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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

  • 년도
  • 나이
  • 내용
  • 1928년
  •  
  • 평안북도 희천 출생(주민등록상 출생연도는 1927년)
  • 1940년
  • (13세)
  • 만주 하얼빈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
  • 1941년
  • (14세)
  • 성병에 걸려 귀국
  • 1942년경
  • (15세경)
  • 중국 석가장에서 다시 일본군 ‘위안부’ 생활
  • 1945년
  • (18세)
  • 인천으로 귀국
  • 1948년경
  • (21세경)
  • 충북 온양에서 사별한 남자와 재혼
    밀주를 만들며 생계유지
  • 1954년
  • (27세)
  • 유부남 황○○와 동거
    부천에서 만물상, 도매상 등 장사
  • 1958년
  • (31세)
  • 양자 얻음
  • 1976년경
  • (49세경)
  • 빚보증을 잘못 서서 생활이 어려워짐
    황○○와 헤어짐
  • 1998년
  • (71세)
  • 일본군 ‘위안부’ 신고
  • 2004년
  • (77세)
  • 현재 정부 보조금으로 인천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음

평양 위치 →하얼빈 위치 →평양 위치 →석가장 위치 →인천 위치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질 못했을 거에요.
“어떤 때는 나이가 먹어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은 하루 죙-일,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자서 그런지 밤에 잠이 안 오면은 되짚어 볼라고 가다가, 가다가 되짚어 볼라고 해도 상상도 안 되고 그러면은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무서운 얘기를 다 내가 상상을 했대면 오늘날까지 살지를 못했겠죠. 나 혼자 말하고 나 혼자 위로받고, 그렇게 살아요 시방.
“모르는 사람이 행복한 거예요. 자기들 직접 당하지 않았어도 당하는 걸 보기만 하는 사람도 몸서리가 날 정도였을 거에요.
“자식도 못 낳구- 참,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거 하나도 못해보구.
“사람 사는 것 같이 살질 않고 어떻게 그냥, 누구 말마따나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

벌금

돈 이십 원에 나 사가구 우리 아버지 빼 달라고 그랬갔지.
“내가 낳기는 평북에서 낳는데 아주 어려서 평양시에 나와 가지고, 우리 오빠 이불짐 위에 태와 가지고 냇가를 건넜던 생각이 나요. 그것만이 어렴풋이 생각이 나니까. 아마 네다섯 살이 되었나 대여섯 살이 되었나.
“우리가 오남매인데 위로 오라버니가 둘, 언니가 하나, 나, 남동생이 있었거든.
“우리 아버지가 약주를 과하다고 그럴까. 그냥 외박을 잘 하시는 분인가 봐. …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다니셨으니깐. … 그랬는데 얼마 있다가서 아버지가 왔는데, 같이 사는 동안에 고물상을 했어요. 아빠 만나기 전에 엄마는 시방으로 치면은 생선노점, 방문장사 생선, 그거 핸 기억이 나요.
“암동 주 138
각주 138)
평양시 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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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 고물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에는 나를 학교에 집어 넣나 봐요. 그랬길래 학교 갔다 오니까 막 숭개숭개하고 야단들 났지요, 아버지 붙잡혀 갔다고, 고물상을 하다가. 시방도 그렇지요? 도둑놈 물건 사면 산 사람이 붙잡혀 들어가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그때도 그렇게 해서 들어갔을 꺼요.
“학교도 그렇게 되니깐 집안이 파탄이 되는데 댕기나요?
“한 이 년 정도? 일 년 이상 학교를 다닌 것은 같은데 … 오빠들도 학교에 많이 못 댕겼다는 거지. 큰오빠도 평북 희천에서 살다 나와서 살기 힘드니깐 그냥 엄마 도와서 일만 할려고 애썼지, 공부하는 걸 못 봤단 말이야.
“고물상 하다가 아버지가 가막소에 들어가게 되니깐 공부는 못하러 댕기니깐 그냥. … 나 되게 까불었나봐. 그러니깐 이왕 저길 할려면 권번에 가서람이 배와서 해야지, 안 배운 사람 배운 사람 달르다고 거길 집어 넣어 줬나 봐, 누가.
“옛날에는 채 맞은 기생, 채 안 맞은 기생 그랬거든. 권번에 가서 배운 사람 안 배운 사람 구별해 가지고 권번 졸업 맡은 사람을 채 맞은 기생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평양기생 소리가 거기서 나왔어요. 거기 가서람이 서도 주 139
각주 139)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서 불린 민요나 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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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금 배웠는데 그것도 뜻 모르던 거지. 거 이제 몇 달 댕기다가서는 냉중에 오빠한테 들켜서 되게 맞았지. 내가 어떻게 보면 좀 까분다고 그럴까. 나이 열세 살이 뭐 안다고 그런 데 가갔어요.
“그때가 열두 살? 열세 살 초반? 그 정도 됐을 거예요. 그래서 댕기다가서람이. 이 오른손 엄지손을 앓게 되니까 장구도 못 치고 이렇게 되자, 그 권번에 있던 여자랑 같이 ‘우리 돈벌러 가자-’ 그러고서람이 나와 가지고서는 만주로 간 거 같애요.
“아버지 가막소 벌금이 그때 돈으로 이십 원인지 얼마인지 그런 말이 있었나 봐요. 그러자 내가 벌어서 갚는다고.
“친구랑 같이 … 어떻게 알았는 지도 모르지. 그러니깐 아마 철없이 이십 원 가지면 우리 아버지 나온다 이것만 생각하고 돈 번대니까 가자 해서 아마 갔나봐요.
“팔려간 건지 그냥 어떻게 해서 간 건지 모르지만 하여튼 확실하게 기억하기는 열세 살이거든요. 열세 살인데 만주로 갔거든, 두만강 건너서.

