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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기]참여기/강일출의 ‘조국을 위하여’

 
  • 저필자오연주
 

강일출의 ‘조국을 위하여’

 

2002년 6월, 강일출 할머니와의 첫 만남은 화창한 소풍으로 시작됐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피해자 복지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했던 안면도 소풍은 피해자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운 느낌과는 다르게 수다스럽고 한가로운 나들이었다. 할머니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어투로 노래와 농담과 지나간 때의 경험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강일출 할머니도 어렸을 때의 추억에서부터 한국으로 귀국할 당시의 서러움, 현재 나눔의 집에서의 생활, 심지어는 위안소 내에서 있었던 폭력의 경험까지 쉴 새 없이 풀어냈다. 이틀 간의 여행은 할머니들에게 소풍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듯 보였다. 각자가 살아온 삶은 달랐지만 할머니들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공통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소풍은 자식들에게, 친지들에게, 혹은 이웃들에게 ‘위안부’였음을 숨겨야만 하는 조심스런 일상에서 벗어나 짧은 시간이나마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덕분에 할머니들은 방문을 닫을 필요도 없이, 옆에 누군가가 있는지 살필 필요도 없이 많은 얘기들을 꺼냈고 강일출 할머니 역시 지난 경험들을 풀어냈다. 이런 할머니의 적극적인 태도는 인터뷰 승낙을 하지 않거나, 승낙을 받더라도 많은 부분들을 침묵으로 일관할지도 모른다는 나의 걱정들을 덜어주었다. 인터뷰에 앞서 친해지는 과정으로 할머니와 함께 소풍을 간 것은 꽤나 괜찮은 경험이었다.

소풍 이후로 수요시위 때 두 세 번에 걸쳐 할머니를 만나 뵙다가, 2002년 7월에는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부탁드리고자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할머니는 고향인 경북 상주와 서울에 친지들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2000년에 중국에서 살다가 영구 귀국한 이후로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해 오고 있다. 건강상으로나 금전상으로나 친지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직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눔의 집은 할머니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지만 할머니는 종종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가장 큰 불만은 종교적인 것으로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비해 나눔의 집은 불교계에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하나님이 나보고 이겨내라고 여기로 보낸 거야”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과“열심히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이런 말은 나눔의 집 식구들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할머니는 아무래도 종교가 다른 탓에 눈치가 보인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빠지지 않고 근처 교회에 다니고 있다.

나눔의 집을 둘러본 뒤 조심스레 꺼낸 인터뷰 부탁에 할머니는 단호히 거절했다. 소풍과 수요시위에서의 만남을 통해서 쌓아왔던 친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소풍 내내“내가 너 고향에 있는 우리 조카 아들한테 소개시켜 줄께”하며 함께 사진 찍기를 고집했고 나눔의 집에 처음 방문했을 때도“얘가 나하고 친한 아야”라고 소개를 했지만, 이러한 친분이 곧 인터뷰 승낙을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인터뷰 전에 쌓았던 친분이 걸림돌이 되었는데, 조카아들 며느리 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학생이 어느새 인터뷰를 청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당혹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터뷰를 거절당한 뒤에도 한 달 동안 전화와 수요시위에서의 만남을 통해 계속해서 부탁드렸고 할머니는 “그래 나한테 듣고 싶은 얘기가 뭔데?”하며 말하기 싫다던 그“역사”를 마침내 꺼냈다.


