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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화친 후에도 싸움이 지속되자 고조(高祖)가 묵특과 혼인관게를 맺고 형제의 맹약을 맺음

  • 국가
    흉노(匈奴)
그 뒤에 한왕 이 흉노의 장군이 되었고, 조리, 왕황 등이 자주 [화친] 약속을 깨고 대[군], 운중[군] 주 001
각주 001)
『漢書』에는 代[郡] 뒤에 “鴈門”이 들어가 있다. 代, 鴈門, 雲中 등의 郡은 과거 趙나라의 武靈王이 북쪽으로 林胡와 樓煩을 격파하고 長城을 구축한 다음에 설치한 것이었다(주154), 주155), 주1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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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입해 노략질해 갔다. 얼마 안 되어 [한나라의] 진희(陳豨) 주 002
각주 002)
陳豨 : 지금의 山東省 曹縣 서북쪽에 위치한 宛朐 사람이다. 처음에 高祖를 어떻게 따라다니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漢 高祖 7년(전200)에 漢王 信이 匈奴에 투항한 것을 정벌하기 위해 高祖가 원정을 하였을 때 列侯가 되었다. 그리고 趙나라 相國의 신분으로 병졸을 거느리고 代를 수비하다가 전197년 匈奴와 결탁하였다. 그 다음 漢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代王이라고 하였다. 이후 高祖 12년(전195)에 樊噲의 공격을 받아 패배해 靈丘(山西省 靈丘縣 동쪽)에서 죽임을 당하였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9 ~ 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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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모반해 또 한신과 같이 모의하여 대[군]을 공격했다. 한나라에서는 번쾌(樊噲) 주 003
각주 003)
樊噲(? ~ 전189) : 沛縣(지금의 江蘇省 沛縣) 사람으로 젊어 개백정이었다. 신분이 미천했으나 劉邦을 따라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楚漢전쟁에 참가해 鴻門之會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劉邦을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그는 劉邦이 漢王이 된 이후 列侯, 郎中으로 三秦의 토벌을 맡았다. 즉위 이후에는 左丞相, 相國이 되어 燕王 藏余의 반란, 楚王 韓信의 반란, 燕王 盧綰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써 舞陽侯로 5,400호를 받았다. 呂皇后의 동생이 그의 처인데, 高祖 말기 呂后의 일파로 몰렸다. 하지만 惠帝時期에 풀려났다가 惠帝 6년(전189)에 죽었다(『史記』 권95 「樊噲列傳」 : 2651 ~ 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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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시켜 이들을 치도록 하여 대[군], 안문[군], 운중[군] 등의 군현을 다시 뺏었으나 [국경의] 요새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이 무렵 한나라 장수들이 많이 흉노로 가서 투항하였다.주 004
각주 004)
이 무렵 匈奴에 투항한 한나라의 장군은 韓信, 王黃, 曼丘臣, 陳豨, 盧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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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교만해진] 묵특이 늘 대[군]의 땅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한나라에서 이를 근심스럽게 여겨 고조주 005
각주 005)
『漢書』에는 “於是高祖患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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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으로 하여금 종실의 딸을 공주주 006
각주 006)
『漢書』에는 “翁主”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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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여 모셔 가게 해 선우의 연지로 삼게 했고, 해마다 흉노에게 명주솜, 견직물, 술, 곡물[米] 쌀주 007
각주 007)
『漢書』에는 “곡물[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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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식품 등을 일정량 주고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면서 화친을 맺자, 묵특이 이에 [공세를] 약간 멈추었다. [그렇지만] 이후에 연왕 노관(盧綰) 주 008
각주 008)
盧綰 : 沛縣 사람으로 처음 劉邦을 따라 봉기하였다. 그 이후 계속적으로 그를 시종하다가 관직이 太蔚에 오르고 燕王에 봉해졌다. 陳豨가 漢나라를 배반하였을 때, 그가 사람을 보내 서로 연락하고 匈奴와 결탁하였다. 漢나라 군대가 진격해 오자 무리를 이끌고 匈奴로 도주하였다. 匈奴에서 東胡 盧王에 임명되었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7 ~ 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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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란을 일으켜 그의 무리 수천 명을주 009
각주 009)
『漢書』에는 “萬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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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고 흉노에게 투항해 갔다가 상곡[군]의 동쪽을 드나들면서 [한나라를] 괴롭혔다.

  • 각주 001)
    『漢書』에는 代[郡] 뒤에 “鴈門”이 들어가 있다. 代, 鴈門, 雲中 등의 郡은 과거 趙나라의 武靈王이 북쪽으로 林胡와 樓煩을 격파하고 長城을 구축한 다음에 설치한 것이었다(주154), 주155), 주1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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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陳豨 : 지금의 山東省 曹縣 서북쪽에 위치한 宛朐 사람이다. 처음에 高祖를 어떻게 따라다니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漢 高祖 7년(전200)에 漢王 信이 匈奴에 투항한 것을 정벌하기 위해 高祖가 원정을 하였을 때 列侯가 되었다. 그리고 趙나라 相國의 신분으로 병졸을 거느리고 代를 수비하다가 전197년 匈奴와 결탁하였다. 그 다음 漢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代王이라고 하였다. 이후 高祖 12년(전195)에 樊噲의 공격을 받아 패배해 靈丘(山西省 靈丘縣 동쪽)에서 죽임을 당하였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9 ~ 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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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樊噲(? ~ 전189) : 沛縣(지금의 江蘇省 沛縣) 사람으로 젊어 개백정이었다. 신분이 미천했으나 劉邦을 따라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楚漢전쟁에 참가해 鴻門之會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劉邦을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그는 劉邦이 漢王이 된 이후 列侯, 郎中으로 三秦의 토벌을 맡았다. 즉위 이후에는 左丞相, 相國이 되어 燕王 藏余의 반란, 楚王 韓信의 반란, 燕王 盧綰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써 舞陽侯로 5,400호를 받았다. 呂皇后의 동생이 그의 처인데, 高祖 말기 呂后의 일파로 몰렸다. 하지만 惠帝時期에 풀려났다가 惠帝 6년(전189)에 죽었다(『史記』 권95 「樊噲列傳」 : 2651 ~ 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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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이 무렵 匈奴에 투항한 한나라의 장군은 韓信, 王黃, 曼丘臣, 陳豨, 盧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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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漢書』에는 “於是高祖患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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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書』에는 “翁主”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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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漢書』에는 “곡물[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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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盧綰 : 沛縣 사람으로 처음 劉邦을 따라 봉기하였다. 그 이후 계속적으로 그를 시종하다가 관직이 太蔚에 오르고 燕王에 봉해졌다. 陳豨가 漢나라를 배반하였을 때, 그가 사람을 보내 서로 연락하고 匈奴와 결탁하였다. 漢나라 군대가 진격해 오자 무리를 이끌고 匈奴로 도주하였다. 匈奴에서 東胡 盧王에 임명되었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7 ~ 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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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漢書』에는 “萬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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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 조리, 왕황, 진희(陳豨), 한신, 번쾌(樊噲), 묵특, 대[군], 고조, 유경, 묵특, 노관(盧綰)
지명
대[군], 운중[군], 한나라, 대[군], 한나라, 대[군], 안문[군], 운중[군], 한나라, 한나라, 상곡[군],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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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친 후에도 싸움이 지속되자 고조(高祖)가 묵특과 혼인관게를 맺고 형제의 맹약을 맺음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