요꼬네 수술

십오 세 안쪽에 다 된 거지, 병신은.
“갈 적에 여럿이 갔는데 여럿이 갔어도 누구 누군지도 모르고.
“거기는 일체 한국사람은 볼 수 없고 맨 이제 일본사람도 그냥 사람이 아니라 군인들, 군인들만 왔다갔다 하구 하는데 엄청 추운 생각만 나, 그 추운 생각만 나.
“이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말할 수 없이 힘들지. 처음 가서 힘든 얘기 그거는 뭐 하나마나한 얘기고. 아마, 그게 제일 힘들었을 거야. 주인 할머니가 무섭구. 그 사람만 보였다 하면은 군인 봐서 떨리는 거 이상 가게 그 사람만 보면 겁이 난 걸 보니까.
“원체 어린 아이에게 무리가 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거기가선 얼마 안 있어 가지고 바로, 말하자면 성병이지, 요꼬네라는 그게 걸렸어요.
요꼬네라구 이게 한국말로, 가래또시 주 140
각주 140)
가래톳은 넓적다리 죽지의 임파선이 붓는 것을 말한다. 대개 임파선이 붓는 것은 성병과 동시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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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양쪽 샅을 가리키며) 이렇게 양짝에 생겨 가지구.
“뭐 열이 많이 나구, 이제 손님 못하게끔 되니깐 말도 못하죠 뭐.
“그게 걸렸으니깐 도저히 이제 자기들이 부려먹질 못하갔으니깐 수술을 시키더라고. 근데 그 수술 시키는 데에서 너무 잔인하지, 일본 사람들이. 저희, 저희 딸, 저희 고향의 딸이래면 그런 짓을 안 했을 거여. 양쪽을 수술하면서 나팔관을 막아논 거여. 그러니까 그게 쎄고쎄고쎄- 가지고서 이십 세가 넘어가니까 난소난종이라는 혹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이거만큼씩한 혹이 양쪽에 뱃 속에가 들게 됐어요.
“그러니까 십오 세 안쪽에 다 된 거지, 병신은.
“양짝 다리 수술을 받았으니깐 걸음을 못 걷지. 나쁜 기운이 들어갔는데 낫갔어요? 안 낫구, 자기네가 사용을 못해 먹갔으니깐 거기에 남자 분, 한국 사람을 딸려서 나를 한국에다 내보냈거든.
“이제 내 저기를 못 저기 하니까 막 야단을 하갔지. 나 데리고 나온 사람이 그냥 ‘거 억지로 하는 일 아닌데 병이 나서 그러는 놈을 뭘 어떡하느냐’고 그래가매 나를 도와서 얘기해 준 거 같애. 그러니깐 겁없이 그 사람이 집에 데려다 준대니까 따라 나왔지.
“[그 사람이] 군인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한 번도 안 보던 사람인데, 그냥 그 사람 딸려서 나를 데려다 주더라구요. 그때는 증명이 없이는 들어가고 나가고 하지 못하는 데니까 거기는.
“시방으로 치면 여행증명서래든지 주민등록이래든지, 그 사람 보장하는 저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때에도 역시 내가, 나 혼자 맘대로 중국에 가고 싶으면 가고 만주에 가고 싶으면 가는 게 아니고, 아마 그 때에도 말하자면 여자, 관리하는 여자, 포주래는 여자 그 여자가 증명을 뭘 뭘 하라고 해서 했는지, 그거를 해서 내보냈는지, 하이튼 그게 또 그렇게 기억만 나요.

귀향

이제 그런 델 안 가구 여기서 돈 벌을라구 아마 그 부대에도 댕기고 그랬갔죠..
“엄마는 내가 만주에 갔다 와서두 생선장사한 거이 기억나요. 내가 만주가서 병들어 갖고 집에 나온 뒤에 얼마 안 있다가 언니는 시집간 거 같애.
“뭐를 하건 간에 쌀밥이 아니라 밤낮 조밥. 보리밥도 아니어, 조밥. 언니는 시집가고 없으니깐, 어려서두 내가 인제 부뚜막에 올라 앉아서 밤낮 조밥을 해댔으니깐. 나무가 없으니깐 나무도 줏으러 댕기고.
“우리집에 얼마 안 가서 일본 사람들 총 만들고 하는 부대가 있었어요. 집은 가난하고 어려우니깐.
“이제 그런 델 안 가구 여기서 돈 벌을라구 아마 그 부대에도 댕기고 그랬갔죠.
“아침에 줄을 서면 노인네도 있고 애들도 있고, 그날 일 할 수 있는 사람만큼 몇 사람을-. 그렇게 들어가면 이름 불르고 허리빠(허리띠) 하나 주면, 그거 없이는 어딜 못 댕겨, 총알 맹길고 그냥 닦고 하는 데니까.
“권번에 댕기던 친구들하고[도] 만나지. 부대에 몇 시에 나온대는 거를 알고 애들이 길목 지켰다가서람이 저희들 옷 빌려주기도 하고 해서람이, 각 영업집 가서람이 노래를 불르지. 시방은 그야말로 여자들이 말도 못하게 저기 하지, 전에는 권번에 댕기는 사람은 문 열고 들어가는 자체부터 벌써 달랐으니까. 그런께 만나서 아마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가 우리 글루(중국) 가자 하고 그랬는지. … 중국엘 가면 이제 편안하다, 돈 많이 번다 어쩐다 하니까 아마 글루 방향을.
“그러니깐 이제 다시는 그런 데는 안 간다고 하구서 했던 것이 또 그런 데로 또 가 가지구서는.

