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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제천의식과 사회제도 및 장례풍습과 전쟁할 때의 풍습에 대한 설명

 
  • 국가흉노(匈奴)
매년 정월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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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初에는 周나라의 역법에 따라 시월을 한 해의 첫 달로 했다. 하지만 武帝 太初 元年(전104)에 夏나라의 역법으로 바꾸면서 正月을 첫 달로 삼았다. 司馬遷은 太初曆의 개정에 참가한 이후에 『史記』를 지었는데, 匈奴의 정확한 역법을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바꾼 역법에 기초해 기록했다는 점에서 歲正月은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는 여러 장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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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長 : 左賢王 이하 24長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219) 참조)

들이 선우정에서 작은 모임[小會]을 갖고 제사를 지냈다.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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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에 모임을 갖는 것은 유목민들에게 모피 내지는 식량을 구하기 위한 사냥 모임이란 이유 이외에 달리 까닭을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초원의 겨울은 길고 추워 모임을 갖기 좋은 계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正月에 單于庭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匈奴 고유의 것이 아니라 中國의 제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는 이 집회의 성격이 원래 單于의 일족인 攣鞮氏 또는 그 씨족의 祭儀였으나 국가 성립 이후 匈奴의 장들이 참가하는 국가적인 성격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江上波夫, 1948 : 250 ~ 252). 한편, 겨울철의 大狩獵祭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祭天의 의미보다는 部族이나 국가의 통합을 위한 동맹의 확인 또 충성의 상징을 보이는 정치적 의미와 함께 집단 몰이사냥을 통한 군사적 의미에 더 초점을 두기도 한다(박원길, 2001 : 23 ~ 24).

오월에는 농성(蘢城)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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蘢城 : 單于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면서 祭天儀式을 거행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蘢城에서 벌어지는 제천 행사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몽골 초원 유목민들이 오월 초원의 풀이 푸르러지고 말 젖으로 만든 술이 익는 풍요로운 계절(여름의 시작)에 벌이는 春祭였다. 이후 몽골시대에 보이는 쿠릴타이와 같은 정치·종교적 행사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이해되기도 했다. 따라서 蘢城의 의미와 위치, 정치적 비중, 종교적 성격 등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먼저 의미와 위치에 관련하여 『史記』에 기록된 蘢城의 蘢이 『漢書』 「嚴安傳」에 “深入匈奴, 燔其龍城”이라고 된 것에 대해 顔師古가 “燔燒也. 龍城匈奴祭天處.”라고 주를 단 것을 기초로 자연 상태의 나무나 목조로 된 제단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江上波夫, 1948 : 237 ~ 8). 그의 입장을 이어 蘢城이 오늘날 몽골의 신앙 대상인 오보(Ovoo)라고 주장하기도 했다(護雅夫, 1967 : 89 ~ 190;後藤富男, 1956 : 65). 그와 달리 성채와 같은 실체가 있는 건물로 政治·軍事·宗敎의 중심이라고 보기도 했다(內田吟風, 1975 : 60 ~ 64). 이것은 “蘢城”이 문헌에 따라 “蘢城”(『史記』 「匈奴傳」), “龍城”(『漢書』 「匈奴傳」, 『鹽鐵論』), “籠城”(『漢書』 「衛靑傳」) 등으로 달리 표기되고, 또한 경우에 따라 “單于庭”(『史記』와 『漢書』), “龍祠”(『後漢書』 「南匈奴傳」), “朝會”(『漢書』 「西域傳」), “龍庭”(『後漢書』 「竇憲傳」), “庭會”(『後漢書』 「南匈奴傳」) 등의 표현이 蘢城과 같이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용례를 통해 그 의미가 單于가 있는 單于庭(오르두)을 의미하는 것이고, 蘢이 그와 음이 유사하고 뜻이 부합하는 龍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하고, 그 어원을 單于의 씨족인 攣鞮의 祭로 이해하기도 했다(박원길, 2001 : 27 ~ 28). 한편 蘢城의 의식이 갖는 성격에 대해서는 祭天儀式 이외에도 합의를 이루는 會議體로서의 정치적인 성격을 부여하기도 했다(箭內亙, 1930 : 367.) 따라서 蘢城의 위치를 單于庭이 위치한 곳과 연결 지어 漠南에 匈奴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을 때에는 현재 內蒙古自治區 呼和浩特 주변(『史記』 권110 「匈奴傳」) 또는 그들이 밀려 올라가 漠北에 머무를 때에는 몽골공화국 오르콘강 주변(『雙溪醉隱集』 “龍庭, 和林西北地”)에 있는 호쇼 차이담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馬長壽(a), 2006 : 24). 『漢書』에는 ‘龍城’으로 되어 있다.

