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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참여기/메마른 눈물

  • 저필자
    최기자

메마른 눈물

【※ 장점돌의 구술을 듣고 녹취를 하는 작업은 진현정(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간사)과 함께 하였다.】
장점돌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가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주최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제주도 인권캠프에서였다. 할머니는 나와 같은 조도 아니었고 그다지 활동적인 성격이 아니라 수 십 명이 되는 할머니들 중에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인권캠프가 끝나갈 때까지도 나는 할머니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권캠프 마지막 날, 거동이 불편한 다른 할머니를 모시고 마지막 관광 코스에 뒤늦게 도착했을 때였다. 할머니는 기념촬영을 해 주는 가게 앞에서 시집가는 새색시 마냥 한복을 차려 입고 다른 할머니들의 환호 속에서 쑥스러운 듯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머리 한 번 못 올려보고, 제대로 된 결혼식을 못 해 본 것이 가장 한이 된다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원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젊은 정대협 간사를 신랑 삼아 족두리를 쓰고 기념 촬영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게 할머니의 첫인상은 소극적인 것 같지만 그래도 해 보고 싶은 일에는 적극성을 보이는 당차고 재미있는 할머니로 기억되었다.
할머니를 다시 만난 것은 다른 할머니들의 인터뷰가 거의 끝나 가는 2002년 11월이었다. 그 전에 다른 팀원이 할머니를 두 차례 방문했었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마무리를 짓지 못 해 팀원들의 합의로 내가 이어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이미 두 차례나 인터뷰에 응했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 작업이 가지는 의의를 설명하고 인터뷰 승낙을 받아내야 하는 수고는 덜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면접자와 익숙해져 있는 할머니에게 그동안 이루어져 온 인터뷰의 맥을 끊지 않으면서 나머지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나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하면 나의 불찰로 할머니가 썩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 고문과 같은 인터뷰가 진행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인터뷰를 가기 전에 이전 면접자에게서 받은 녹취록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충분히 숙지해 놓아야 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녹취록은 너무 난해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애를 시간 순으로 잘 정리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대면하고 듣는 것도 아닌, 지면으로 만나는 할머니의 생애이야기는 도저히 그 지도를 그릴 수가 없었다. 미리 받은 녹취록에서 할머니는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식구들이 언제, 왜 갔는지도 밝히지 않은 채 만주에 갔다고 하였고, 그러다 또 난데없이 이산가족 찾기 이야기를 하였다. 처음 붙잡혀 간 곳이 만주벌판이라면서 만주벌판에 있는 위안소를 설명하다 느닷없이 싱가포르에서 죽은 아기를 낳았다고 했고 어느 날 딸이 미국에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돈을 달라고 해서 줬더니 일년도 못 살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한 해방 후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가난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너무 돈이 없어서 ‘위안부’ 신고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가 심하게 뒤얽혀서 녹취록만 보고서는 할머니의 생애에 대한 감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 인터뷰를 가는 날은 ‘혹시 내가 할머니 이야기를 잘 따라가지 못해서 할머니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라는 불안감에 잔뜩 긴장을 하였다.
할머니는 인천에서 할머니의 호적에 올린 조카 내외, 손자 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집이 무척 넓어서 겉보기에는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해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임대 아파트를 신청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고 아파트가 나올 때까지만 일정 정도의 생활비를 내고 조카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당신이 지금껏 키워 온 조카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조카와 조카사위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심지어 2001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면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조카사위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 지원금이 끊기게 되자 뒤늦게“챙피”를 무릅쓰고 ‘위안부’ 신고를 했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절대 지지 않으려는, 당신이 말한 대로“자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2003년 1월 현재 정부에 신고한 ‘위안부’ 여성 중 가장 마지막으로 신고한 사람이다. 어쩌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지 않았으면 당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할머니를 통해 정부에 공식 신고한 207명의 ‘위안부’ 여성들 이외에도 아직 우리 사회에 당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지 않은, 혹은 밝힐 수 없는 여성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 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과거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살기 위해서는 아직도 물질적인 보상 이면에 있는 더 큰 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할머니는 미리 본 녹취록에서처럼 시․공간을 넘나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여전히 할머니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인터뷰 중간 중간에 끼어 들어서“왜?”,“누가?”,“언제?”라는 질문을 계속 해야했다. 다행히 할머니는 내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정리해 가려는 나의 의도를 잘 따라 와 주었다. 할머니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시간 순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고 보니 그 복잡했던 할머니의 기억의 맥락이 잡히는 것 같았고 나는 인터뷰가 ‘대성공’이라며 흡족해 하면서 돌아왔다.