다시 중국으로

두 번째 알고 갈 수가 있나, 몰르니까 갔지.
“북지(중국 북부)로 갈 적에는 압록강을 건넜거든.
“내 친구랑 둘이 가게 된 모양이에요. 언제 며칟날 간대는 얘기를 듣구서 평양[역]에 가보니깐 하여튼 엄청 많더라니까.
“다 우리네 같은 사람들이지 뭐.
“우리는 권번에 같이 댕기던 사람이니까 시방으로 치면 술집에 노래하고 술 팔러 가는 건 줄 알았지, 그런 데는 아닌 줄 알았지.
“그러니깐 내가 좀 둔했는지 아둔했는지.
“우리네 직접 간 사람도 거기 들어앉기 전엔 몰랐는데 [집에서] 알 리가 있겠어? 그런 데는 아닌 줄 알았지. 두 번째 갈 적에는 더군다나 완전히- 몰르고 간 게 뭐냐면, 먼저 번에 그런 데서 되게 힘들었으니까 두 번째 알고 갈 수가 있나, 몰르니까 갔지.
“만주 갈 적에는 몰라서 갔지만은 와서는 거기를 안 갈라고 부대에까지 댕기면서 일을 댕기고 막일을 하고 그랬는데 왜 또 중국엘 갔을까.
“그런데 내가 중국에 간다는 거를 우리 엄마는 알았다, 그거는 알 수 있어요. 왜냐믄 우리 엄마가 내가 떠날 때 저고리를 (주황색 천을 가리키며) 요 색깔이, 요 색깔에다가 밑에는 초록 치마, 응- 유똥 치마를 해줬고. 그걸 왜 해줬는지까지도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글쎄, 노래 부르러 간대니까 치마저고리를 한 벌 해줬는지.
“그때에는 나 치마저고리를 해 줄 만큼 우리집이 넉넉하지 못하고 아버지 가막에서 금방 나오구, 언니 시집가고 뭐 해 줄 수가 없었을 텐데. 엄마가 노래를 하러 간다고 하니까 해줬는지-. 그러니까 남북통일이 되면 아휴- 만나면 그런 거라도 한 번 물어봐야 하는데. 이제 육십 년 넘었으니까 우리 엄마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을 거예요. (잠시 침묵)
“나 혼자만 간 게 아니거든. 여럿이들 가서람이 거기가 나마창 주 141
각주 141)
나마창은 중국 석가장 근처 마을이라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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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석가장 주 142
각주 142)
중국 북부지역의 지명 이름으로 일본 군대가 많이 밀접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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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시방 이름을 잘 기억 못하겠지만, 갔는데 도키와 주 143
각주 143)
길원옥이 있었던 위안소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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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하룬가 지내는데 처음 밥이 뭘로 나왔냐면 쌀밥에다가 된장국에 소고기 넣고 끓여준 생각이 나.
“세상에- 왜된장에다가 시금치 국을 끓이는데 고기를 이렇게 넓적넓적하게 써는 게 아니라, 요렇게 몽땅몽땅하게 썰은 건데, 그걸 국을 끓여서 주는데.
“어-찌나 맛있는지. 그걸 먹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엄마 아빠 생각이 나고. 에휴- 나는 쌀밥에 고기국을 먹는데 우리집 식구들은 다- 뭐 먹고 살까, 좁쌀 고거만 먹고 살갔지.
“그렇게 그걸 먹질 못하고 차에 시달리면서 가 가지고 배가 고플텐데도 안 먹고 집안 생각을 하고, 내가 [그러니까] 그 방안에 식구들이 다 울다시피하고 그랬지.
“[또 그런 데 갔다는 것을] 거기 가서 알았어요. 그러길래 거기 처음에 들어가서 그 시금치국 끓여주던 집이서람이 거길로 갈 적에 안 간다 그랬갔지. 그런 데 안 간다 그럴 적에 그때까지도 한국 남자도 있었단 말이여. 그러니깐 안 갈래믄 시방 어떤 식으로 해서람이 [그 남자가] 돈을 많이 줘야 하는데 뭘로다 줄 거냐고, 그랜 거 같애요. 그렇게 그 사람이 위협을 핸 거 같애. 그러니깐 할 수 없이 저길 하면서 ‘그럼 그 집이 노래하는 집이야요, 술 파는 집이야요, 뭐 하는 집이야요?’하고 그렇게 자꾸 물어보니까, ‘술 파는 데래니까 말이 많아!’ 그러고 야단을 쳤갔지.

도키와

낮에두 사람들이 들어 닥치면은 어- 쩔 수 없이.
“가서 보니까 술은 한 잔도 안 팔고 뭐- 사람 구경은 하나도 못하고 순전히 온대는 사람은 일본 사람.
“내가 있은 데는 도키와래는 데 였어요.
“거저 반항만 자꾸 하니까 ‘너 반항할 주제가 되냐’하고 주인이 미워했을 것 같애.
“자유가 없죠. 외출 전혀 못 한다니깐-. 낮에두 그 사람들이 들어 닥치면은 어-쩔 수 없이 그야말로 그 사람들- 그냥.
“[군인들은] 대개가 아침은 아니고 오후 시간부터 저녁까지가 더 많은 것 같애요. 오후부터 저녁 때가 더 많은 것 같은 게 뭐냐면, 아침에 이제 좀 늦잠을 자고 화장을 이제 좀 들하고 나면은 거 감시하는 여자들이 쫓아댕기면서 시방 신데 화장을 들하고 있느냐고, 그 얼굴 가지고 손님 대하겠느냐 그러고 야단치던 생각이 나.
“이제 화장을 시켜서 내 앉혀 놓면, 쭉- 이렇게.
“시방으로 치면 홀 마냥 이렇게 해 가지구 갓(가장자리)으로 삥- 둘러 이렇게 의자가 있는데 거기에 앉아 있은 생각이 나고.
“근데 이제 그 거기서람이 이렇게 이렇-게 살피는 여자가 또 있지요. 그 여자가 벌써 척 들어와서람이 그 사람들 하는 행동을 보면은 누구래는 걸 알게 되거든. 그러믄 ‘누구 아무 데로 가’ 그러고 ‘누구’ 그러고 이름 불르면 생각하고 벌써 자기 방으로 가야죠.
“그러다 보면은 의자에 나가서 다시 앉았을 때도 있지만은 그거는 여간해서람이 드문 일이고, 채 씻기도 전에 사람이 또 들어오는 수가 있어. 그렇게 힘이 들었어요.
“아마 들어오면서 [군인들이] 표를 사고 들어오는지, 그거 내밀고서람이 저기를 하면 그냥 들어가고 그랬나 봐요.
“우리한테는 그냥 고 표만 가지고 들어와서, 그거 받아서람이 나는 이제 저 매표소에 갖다 내야 되니까. 돈은 한 번도 못 받아 봤으니깐.
“근데 일본 사람이 오는 것도 술 안 먹고 들어오는 사람은 덜 무서운데 술만 먹고 들어오면은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 이제 술 취한 사람 벌써 목소리가 나서 들어오면은 … 그-냥 무서워서 아유 저 사람은 나를 좀 안 잡아줬으면 참 좋갔는데-. … 시방도 그래. 시방도 술 먹은 사람은 그렇게 무서워요.

