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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참여기/안경과 금시계

  • 저필자
    강현주

안경과 금시계

마산 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도랑을 따라 내려가다 만난 작은 시멘트 다리, 그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을 들어서면 왼쪽 편에 짙은 파란색 대문의 1층집이 보인다. 나는 그 집 대문에 가볍게 노크를 하고 들어선다.“할머니, 저예요.”“아이고, 니 보고 싶었다. 얼라가 엄마 기다리는 것 맨치로 똑- 기다리고 있었다.” 임정자 할머니는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준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다림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고 벅찬 일이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던 2002년 여름, 하늘의 농간이었는지 할머니를 만난 첫 날과 마지막 날은 태풍이 불었다. 2002년 7월, 태풍 라마순이 한반도를 덮치려던 날 할머니와 처음 만났다. 태풍은 순탄치만은 않을 우리의 만남을 예고하는 듯 했다. 열악한 날씨로 인한 불안한 마음과 일본군 ‘위안부’ 여성과의 첫 만남이라는 설렘과 떨림을 애써 추스르며 마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5시간을 달려 도착한 마산. 다행히 우리가 도착했을 무렵 비바람은 잠잠해진 상태였다.
할머니를 만나기 전, 시청 여성복지과 계장에게 전해 들은 바에 다르면 할머니는 이야기도 잘 하고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했다. 그 말에 조금 안도하며 동사무소 직원의 안내를 받아 할머니 동네를 찾아갔다. 먹구름 낀 하늘 때문에 어둑어둑해진 집에서 할머니 방 불빛만이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태풍에 오느라고 고생했다며 반가운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할머니의 따뜻한 한마디는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걱정과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할머니는 현재 마산에서 ‘위안부’ 등록 시 받은 보조금으로 전세를 얻어 조카와 함께 살고 있다. 자식이 없는 할머니는 여동생이 죽은 후 조카를 키웠고, 그들은 친밀한 모자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할머니는 중대한 일을 항상 조카와 상의하였고 조카는 유일한 가족으로서 할머니의 생활에 많은 부분 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첫 방문 때 할머니는 혼자 집안에 있었다. 조카는 나의 방문을 알고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었다고 했다. 방에 들어서자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유난히 피부가 하얀 한 여인의 사진이 큰 액자 속에 담겨 있었다. 바로 임정자 할머니였다. 이제는 하얀 피부 위에 주름이 더해졌지만 웃을 때마다 눈가와 입가로 번져나가는 그 주름은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할머니의 방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깨끗했다. 방 안 찬장에는 일본 가요집이 세 권 꽂혀 있었는데, 노래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요즘도 전축을 켜고 트로트나 일본 가요를 자주 듣는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하여 매일 집안에만 있다시피 하는 할머니에게 노래는 유일한 낙인 듯 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소속이라는 친밀감 때문이었는지, 조카의 배려 때문이었는지, 활달하고 사교성이 뛰어난 당신의 성격 때문이었는지 할머니는 처음부터 나에게 그다지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의 이런 호의적인 태도와 성격은 인터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할머니는 위안소 시절 이야기들을 비교적 담담하게 시작했다. 할머니의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고 또박또박 이야기를 잘 풀어나갔다. 할머니는 열일곱 살에 물 길러 갔다가 일본군인에게 강제 연행되어 8년 간 여러 곳에서 위안소 생활을 한 이른바 전형적인 ‘위안부’였다. 여태껏 한번도 제대로 표현해 본 적 없는, 희미해져버린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회상에 빠지기도 하고 눈물짓는 할머니를 보면서 그 동안 가슴 속에 묻어 놓았던 한의 덩어리가 매우 컸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외롭게 방지킴이 생활을 해왔던 할머니는, 오랜만에 반가운 벗을 만난 듯 쉴새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네 시간에 걸쳐 숨가쁘게 이어진 할머니의 이야기는 저녁때가 되어 들어온 조카의 등장으로 일단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인터뷰에 앞서, 한달 동안 한번도 바깥 구경을 못했다는 할머니를 위해 바람도 쐴 겸 병원에 모셔 가기로 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월요일. 약속시간인 오전 10시 정각에 도착한 나에게 할머니는“왜 이제 왔노?”라며 다그쳤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일을 미루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정각에 도착했음에도 당신에게는 늦게 온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아주 분주하게 외출 준비를 했다. 어떤 옷을 입을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 의견을 묻고는 분홍색 자켓을 골랐다. 손가락에는 큰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왼쪽 손목에는 금시계를 찼다. 그리고 뿔테 안경으로 마무리를 한 후에야 비로소 대문 밖을 나섰다. 하지만 외출용 소품 중 안경과 금시계는 단순한 전시용일 뿐 할머니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재작년 백내장 수술을 한 이후로 시력이 저하되어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약이 다 된 왼쪽 손목의 금시계 역시 볼 수 없기에 시계바늘은 언제나 1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인터뷰가 없는 날에도 말동무가 되고자 종종 할머니 집을 찾았고 잦은 만남을 통해 차츰 신뢰를 쌓아갔다. 