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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참여기/‘슬픈 시간의 기억’

  • 저필자
    김은경

‘슬픈 시간의 기억’

햇살이 제법 따가워지기 시작하던 2002년 초여름 어느 날, 정애 주 111
각주 111)
노청자의 구술을 듣는 작업은 박정애와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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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는 한껏 델마와 루이스를 흉내내며 시원하게 뚫린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렸다. 서태지부터 박근혜까지 ‘심오한’ 수다에 열중하며 내리 3시간을 달린 끝에 보령에 도착했다.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할머니께 도착 전화를 드리고, 할머니에 대한 사전 정보를 토대로 잠시 작전회의를 했다. 1922년 생인 할머니는 열 아홉 살 때에 고향인 유성에서 밭을 매다가 강제로 동원되어 만주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우리에게 이미지화 되어 있는 ‘전형적인’ 위안부였다. 할머니는 1993년에 ‘위안부’로 신고를 한 후로, 각종 시위에 참여하거나 TV 다큐멘타리에 출연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구술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첫 번째 구술에서는 해방 전까지의 경험을 듣는 것으로 정하고, 가족관계와 동원상황에 대한 질문들을 준비했다. 우리는 사전에 읽은 몇몇 구술사 관련 논문들을 떠올리며, 구술자의 경험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그녀 스스로 말하게 할 것을 인터뷰의 기본 원칙으로 공유했다. 우리는 너무 ‘완벽’했다.
꿀 한 단지를 들고서 찾아간 할머니 댁은 보령 시내의 한 임대아파트였다. 아파트 입구까지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할머니는 이가 없어서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비교적 볕이 잘 드는 11평 아파트의 내부는 할머니의 이런저런 살림들로 꽉 차 있었다. 낡은 침대와 이름 모를 약들이 가득 들어있는 장식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발 뒷꿈치를 들어야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매달려 있는 액자에는 한복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한 젊은 시절 할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예닐곱 개의 사진 모두 할머니 혼자인 채로….
우리는 준비해 간 대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먼저 일본에 대한 격한 감정부터 쏟아내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밭을 매다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동원 이후의 경험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좀 많이 달랐다. 할머니는 일본군인들의 빨래와 밥을 해주는 식당으로 끌려갔었다고 했다. 거기서 일본군인들이 조선여자들을 강간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당신은“총기가 빨라서” 그런 일이 없었고, 계속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식모 노릇만 하였다고 했다. 정색을 하며 위안소에 가 본 적도 없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재차 물었다.“[위안소에] 생전 안 가보셨어요?”“거기 웬수를 뭣 하러 가?”“아, 한 번도 안 가보셨어요?”“안 가봤어. 말만 들었지.”“누가 할머니 강제로 어떻게 한 적은 없구요?”“강제로 어떻게, 그런 일 없어. 아휴-.” 할머니는 첫 번째 인터뷰 내내 당신은“어리석은 여자들”과는 달리 일본군인들을 전혀 상대하지 않았으며, 청소와 군부대 빨래만 몸서리치게 했다고 되풀이 해 이야기하였다. 할머니는 과거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속이는 걸까, 아니면 진짜로 빨래만 했었다고 믿고 있는 걸까?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무척 난감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할머니는 요즘 치매가 있어서 집밖에 멀리 나갈 때는 주민등록증과 열쇠를 목에 걸고 나간다고 했다. ‘아뿔싸, 치매!’ 다분히 증언의 성격이 강한 이 구술작업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과연 얼마만큼 사실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터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애와 나는 구술의 신뢰성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을 하였다. 치매로 인해 할머니의 기억이 많이 손상되었다면 무리하게 구술작업을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고 말기에는 할머니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고, 상황에 대한 묘사도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우리는 시간을 두고 할머니를 만나보기로 했다.