폭력

으악- 하고 내려친 사람이나 제 욕심 채우기로 저길 한 사람이나.
“얼른 끝내지도 않고 사람 애를 먹이는 게 아마 제일 큰 욕인 거 같애요. 오래, 거저 사람은 죽거나 말거나 제 욕심 채우기로 저길 하니깐 힘이 들지.
“수도 모르갔어. 한두 명이 그럴 것 같으면 그렇게 안 저기 했지. 어떤 때는 뭐 진짜로, 미처 그야말로 밑에 씻어 내기가 바쁠 정도로 저기 하니까. 피가 나거나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힘드니깐 반항을 좀 하지. 그러면 또 반항을 한다고 뚜드려 맞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저 그 사람들한테 당핸 생각만 그냥 끔찍스럽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반항을 하다 이렇게 해졌을까-.
“(정수리 부분의 흉터를 보여주며) 이거는 일본군도, 빼지 않고 그냥 내리쳤으니까 그렇지 빼 가지구 쳤으면 죽었을 텐데-. 시방까지도 이렇게 흉터가 크니. 옷이 피에 젖어서 벳겨 내지를 못하고 찢어냈다니까. 그걸 상상을 해 봐요.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게 모질게 맞고 그기 그렇게 상처가 된대는게, 그게 지나가는 말로 하니까 그렇지 상상을 하면 나도 사람인데 왜 그런 사람들한테 원한을 안 가지갔어요, 가지지. 그러게 난 도대체가 그 사람들을 상상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난 휴- 잊을라 그래요.
“아히구 어떤 때는 정말 이렇게 당하지 말고 죽었으면 하는 때가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뭐 그야말로 한번 으악- 하고 내려친 사람이나, 모질게 시간을 끌면서 그렇게 사람을 애먹인 사람이나 뭐.
“근데 미련스러웠던 것 같아. 도망간 사람도 있었고, 잡아다 패고 그런 것도 기억에 남거든. 근데 나- 도망쳐야갔다는 생각을 한 기억은 없는데, 그냥 이제 ‘어떡하믄은 고향에를 갈까’, ‘어떡하면 주인 맘에 들어 고향에 보내줄까’ 이렇게만 미련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만일에 삼십 명이나 있는 데서 한 사람이 도망갔다면 그 이십구 명은 다 죽어나가는 거예요. 하나 도망갔다 하면 그냥 뭐- 남아있는 사람이 도망간 사람 이상 고통을 받은 거죠. 더 자유가 없어지지, 말도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일어나’ 하면 일어나야 하는 거지, 아무리 저기래두 뭐 딴청은 절대 못 부리고, 항상 도망가는 사람 있으니깐. 에휴- 이렇게 시방 앉아서 말이니까 그렇지, 아휴- 끔찍해요.

“개중에 일본 사람이라도 한 사람이 참- 착했었어요. 그 이제 돈을 주고 들어오면은 봐서람이 내가 이제 힘들어하는 기색을 하면은 건들질 않고, 쯔께모노, 김치, ‘김치 있냐?’ 그러고 ‘그것 좀 해 줄수 없냐?’ 그러고. 그러면은 인제 배차(배추), 뭐 양념이나 제대로 냈나? 배차하고 소금하고, 뭐 뭐 젓갈 그런 거는 다 없고 그냥 마늘생이나 파나 그런 거나 좀 이제 있으면 가져오라 그러면은 [그 일본 사람이] 쬐끔씩 이제 가져오면은 그걸 그래도 어린 나이에 절여서 해 주면 주인은 그것도 또 야단을 하는 거여, 없는 일 한다고. 몰래 해서람이 주면 이제 그 사람이 담요 같은 것도, 군인 담요도 내다 주고, 치약 칫솔 같은 것도 그냥 이제 자기 쓰라고 준 거갔지? 그런 것도 이렇게 더러 갖다 주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는 사람도 있더라구. 그러니깐 세상 사람은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조선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할 게 없나 봐. 다- 그 중에 또 좀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그런 건가 봐요.
“그 사람 성이 뭐인가 하고 생각을 할래도 안 나요. 근데 내 이름은 안 잊어버렸었어, 어떻게. 내 이름. 내 이름은 요시모토 하나꼰데, 내 이름하고 도끼와래는 것만 알지, 그 이외는 하나도 몰라.

콩쿨대회

사람들이 추천을 해 가지고 내가 콩쿨대회를 나갔었어요.
“그때는 음성이 너무 고왔어. 만일에 이렇게 앉아서 노래 부르고 있다면 사람들이 꼭 모여든다고 할 정도로 음성이 좋았어요.
“사람들이 추천을 해 가지고 내가 콩쿨대회를 나갔었어요. 여러 사람 추천이 아니면 못 나가는 데인데 나간 기억이.
“시방으로 치면 노래자랑인 거 같아요. 그런 사람들만 이렇게 많이 모여서람이 무슨 간판이 있는 집들, 나 있던 집은 도키와니까 도키와니, 또 이름이 있어요.
“노래자랑에 나가서 어느 집에서 왔다, 어느 집에서 왔다 하니까 알지, 그전에는 그런 데에 무슨 집이 있다는 거 시상 알 수 없죠. 웬만한 영업집은 다, 이름 있는 영업집들은 와 가지고 저기(참가)한 것 같아요.
도키와래는 데선 나 하나만 나간 것 같애요. 나 있던 집이 컸는데 큰 데서도 나 하나 나간 것 같애. 노래하는 사람들은 한 삼 사십 명, 사 오십 명 되나?
“일본 노랜데 시방 거 첫 머리 쬐금만 기억이 나지. 하루요 오도메요 오도메요다. 주 144
각주 144)
‘봄이여 처녀여’라는 뜻의 일본말.
닫기
“구경 온 사람들은 군인들이지. 군대 안인지 바깥인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 사람들하고는 아녀. 전부 다 옷이 군복만 같은 옷이었고.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니까 여자들이 많대는 것도 알고, 몇 십 명 중에 한 명이 뽑혀 나왔다, 몇 십 명 중에 무슨 둘이 나왔다 이렇게들 말을 하니까 이 근방에 우리, 나 같이 조선여자가 많구나 하는 거를 알았지 그것도 몰랐을 거예요, 그런 데를 안 나갔으면.