에서 큰 모임[大會]을 갖고 그들의 조상, 하늘과 땅 그리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찔 무렵에는 대림(蹛林)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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蹛林 : 匈奴가 제전을 벌이기 위해 벌이는 장소 내지는 행사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에 대해 자료 부족으로 시기, 장소, 행사의 성격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먼저, 蹛林이 벌어지는 시기가 단순하게 가을[秋]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여타 기록을 통해 팔월 말에서 구월 초, 즉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시기, 다시 말해 冬營地로 이동하기 전에 이루어진 행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행사가 벌어진 장소로서 蹛林에 대해 두 가지의 다른 해석이 있다. 먼저 顏師古는 “나무로 둘러싸고 제사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른 한편에서 服虔은 지명으로 보아 “삼림으로 둘러싸여진 곳”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런 차이로 인해 蹛林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 먼저, 전자의 연장선상에서 蘢城에서 이 행사가 벌어지고 蹛林은 그곳에서 행해지는 祭祀儀式으로 자연 상태나 인공 상태로 세운 나무(몽골의 오보와 비슷하게 생긴 것) 주변을 도는 의식으로 이해했다(江上波夫, 1948 : 249;護雅夫, 1967 : 190). 그와 달리 單于庭에서 벌어지는 행사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고 그곳으로 가는 것을 묘사한 것이 蹛林이라고 설명하는 입장도 있었다(內田吟風, 1975 : 244). 물론 전자와 관련해 蹛林을 구체적 지명이 아니라 단순한 숲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林幹, 1986 : 34), 그 祭儀의 형식이 神樹의 주변을 도는 의식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즉 祭儀가 북아시아 유목민들의 神樹 숭배와 관련된 샤머니즘의 성격을 띤 것이라는 이해가 이와 관련되었다. 반면 蹛林을 실재하는 구체적인 지명으로 이해하고 그 위치를 음의 유사성에 근거해 單于庭이 위치한 호쇼 차이담으로부터 서쪽에 있는 타미르강이라고 비정하기도 했다(馬長壽(a), 2006 : 24)

에서 큰 모임을 열어 백성과 가축의 숫자를 헤아렸다.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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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口와 家畜의 숫자를 따져 單于나 王長 등에게 바칠 賦稅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匈奴의 賦稅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후대에 등장하는 유목국가에서 이루어졌던 징수체계와 비슷하게 人頭稅와 가축에 대한 貢納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의 법에 따르면, 칼을 한 자 이상 칼집에서 뽑는 자는 사형에 처하며,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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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拔刃尺者死”라고 기록된 내용은 평상시에 칼을 1척 이상 뽑는 것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전쟁에 사용하는 신성한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사와다, 2007 : 128). 하지만 이것이 정확하게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혹 이것을 “칼을 뽑아 남을 상하게 한 것이 1尺이 되면 사형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도둑질한 자는 그 집안[의 재산]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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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북방 유목민들의 습속에 따르면 도둑질을 한 경우 재물을 배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이상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을 몰수했다. 가벼운 범죄자는 알형(軋刑)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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軋刑 : 『漢書音義』에 따르면 “칼로 죄인의 얼굴을 새기는 형벌”이고, 또는 顏師古에 따르면 “죄인의 몸에 수레바퀴가 지나가게 하는 형벌”이라는 다른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이 중에서 戰士의 능력을 없앤다는 점에서 발의 복사뼈를 수레바퀴로 치어 부수는 형벌이라는 설명이 더 맞을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전투력을 중시하는 유목사회에서 발을 못 쓰게 될 경우 보다 치명적인 형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사와다, 2007 : 128). 그리고, 고대 유목민의 장례 풍습에는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얼굴을 칼로 자해하는 습속이 있었다는 점에서 전자의 경우는 형벌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에 처하며 큰 죄를 지은 자는 사형에 처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기간은 길어도 열흘을 넘지 않으니 죄수는 전국을 통틀어도 몇 명이 되지 않았다. [주010]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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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내용은 『鹽鐵論』의 기록(「論功篇」 : 356) “匈奴……法約而易辨, 求寡而易供, 是以省刑而不犯, 指麾而令從.”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선우는 아침 천막에서 나와 해가 뜨는 [동쪽을 보고] 절하고, [주011]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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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는 동쪽을 앞쪽으로 삼고 이를 신성하게 여겼다. 이런 관습은 이후 突厥 등의 그것과 비슷하나 남쪽을 앞으로 생각하는 몽골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종족 간의 풍습 차이를 알 수 있다.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했다. 좌석은 왼쪽을 중요하게 여겼고 북쪽을 향하였다. [주012]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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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于의 자리는 천막 안에서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그의 왼쪽에 앉았다. 이런 배치는 왼쪽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匈奴의 관제에도 반영되어 차기 계승자에게 左賢王의 지위를 부여한 것처럼 늘 왼쪽이 우선적이었다. 이후 突厥시대에도 遊牧君主가 거주하는 천막 내의 자리 배치의 경우 君主의 子弟들을 왼쪽에, 그리고 異姓의 貴族이나 官吏들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배치는 匈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열흘마다 돌아오는 십간(十干) 중에서 제5일째의] 무일(戊日)과 [제6일째의] 기일(己日)을 길일(吉日)로 쳤다. [주013]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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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록을 통해 匈奴가 열흘 단위의 태양력에 기초한 달력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戊’와 ‘己’는 五行에서 土에 해당하는 방위로 ‘중앙’이며 ‘행운’과 ‘축복’을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네 방위에서 종족을 통치하는 권력을 나타낸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中國的인 이해가 匈奴의 그것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이 분명하지 않아 논쟁거리이다.