할머니는 점차 나를 단순히 면접자라기보다 믿음직스러운 벗처럼 생각하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안 쌓인 믿음과 당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 내버리고자 하는 할머니의 의지로 인해 별무리 없이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1차 때와 같은 순조로운 인터뷰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결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 댁을 첫 방문한 지 2주 후, 조카가 재혼을 하면서부터 우리의 만남에도 고비가 찾아왔다. 두 번째 인터뷰를 위해 할머니 댁에 들어서자 온 집안에 환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할머니의 모습은 처음보다 훨씬 밝고 여유로와 보였다.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나를“서울 관청에서 온 사람”으로 소개했고, 당신이 일제시대 위문단으로 갔다왔다며 그것을 조사하러 내려온 사람이라고 둘러댔다. 이 때부터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혹시라도 며느리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까 염려하여 문 밖 쪽을 수시로 쳐다보았다. 며느리가 알면 당신을“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카 역시 아내가 듣지 못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것을 할머니께 부탁드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나의 방문을 반기기는 했지만, 당신의 과거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며느리에게 들킬까 봐 몹시 불안해했다.
나는 할머니의 심경을 알아채고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인터뷰를 끝내기 위해, 빠진 질문과 내용을 재검토하고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위안소의 경로와 이동수단에 중점을 맞추어 철저히 세 번째 인터뷰를 준비했다. 그러나 유난히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며 위안소 생활을 했던 할머니였기에, 6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위안소의 경로와 이동수단을 기억해내는 것은 쉽지 않았고, 끝내 이 부분은 정확히 알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여느 때보다 많은 준비를 했고 할머니의 말씀과 침묵을 기다리는 여유를 가지고 임한 덕분이었는지, 할머니는“조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는 위안소생활과 귀국 후 결혼생활 등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제 인터뷰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마지막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을 때, 할머니는 호흡 곤란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퇴원한데다가, 집안에 사소한 일까지 겹쳐 심신이 지쳐 있었다. 게다가 인터뷰 도중 강력한 태풍 루사 때문에 집이 요동치는 등 외부 상황까지 악화되자 할머니는 감정이 격해져 계속 눈물을 보였다. 나는 인터뷰를 강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느꼈고 더 이상 할머니를 힘들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인터뷰를 접었다. 잠잠했던 첫 날 태풍이 할머니의 침묵을 떨치게 한 ‘시작의 날’이었다면, 거세게 휘몰아친 마지막 날 태풍은 이제 너무 힘들어서 쉬고 싶다는 ‘멈춤의 날’은 아니었을까?
그 뒤, 나는 할머니의 인터뷰를 책으로 만드는 것을 허락 받기 위해 두 달 만에 할머니 집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지난달부터 먹은 보약의 효과 때문인지 제법 살이 오른 모습이었다. 우리는 우선 지난 두 달간 밀린 이야기부터 풀어냈다. 식사 후 나는 기회를 살펴 할머니에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인터뷰 초기부터 인터뷰를 시작할 때마다 매번 구술의 가치, 의의 등에 대한 설명을 했고 할머니도 허락했기에 시작한 인터뷰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막상 자신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온다고 하니 불안해했다. 그래서 책에 가명을 쓰기로 하고, 면접자의 성(姓)과 할머니 이름 뒷글자를 따서 함께 강순자라는 이름을 지었다.“내 죽으면 누가 이 책 가져가노?”“제가 꼬옥 보관할게요”라며 손도장도 찍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불안했는지 옆방에 있는 조카와 의논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카는 좋은 일인지는 알겠으나 세상에 알려져 복잡해지는 것이 싫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할머니는“하지 말라 쿠네, 미안하다”라며 힘없이 입에 담배를 물었다.
할머니는 당신이 ‘위안부’였다는 것이 ‘탄로’ 났을 때 조카가 받을 사회의 이목을 두려워했고, 조카 역시 주변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혹시라도 이 책이 조카의 앞날에 해가 될까 염려했다. 역사의 피해자인 할머니에게 오히려 암묵적 침묵을 요구하고, 주변 인물에게도 할머니의 침묵에 동조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아직 ‘그 이야기’는 꺼내 봤자 덕 될 것 없는, 아니 손해만 보는 이야기라고 할머니는 믿고 있었다. 할머니의 침묵 저변에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전제되어 있었고 그것은 60년 간 할머니를 침묵하게 했는지 모른다. 세상의 부담스런 시선을 감수하면서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당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은 많은 고민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슴 속 한 켠에서 밀려오는 착잡한 심정을 떨칠 수가 없었고 갈등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목이 메여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났을 즈음, 나는 정대협의 한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할머니가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이다. 할머니는 마산을 방문한 정대협 관계자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실명으로 책에 실을 것을 허락했다. 이제 할머니는 60년 간의 침묵을 깨기 위해 세상 밖으로 한걸음을 내딛었다. 더 이상 강순자가 아닌 임정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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