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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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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집]“그 역사를, 첫감에 부끄러워서 얘기를 똑똑하게 못했잖아”

 
 

“그 역사를, 첫감에 부끄러워서 얘기를 똑똑하게 못했잖아”

 


  • 년도
  • 나이
  • 내용
  • 1927년
  •  
  • 부산 출생
  • 1941년
  • (15세)
  • 부산 - 부산진 우동집으로 팔려감
    부산진 우동집 - 울산으로 팔려감
  • 1942년
  • (16세)
  • 울산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연행
    중국 도문 비행장 - 근처 서시장 위안소로 이동
  • 1945년
  • (19세)
  • 심○○와 결혼
  • 1955년
  • (29세)
  • 김○○와 재혼
  • 2000년
  • (74세)
  • 영구 귀국
  • 2001년
  • (75세)
  • 한국 국적 회복
  • 2004년
  • (78세)
  •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

부산 지도 →울산 지도 →도문 지도 →용정 지도 →경기도 광주 지도

“저번때 [중국에] 가니까 [이웃들이] 할머니 [한국에] 가지 말라니까 자꾸 가더만 테레비 보니까 할머니 (주먹을 들고 구호 외치는 흉내를 내며) 이렇게 이렇게 하더만, 그 주먹질 하자고 갔느냐고 하쟎아.

“위안부 문제는, 첫감에 여기(한국에) 올 적에도 모두 와서 물어보는 거 부끄러와 말도 못하고 그때꺼정도 얼굴을 못 들었어요. 근데 이제는 여기 나와서 운동도 하고 이러니까 이제는 뭐 내 맘 한량이야. 그래서 누가 물어봐도 예- 그랬어. 학생들이 와 물어봐도 할머니 역사 물어봐, 군인들하고 어떻게 자고-. 에구- 정말 이제는 너무 그러니까 부끄럼도 없고.

“[나눔의 집에는] 만날 학생들이 오지, 또 이렇게 이옥선 이름을 자꾸 찍어서 여기저기 자꾸 그러지 이러니까. … 지금은 참 좋아요. 밖에 나가면 밖에서 알아주고, [나눔의] 집에 들어오면 집에서 알아주고 말할 필요 없어요. 그저 마음 편안하지. 내가 중국에서 오십팔 년 동안 고생을 했는데 그 고생한 거 생각하면 이게 정말 행복이에요, 내게는.

 

학구열

 

 

 내가 얼마나 좋아요. 통통 뛰면서 학교 보내준다니 가겠다 했거든.

 

“부산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부모님] 본 고향이 황해도야. 그러니까 이십칠 년도, 시월 십 일 음력이야. … 부산에서 태어나 갖고 부산에서 열다섯 살까지 컸거든.

“학교 보내 달라고 그래 조르면 엄마가 ‘학교를 못 간다, 돈이 없다, 니가 학교를 가면 누가 학비를 대 주겠냐 … 니가 애기(동생들)를 안 봐 주면 엄마가 나가 벌지 못하면 또 먹고도 못 살고 하니까 니가 집에서 애기를 봐 줘야 엄마가 나가 번다.’ 이래 갖고 학교를 안 보내주고 이래서 그냥 열다섯 살까지 울었단 말야. 해마다 한 번씩 학교 갈 때마다 울고 울고.

“한 날은 [어머니가] ‘너 학교를 가지 못해 자꾸 그러는데 저기 어떤 집에서 자식이 없는데 그 집서 너를 수양딸로 데리고 가서 너를 학교 보내 공부를 시켜 주겠단다’… 그래 갖고 내가 얼마나 좋아요. 통통 뛰면서 학교 보내준다니 가겠다 했거든.

“[거기에] 간게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너무 [학교 보내달라고] 그러니까 우리 엄마도 고상스럽고 나 잘 거둬두지 못하고 너무 생활이 그렇고 하니까, 나를 남의 집에 보낸 거야. 가니까 쪼끄만한 우동집이야, … 부산진이라고.

“내 머리를 (허리까지 손을 내리면서) 이만큼 길었댔어. 그래 길어서 내가 혼자 [머리를] 못 따서 엄마가 빗어가 따 안 주면 아버지가 따 주는 거야, 그 머리를. 그 집 가서 그 머리를 그렇게 똑 짤라 버리잖아. 그래서 내가 울었어, 그 머리 자른다고 아까워 갖고. 그러니까 난 생각에 학교를 보내주는가 부다 했지. 그런데 식모로 부려먹잖아.

“그래, 한 날은 또 주인집에서 어떤 수작을 하는가 하면 … 뒷방에다가 술상을 차려 놓고 날 들여보내는 거야. … 가니까 이제 남자 하나 앉아 있는 거야. … [요즘] 노래방이나 어디 가면 [하는 것처럼] 남자들 술 많이 먹으면 여자한테 손이 오고 희롱하다 가는 거야. 그래 내가 막 뿌리치고 막 소리치는 거야. 손님이 소리쳐 갖고 주인이 들어왔거든. 들어오니까 어 어디서 이런 여자를 데리고 왔는가 하고 그러며 야단을 하며 그러니까 주인댁이 나를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데리 쥐 끌고 나왔어. 송곳찜질 한거야. (어깨를 가리키며) 내 여기 송곳찜질한 자리, 여태 흠집이 있어. 그래 갖고 막 때리.

“그래 손님 안 받는다구, 손님하고 그렇게 한다고 그러며 나를 욕하며 끌고 나와 갖고 길에치 끌고 나와 갖고 때리며 욕하며 송곳으로 이래 찌른 거야.

“그 집에서 내가 말을 안 듣고 그렇게 하니까 울산에다가 날 팔아먹은 거야.