장례를 치를 때 관(棺), 곽(槨)에다 금은이나 옷가지와 갖옷(裘) [주01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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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衣裳”으로 되어 있다.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주015]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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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인 발굴 성과에 따르면, 匈奴시대의 묘에 부장되는 물품은 희생해 순장하는 가축(말, 소, 양 등)과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陶器, 금은과 같은 귀금속제품과 옥석장식품, 골제품, 칠기목제품, 비단 등) 등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馬利淸, 2005 : 72 ~ 92).

[무덤 [주016]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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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는 무덤을 “逗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지 않았고 상복(喪服)도 입지 않았다. [주017]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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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 內蒙古와 몽골공화국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고고 발굴 성과에 따르면, 匈奴 墳墓는 다양한 형식을 갖고 있었다. 주로 중국 북방에서 발견된 소형의 匈奴 무덤은 木棺을 넣은 장방 竪穴墳으로 지면에는 별다른 표지가 없다. 반면, 몽골공화국 내지는 바이칼 지역에서 발견된 대형의 匈奴 무덤에는 지면에 원형의 돌무지와 무덤의 네 주변에 돌무더기가 있고, 안으로는 장방형의 竪穴墳 안에 棺과 槨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內蒙古와 달리 지금 몽골공화국의 초원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匈奴의 분묘는 司馬遷의 기록과 달리 封墳이 있다(田廣金·
郭素新, 2005 : 474 ~ 477). 오른쪽의 그림처럼 방형과 원형의 봉토분이 있고, 내부에는 곽과 관이 다양하게 배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외 일반 평민의 무덤으로 보이는 것에는 石棺, 甕棺, 天葬 등의 다양한 형식이 발굴되기도 했다.

 
〈흉노의 묘장〉
〈흉노의 묘장〉:5

[군주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이 따라 죽었는데[從死] [주018]
각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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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의 장례 풍속은 유라시아 초원에서 살았던 여타 유목민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먼저 죽은 자를 애도하는 기간 동안 스스로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서 피와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하는 풍습인 剺面이 있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이마에 산 자의 피를 뿌려 죽은 자와 산 자가 일체화됨으로써 그를 소생시키려는 바람을 담고 있었다. 이와 함께 죽은 자와 관계 있는 사람을 殉葬하는데,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가축을 함께 묻거나 산 자의 머리카락을 잘라 무덤에 넣는 剪髮의 풍습이 더욱 보편적이었다. 이것은 몸의 일부를 매장하여 의례의 간편화를 도모하며 죽은 자에게 애도를 표하는 것으로 殉死를 형식화함으로써 남겨진 사람들의 희생을 막고 나아가 노동력과 전투력을 보존하려는 것과도 관련되었다(사와다, 2007 : 126 ~ 7).