할머니의 얘기는 잘 정리된 메모를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듯 공간의 이동이 비교적 정확했다. 어린 시절, 연행상황, 장춘, 목단강, 집안현, 간호사 시절, 귀국 상황으로 이어져 있는 앞의 편집본 내용은 할머니가 말한 순서 그대로이고, 그 기억의 범위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인터뷰 준비 과정으로 할머니를 방문하기 전에 읽었던 정신대연구소의 1998년 인터뷰 내용에 비해서 크게 비는 부분도, 크게 보태지는 부분도 없이 비교적 정확한 기억력으로 일관했다. 할머니는 4차에 걸친 인터뷰 동안 거의 유사한 틀을 반복했고, 덕분에 엉켜 있는 기억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은 덜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정형화된 기억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그리고 이에 앞서 할머니의 기억이 왜 그런 식으로 정형화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안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정신대연구소의 인터뷰는 할머니가 영구 귀국하기 전에 행해진 것이었다. 즉,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위안부’였다는 것을 밝힌 적이 없던 할머니에게, 위의 인터뷰는 거의 구술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나와의 인터뷰 이전에 기억의 틀을 짜 놓은 것일까? 할머니는 네 차례의 인터뷰를 거치는 동안 당신만큼 ‘역사’를 잘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다. 할머니가 말하는 ‘역사’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버린 ‘위안부’로서의 삶뿐이었으며, 할머니는 그것만이 면접자가 듣고자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기억이 이전까지의 인터뷰 경험을 통해 정형화된 것은 아닐까? 당신 삶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스스로가 정리한 것이 아니라 수 차례의 인터뷰를 거치며 편집된 것은 아닐까? 할머니의 고정된 기억틀은 ‘너희가 이제까지 들으려고 했던 게 이런 것 아니었어?’ 하는 반문인 것 같았다.

할머니의 정형화된 인터뷰의 흐름을 깨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질문에는 사실적인 경험들을 묻는 것이 아닌 할머니의 전체적인 생각을 묻는 것, 혹은 할머니의 감정상태를 묻는 내용을 담기로 정했다. 이를테면 할머니의 결혼생활에 대해 물을 때, 언제, 어떤 사람과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는지 세부적인 것들을 묻는 것이 아니라“할머니 결혼은 어떤것 같아요?”하고 포괄적인 질문을 던졌다. 혹은 간호사 시절의 경험들을 물을 때,“간호사 하면서 마음이 뿌듯하거나 이런 적 있으셨어요?”라며 할머니의 당시 느낌들을 묻는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는 결혼은 꼭 해야 되지만“얼굴이 잘난 사람”은 피해야 한다며 재혼한 남편의 외도 얘기를 꺼냈다. 간호사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는 사람들은 많이 살렸지만“딸 아가 죽었어.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 가지고. 좀 치료를 못 해 가지고 죽은 거 있어”라며 살리지 못했던 첫 아이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인터뷰 시간의 꽤 많은 부분들을 현재 삶의 불만들로 채웠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 문제, 나눔의 집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살면서 일어나는 갈등들, ‘위안부’ 문제 해결과 피해자 할머니들의 복지에 무관심해 보이는 국회와 여성부의 태도가 할머니의 주요 불만이었다. 할머니의 개인적인 요구는 중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 딸 내외와 한국에 있지만 떨어져서 살고 있는 막내아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집이 주어지는 것, 단 하나였다. 할머니의 이야기들 속에서 같은 불만과 요구가 반복 될 때는 적당히 다른 내용을 유도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질문에 상관없이 계속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며 인터뷰를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나 이외에도, 정대협의 누군가가 혹은 여성부의 누군가가 들을 거라고 생각한 듯 마이크를 통해 끊임없이 이러한 요구와 불만들을 쏟아냈다.

할머니의 불만과 요구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정부에서 더욱더 많은 관심을 보여서 빨리 보상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고, 보상은 곧 자식들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할 수 있음을 뜻했다. 또한 나눔의 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을 토로하며 살 집만 있으면 나가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할머니 혼자서 생활할 집이 아닌 자식들과 살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집이었다. 할머니는 2002년 여름 혼자 살기에는 좁지 않은 임대아파트를 구했었지만 집이 넓지 못하다며 계약은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현재의 불만과 갈등은 어떤 요구를 하기 위한 일종의 전제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조국을 위해”,“후손을 위해”라는 말을 종종 꺼냈다. 할머니는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경험을 말하는 것이 곧 국가적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고, 이에 당신의 이야기를 ‘역사’라고 부르며 그것이 갖는 가치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말함으로써 후손들이 과거의 사실들을 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없는 데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면, 편안했던 중국에서의 삶을 버리고 남한을 택한 자신에게 왜 물질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지 섭섭함을 비치기도 했다. 할머니는“조국” 때문에 잃었던 어린 시절의 행복을,“조국”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잃어야 했던 중국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이제는 보상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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