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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참여기/악몽

  • 저필자
    김동희

악몽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자료수집활동을 하면서 나는 우연히 정서운이 직접 수집한 정서운 관련 신문기사 스크랩과 증언집회 사진, 비디오 등을 보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 중에 이렇게 체계적으로 자신의 활동을 정리한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또한 정서운을 알고 있는 다른 이를 통해서 그녀가 2001년 8월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되기 이전에는 19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 경남지역 대학, 일본 등지의 증언집회 등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더더욱 정서운을 만나보고 싶었고 그러던 차에 연구팀에 참여하면서 주저없이 정서운을 선택하였다.
정서운은 진해 변두리에 있는 임대아파트에서 두 번째 남편과 30년을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 역시 젊은 시절 일본유학 중 강제징용을 경험한 피해자였고, 지금도 관련단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노부부는 지난 과거의 아픔을 서로 감싸 안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첫 인터뷰를 갔을 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사진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정서운의 꼭다문 입술과 무표정한 모습에 나는 조금 위축이 되었다. 처음 만남의 어색함과 그녀의 표정 때문에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내 얘기 들으러 왔다면서, 그럼 해야지”라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열네 살 동짓달에 갔어”로 시작하며 끌려갈 당시를 중심으로 자신의 기억들을 토해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그녀는 연행 당시, 귀국 당시의 포로수용소 생활, 현재의 고달픈 삶 등에 대해 너무나 단숨에 풀어내었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무척이나 당당하였다. 버리고 싶은 저 너머의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 내는 것이 상당한 고통일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정서운은 자신의 잘못이나 운명으로 인해 그런 고통에 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첫 인터뷰 이후 정서운은 뭔가가 달라졌다. 두 번째 인터뷰를 위해 진해에 내려간다고 했을 때, 그녀는 나의 방문 이후로 밤에 잠을 못 자고 천장이 내려앉는 악몽을 꾼다면서 극도로 신경질적으로“올 필요가 뭐가 있냐”면서 내게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두 번째 진해에 내려갔을 때, 처음 방문 했을 때의 말끔한 집안과 단정한 옷차림의 정서운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그녀는 몸져 누워 있었다. 나는 없는 솜씨에 그녀가 좋아한다는 청국장도 끓여보고, 온몸이 저려온다는 그녀를 위해 2시간이 넘도록 온몸을 주무르면서 그녀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길, 그리고 인터뷰도 원만하게 진행되길 간절히 기원하였다. 그러나 정서운의 이야기는 처음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좀 자세하게 물어볼라치면“그때 다 말했는데, 뭘 또 물어? 귀찮어!”라고만 하였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 내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늘 얼마 안되는 정부 보조금으로는 노부부의 약값 대기도 벅차며, 안 아픈 곳이 없다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불만과 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감당해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거리가 가깝다면 자주 찾아가고 불만을 다 받아내면서라도 관계를 회복시켜 볼 수 있었겠지만 거리상의 문제와 시간상의 제약 때문에 두 번째, 세 번째 인터뷰는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고 겉돌기만 하였다.
네번째 인터뷰를 가기 전, 정서운에게 구술내용이 불충분하면 책에서 빠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책에서 빠질 수도 있다는 말때문이였을까. 네번째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차가 밀려 서울에서 7시간 만에 도착한 내게 그녀는 왜 이리 늦게 왔냐며, 걱정했다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남편이 손수 장만한 점심 겸 저녁식사를 한 후 2차, 3차 인터뷰 때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해방 후 이미 다른 이와 결혼한 정혼남과의 결혼생활, 남의 젖먹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 생활전선에 나섰던 이야기, 그런 자식들에게 버림받았던 이야기 등을 5시간이 넘게 담배에 의지하면서 이야기하였다.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기억이 안 나, 뭐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해.” 그렇게 넘어가기도 했지만 이전 증언과는 다른 속내를 이야기 해 준 것은 큰 성과였다. 정서운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담배를 물면서“이것이 진짜 끝이다. 이젠 너에게 더 이상 해줄 얘기가 없다”며 이야기를 마쳤다.