“울산에 가니까 그게 또 술집인 거야, 그 집은. 이런 이층집인데 그래 거기를 가 갖고 식모질을 하는 거야. 새벽 한 시까지 또 일 해야 되는 거야. 밤에 손님들 오면 물도 떠다 주고. 또 무슨 차를 가지고 와라 하면 또 차를 갖다 주고. 이래 심부름을 왔다갔다 하고 그렇게 한 게 그때 열여섯 살 먹었어.

“그 집에서 몇 달 또 못 있었지.

 

그 날 그렇게

 

 

 심부름 갔다 오다가 끌려간 거야. 뉘기도 몰라요.

 

“긴데 턱 끌고 가는 거 안 가겠다고 막- 발버둥질 하니까, 쪼끔 가니까 트럭이 하나 있어. 그래 그 트럭에다 이래 톡 줏어 올려 놓고 우리가 쪼끄만 게 뭐 남자들의 힘에 감당해? 턱 들어올려 노니까 그저 그대로 가는 게, 그래서 거기서 내려 놔 달라고 막 소리치며 야단하니까 입을 탈아 막아. 입을 탈아 막으니까 뭐 말도 못하고 소리도 못 치잖아. 기런데 그 [트럭] 우엣 사람, 우리 같은 여자들 있는데 멫이나 됐는지도 몰라요. 여자들이 있긴 있는데, 거 한 대여섯 되는데. 그래 갖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트럭에다 담아 싣고 갔는 데 기차 역전으로 갔지. 기차 역전에서 타고 갔는데 어디로 갔는 지도 몰라.

“중국을 가는지 일본을 가는지 누구도 모르는 거야. 중국에 도문 [주057]
각주 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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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圖們, Tumen). 중국 길림성 동쪽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에 건너가 갖고도 중국인 줄을 몰랐어. 우리가 도문에 가 갖고 그런 거 뭐야, 감옥에. 조그만 할 때는 감옥이 뭔지 수용소가 뭔지 우리 그런 거 모르잖아 그때는. 그랬는데 내가 직접 들어가 보니까 … 이래 조금 (양손을 어깨 넓이만큼 벌리며) 이막시 실한 쇠때기로 이렇게 막 살창을 한 거야. 그런 이만한 큰 집에다가 맨 콩크리 바닥 한 데, 그 찬 데다가 밀어 넣는 거야. 그리고는 그때 사람이 몇이던지, 내 생각에 여섯이 같은데, 다른 사람은 몽땅 한 방에다 갖다 재우고 나 혼자만 따로 독방에다 재우는 거야. 나 그때 일은 암만 생각해도 지금도 생각이 안 나.

“그기서 하룻밤 자고 나오라 그래 나왔는데, 어- 다른 사람은 다 거기서 헤쳐져서 갈라졌어, 친구들이, 같이 끌려간 사람들이. 갈라진 데 다 다른 데로 갔는데 어디로 간지 모르고.

 

비행장

 

 

 거기 가서 비행장을 닦는 거야, 그 마당을.

 

“그래 거기 가서 어디로 갔는가, 비행장 [주058]
각주 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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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에서 연길까지 다시 기차를 타고 간 곳은 연길의 동(東)비행장이 있던 일본군 부대(현재의 연길사회정신병원앞)안에 흙으로 지은 막사였다.(경남정신대문제대책을위한시민연대모임 홈페이지 증언자료실 인용,  )

으로 간 거야. … 그 비행장이 일본 사람들이 거기 침략해 들어가 갖고 비행장이 작으니까 크게 확대를 하는 거야. 거기 가서 비행장을 닦는 거야, 그 마당을.

“군인들 있는 데 가면 가시철줄, 이렇게 철망 거기처럼 그렇게 한 거야. 기다래서 거기다가 전기를 넣는 거야. 전기를 왜 넣는가, 우리 도망간다고. 도망가면 거기 붙어 죽으라고 전기를 넣는 거야.

“우리 여기서 칠월 달에 갔는데 거기 가니까 날이 선들선들하지. 그래서 거기서 일을 했는데 우리가 일을 바로 안 하잖아. 자꾸 집에 보내달라고 떼질하고 욕하고 이러니까 때리잖아, 자꾸. 어떤 아가씨들은 매가 무서우니까 떨면서 일하는 것처럼 하는 거야. 또 나도 오기도 있기로 성질 있고 못됐어. 그래도 거서 매 때리는 거 무서워 안 하는 거야. 코피가 막 터져서 그리해도 그래도 그냥 대항하지, 왜 우리를 이런가 하고, 집에 안 보내주는가 하고.

“그때 그- 부대 안에서 첫 감에 가니까 집을 큰 걸 줬거든. 줬는데- , 일본 사람들이 참 그런 거 보면 더럽고도 치사한 거야. … 여자들이 열이 있으면 열, 스물 있으면 [스물], 저네 맘대로 강간하는 거야. 그런 거 사람 많은 거 상관 안 하는 거야.

 

양철집

 

 

 위안소가 뭔지 모르고 간 거야. 그래 가니까 그런 집이야.

 

“그래서 거기서 일본놈들이 가자 그래. 우리가 너무 애를 먹이니까 가자 하는 거야. 어, 이 사람들이 가자 하니까, 우리를 집에 보내 주겠는가 부다 하고 좋다고 모두 모다서 다 나오는 거야. 나오니까 그 서쪽에 있다고 서시장이라고 그래. 그래서 그 가니까 위안부라고 집이 이렇게 커다란 집이 있는데 양철집인데 간판이 있어. 거 위안부로 데리고 갔잖아. 우리는 집에 간다고 데리고 가니까 좋다고 따라나온 게.