, 많으면 수천, 수백 명에 이르렀다. [주019]
각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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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의 “多至數千百人”이라는 기록은 『漢書』 권94 「匈奴傳」에 “多至數十百人”으로 다르게 나온다. 또한 기존의 匈奴 무덤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와 顔師古의 주석([顔]師古曰 : “或數十人, 或百人.”)에 따라 ‘千’은 ‘十’으로 고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쟁을 일으킬 때에는 항상 별 [주020]
각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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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星”이 없다.

과 달의 상태를 살폈다. 달이 차면 공격해 싸우고 달이 기울면 군대를 물렸다. [주021]
각주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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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유목민에게는 역법이 발달하지 않아 달이 차는 것을 기다려 공격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것은 이후 突厥도 비슷하다(『隋書』 권84 「突厥傳」 : 1864, “候月將滿, 輒爲寇抄”).

전투를 벌여 목을 베거나 [산 채로] 포로를 잡으면 상으로 한 잔의 술을 내렸고, 노획품은 그대로 본인이 갖도록 하였다. [주022]
각주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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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遊牧民들은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재화를 약탈한 본인이 모두 갖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목 군주 역시 약탈한 재화를 部落民들에게 다시 惠施해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려고 했다. 이것은 초기에 遊牧君主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국가가 발전하고 중국과 관계를 맺게 되면 遠征보다는 協商과 交易을 통해 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배분함으로써 군장에 대한 부락민들의 경제적 예속관계를 강화하려고 했다. 이상과 같이 약탈물의 획득과 분배가 부락민들에게 이루어진 것은 초기 국가 건설 시기 부족 통합 과정에서 君主權의 强化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김호동, 1993 : 152).

포로는 잡은 자의 노비가 되었다. [주023]
각주 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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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에 존재하고 있었던 한인 노예는 전쟁으로 인해 文帝시대부터 昭帝시대까지 匈奴에 잡혀 간 포로의 숫자가 약 10만 정도 된다고 추정된다. 이상과 같은 기록은 약탈전쟁의 성격이 재화와 人口의 약탈에 주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王慶憲, 2005 : 47 ~ 52).

그러므로 전투 때에 사람들은 제 이익을 위해 달려 나갔는데, 군대를 유인하여 적을 덮치는 [주024]
각주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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冒 : “덮치다”, “갑자기 공격하다”는 의미이다. 『漢書』에는 “包”로 되어 있다.

것을 잘하였다. 그 까닭에 적을 발견하면 이익을 좇는 것같이 새떼처럼 모여들었고 어려워 도망갈 때는 구름처럼 스러져 흩어졌다. [주025]
각주 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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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록과 관련하여 『鹽鐵論』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다(「備胡篇」 : 280 ~ 281, “匈奴不變業, 而中國已騷動矣. 風合而雲解, 就之則亡, 擊之則散, 未可一世而舉也.”). 이렇게 중국인들은 匈奴와 같은 유목민들이 이익을 쫓아 움직이는 것을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유목민들이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주36) 참조).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을 거두어 돌아오면 [주026]
각주 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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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輿”가 “轝”로 되어 있다.

, 그 죽은 사람의 집과 재물[家財]을 모두 갖게 했다.

 