밤이 깊은 관계로 그날은 서울로 돌아가기가 힘들거라면서 그녀는 빈방에 나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녀가 이전 인터뷰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기쁨으로 다음 인터뷰에서 보충할 질문내용들을 정리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내게 갑자기 커다란 비명소리가 들렸다. 너무 놀라 들여다 본 정서운의 방에는 어둠 속에서 계속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녀와 그녀를 연신 주무르면서“괜찮아, 괜찮아”하는 그녀의 남편이 있었다. 그날 밤 나 역시 현실인지, 꿈인지 분별이 안되는 비명소리에 시달렸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등 떠밀듯이 나를 내보냈고 나 역시 더 이상의 인터뷰는 무리라고 생각되어 그저 건강하시라는 말과 함께 서울 올라가면 전화를 하겠다는 약속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정서운의 이야기에는 고단했던, 떠오르기조차 싫은 과거는 있을지언정, ‘위안부’로서 살 수밖에 없었던 지난 삶에 대한 자책, 부끄러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부끄러운 건 자기 자신이 아닌 위안소를 만들고 이용한 일본군부와 일본정부이며, 아직까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일본의 눈치만 보고 있는 한국정부라는 것을 재차 주장하였다. 첫 만남 후에 나는 정서운이 다른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에 비해 지난 삶에 대한 상처를 어느 정도는 극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겉으로 보이는 당당함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두려움과 아픔들이 몸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정서운과의 인터뷰는 진행되지 못했다. 그날밤 그녀의 비명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한번 정도는 더 이야기를 듣고자 진해에 내려갔을 것이다. 그녀의 지난 과거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가 전부가 아닌, 가슴 속에 더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산다는 것을 안 후에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다만 전화로 안부 정도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주체적이고, 용기 있어 보였던 정서운은 정작 그 속내를 겉으로 풀어내지 못한 채 그렇게 마음속에 고통을 담아두며 살아온 것 같다. 그녀는 그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갔다. 일제에 저항하다 투옥된 아버지를 풀어준다는 이장 말에 속아 ‘위안부’ 로 끌려갔고,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아편쟁이가 되었지만 귀국 후 이를 악물고 아편을 끊었고, ‘위안부’ 였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워 남들보다 몇 배는 고생하며 완벽한 주부로서 헌신하였고, 병이 들어 가세를 탕진한 첫 남편 대신 밀수장사, 풀빵장사, 녹용장사를 하면서 남편의 자식들을 대학공부까지 시켰다. 또한 ‘위안부’로 신고를 한 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며 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야기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운명을 개척해 나갔던 전 일본군 ‘위안부’인 정서운이라는 인물의 고난사만 있다. 그 외의 삶은 그녀에게 가치가 결여된 한낱 필요없는 인생사로 치부되어있다. 그녀는 자신이 정해 놓은 시나리오처럼 ‘위안부’ 삶과 그와 관련된 삶만을 당당하게 드러내었다. ‘위안부’로 등록한 이후 일 년에 몇 차례의 증언집회와 언론, 방송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는 대중들이 그녀에게 ‘위안부’로서의 삶만을 듣길 원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가끔 그녀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한숨을 쉬면서“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라는 말을 한다.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녀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저 너머의 기억이 있다. 어느 정도 극복된 ‘위안부’의 삶보다 극복되지 못한 저 너머의 삶이 그녀에게 아직도 악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언제쯤이 되어야 그 악몽에서 벗어나게 될는지를 기약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더 이상 그녀가 악몽을 꿈꾸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다.
지난 2003년 10월, 정서운은 낙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온 몸에 깁스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도 그녀의 생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며,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원 후 갈수록 쇠약해져만 갔다. 인정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마지막을 준비해야만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 달라는 부탁에 정서운은 “우리 문제를 확실하게 확실하게 판결해 줘. 확실하게 넘들한테 사죄 받고, 내가 내가 해결을 못 보고 죽으면 억울해서 어찌할꼬…”라며 유언 아닌 유언을 하였다. 그리고 온 나라가 ‘위안부’ 문제로 들썩이던 2004년 2월, 정서운은 이승에서의 생을 마쳤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악몽을 꿈꾸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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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기/악몽 자료번호 : iswj.d_0004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