“그때는 모르잖아. 우리는 부대에서는 강간 당했어도 가자 하니까 갔지, 위안부가 뭔지 위안소가 뭔지 모르고 간 거야. 그래 가니까 그런 집이야. 그런 집에 가니까 다 일본 사람이야. 밥을 주는 게 조밥을 주는 거야. 좁쌀 밥을 주고 반찬 준다는 게 김치라는 게 시래기 같은 걸로 해서 주는 게 맛이 없고. 밥을 한 술 이래 턱 뜨니까 아이구- 해수욕 가면 바닷가에 모래 있잖아, 그 모래를 한술 퍼 넣는 거 같애. 아- 맛이 없으면 얼마나 맛이 [없어]. 그래도 배고프니까 그게 다 맛있는 거야. 시래기 같은 것도 다 맛있고, 거기서는 그렇게 먹고 살았어.

“거기에서 손님들은 막 접대를 해라, 많이 접대를 안 하면-. 이런 사날에는 (평일에는) 괜찮은데 주일날이 바쁘지. 주일날은 군인들이 (길게 줄을 서는 흉내 내며) 이렇게 줄 서는 거야, 두 줄로. 두 줄로 이렇게 줄 서서 저기까지 이렇게 아주. 그거 다 받아내야 되는 거야. … 군인을 한 날에 삼십 명이나 사십 명을 받으라고 하면 어떻게 받는가? 밥도 잘 먹지 못하고. 그래 갖고 군인들이 끌어가 갖고 조그마니까 그게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맘대로 못하니까 성숙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여자를 칼로 째는 거야, 째고 찌르고 죽이는 거야.

“이 전사들은 괜찮은데 장관들이 좀 나빠. 피임 도구를 쓰는데(써야 하는데) 피임 도구를 안 써 사실. 그래서 우리는 써야 된다, 사용해야 된다 하고, 너도 병 안 들고 나도 병 안 들고.

“그때는 이름을 썼어. 요만한 패자박(나무팻말)에다가 이름을 쓰는 거야, 여자들 이름. 조선 이름을 안 쓰고 일본 이름을 바꿨어. 내가 그때 도미꼬라고 그래 쓰고 있었어. 그래서 이제 패짝을 꼽아 놓아. 병이 있어 못 받으면 그 패짝을 (팻말을 뒤로 돌려 놓는 시늉을 하며) 이래 돌려 놓는 거야. 이 사람은 손님 못 받는다. 그런데 어지간한 건 안 되는 거야. 그래도 손님 막 받으라는 거야. 병원에서 알면 안 되지, 군대에서 알면 안 되는 거야, 그게. 한달에 한 번씩 월경이 있을 적에도 손님을 막 접대하는 거야. … 그 월경할 때는 그게 월경 또 방비하는 게 있어, 도구가.

“(성기 쪽을 가리키며) 이래 거기 들어가면(들어가도록) 오린 게 있어. 그래 그런 걸 주면 안에 구멍을 막는 거야. 그래야 피가 나오지 못하게. 그래도 왜 안 나오간? 그래서 그런 게 있을 적에도 마구 쉬지 못하는 거야, 여자들이. 그래서 애기 못 낳는 사람이 많잖아, 그런 데 갔다 온 사람이. 그래 갖고 나는 병이 들어 갖고, 매독 들어 갖고 고생을 얼마나 했겠어.

사르바르(살바르산)라고 606호야. 그때 흠집이 있었는데 이젠 다 나이 먹으니까 몇 십 년 되니까 이래 조금 남았어 아직도, 이게.

“그래 갖고 주사를 놓으면 여기 봐, 여기(어느 팔인지) 흠집이 이만큼.

“많이 맞았지. 그래 갖고 그래도 떨어지지 않아 갖고 그래서 내가 시원(수은)을 썼잖아.

“그걸 쐬어 갖고 이렇게 애기를 못 낳잖아. … [수은을] 쐬우는 거야, 밑에 김을 쐬우는 거야. 목만 내놓고 이불을 이렇게 쓰고선.

 

굴뱅이

 

 

 그거 풀어 가지고 한 번씩 때리면 시퍼렇게 굴뱅이가 막 지는 거야.

 

“나는 자꾸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갈 수가 없고, 약을 먹고 죽을래도 약을 먹고 죽을 수도 없지. 돈이 있으니까(있어서) 약 사러갈 수가 있어? 못 가지. … 문 앞에 뭐 나무가 있어야 목을 매 죽겠어? 여기는, 우리 한국에는 집집마다 나무가 얼마나 많아. 그렇지만 중국에는 집, 사람 사는 데는 나무가 없으니까, … 산에만 있지. 산 밑에서 살아도 집 앞에는 나무가 없는 거야. 그래서 죽지도 못하지, 도망할래야 도망 나갈 수도 없지.

“이래 갖고 한 번은 생각했거든. 내가 어떻게 하면 도망을 가겠는가, 그래 갖고 일요일날이니까 대문이 열리잖아. 군인이 많이 들어오니까 도망간다고. 그러니까 열일곱 살 때였지. 그래 나이 하나 더 먹으니까 철이 났길래 도망갔지. 그래서 도망을 빠지기는 빠졌는데 길을 알아야 가지. 길을 모른다 말이야, 중국의 길을.

“돈도 없지 아무것도 없고, … 나가긴 나갔는데 행방(방향감각)이 없어. 그래서 잠시 산 속에 있는데 그 잠시 가다가 붙들려 왔어. 붙들려 와 갖고 끌려 또 되돌려 거기로 갔잖아.