관보

저희 부모가 돌아갔대는데 안 나오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중국에 있을 때는 집에 편지를 했었나 봐요. 그러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거, 편지 왕래가 됐갔지.
“사십사 년도인가, 그때에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편지가 오고 사망하셨다고 관보 오고 그랬거든.
“내 생각에 그렇게 되면은 그래두 얘기를 하면 보내주는 건 줄 알았지. 그랬는데 [주인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람이 대뜸 무슨 소리냐-구, 나갔다 언제 온다는 소리냐-구.
“그래서 뭐 하나도 이렇단 소리도 못 해보구 막- 병신 마냥 우는 거에요. 무기가 우는 것밖에 없어. 저희 부모가 돌아갔대는데 안 나오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암만 저길 해도 그냥 차삯만 주면 나오고 싶지. 그러게 못 나오게 되니깐(표정이 일그러지며) 돈도 없지-, 돈도 안 주고 날 안 보내주니까 너무- 너무- 너무 미웠어요. 그렇게 그 소식 듣고서는 다시는 집에 편지 한 장을 해 봤을까.
“그렇게 하다가 어떻게 8.15 해방이 되니까 해방이 돼도 좋은 것두 몰르구 이젠 살았구나 생각도 없구. 아무- 거저 무의하게, 너무 허무하고 지난하고.

해방

얼마라도 벌어서 간다고 했다가 다시는 뭐, 오고 가고 맥혀버렸지.
“딱 끝나고 나니깐 그냥 숭개숭개 하지 뭐. 8.15 해방됐다고 바로 나가는게 아니니깐 우리네도 바깥에 못 나갔어요. 어떻게 해서 숭개숭개 그것들이 얘기하는 소리 들으니깐, ‘몇 시에 배가 있다’하니깐 그냥 그 배를 탈라고 기를 쓰고 나와서람이 인천 와서 닿는데 얼른 육지에 못 들어오는 것도 콜레란가 장질부산가 또 돌림병이 있어서람이 저 바다에서람이 두 주간을 있었지.
“이 주간 [배에] 갇혔다 나와서람이 보니깐 주먹밥인지 밥 주구, 삼십 원인지 삼천 원인지 삼백 원인지 모르갖구, 돈을 줬어요, 이 한국 나라에서. 그래 가지구서는 장충단 공원으로다 우리들을 집결시켰거든. 근데 그때는 맘대로 이북도 갈래면 갈 수가 있고 이남엘 갈 수가 있을 때거든요.
“그런데 같이 나온 여자들 셋이랑 하는 말이 ‘우리가 그냥 빈주먹 들고 가야 귀여움 받겠냐, 그러니깐 우리 몇 달 돈 벌어 가지구 가자’ 해 가지구 간 곳이 천안이여.
“한 삼 개월이라도 벌어서 그럭 한다고. 같이 나온 친구가 셋인가 그랬는데, 멫 개월 안 가 가지고 딱 이렇게 닫혀버렸으니 … 다시는 뭐 그야말로 가고 오고 맥혀 버렸지.
“천안으로 가 가지구서람이 시방으로 치면 접대부지, 영업집서 노래 불르구 술 따라 주고, 손님들 오면 돌아가며 노래하는 거예요. 돈 번대니깐 갔는데 그때만 해도 아픔이 있으니깐 친구들하고 극장 구경 가면 극장에서 조금이라도 슬픈 게 나오는 날이면 울매불매 하다가서람이 그냥 아무 데나 영업집에 들어 가 가지구선, 중국집이면 빼갈 달래서 먹구선 정신 못 차리니깐 수채구멍에도 가서 쓰러지구. 그럼 친구들이 그냥 데려가 가지구 다- 씻겨서 옷 갈아 입혀서-.

살림

술집만 빠져나오면 제일인 줄 알고 그렇게 해서 나왔는데 그게 아니야.
“그 담엔 계속 색시들 놓고 술 파는 집에 댕기면서 한 달에 얼마씩 월급을 받으며 댕겼지. 월급이 적지 않은 돈이거든. 그런데 그것만 생각했지 노래를 하러 들어 갈려면 옷도 많아야 하고 화장도 하고 해야 한다는 걸 전연 생각도 못[하고] 뭐- 월급 타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저렇게 쪼끔 쓰다 보면 모둬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 데로다만 돌아댕겼죠. 온양 주 145
각주 145)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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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리라는 데를 가 가지구 진짜 깡패 중의 깡패, 부인은 죽구 아들은 하나구 어머니는 중풍 들어서 한 칠 년 되는 그런 데를 이제 이 생활 안 한다구 들어간 거예요.
“처음에는 저 사람하고 살면 그래두 주먹깨나 쓰구 그러니깐 밥은 안 굶기겠지 하구 갔지. 술집에서 술만 따라 준다고 해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 그런께 그걸 면하기 위해서람이 그 사람하고 살면 주먹깨나 쓰니까 그래도 누가 넘보지는 않겠지 하구서.
“그때가 6.25 전이니까, 내가 스물세 살에 6.25가 났으니까 한 스물 하나, 둘.
“[남편은] 나가면 열흘도 가야 한 달도 가야 그러는데,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여자도 데리고 오고 빚도 가지고 오고 그냥 갖은 짓을 다 해.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 길이 없으니까 그냥 나무도 주워다 때고 이제 벼찧는 방앗간에 가 가지구서 쓰레기 주워다가서람이 때고 그렇게 하는데도 사할을 밥을 못 끓이게 되니깐.
“쌀 한 말을 갖다가서람이 술을 빚었는데 중풍이 들은 시어머니가 누룩을 어떻게 하래는 거, 술밥을 어떻게 찌래는 거를 안에서 말로 가르쳐 주면 그걸 갖다가서람이 해보는 거야. 술을 해서 팔았는데, 콩나물 아무 양념도 없이 끓여서람이, [사람들이] 그냥 잘 먹어, 돈도 잘 벌려.
“오륙 년이나 지냈을까. 그렇게 세상을 고생을 하며 살아도 도무지 안되니깐 할 수 없이 도망을 나와 가지구. 또 이제 그런 데(술집) 밖에 갈 데가 없어. 그런 데 가 있는데 그 사람도 무척 찾아 댕겼지, 부천까지 찾아 댕기고.