주 001
漢初에는 周나라의 역법에 따라 시월을 한 해의 첫 달로 했다. 하지만 武帝 太初 元年(전104)에 夏나라의 역법으로 바꾸면서 正月을 첫 달로 삼았다. 司馬遷은 太初曆의 개정에 참가한 이후에 『史記』를 지었는데, 匈奴의 정확한 역법을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바꾼 역법에 기초해 기록했다는 점에서 歲正月은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 002
諸長 : 左賢王 이하 24長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219) 참조)
주 003
겨울철에 모임을 갖는 것은 유목민들에게 모피 내지는 식량을 구하기 위한 사냥 모임이란 이유 이외에 달리 까닭을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초원의 겨울은 길고 추워 모임을 갖기 좋은 계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正月에 單于庭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匈奴 고유의 것이 아니라 中國의 제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는 이 집회의 성격이 원래 單于의 일족인 攣鞮氏 또는 그 씨족의 祭儀였으나 국가 성립 이후 匈奴의 장들이 참가하는 국가적인 성격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江上波夫, 1948 : 250 ~ 252). 한편, 겨울철의 大狩獵祭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祭天의 의미보다는 部族이나 국가의 통합을 위한 동맹의 확인 또 충성의 상징을 보이는 정치적 의미와 함께 집단 몰이사냥을 통한 군사적 의미에 더 초점을 두기도 한다(박원길, 2001 : 23 ~ 24).
주 004
蘢城 : 單于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면서 祭天儀式을 거행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蘢城에서 벌어지는 제천 행사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몽골 초원 유목민들이 오월 초원의 풀이 푸르러지고 말 젖으로 만든 술이 익는 풍요로운 계절(여름의 시작)에 벌이는 春祭였다. 이후 몽골시대에 보이는 쿠릴타이와 같은 정치·종교적 행사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이해되기도 했다. 따라서 蘢城의 의미와 위치, 정치적 비중, 종교적 성격 등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먼저 의미와 위치에 관련하여 『史記』에 기록된 蘢城의 蘢이 『漢書』 「嚴安傳」에 “深入匈奴, 燔其龍城”이라고 된 것에 대해 顔師古가 “燔燒也. 龍城匈奴祭天處.”라고 주를 단 것을 기초로 자연 상태의 나무나 목조로 된 제단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江上波夫, 1948 : 237 ~ 8). 그의 입장을 이어 蘢城이 오늘날 몽골의 신앙 대상인 오보(Ovoo)라고 주장하기도 했다(護雅夫, 1967 : 89 ~ 190;後藤富男, 1956 : 65). 그와 달리 성채와 같은 실체가 있는 건물로 政治·軍事·宗敎의 중심이라고 보기도 했다(內田吟風, 1975 : 60 ~ 64). 이것은 “蘢城”이 문헌에 따라 “蘢城”(『史記』 「匈奴傳」), “龍城”(『漢書』 「匈奴傳」, 『鹽鐵論』), “籠城”(『漢書』 「衛靑傳」) 등으로 달리 표기되고, 또한 경우에 따라 “單于庭”(『史記』와 『漢書』), “龍祠”(『後漢書』 「南匈奴傳」), “朝會”(『漢書』 「西域傳」), “龍庭”(『後漢書』 「竇憲傳」), “庭會”(『後漢書』 「南匈奴傳」) 등의 표현이 蘢城과 같이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용례를 통해 그 의미가 單于가 있는 單于庭(오르두)을 의미하는 것이고, 蘢이 그와 음이 유사하고 뜻이 부합하는 龍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하고, 그 어원을 單于의 씨족인 攣鞮의 祭로 이해하기도 했다(박원길, 2001 : 27 ~ 28). 한편 蘢城의 의식이 갖는 성격에 대해서는 祭天儀式 이외에도 합의를 이루는 會議體로서의 정치적인 성격을 부여하기도 했다(箭內亙, 1930 : 367.) 따라서 蘢城의 위치를 單于庭이 위치한 곳과 연결 지어 漠南에 匈奴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을 때에는 현재 內蒙古自治區 呼和浩特 주변(『史記』 권110 「匈奴傳」) 또는 그들이 밀려 올라가 漠北에 머무를 때에는 몽골공화국 오르콘강 주변(『雙溪醉隱集』 “龍庭, 和林西北地”)에 있는 호쇼 차이담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馬長壽(a), 2006 : 24). 『漢書』에는 ‘龍城’으로 되어 있다.
주 005
蹛林 : 匈奴가 제전을 벌이기 위해 벌이는 장소 내지는 행사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에 대해 자료 부족으로 시기, 장소, 행사의 성격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먼저, 蹛林이 벌어지는 시기가 단순하게 가을[秋]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여타 기록을 통해 팔월 말에서 구월 초, 즉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시기, 다시 말해 冬營地로 이동하기 전에 이루어진 행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행사가 벌어진 장소로서 蹛林에 대해 두 가지의 다른 해석이 있다. 먼저 顏師古는 “나무로 둘러싸고 제사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른 한편에서 服虔은 지명으로 보아 “삼림으로 둘러싸여진 곳”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런 차이로 인해 蹛林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 먼저, 전자의 연장선상에서 蘢城에서 이 행사가 벌어지고 蹛林은 그곳에서 행해지는 祭祀儀式으로 자연 상태나 인공 상태로 세운 나무(몽골의 오보와 비슷하게 생긴 것) 주변을 도는 의식으로 이해했다(江上波夫, 1948 : 249;護雅夫, 1967 : 190). 그와 달리 單于庭에서 벌어지는 행사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고 그곳으로 가는 것을 묘사한 것이 蹛林이라고 설명하는 입장도 있었다(內田吟風, 1975 : 244). 물론 전자와 관련해 蹛林을 구체적 지명이 아니라 단순한 숲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林幹, 1986 : 34), 그 祭儀의 형식이 神樹의 주변을 도는 의식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즉 祭儀가 북아시아 유목민들의 神樹 숭배와 관련된 샤머니즘의 성격을 띤 것이라는 이해가 이와 관련되었다. 반면 蹛林을 실재하는 구체적인 지명으로 이해하고 그 위치를 음의 유사성에 근거해 單于庭이 위치한 호쇼 차이담으로부터 서쪽에 있는 타미르강이라고 비정하기도 했다(馬長壽(a), 2006 : 24)