“나가자마자 붙들려 끌려 들어왔지. 끌려와 갖고 맞아대는 게, 그때 내가 죽지 않고 산 일이 참 하늘이 도왔다는 거야. … 내 맞은 일을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거기 그렇겠는데, 안 죽었거든. 너무 너무 때려가 여기 온 데 피투성이야. 막 구둣발로 차고 군인이, 그 다음에 경찰이 때리다가 이기지 못하니까 가 버리고 군인을 시켜서 군인이 때리지. 군인이 때리다가 내가 항복을 안 하지. 또 도망가겠는가 하면 안 가겠단 소리를 안 하지. 그냥 대항하지. 나 집에 보내주면 도망 안 한다는 거야. 왜 우리를 이런 여기에 엄마, 아버지 다 이별하고 이렇게 와서 이게 어디멘가 하고, 우리를 데려다가 이렇게 하는가 하고 그러며 자꾸 막 항의하고 도망 안 간단 소린 안 하거든. 자꾸 때리지. 때리다 때리다 못하면 헌병 불러오는 거야.

“헌병 불러오면, 구두가 참 두꺼운 구두야, 군인들 신이. 그걸로 다 차고 여 온통 피멍이 되고 그 다음에는 여기 허리띠, 소가죽이라는 게 이렇게 넓은 거야. 그러니까 위에다 이래 턱 차고, 거기다 칼 차고 또 권총을 차고 이런 허리띠기 때문에 든든해. 그거 풀어 가지고 때리면 (온 몸을 가리키며) 여기다 한 번씩 때리면 시퍼렇게 굴뱅이(피멍)가 막 지는 거야. 그래서 그 이튿날 일어나서 군인, 다른 군인들 접대를 하게 되면 윗도리 벗겨 보면 막 놀라서 달아나는 거야, 이게 뭐인가 하고.

 

심 동무

 

 

 탁 와가 길에서 탁 만났는데 가자는 게 얼마나 반갑겠어.

 

“우린 [일본군인들이] 피난 가자니까 정말 피난 가는가 했지. 피난이라니 그땐 모르고 막- 비행기서 막 폭격을 하니까 보니까 우리가 무섭잖아. 피난 가자해서 갔거든. 간디(갔는데) 그- 아주 지끔 생각하믄 그 산이 있어요.

“산에다가 그 놈들이 갖다 버린 거, 거서 헤매고 헤매고, … 사람들이 그래 산에다 버리고 가니까, 해 넘어가지. ‘우리 가자, 이러다 산에서 못 산다 가자.’ 이래 다 개처럼 거꾸로 막 기어 내려오는 거야, 길도 없으니까. 산밑을 내려오니까 사람 다니는 오솔길이 있어. 거기로 나오는데 한참 나오느라고 나오니까 연길 [주059]
각주 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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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주도(州都).

시내야.

“그래서 나오니까 낮에는 몽땅 피난가는 거야, 시내 사람들이. 몽땅 산으로 피난가고 밤에 내려와서 밥 해 먹고 새벽에 또 피난가. 그것은 왜 그러는가 하면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나와 갖고 사람을 많이 죽이지. 여자들을 강간하고 죽인단 말야. 그러니까 여자들은 낮에 나와 다니지도 못하는 거야. 그래 갖고 우리가 나오니까 밥을 얻어먹을 수 있나? 사람이 많으니까, [주060]
각주 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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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소에서 함께 나온 여성들은 약 10명 정도였다.

한 집에 가면. 야, 이러다가 아무래도 정말 다 굶어죽고 말겠다. 집도 못 가고 길도 모르지. 돈도, 다 돈이 없는 거야. … 그래 우리 이래서 다 죽겠다, 그래서 딱 갈라진 거야, 위안부 여자들이. 싹 갈라져서 한참 내 혼자 막 헤매고 댕기는데.

“고럴 적에 그 남자 [주061]
각주 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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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선의 첫 번째 남편 심○○을 말한다.

가 와서 날-, 군인들이 까-뜩 실은 차야, 탁 와가 길에서 탁 만났는데 가자는 게 얼마나 반갑겠어.

“그래도(그것도) 시내에서. 그래 만나 갖고 가자고, 우리 집으로 가자고. 얼마나 반가워, 정말. 밥도 굶고 눈물을 쭐쭐 짜며 다니면서 생활하고 다녔는데. 그래 갖고 차를 타라고 해서 차를 탔지. 아이구, [그런데] 군인들이 다- 그러고 웃는다. 누가 있다가 심 동무, 거기는 동무라 하거든, 군인들. 심 동무 애인 같다고.

“열아홉 살이지, 해방됐으니까. 해방돼서 연길서 고생하는데 그 사람이 데리고 갔으니까.

 

첫 번째 결혼

 

 

 [남편이] 아버지 앞에서 칼 물고 죽어 버리겠다고, 그러니까 날 내 놓겠어? 안 내 놓잖아.

 

“결혼할 적에 우리 만날 적에 내가(나를) [남편]집에 부모 허락없이 불새에 데려갔단 말야. 딱 데려온 거 보니까 이런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 뭐라 하겠나? 나는 갈 데 없단 말이야. 그래서 안 된다, 니가 총각으로 어째서 그런 여자를 얻어 데리고 사는가, [시어머니가] ‘안 돼’[그러는 거야]. 나하고 [남편이] 삼 년 차야. 내 열아홉 살이고 스물둘이고. 그래 갖고 안 된다는 거야. [나를] 그냥 보내라는 거야.

“우리 시고모가 셋이거든. 그래 둘째 고모부가 이남에 있는 분이야. 그 고모부가 뭐라는 줄 알아? ‘야, 니가 이 여자하고 못 산다. 왜 못 사는가? 니가 얼마 데리고 살다가 후에 애기 못 낳는다. … 이렇게 하려면 차라리 고향 보내라.’ 제 고향 보내고 다른 여자 얻으라는 거야. [남편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는 거야.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그래도 안 된다고 하니까,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정 이 여자하고 난 못 살게 하면 난 아버지 앞에서 칼 물고 죽어 버리겠다고, 그러니까 날 내놓겠어? 안 내놓잖아.

