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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피해와 자기공개

 

일본군은 15년에 걸친 중일전쟁 중, 중국에서 살육과 강간을 반복했다. 1937년 남경대학살에서의 집단강간은 반일 감정을 고양시키고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상층부는 위안소 건설을 본격화했다. 도시의 위안소에 보내진 것은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 일본·중국의 여성들이었다. 점령지의 일본군 거점에서는 여성들을 납치·연행하거나, 마을에 「제공」을 명령해서 「강간소」에 감금하고 강간했다.
이러한 강간이나 「위안부」범죄의 일부는 전후의 전범재판에서 재판을 받고, 전쟁피해의 실태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배상청구로는 되지 않고, 성폭력은 ‘수치’로 여겨져서 여성들은 침묵했다. 피해실태와 전모가 명확해 진 것은, 1990년대, 아시아 각지에서 확산된 피해여성의 자기공개와 고발 때문이다. 92년의 「일본의 전후보상에 관한 국제공시청회(도쿄)」에서는, 산시성(山西省)의 만애화(万愛花)씨가 중국인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증언했다. 95년부터 시작된 일본정부에 대한 손해배송청구재판의 과정에서 여성들은 피해증언을 하고, 중국·일본의 시민이나 변호사, 연구자에 의한 조사 자료 발굴이 진행되었다.

 

중국정부와 사회의 변화

 

중국정부는, 95년의 북경의 세계여성회의에는 중국의 성폭력 피해자와 관계자의 참가를 허가하지 않았지만, 산시성(山西省)의 배상청구재판의 제소나 지원은 묵인했다. 중국사회에 큰 변화가 나타난 것은 여성국제전범재판법정의 준비가 시작된 90년대 후반부터였다. 2000년 3월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최초의 「위안부」문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 그 이후에는 매스컴 보도나 조사연구도 왕성해 지고, 계림(桂林)이나 난징(南京)등에서 새로운 피해자도 스스로 자신을 드러냈다. 2001년에는 하이난도의 재판도 시작되었고, 07년에는 상하이(上海)에 중국 「위안부」자료관이 개관했다. 성폭력을 여성의 인권문제로서 취급하는 여성 운동의 움직임은 아직 볼 수 없지만, 재판을 통하여 싸우는 여성들에 대한 민간의 조직적 투쟁 활동이나 지방 정부에 의한 생활지원, 변호사들에 의한 각지의 조사 활동이 시작되고 있다. 산시성 무향(武郷)의 팔로군(八路軍) 기념관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성 폭력 피해의 실태와 여성들의 투쟁을 전하는 패널전의 개최 계획도 진행되고 있다. 피해 여성의 존엄 회복을 위한 투쟁이 중국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시성 우현(盂県)의 피해 여성들의 지원에 달려 든, 태원(太原)의 택시 운전기사들
- 제공:산시성을 밝게 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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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시성 우현(盂県)의 피해 여성들의 지원에 달려 든, 태원(太原)의 택시 운전기사들

    제공:산시성을 밝게 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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