주 006
人口와 家畜의 숫자를 따져 單于나 王長 등에게 바칠 賦稅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匈奴의 賦稅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후대에 등장하는 유목국가에서 이루어졌던 징수체계와 비슷하게 人頭稅와 가축에 대한 貢納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주 007
“拔刃尺者死”라고 기록된 내용은 평상시에 칼을 1척 이상 뽑는 것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전쟁에 사용하는 신성한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사와다, 2007 : 128). 하지만 이것이 정확하게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혹 이것을 “칼을 뽑아 남을 상하게 한 것이 1尺이 되면 사형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주 008
여타 북방 유목민들의 습속에 따르면 도둑질을 한 경우 재물을 배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이상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주 009
軋刑 : 『漢書音義』에 따르면 “칼로 죄인의 얼굴을 새기는 형벌”이고, 또는 顏師古에 따르면 “죄인의 몸에 수레바퀴가 지나가게 하는 형벌”이라는 다른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이 중에서 戰士의 능력을 없앤다는 점에서 발의 복사뼈를 수레바퀴로 치어 부수는 형벌이라는 설명이 더 맞을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전투력을 중시하는 유목사회에서 발을 못 쓰게 될 경우 보다 치명적인 형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사와다, 2007 : 128). 그리고, 고대 유목민의 장례 풍습에는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얼굴을 칼로 자해하는 습속이 있었다는 점에서 전자의 경우는 형벌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주 010
위와 같은 내용은 『鹽鐵論』의 기록(「論功篇」 : 356) “匈奴……法約而易辨, 求寡而易供, 是以省刑而不犯, 指麾而令從.”에서도 확인된다.
주 011
匈奴는 동쪽을 앞쪽으로 삼고 이를 신성하게 여겼다. 이런 관습은 이후 突厥 등의 그것과 비슷하나 남쪽을 앞으로 생각하는 몽골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종족 간의 풍습 차이를 알 수 있다.
주 012
單于의 자리는 천막 안에서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그의 왼쪽에 앉았다. 이런 배치는 왼쪽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匈奴의 관제에도 반영되어 차기 계승자에게 左賢王의 지위를 부여한 것처럼 늘 왼쪽이 우선적이었다. 이후 突厥시대에도 遊牧君主가 거주하는 천막 내의 자리 배치의 경우 君主의 子弟들을 왼쪽에, 그리고 異姓의 貴族이나 官吏들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배치는 匈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 013
이런 기록을 통해 匈奴가 열흘 단위의 태양력에 기초한 달력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戊’와 ‘己’는 五行에서 土에 해당하는 방위로 ‘중앙’이며 ‘행운’과 ‘축복’을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네 방위에서 종족을 통치하는 권력을 나타낸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中國的인 이해가 匈奴의 그것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이 분명하지 않아 논쟁거리이다.
주 014
『漢書』에는 “衣裳”으로 되어 있다.
주 015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에 따르면, 匈奴시대의 묘에 부장되는 물품은 희생해 순장하는 가축(말, 소, 양 등)과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陶器, 금은과 같은 귀금속제품과 옥석장식품, 골제품, 칠기목제품, 비단 등) 등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馬利淸, 2005 : 72 ~ 92).
주 016
匈奴는 무덤을 “逗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 017
20세기 이후 內蒙古와 몽골공화국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고고 발굴 성과에 따르면, 匈奴 墳墓는 다양한 형식을 갖고 있었다. 주로 중국 북방에서 발견된 소형의 匈奴 무덤은 木棺을 넣은 장방 竪穴墳으로 지면에는 별다른 표지가 없다. 반면, 몽골공화국 내지는 바이칼 지역에서 발견된 대형의 匈奴 무덤에는 지면에 원형의 돌무지와 무덤의 네 주변에 돌무더기가 있고, 안으로는 장방형의 竪穴墳 안에 棺과 槨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內蒙古와 달리 지금 몽골공화국의 초원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匈奴의 분묘는 司馬遷의 기록과 달리 封墳이 있다(田廣金·
郭素新, 2005 : 474 ~ 477). 오른쪽의 그림처럼 방형과 원형의 봉토분이 있고, 내부에는 곽과 관이 다양하게 배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외 일반 평민의 무덤으로 보이는 것에는 石棺, 甕棺, 天葬 등의 다양한 형식이 발굴되기도 했다.
 