“군에 있으며 나를 데리고 간 거야. 저(시댁) 집에다 갖다 놓고 또 [부대로] 도로 갔잖아. 부대로 가 갖고 결혼 날짜를 며칠 앞두고 온 거야, 결혼하려고. … 그런데 그 집도 너무 곤란해. 뭐 결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야.

“나흘 동안 있었으니까 우리 결혼 날에 부대 군인들이 가뜩 와서 이틀 밤을 뛰고 놀았어, 이틀 밤을.

“우리 시어머니가 마흔한 살이야, 옳지 마흔둘이구나. 그런데 빨간 바지 저고리를 입고 가물목에 앉아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거야, 그렇게 곤란한 집에서도. 그래 가보니까 할아버지 있고, 신랑댁 할아버지 있고 할머니 있고, 엄마 있고 아버지 있고, 남동생들이 또 서이 있고 그런 식구에 내 들어가 아홉이야. 맨 남자들이고, 여자라는 건 나 있고 우리 시어머니 있고 할머니 있고. 서이 여자고 다 남자야. 다들 이런 감에 하나씩 해도 다 노는 거야, [주062]
각주 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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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선을 포함한 아홉식구가 무언가 하고 있는 일은 있지만 경제적 능력은 없다는 표현이다.

맨 남자들이 돼 놔서 곤란하니까 더 먹지 않아. 기름기 있는 거 못 먹으니까. 그래서 나는 날마다 가마추만 먹고 사는 거야, 누룽지만. 밥 누룽지만 나는 차려주는 거야, 식구가 많으니까.

“[남편이] 전쟁판에 가 갖고, 부상당해 집에 와서 몇 달 있은 거야. … 그래 갖고 몇 달 같이 있다가 갈라진 거야. 왜 갈라졌는가? [남편이] 일본 부대 가서 대장질 했기 때문에 좀 무서워했다는 거야, 대장이니까. 밑에 사람 말 안 들으면 때리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런 거야. 그래 그, 그거 피해자가 있는 거야.

“해방되니까 [일제잔재] 청산이라구 우리집에 와서 다 이렇게 뒤로 붙인거야. 여기서도 돈 받으려면 빚지면 다 이렇게 종이로 붙이잖아, 그렇게 하는 거야. 뭐 하나도 못 다치는 거야(못 건드리는 거야). 몽땅 가져갔지. 새각시니까 아무것도 없어. 쫄딱 벗고 사는 거야, 쫄딱 벗고.

 

허망한 이별

 

 

 편지 한 장 없고 소식 한 장 없고. 그렇게 십 년 동안 기다렸어.

 

“나를 어디 뭐 내놀세라 하고 정말 누구 다칠세라 하고 동네에서도 다 말을 한 거야. 그렇게 하던 사람이 가더니만 편지 한 장 없고 소식 한 장 없고, 그렇게 십 년 동안 기다렸어. 저는(남편은) 장가 가서 애기 낳고 살림 잘 하고 했잖아. 그럴 때까지 내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지.

“삼촌이 [연길 시내에] 나갔는데 영화관에서 [우리 남편을] 딱 만나게 됐다. 나[이] 먹은 사람은 모습이 그냥 있어도 어린 사람은 나[이] 먹으면 변하지 않아? 그래서 이제 그 삼촌은 그 사람을 못 알아보지, 조카요 삼촌이요 해도. 그래서 우리 서방, 제가 먼저 봤단 말이야. [남편이] ‘중국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하니까 [삼촌이] ‘그랬다. 누구인가?’ 하구, ‘날 모르겠는가?’, 아무개 삼촌이 아닌가 하니까 [삼촌이] ‘옳다’하는 거지. 그러니까 [삼촌이] 저는 누구인가 하고 자꾸 물으니까 ‘나도 중국에서 나온 사람이다’, ‘난 생각이 안 나’, 날 모르겠느냐고 하니까 ‘나는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러더래. 그래 [남편이] 우리 시아버지, 자기 아버지 이름 심○○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오, (박수를 치며) 니가 어떻게 돼서 여기에 있니? 소련 갔다고 하더니.’ [남편이] 여기 나와 산다고 그러더래.

“그래서 구경하고 [남편이] 우리 집을 가자고 그러더래. 그래 따라가니까 가시나가 셋이더래. (허탈하게 웃으며) 그리고 배 안에 또 하나 있고. 그래서 그 삼촌이 거기서 대접을 잘 받고 ‘니가 왜 이래- .’ 그러니까 [남편이] 삼촌, 남자로 생겨서 객지생활을 오래하니까 십 년이 어디메야, 그래 객지생활을 나와 남자로 사니까 자연히 이렇게 안 하고는 안 되겠다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다고. ‘니 잘못했다. 너 집에 가 봐라 …, 너 첫 시장(부인)도 있다. 할머니를 어떻게 모시고 있는지 니 아니?’ 그러니까 무릎을 턱 치면서 ‘정말 잘못했다. 난 그래도 이적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구.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고무공장이라는 데 가서 신 만드는 데 가서, 삼 년 있으며 거기서 벌어서 시집 식구들 먹여 살리는 거야 내가. 하도 고생스러워, 없으니까. 그래서 먹여 살리고 다 옷 해 입고 이래. 내가 그 집에 가서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할머니 돌아가시고, 내 손으로 다 모신 거야.

 

두번째 남편

 

 

 고생은 이 집에 와 고생 다 했지. 목 매 죽겠다고 이러니까 내가 얼마나 고생스러워.

 

“우리 시고모가, 전에 아주 깊은 산골에 있었어. [주063]
각주 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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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집과 같은 지역인 길림성 용정시 팔도진을 말한다. 이옥선은 한국으로 영구귀국 할 때까지 이 곳에서 거주하였다.