두 번째 인터뷰를 가기 전에 우리는 좀 더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해야했다. 할머니가 ‘위안부’ 경험을 적극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고의든, 아니면 치매로 기억을 못하는 것이든 간에 그것은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좀 돌아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과거를 무리해서 캐기보다 가족 이야기나 현재 사는 이야기를 편안히 할 수 있도록 질문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인터뷰 초반부터 예기치 않았던 할머니의 경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할머니한테 녹음 마이크를 달아주면서 노래를 한 곡 부탁하는 과정에서 나는 대학 시절에 배운 장구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대뜸 당신도 장구는 잘 친다고 맞받았다. 장구를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더니 권번에서 배웠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우리에게 타령과 능숙한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이야기인 즉, 열다섯 살에 동네 친구들하고 춤과 노래가 배우고 싶어서 권번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중에 만주에 끌려갔을 때에는 그 때문에 ‘위문단’ 활동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빨래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하고 시종 권번과 위문단 이야기만 하였다.
또 다시 당황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가 권번에 다닌 적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간사들도 전혀 몰랐고, 1993년도의 TV 인터뷰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권번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고 의심도 해보았지만, 그러나 할머니가 이야기 한 권번 경험은 일제시기 권번에 대한 자료들과 많은 부분이 일치했다. 권번에서 장구를 치고 소리를 배우면서 3년만에 졸업을 했다고 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일제시기 권번이 기생학교의 역할을 했던 사실과 맞았다. 우리는 더 이상 할머니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권번에 대한 이야기를 이전에는 왜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권번 경험이 ‘전형적인’ 위안부와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김원일의 소설 『슬픈 시간의 기억』에 나오는 한여사처럼, 할머니의 치매는 과거의 기억을 훼손하기보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금지된 경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열어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러고도 또 하나의 숙제가 남아있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위안부’로서의 경험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다만, 탈출을 도왔던 한 일본군 장교가 탈출의 대가로 할머니와의 하룻밤을 요구해서 조선에 가고 싶은 생각에 하는 수 없이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우리는 결국 가장 ‘결정적인 증언’을 못 받은 셈이 되었다.
7~8년 전 TV 인터뷰에서 적극적으로 ‘위안부’ 경험을 이야기했던 할머니가 왜 갑자기“그런 일 없었어”로 일관하는 걸까? 이런 고민에 한창 빠져있을 때쯤, 할머니와 같이 사시는 동거인 아주머니로부터 한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예전부터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동네에서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의 할머니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치매가 걸린 이후부터는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극구 혼자만 숨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아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알아? 누가 이야기해서 그걸 알아?”하면서 역정을 낸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할머니는 당신의 과거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되는 것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싫은 것 같다. 할머니는 당신의 과거에 대해 늘 조마조마해 하였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혼자만 애써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인터뷰 중에 할머니는 바람 때문에 나는 문소리에도“가만있어, 가만있어”라고 우리를 제지하며 유심히 밖을 살펴보곤 하였다. 당신은 그렇게“몹쓸 짓”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일본군 이야기만 나오면 몸을 부들부들 떨고, 가슴을 뜯으며 제대로 크게 울지조차 못한 이유를 우리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할머니는 말이 아닌 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할머니의 치매는 구술을 신뢰하지 못할 방해물이 아니었다. 그 치매의 기억은 박제화 된 기억이 아니었다. 할머니에게 치매는 오히려 과거의 경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촉매제였다. 치매는 기억을 선별하여 재단했던 할머니의 이성적 제어능력을 무장해제 시켜서 이전에는 애써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경험들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치매는 할머니의 무의식-‘수치스러운’ 과거를 숨겨야만 한다는 강박증과도 같은 무의식-을 드러내게 하였다. 예전에 ‘위안부’로서 TV에서 증언했던 것과는 달리, 위안소에는 가 본 적도 없고“몹쓸 짓”도 당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던 까닭은 바로 오랫동안 할머니를 지배해 온 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의 구술은 순도 100%의 사실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할머니의 구술에는 실제의 경험들과 심리가 얽혀있다. 따라서 여러 결을 가진 할머니의 이야기가 하나의 판에 박힌 정석대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 각주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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