자궁수술

하여튼 너무 잔인하게 찔겨, 내 명이.
“이제 그냥 자꾸만 배는 불러져 나오면서도 냉은 냉대로 이제 그냥 터져 나오고, 그러니깐 산부인과를 몇 번 가서 이제 진찰을 하니까 혹 같다, 혹 같다 하면서도 그냥 지냈는데 낸중에 기독병원에 가니깐 안 된다고, 더 있어선 안 된다고 수술 해야 한다 그러니까 수술을 아마 하게 됐나본데.
“양쪽에 혹이 달렸으니까, 요꼬네 수술을 하면서 나팔관을 막아놨으니까 나팔관에서람이 사람, 이제 그 여자 충이 저기 되게 마련인데 그걸 못 하게끔 해놨으니까 그게 혹이 되는 거여. 그래 가지고 (두 주먹을 아랫배 양쪽에 갖다대며) 요렇게 요만큼 시방 양쪽에가 양짝 나팔관에다 달렸으니까 그걸 떼내야만 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게 아마 하- 인천 기독병원에서 했는데 그게 스물여덟 살인지 몇 살인지 그때에 양쪽을 다 떼냈는데.
“그냥 얼마나- 추울 때 수술을 했는지 참 하여튼 너무 잔인하게 찔겨, 내 명이. 그때에도 이 사람들이 이제 수술을 받고 나서람이 닝겔을 갖다 꽂는다는 게 꽝꽝 얼은 걸 그냥 갖다 꽂은 거여. 그러니깐 그게 단 천 그람도, 백 그람도 안 들어가서람이 그냥 온 몸이 다 쌔까맣게 죽다시피 해서람이 막 떨기 시작하니까 그냥 이제 의사, 담당의사가 들어와 가지고 막- 난 수술 실수 없이 잘 했으니까 니들 책임지라고 막 야단하고 나가는 거여. 야단하고 나가면 뭘 해? 백그람은 들어가고 그걸 멈췄는데도 그냥 뭐 뭐 사시나무 떨 듯 하는 데 안 죽어-, 안 죽어, 하하하하. 그래 가지고서는 하여튼 그 주사를 한 대 못 맞고, 그것도 한 대 못 맞고 그냥 일주일만에 퇴원을 했나- 아흐레 만에 퇴원을 했나, 하여튼.
“며칠 만에 퇴원을 해 가지고 나와 가지고는, 왜 새복(새벽)에 한 네시나 여때쯤만 되면 그렇게- 배가 고파서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이 그냥 눈물이 막- 나오는 거여. 그러면 그걸 참고 바깥에 들리지 않게 해야갔는데 그 주인 집에서람이, 내가 세 들어서람이 살다 그랬는데, 주인집에서람이 열심히 그야말로 간호하느라고 해 주는데 그 새복이믄 여자가 울고 그러면은 얼마나 속상해. 그러니까 그걸 내색을 안 할라 그래도 그냥 너무 배가 고파서 참아지질 않고 그냥 너무 너무 눈물이 그냥 쏟아지면 이불을 폭- 뒤집어 써도 흑흑 느껴지는 거여 그냥. 그렇게 얼마를 지났는지 그래도 그게 또 배고픈 게 가셔지고. 참 어떻게 살았는지-.

동거

그 사람도 나한테 뜯어서람이 기집질을 하는 거여.
“그 다음엔 저기 오류동 주 146
각주 146)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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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 주 147
각주 147)
경기도 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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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 영업집으로 댕기면서 목구멍 팔아 먹구 살았지. 그때는 몸 파는 게 아니라 목구멍 팔아서 살았다니까. 그렇게 하다가서 이제 포천서 ‘내가 벌어먹구 사는데 죄가 안 되갔지’ 하구서람이 삼남 일녀 있는 남자한테 얹혀서 사는데, 하여튼 내가 덕을 못 타고난 게 그 사람도 어떻게 부인 두구도 모자라니깐 나한테서 뜯어서람이 그걸루 기집질을 하는 거여.
“그때는 전기회사에 댕기는데 전기회사 월급이래는 게 얼마 없는데 사남매 공부 가리켜야지, 아니할 말로 여섯 식구가 밥 먹고 살아야지, 줄 게 없지. 근데 또 살림욕이 나를 당하지 못하지, 나는 살림욕이 강하니까.
“돈 달래두 안 주면은 건넌방에 가서람이 가스불 피워 놓구서람이 죽는다고, 나 죽으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 애들이 가만 둘 줄 아느냐고, 이렇게 위협해가매 그러지. 아휴- 말 할 수 없어. 거기서 겪은 말만 해도 증말로 아휴- 얼마나 기가 맥힌지. 그런게 그게 다 원인이 뭔가면, 시방 사람들 자식 안 난다면 한심한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왜 자식이 필요하고, 왜 동지간이 필요하고 부모가 필요하냐. 일가친척이 없으면은, 울타리가 없으면은 아무리 힘을 써야 힘을 쓸 수가 없어. 친구가 암만 저길 해도 친구는 친구지 일가 친척이 아니니깐 말발이 스지 않아.
“그렇게 세월을 보내기를 엄청 보내다가 아이를 키우면은 그 사람이 다시는 안 오려니 하고 아이를 갖다 키우게 되니까.