그래 [나를 시고모집에] 데리고 갔는데, 가니까 날 보고 배추 좀 다듬어 주고 가라고, 다듬어 놓으니까 또 씻어주고 가라고, 절궈주고 가라고 이런단 말야. 그래 그 원인이 뭐인가? 날 시집 보내겠다고 남자들이 선보는 거야. 날 보러 오는 거야, … 문 앞에서 일을 하니까. 그런데 거기 우리 두 번째 남편이 중국 공산당원이야. 사회에 지도주임이라고 법을 다스리는 공작하는 사람이야, 농촌에서.

“신을 다 훔쳐 놓고(숨겨 놓고) 안 주잖아, 우리 고모가. ‘우리 조카는 안 온다. 이제 십 년이 됐는데 올 수가 있는가, 죽었지.’ 안 온다고 그러며 [다른 사람한테 시집을] 가라고. 괜히 고생스럽게 벌어서 시집을, 없는 시집을 그렇게 돌봐 줄 게 없다고. 니 암만 돌봐 줘도 무슨 성과가 있는가 하고 가라는 거야. 너무 붙들고 그렇게 며칠씩 놓지 않고-. 너무 그러니까 내가 … ‘그럼 고모, 그러지 말고 정 나를 고생한다고 불쌍하면 그 사람 나 좀 대면 해 보자, 어떤 사람인가?’ 그래 오라고 해서 왔는데 사람이 못나지도 않고 체격도 좋고 말 시키니까 똑똑한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허물을 거기 내놨지. [그랬더니] 그거 상관 안 한다, 우리집에 엄마 없는 아이 둘이 있다, 이 아이만 잘 거둬주면 난 동의를 한다, 남자가 그러거든. 여자는 아홉 살이고 남자는 네 살이고. 남자가 괜찮길래 허락하고 간 거야.

“남편 때문에 좀 속이 타지. 술을 많이 먹어. 아우, 어쩌면 내가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똑같은 거 얻어 데리고 사는가 하고. 도박을 해, 술을 먹고. 아휴- 이래서 집을 다 팔아먹고 소 다 팔아먹고, 막 기가 막히는 거야. 쌀 다 퍼내다가 주고. 그것도 우리 몰랐는데 후에서야 그거 알았잖아, 내가. 그거 알고 아들, 며느리 피땀 흘리며 벌어서 아버지 빚 다 물어줬어. 그리고 집도 없고 소도 없고, 이제는 소도 까먹고.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하나도 없어.

“아이구 말도 마라. 청산 [주064]
각주 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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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선의 두 번째 남편인 김○○은 중국 공산당원으로 동네의 민원을 맡고 있었다. 그가 취중에 한 말실수가 중앙에 알려지면서 자아비판 형식의 벌(罰)을 받았다.

맞아노니까 윗도리도 없는 거야. 우리 남편 땜에 청산 맞았거든. 청산 맞고 나니까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고생은 이 집에 와 고생 다 했지. 목 매 죽겠다고 이러니까 내가 얼마나 고생스러워. 본 남편 집에서[보다] 고생은 더한 거야. 배고픈 건 더 고생하고 그렇게 한 거야. 더 입지 못하고 그 집에 가 그 영감하고 그렇게 오십 년 살아 갖고 빚 다 물고 살고. 그런데 [남편이] 죽은 다음에 [동네]남자들이 ‘할아버지 윗도리 내놓으시오, 버릴 거’ 그래. 넣어 보낼 거 더러 넣어 보내고 꺼내니까 막 집 농에도 또 이렇게 한 보따리야, 아이구- 그때 바지 하나 놓고 둘이 입고 살던 게, 이제는 윗도리가 이렇게 많고 이제 살 만하고 밥도 잡술만하니까 돌아가신다고, 내가 그 소리를 했어.

 

불쌍한 우리 아들

 

 

 네 살에 내가 들어와서 오십 한 살까지 같이 있었으니까 내 정이 더 많지.

 

“그 집에 가서도 너무 고생스럽고 죽은 부인이 빚을 너무 많이 지고 죽었어. … 가 가지고 갸(아들) 네 살인데, 사흘만에 나한테 붙어 갖고 엄마라고 하며 안 떨어지고 그냥 그러잖아. 그래서 그거를 또 기르고. 그러면서 내가 우리 ○○ 다 크면 내가 친엄마 아니라고 다 말해주겠다고. … 그거 기를 적에 속을 안 탔는데 딸 때문에 좀 속이 탔어. 여자니까 여자가 좀 따잖아(다르잖아). 그래서 작은 거는 엄마라고 하는데 큰 거는 아홉 살이니까 알 수 있잖아. 그런데 그게 내하고 십 년 있다가 북한으로 간 거야. [주065]
각주 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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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선의 구술에 따르면 1963-1964년 무렵 북한의 이주장려 정책으로 19살이었던 딸이 북한으로 갔다고 한다.

그때가 육십사 년인지 육십삼 년도인지 그때야, 그때.

“그래서 그거(딸)를 보내고 아들 하나를 데리고 그냥 살다가 아들이 스무 살 되기 전에, 내가 니 친엄마 아니고 니 낳은 엄마는 죽고 저기 묻었다, 이제 니가 산을 다녀서 [너를 낳아준] 엄마 산에 가서 풀을 깎아 주고 해라, … 니 외갓집을 가라, 외삼촌이 니가 산에 가겠는가 해서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술을 사서 갖다 주니까(갖다 줄 테니까) 가지고 가라, 그래 그래 얼러서 스물 몇 살 먹어서 [친]엄마 [산소]에 간 거야. 그래 다니기 시작해서 지금은 엄마 있는 데(산소에) 가는 거야. 이게 [내가] 제 친엄마 아닌 줄 알지만 거기는 있은 시간이 작고, 내가 있은 시간이 오래지. 그러니까 그 엄마 정이 없잖아. 네 살에 내가 들어와서 오십 한 살까지 같이 있었으니까 내 정이 더 많지. 그러니까 이 엄마밖에 없다 그러지. 우리 아들, 며느리 참 좋아.