그러나 편집본을 만들기 위해 두 개의 녹취록을 비교해가며 읽으면서 나는 ‘대성공’이었던 나의 인터뷰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시간 순으로 잘 정리된 나와의 인터뷰는 문자를 습득한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지 할머니의 언어로 된 할머니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언어에서는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누구랑 무엇을 하며 살다가 어떻게 끌려갔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언어는 고향을 통해 가족을 기억하고, 할머니가 끌려간 동안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가버린 오빠에 대한 원망, 다시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가족을 만나고 싶었던 바람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배열이 아닌 가족을 매개로 하는 몇 개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한 귀국 직후의 가난했던 기억은 현재의 가난과 연결되어 ‘위안부’ 신고라는 사건을 낳았고, 신고는“챙피”함을, 챙피함은 다시 양○○이 소문을 내서 돌아갈 수 없는 포항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으며, 양○○은 또 다시 위안소의 기억을 불러들였다. 이와 같이 할머니의 언어에는 시간 순으로 도식화된 인과관계가 아닌 시․공간을 초월하는 연상작용을 통한 기억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할머니만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도식화된 인과관계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그런 할머니만의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무척 벅찼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나에게 할머니를 맞추려 했던 것이다.
뒤늦게 나의 과오를 반성하며 편집본에서는 할머니만의 이야기 구조를 살려보겠다면서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다. 먼저 시간적 배열을 무시하고 연상작용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또 과거로 넘어가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펼치고 각각의 독립된 에피소드들이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마치 극영화나 다큐멘터리 형식처럼 편집을 시도 해 보았다. 그러나 영화는 시청각 자료라는 점에서 행간에서 설명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수 있지만 오직 문자로만 재현되는 편집본에서는 행간에서 설명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끝까지 설명해 낼 수가 없었다. 독자들은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가족들이 만주로 갔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내가 처음 녹취록을 읽고 그랬듯이, 할머니가 만주에서 가족들이랑 함께 살다가 끌려 갔다거나 가족들이 할머니를 찾으러 만주에 왔을 것이라고 상상을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산가족 찾기 이야기가 나오면 그 맥락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편집본은 독자들의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계속되는 질문공세를 펴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배열한 후에야 할머니 이야기 속의 연상작용을 이해했듯이 독자들 또한 연상작용에 의한 에피소드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 편집본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각각의 에피소드에 들어있는 개개의 사건들을 다시 시간 순으로 재배열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결혼에 대한 미련이나 삶에 대한 적극성이 많을 것이라고 느낀 제주도에서의 첫인상과 상당한 충돌이 일었다. 오히려 할머니에게서는 삶의 어떠한 것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 건조함이 느껴졌다. 결혼은 왜 안 했는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물어보았을 때 결혼에 대한 미련은커녕“남들 결혼하는 것 하나도 안 부럽다”고 하였고 제주도에서의 사진은 다른 사람들이 하도 찍어 보라고 해서 그냥 찍어 본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건조함은 특히 가까운 누군가가 죽었을 때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서 느껴졌다. 심지어 친딸이 죽었을 때조차 눈물이 나지 않았다니. 하지만 위안소에서 같이 있었던 사람을 만나서 그때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말에서 할머니의 삶에 대한 건조함이 ‘위안부’ 시절에서부터 시작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어도 그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나와 같은 타자들이 아닌 함께 고생했던 ‘위안부’ 여성들을 만나 동병상련의 이야기를 풀고 나면 눈물과 함께 할머니의 가슴을 막고 있는 답답함도 조금은 제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머니의 감정들을 건조하게 만들어버린 그 경험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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