아들과의 만남

하느님 아버지, 감사해요. 나 같은 이런 무식쟁이한테 아들을 주고.
“내가 서른 살 때에 쯤 됐을 거예요.
“우리 동네에 무슨 불상사가 났다던지 동네 초상이 나도 내 손이 가는 거여, 그렇게 서슴없이 하고 댕겼으니까. [어느 날 친구가] ‘시방 삼청병원에서 오고 갈 데 없는 사람이 애기를 낳아 가지구 삼(탯줄)을 의사가 안 갈라준대- 저기 가서 삼 갈라줘야지 어떡하냐’ 그래서 삼 갈라줄라구 담요랑 가지고 가니까 엄마는 딱- 벽을 바라보고 드러누웠어. 밥 먹으라니까 국 하나도 안 먹고 간장 꾹꾹 찍어서 밥 한 그릇을 다 먹어. 그러니깐 이 사람이 [애를] 이제 딴 데다 줄 거다, 내다 버릴 거라는 거를 알았지, 사람들이.
“[친구들이] 와 가지고 너 이번에 쟤 안 갖다 기르면 넌 생전 이 집 귀신 노릇 할라고 그러는 거라구 그래가면서 쟤만 갖다 길러보라구 절대 [동거하는 남자] 안 올거라구. 쟤 갖다 길르면 안 온다니까 그것두 솔깃하니까 그래 가지구 가져왔죠.
“그런데 하다못해 [나한테는] 양말 한 짝을 안 사다 줘두 그 아이한테는 총도 사다 주구 유모차도 사다 주구 그렇게 저렇게 하는게-. 호적을 해야갔으니깐,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아들을 거기다 올려달래야것다. 거기다 올려줬어, 그 집이다. 황○○이라고 그러지, 황씨 집이어서.
“집을 팔아서 이제 부천을 뜰라고,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만 데리고 뜰라고 하는데 [내가] 살림욕이 강하니까 돈놀이를 핸 거에요, 일수놀이도 하고 딸라놀이도 하고. 이 짝에 준 돈이 들어와서 에- 메칟날은 이제 들어오니까 가야갔다 하면 이 짝에 몰려서람이 또 이짝 몰린 돈 받아야지 하고. 그렇게 저렇게 하다보니까 그냥 부천에서람이 그냥 세월이 가게 됐어요. 그래서 그냥 도망도 못 가고 내-내 그냥 저냥 살다가 빚보위(빚보증)를 [잘못] 서서 홀랑 홀려 가지고서는 빚을 지게 되니까, 이제 [황씨가] 더 뜯어 먹을 거 없다 싶으니까 이제 왕창 먹을라고 이 사람이 살던 집을 팔은 거여. 근데 팔리나? 내가 그야말로 집문서를 내주나? 안 내주지. 그러니까 중도금을 못 받아먹지, 계약금만 받았지.
“그러니깐 거기 친구들이 하는 말이, ‘야 그냥 걔(황씨) 쬐끔 주구서 그냥 좋게 해결해야지, 어디 간들, 처음에 그렇지 않았을 때도 찾아 댕겼는데 그냥 두겠냐? 집 팔아가지고 왔다 소리 들으면 더더구나 그냥 안 둘테니까 [황씨한테] 쪼끔 [돈] 주고 그냥 [너는] 여기서람이, 빌어먹어도 아는 사람한테서 빌어먹어라’ 해가면서 친구들이 붙잡아 가지고 이제 집을 팔았는데. 아마 첩으로 살다가서 남자한테 위자료 주구 떨어졌대는 사람은 한국에서 나 하나밖에 없을 거여.
“그래 가지고서는 이제 뭐 빚 따라가매 다 갚고 나니까 빈 주먹인데 그 때부턴 노점에 앉아서, 가게도 없이 노점에 앉아서 심지어 뻔데기 장사까지 했어, 옥수수도 삶아 팔고, 겨란도 삶아 팔고. (울먹이며) 뻔데기 장사도 하고 안 한 거 없이 별 짓을 다 헤가매 저 자식은 가리켜야 한다, 나는 못 배왔지만 남의 자식 갖다 공부 안 가리켜서는 안 된다 싶어서 거 가리키느라고 참- 단돈 만 원을 들고 옷 한 가지를 못 사 입어보고, 친구들이 입든 거, 주는 거, 그냥 얻어 입고 살고, 그렇게 저렇게 살아간 게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사랑하는 하나님이니까 축복을 해 줘 가지고서.
“[아들을] 신학교대학 마치고 대학원까지 보냈어요. 그래 가지구 시방 저렇게 목사하러 다니는데. 그 공납금을 해 놓고 나면 왜 그렇게 좋아, 왜 그렇게 좋은지.
“나 혼자 그냥 아무도 없이 방에서 뱅뱅뱅- ‘하느님 아버지 감사해요. 나 같이 이런 무식-쟁이한테서 아들을 주고, 그 아들로 인해서 이렇게 학교를, 그래두 대학교도 보낸다는 게 이게 이게 웬 복입니까?’ 그냥- 고맙다구 그러구, 방에서 혼저. 그렇게 지냈던 생각이 엊그저께 같은데.