“나는 아들이 불쌍한 거야, 남만 못하니까. … 귀, 귀 앓아 갖고 다 수술했잖아. 그래 고막 하나 들어내 버리니까 또 듣지도 못하지. 한쪽 귀 고막이 있는데 그건 또 군기 [주066]
각주 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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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생기는 질병으로 청력이 감퇴하는 병으로 추정된다.

나 갖고 또 그렇지. 그러니까 크게 소리쳐야 조금 알아듣는 거야. 그래서 내 그게(아들이) 불쌍하지.

“이혼하려고 그걸(아들을) 앉혀 놓고 이래 본다. 보면 내가 안 낳았는데 무슨 상관 있어. 내가 두고 가면 어떤 엄마 들어와서 너를 거둬 주겠니 하면 (울먹이며) 눈물이 너무 너무 나와서 못 견디는 거야. 그래서 내가 못 갔어, 이혼을 못했어 그 영감하고.

“또 한 번은 내가 목을 매 죽으러 간다고 소껍질 하나랑 이만한 바(나무막대)를 가지고 산으로 가는 거야. 한참 막 높은 데 올라가니까 이런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데 높은 게 하나 있어. 아, 저기다가 내가 목을 걸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 그래서 이제 그 나무 밑에가 턱- 다리를 뻗치고 앉아 갖고 바를 거기다 놓고 땅을 긁으며 내가 죽어야 되는가, 살아야 되는가 [하면서] 우는 거야, 거기에 앉아서. 그러는데 산 밑에서 소리가, 사람소리가 나는 거야. 우리 아들, 며느리, 손자, 영감 다 찾으러 다니는 거야, 내가 없다고. 우리 아들이 ‘엄마 여기도 없어, 엄마 여기도 없어’ 하며 막 그래 야단하니까 아, 너네가 날 찾아다니는구나. 앉아 울다울다-. 그 다음에 내가 죽어서는 안 되겠다, 아들이 저렇게 엄마 찾고 다니는데. 그 다음에 눈물을 쓱쓱 닦고선 바를 저만치 넣어 갖고 [산에서] 내려오는 거야. 내려와 갖고 저것들 보지 않는데 빙 돌아서 집에 와서 울면서 주머니에서 바를 꺼내서 그대로 팍 팽개치고 엎드려 우는 거야. 그런데 우리 아들이 막 달려 들어와서 ‘아버지, 엄마 왔어’ 하며 들어오더니 엄마 어째 그러는가 하면서 막 바부터 가지고 치우잖아. 그래 치우고는 엄마가 왜 그러는가 하고 ‘엄마 그러지마,’ 하고 그러니까 그게 자꾸 울리지.

 

산파질

 

 

 지금이라도 누구 애기 못 낳는 사람 있으면 나를 불러가 봐.

 

“오십오 년도 그 사람(두 번째 남편)한테 [시집]갔는데, 그 해 겨울부터 내가 거기서 산파질을 하는 거야.

“거기는 할 사람이 없다니까. 큰 병원에서 원장이 왜 거기에 갈 사람이 없는가, 거 아무개 주임, 김주임 부인 그 사람 시키라는 거지. 그런 사람 두고 못하는가 하고. 그래 나도 그때 병원에서 지적을 받아 갖고 그 기술을 배워서 한 거야. 그래서 십오 년 동안에.

“그건(산파) 얼마든지 하지. 지금이라도 누구 애기 못 낳는 사람 있으면 나를 불러가 봐. 십 오 년 동안 내 실수 하나도 없이 실패 하나도 없는 거야.

“거기 가서(두 번째 시집을 가서) 내가 위생사업을 맡은 거야. 위생원으로 그 사업을 맡아 갖고 그 다음에 거기다가 산파를 겸하고 위생을 겸하고 복리를 겸하고 음- 생산직 회장을 겸하고 네 가지를 겸하는 거야. 중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겸해서 하는 사람이 많아. 그렇게 해 갖고 거기 가서 해방돼서 … 소조 부녀대장으로 내가 첫감에 가자마자 임명돼서 책임을 지고 일한 거야. 거기서부터 차례로 대장으로부터 해 갖고 청년판에 당 소조에 소조장으로부터 당지부에 또 책임을 지고 이래. 내가 부녀주임질을, 부녀주임이라하면 여기서 부녀위원이지.

 

귀국시도

 

 

 내가 이십 년을 달아다녔어, [가족을] 찾자고.

 

“내가 글을 쓰지 못하니까 얼마나 바빠(어려워). 그래서(그래도) 여 KBS 방송국 [주067]
각주 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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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선은 KBS가 자신의 귀국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SBS의 ‘사건과 사람들’(1997년 1월 4일 방영분)의“중국에 남아있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찾기”를 통해서 귀국할 수 있었다.

에 편지를 한 거야, 내가. … 그런데 소식이 없잖아.

“[내가 한국에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이 안 됐다, 이십 년이 안 돼, 십 년 좀 넘은 거야, 십 년이 넘었어.

“편지를 하고도 오래 있었지, 몇 해 있었지. 그러고 [한국으로부터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지.

“그게 복잡한 거야. 내 아는 사람의 조카딸이 있는데, 한국사람이[야]. [내가] 그 집을 다니는 거야. 그 조카딸이(의) 사촌이거든(사촌이 있거든). [그 사촌이] 언니, 저기, 저 아무개 엄마 얼마[나] 불쌍하오, 그 집에서 똑똑하지도 못한 아들 찾아 와 갖고 싫다 않고 불쌍하다고 거둬주고. 그 없는 집 와서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는데, 그거 좀 살게 해 주라고. … 서울 양반이야, 박씨 [주068]
각주 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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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선을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박상재 처장은 중국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라고. 그런데 그 양반이 [그 집에서] 숙사를(하숙을) 하고 있어서 내 역사를 알지.

