 당호를 시켜 사과해 왔기 때문에 다시 화친에 대한 일을 얘기할 수 있었다.

  • 각주 001)
    文帝가 즉위 후 3년(전177) 오월에 匈奴가 北地, 河南 등을 첫 번째로 공격하자 丞相 灌嬰을 시켜 막게 했다. 11년(전169) 여름에는 匈奴가 두 번째로 狄道를 공격하였다. 14년(전166) 겨울에는 文帝 즉위 이후 세 번째로 공격을 하였다. 14년의 대규모 침입 원인은 匈奴 인구의 中國으로의 유출을 유인하는 漢나라의 정책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漢나라의 招納政策은 20년 정도 중단되었다(熊貴平·王擴建, 2005 :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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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蕭關 : 關門의 명칭으로, 지금의 寧夏回族自治區 古原縣 동남쪽에 위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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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都尉 : 武官 명칭으로, 秦代에는 ‘郡尉’라고 했다. 漢 景帝시기에는 명칭을 都尉로 바꾸었다. 郡守를 군사적인 면에서 보좌하면서 郡守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 모두 銀印剖符를 받았고 秩이 比二千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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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卬 : 孫卬을 말한다. 그는 공을 많이 세워 文帝 10년(전170) 삼월 丁巳(26일)에 그의 자손인 單이 缾侯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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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彭陽 : 현의 명칭으로 지금의 甘肅省 鎭原縣 동남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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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奇兵 : 『漢書』에는 “騎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돌격 기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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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回中宮 : 宮闕의 명칭으로 北地, 즉 지금의 陝西省 隴縣 서북쪽에 있는 岐山 雍縣 서쪽 4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武帝가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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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雍 : 지칭으로 지금의 陝西省 鳳翔縣이었다. 이곳에 戰國時代 秦의 國都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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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甘泉 : 지명으로 雲陽을 지칭하는데, 지금 陝西省 渟化縣 서북쪽에 있었다. 雲陽의 서북쪽에 甘泉山이 있고, 그 위에 甘泉宮이 있었다. 이것이 秦나라의 林光宮이었다. (주145), 주1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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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中尉 : 관직의 명칭이다. 이것은 이미 戰國時代부터 존재했는데, 漢나라가 秦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계속 존재했다. 武帝 太初 元年(전104)에 명칭을 바꾸어 執金吾라고 했다. 中尉는 수도의 수비[掌徼循京師]를 담당하는 장관으로서 皇帝가 출행할 때에 그를 護衛, 儀仗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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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周舍 : 景帝시대에 御史大夫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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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郞中令 : 관직의 명칭으로 秦나라 시기에 설치되었다. 武帝시대에는 명칭을 光祿勳으로 바꾸었다. 주로 宮殿의 門戶을 담당하였으나 실제 그 권력이 아주 막강하였다. 皇帝禁內에서 皇帝를 侍從, 護衛, 顧問하는 중요한 관직으로 九卿의 하나였다. 武帝시대에는 李廣과 李敢 父子가 이 자리를 맡았다. 文帝가 代王일 때에는 張武가 郎中令을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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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將軍 : 고급 무관의 통칭이다. 고급 문관을 ‘卿’이라고 통칭한 것과 비슷하다. 전쟁터에서는 부대의 작전을 지휘 통솔하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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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古代의 戰車 전술에서는 甲車 1乘에 甲士 3명, 步卒 72명, 말 4匹을 하나의 단위로 구성했다. ‘千乘’이라고 하면 甲士가 3,000명, 步卒이 72,000명, 馬가 4,000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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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盧卿 : 高祖시대의 功臣이다. 본래는 齊나라의 장군으로 “昌圉侯 旅卿”으로 기록되었다(『漢書』 권16 「高惠高后文功臣表」). 漢王 4年에 韓信을 따라 齊를 정벌하고 項羽를 격파했고, 그 다음에 韓王 信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代郡에서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昌圉侯로 봉해졌다. 그는 上郡에 군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上郡將軍이라 불렸다. 아래 北地將軍, 隴西將軍 등도 將軍이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던 지역에 따라 붙은 명칭이다. ‘盧’는 달리 ‘玈’로도 표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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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魏遫 : 高祖시기의 공신이다. 漢에 들어가 都尉가 되어 臧荼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高祖 8년(전199) 4월 寧遠侯로 봉해졌다. 文帝 14년(전166)에 魏遫가 北地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北地將軍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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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周竈 : 高祖시기의 功臣이다. 連敖(楚官)로 漢에 들어가 長鉟都尉로서 項籍을 격파하여 高祖 6년(전201) 正月에 隆慮克侯로 봉해졌다. 그의 군대가 隴西에 있었기 때문에 隴西將軍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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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張相如 : 高祖 6년(전201)에 中大夫가 되었고 河間守로 陳豨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高祖 11년(전196) 12월에 東陽武侯로 봉해졌는데, 1,300호를 받았다(『漢書』 권50 「張馮汲鄭傳」 :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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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大將軍 : 부대 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칭하는 명칭이다. 그의 지위는 丞相 다음에 해당하였고, 그에 대한 예의가 아주 깍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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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董赤 : 음은 ‘동혁’이다. 高祖시대의 功臣으로 侯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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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前將軍 : 부대 내의 고급 장군의 명칭으로, 前, 後, 左, 右將軍 중의 하나였다. 그 위치는 大將軍과 車騎將軍 다음으로 衛將軍과 동급이었다. 그 지위는 上卿 다음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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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이상과 같은 장군 임명 이외에도 內史 欒布 역시 將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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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漢書』에는 “乃去”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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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漢書』에는 “匈奴日以驕”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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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漢書』에는 “畜産”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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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漢書』에는 “代”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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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漢書』에는 “郡萬餘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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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漢書』에는 “漢甚患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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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효문황제, [손]앙(孫卬), 효문제, 주사(周舍), 장무(張武), 노경(盧卿), 위속(魏遫), 주조(周竈), 장상여(張相如), 동혁(董赤)
지명
한나라, 조나(朝那), 소관(蕭關), 팽양(彭陽), 옹(雍), 장안, 한나라, 운중, 요동, 대군,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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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황제 14년(전 166) 흉노가 한나라를 자주 공격하자 한나라가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냄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