들통

며느리가 그 말 잡아서 어머님 그게 무슨 저기냐구
“텔레비를 보다가 이제 그-냥 뭐 [위안부 보상문제에 대해] 돈 적게 주네 마네 해 가지구 그때 말썽이 됐을 땐가 봐요. 그런 언짢은 게 나오니깐 내가 있다가 ‘정작 돈을 받아먹어야 할 사람들은 진짜 쉬쉬하고 부끄러워하고 고개도 못 드는데, 저렇게 엉뚱한 사람은 저런다’ 그랬더니 그냥 며느리가 그 말 잡아서 어머님 그게 무슨 저기냐구 그래 가지구선.
“많이 눈물 뺐지. [아들은] ‘(울먹이며) 그렇게- 고생을 해서 오늘날까지 살은 게 기적이라구-’ 그래가며 참 많이 울구. 그 전에는 암만 키워서 저기했다 해도 별로 잘 할라구는 안 했어두 그거 알고 나선 잘 할라구 했는데. 목사(아들)가 와서 방도 치워주지, 그냥 밥 먹으면 설거지도 목사가 하지.
“여기 복지관에서도 자원봉사를 보내준다고 그러는데 아직은 내가 그래두 쪼금 꿈지럭거릴 수 있는데 남을 괴롭히는 것도 안 좋을 것 같아서 안 받아들이고 그냥 내가 지내고 있죠.

바람

한 마디라도 사과의 말을, 진실한 사과의 말을 저기 하는 게 소원이죠.
“시방 이렇게 있다가도 깜짝 깜짝 놀라는 게 벌이 와서 딱 쏘는 마냥 이렇게 해 가지구 욱신욱신한 거야.
“이런 다리도 그렇구 발도 그렇구 이런 데두 그렇구. 어떤 때는 머리도 띵했다가 이글이글 해. 말도 못해요, 얼마나 많이 아픈지. 그래두 한 사람두 나 환자로 안 봐. 의사만 그냥 나 환자로 보구 조심하라구 그러구.
“시방은 의사 말로 안 좋대는 건 다 가지고 있으니깐. 콜레스테롤 그렇지- 당도 삼백이나 가깝게 나가, 이백칠십구인가 그랬어요. 또 골다공증 있지. 골다공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뭐냐면, 어려서 그렇게 해서 있을 때 [자궁] 전체를 들어냈으니까.
“그러니까 시방 여자가 있어야 할 자궁 전체는 벌써 삼십 안에 들어내고. (배를 가리키며) 큰 수술만 해도 세 번 주 148
각주 148)
길원옥은 난소난종, 창자유착, 쓸개정체 수술자국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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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어요.
“(수술 자국 하나 하나를 가리키며) 이건 담석. 이게 창자유착이라는 거. 또 이건 쓸개정체. 응 쓸개를 다 들어냈지. 이게 사십 중반에 했을 거예요.
“그러니깐 이렇게 하나도 성한 데가 없는데두 (웃으며) 은혜지, 남 보기엔 절대 병자 같지 않지.
“그때는 철 없어서 ‘우리집이 너무 가난, 뭐 나라가 어떻다 뭣이 어떻다 이거이 아니구- 우리가 없어서 이런 고통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을 했지. 근데 사실은 알고 보면 그게 아닌데. 없다고 생각해 봐요. 어느 부모가 그런데다 팔아 먹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는 거저 철 없고 몰르구 그러니깐 ‘에잉, 부잣집으로 태어났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그런 생각도 해 봤지만 시방 나이 먹어서 생각을 해 보면 시방도 우리 한국 사람들 돈 이래면은 사족을 못 쓰고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거기에(일본에) 동의해 가지구 그냥 그 ‘오고가지도 못할데다 끌어다 놓구 사람들을 그렇게 고통을 줬지’ 생각하죠. (한숨)
“진-짜야, 나라는 절대 있어야 해. 나라 없는 백성은 산 게 아니야, 죽은 거지.
“이제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이라도 한이 풀어졌으면, 한마디라도 사과의 말을, 진실한 사과의 말을 저기 하는 게 소원이죠.
“아이고 정말로 이렇게 저렇게 가고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나마, 거저 만분지 일 천분지 일이라도 그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사과하고, 그래도 ‘너희들 그야말로 우리들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깐 당신들도 쪼금-좀 마음을 푸시오’하고 해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 하나의 바람은] 정대협에서 이렇게 힘써서 하는 끝에 정-말로 한 민족이 힘을 써서 저거 기념관을 빨리 세워줬음 좋것어. 왜냐면은 자식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왔다 이름을 냄겨 놓고, 자식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냄겨 놓고 죽는데, 우리네 같은 사람들은 이름도 성도 없이 세상에 나와서람이 이 엄청난 고생만 하고서 그냥 가잖아, 이름도 성도 없잖아. 그런데 여기서람이 이렇게 기념관을 세워준다 하니깐 그래도 이름이 남으니까, 암만 부끄러운 이름이라도 이름이 남으니까. 아휴 이거나 좀 우리 좋으신 하나님 여-러 사람들 마음을 감동시켜서 빨-리 그야말로 기념관이 세워져서람이 그래도 이름을 냄겼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이름이 남을 길이 없어. 뭐 그야말로 일가 친척이 있나 어느 자식 있나.
“이 세상에 나 하나에요. 그러니깐 빨리 그야말로 기념관을 세워줬으면 좋갔다 하는 게 내가 하나니까,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난 죽으믄은 아무것도 없잖아.
“나 성 그냥 걸머지고 가기가 너무 너무 그야말로 서운하다. 그러니까 그거나마 좀 세워줘서 이름을 냄겨다오 하는 거지.”

  • 각주 138)
    평양시 암동. 바로가기
  • 각주 139)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서 불린 민요나 잡가. 바로가기
  • 각주 140)
    가래톳은 넓적다리 죽지의 임파선이 붓는 것을 말한다. 대개 임파선이 붓는 것은 성병과 동시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바로가기
  • 각주 141)
    나마창은 중국 석가장 근처 마을이라고 추정된다. 바로가기
  • 각주 142)
    중국 북부지역의 지명 이름으로 일본 군대가 많이 밀접해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143)
    길원옥이 있었던 위안소의 이름이다. 바로가기
  • 각주 144)
    ‘봄이여 처녀여’라는 뜻의 일본말. 바로가기
  • 각주 145)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 바로가기
  • 각주 146)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 바로가기
  • 각주 147)
    경기도 포천. 바로가기
  • 각주 148)
    길원옥은 난소난종, 창자유착, 쓸개정체 수술자국을 보여주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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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어요, 세월이” 자료번호 : iswj.d_0013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