〈흉노의 묘장〉
〈흉노의 묘장〉:5
주 018
匈奴의 장례 풍속은 유라시아 초원에서 살았던 여타 유목민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먼저 죽은 자를 애도하는 기간 동안 스스로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서 피와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하는 풍습인 剺面이 있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이마에 산 자의 피를 뿌려 죽은 자와 산 자가 일체화됨으로써 그를 소생시키려는 바람을 담고 있었다. 이와 함께 죽은 자와 관계 있는 사람을 殉葬하는데,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가축을 함께 묻거나 산 자의 머리카락을 잘라 무덤에 넣는 剪髮의 풍습이 더욱 보편적이었다. 이것은 몸의 일부를 매장하여 의례의 간편화를 도모하며 죽은 자에게 애도를 표하는 것으로 殉死를 형식화함으로써 남겨진 사람들의 희생을 막고 나아가 노동력과 전투력을 보존하려는 것과도 관련되었다(사와다, 2007 : 126 ~ 7).
주 019
『史記』의 “多至數千百人”이라는 기록은 『漢書』 권94 「匈奴傳」에 “多至數十百人”으로 다르게 나온다. 또한 기존의 匈奴 무덤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와 顔師古의 주석([顔]師古曰 : “或數十人, 或百人.”)에 따라 ‘千’은 ‘十’으로 고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주 020
『漢書』에는 “星”이 없다.
주 021
초원 유목민에게는 역법이 발달하지 않아 달이 차는 것을 기다려 공격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것은 이후 突厥도 비슷하다(『隋書』 권84 「突厥傳」 : 1864, “候月將滿, 輒爲寇抄”).
주 022
일반적으로 遊牧民들은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재화를 약탈한 본인이 모두 갖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목 군주 역시 약탈한 재화를 部落民들에게 다시 惠施해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려고 했다. 이것은 초기에 遊牧君主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국가가 발전하고 중국과 관계를 맺게 되면 遠征보다는 協商과 交易을 통해 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배분함으로써 군장에 대한 부락민들의 경제적 예속관계를 강화하려고 했다. 이상과 같이 약탈물의 획득과 분배가 부락민들에게 이루어진 것은 초기 국가 건설 시기 부족 통합 과정에서 君主權의 强化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김호동, 1993 : 152).
주 023
匈奴에 존재하고 있었던 한인 노예는 전쟁으로 인해 文帝시대부터 昭帝시대까지 匈奴에 잡혀 간 포로의 숫자가 약 10만 정도 된다고 추정된다. 이상과 같은 기록은 약탈전쟁의 성격이 재화와 人口의 약탈에 주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王慶憲, 2005 : 47 ~ 52).
주 024
冒 : “덮치다”, “갑자기 공격하다”는 의미이다. 『漢書』에는 “包”로 되어 있다.
주 025
이런 기록과 관련하여 『鹽鐵論』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다(「備胡篇」 : 280 ~ 281, “匈奴不變業, 而中國已騷動矣. 風合而雲解, 就之則亡, 擊之則散, 未可一世而舉也.”). 이렇게 중국인들은 匈奴와 같은 유목민들이 이익을 쫓아 움직이는 것을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유목민들이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주36) 참조).
주 026
『漢書』에는 “輿”가 “轝”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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