“[박 처장이] 날 안다는 집에 숙사를 하고 있으니까 그 집에서 말해 나한테 왔어.

“[박 처장이 나한테] ‘할머니가 위안부에 계셨다는데 정말인가?’ ‘그래, 옳다’고 그래(그랬어), 그 역사를 첫감에 부끄러워서 얘기를 똑똑하게 못했잖아, 그래, 그런 데 있었다는 것만 말하고. 그러니까 [박 처장이] 자기 숙사하고 있는 집 아줌마 보고 할머니가 저렇게 이야기하면 [한국에] 가서로 위안부 있은 증거로 안 된다는 거야. 그때는 부끄러우니까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거야. 그런 데(위안소에) 있었다 하는 것만 증거를 하는 거지.

“그 양반이 첫감에 [한국에] 나와 갖고 우리집을 못 찾았어.

“나를 부산역전에만 갖다 내려 달라구, 그러면 내 눈 감고 찾아간다고. 그때[가 내가 중국에서 산 지] 오십오 년이 된 거야. [박 처장이] ‘할머니 정말?’ 정말이라구, 그러니까 정말 찾아갈 수 있냐 [그래서, 내가] 정말 나를 갖다 놔 보라고 내 눈 감고 찾아간다고.

“이래서 내가 집 도감을 그렸어, 우리집 동네를. 이렇게 그려주면서 (약도에서 집을 찍어주는 흉내를 내며) 여기는 우리집인데 이 집 뒤에 빨래하는 강이 큰 게 있고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가야 보통학교가 있었는데-. 근데 거기 강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없어졌어. 그러고 우리집이 내 있을 적에 보수정이라고 했는데 지금 보수동이라고 정자가 동자로 바뀌었어.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그래서 또 그게 틀린 거구. 그래 기차역전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내려서 들어오면 여기가 우리집이고, 그렇게 해서 알려줬거든. … 부산에 조카를 그래 찾아 갖고 우리 형제들이 다 있는 줄 알고 거기 우리 맏조카가 초청장을 해서 보낸 거야.

“부산 딱 갔는데, 우리○○(둘째 여동생)하고 갔는데 ○○가 ‘언니 눈 감고 찾겠다 했는데 이제 다 왔어.’ ‘응, 그럼 내려놔 봐.’ 그래 가 갖고 내가 살던 집 문 앞에 가[서] 차[에서] 딱 내려 놓는 거야. … 눈 감고 찾아? 눈 뜨고도 못 찾는데 이게 어느 때야. 눈 감고 [못] 찾아.

“이천 년 유월 일 일에 요기(한국에) 도착했어요. … 일 년 반 동안 내가 [나눔의 집] 이 방에 가만-히 죽어 살고 있었어요, … 국적이 없으니까. … 우리집에서 사망 신고를 했버렸지. 그래 법정 놀음 했는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오는가.

“조카가 고모님이 너무 소식이 없으니까, 어- 사망신고를 했는데, 생전에 우리 고모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 누기도 모르지 어디로 가는지, 가는 사람도 모르니까, 그랬는데 어떻게 알고 찾겠어요? 그래 갖고 우리 그 조카 그런 거지(사망신고를 한 거지). 동네 사람들[이] 내가 오니까 다 말하지 않아요. 엄마가 장독에다 냉술 한 사발 떠 놓고 날마다 빌었다는 거지. 하느님, 우리 옥선이가 어디가 죽지 않고 살았으믄 건강하게 잘 살라고 숨 넘어갈 때까지 그렇게 빌었대요. 그러니까 [한국에] 오니까 동네 우리 동상 친구들이 글쎄, ‘너 엄마 하도 비니까 그 덕인 모양이다, 너 언니 저렇게 살아온 거.’

“결국은 형제 간 [한국에] 나와 갖고 찾아 갖고 왔으니까 또 한 날 살아도 내가 지금은 행복으로 사니까 괜찮지.”

 

주 057
도문(圖們, Tumen). 중국 길림성 동쪽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주 058
도문에서 연길까지 다시 기차를 타고 간 곳은 연길의 동(東)비행장이 있던 일본군 부대(현재의 연길사회정신병원앞)안에 흙으로 지은 막사였다.(경남정신대문제대책을위한시민연대모임 홈페이지 증언자료실 인용,  )
주 059
중국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주도(州都).
주 060
위안소에서 함께 나온 여성들은 약 10명 정도였다.
주 061
이옥선의 첫 번째 남편 심○○을 말한다.
주 062
이옥선을 포함한 아홉식구가 무언가 하고 있는 일은 있지만 경제적 능력은 없다는 표현이다.
주 063
첫 번째 시집과 같은 지역인 길림성 용정시 팔도진을 말한다. 이옥선은 한국으로 영구귀국 할 때까지 이 곳에서 거주하였다.
주 064
이옥선의 두 번째 남편인 김○○은 중국 공산당원으로 동네의 민원을 맡고 있었다. 그가 취중에 한 말실수가 중앙에 알려지면서 자아비판 형식의 벌(罰)을 받았다.
주 065
이옥선의 구술에 따르면 1963-1964년 무렵 북한의 이주장려 정책으로 19살이었던 딸이 북한으로 갔다고 한다.
주 066
귀에 생기는 질병으로 청력이 감퇴하는 병으로 추정된다.
주 067
이옥선은 KBS가 자신의 귀국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SBS의 ‘사건과 사람들’(1997년 1월 4일 방영분)의“중국에 남아있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찾기”를 통해서 귀국할 수 있었다.
주 068
이옥선을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박상재 처장은 중국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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