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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 : 연광정과 대동문

 
 

■ 내성 :연광정과 대동문

 

■ 내성 :연광정과 대동문

  • 송암본과 육군본 모두 대동소이하지만, 연광정과 대동문의 측면 칸 수는 차이가 있음. 아울러 성가퀴의 구조도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으며, 송암본은 옹성 부분만 성가퀴가 있는 반면에, 육군본은 문루 앞쪽에도 성가퀴가 있음.
  • 옹성은 사라진 현존 대동문에도 육군본처럼 문루 앞쪽에 성가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치형 상단에 ‘大同門’이란 글자가 돌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대동문은 육군본에 의거해 복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됨.

 

 연광정

 

연광정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111년(예종 6)이 자리에 누정을 다시 짓고 "산수정"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인 16세기에 수차례에 걸쳐 누정을 중수하였으며 이 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29)부터 1860년(철종11)에 중창하였는데 그 건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연광정은 대동강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광정에는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 "제일루대(第一樓臺)", "만화루(萬和樓)"라는 현판이 전하고 고려 때의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며 쓴 시의 편액이 또한 걸려있다. 연광정은 두개의 장방형 평면의 누정이 ㄱ자형 형태로 비스듬히 어긋나게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정면 3칸, 측면 3칸의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선조6)에 정면 2칸, 측면 4칸의 장방향 평면을 북측면에 잇대어 지었다. 누정 본래의 건물은 원형의 기둥을, 그리고, 후대에 지은 북측의 건물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여 구분을 두었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루둘레에는 계자각 난간을 돌렸다. 바닥의 높이는 누마루 식으로 높게 두었는데 이는 유교적 권위공간으로서의 공간적 위계를 보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면서 동시에 유리한 조망권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으로 보인다. 기둥 위의 공포는 모두 익공식인데 남측의 건물은 초익공 형식을 하고 있다. 이렇듯 남쪽 채와 북쪽 채에 있어서 기둥의 형태와 익공의 형식 그리고 지붕의 높이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차이를 둔 것은 북쪽채가 남쪽채보다 후대에 지어졌음을 시사하는 것 외에도 내부공간의 자리 잡음에서 건물의 격에 맞추어 신분의 차서를 두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5량가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구조 및 가구 양식을 이루고 있다. 연광정의 구조에서 특히 지붕처리가 주목할 만하다. 길이와 너비가 서로 다른 남쪽, 북쪽 두 채의 규모에 맞게 지붕 용마루의 높이와 너비를 설정하고 크고 작은 두 개의 합각지붕을 직각으로 맞물리도록 변화를 주어 건물의 조형감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렇듯 연광정은 1670년에 중건한 건물로서 조형성과 조망성을 충분히 확보하며 주변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는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누정 건축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대동문은 대동강변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성문이다.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대동강 건너 남쪽으로 연결되는 주요한 교통로로서 평양성의 여러 성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대동문은 "읍호루"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는 "대동강의 푸른 물을 손을 드리워 떠올릴 수 있다"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예전엔 문밖에 나루터가 있고, 배다리가 놓여 있어서 대안에 선교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인 947년(정종2) 중건하였다가 거란족의 침입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인조13)에 중건한 것이다.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대동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갖는 석축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높이 올린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구조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보통문과 비교할때 중층문루에 있어 보다 정리된 후대형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석축 중앙의 홍예문(무지개문)은 보통문에 비하여 그 크기가 조금 작으며, 전/후면만 석재로 아치식으로 쌓고 가운데 부분은 반자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석축은 장대석 쌓기로 잘 정돈되어 있으며 석축위로는 총안을 가진 여장으로 둘렀다. 이 석축은 1392년(태조 원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전면에 옹성을 두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문루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보통문과 같이 하였으며, 상하층의 높이차를 크게 하였고, 상층의 지붕과 하층의 지붕사이에 광창을 둠으로써 실내공간이 훨씬 밝아지게 하였다. 중앙의 마루바닥을 석축 상면으로부터 1.5m정도 높게 들어 올려서 마루에 앉아서도 멀리 성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성의 문루가 전시에는 방어목적이 있지만 평소에는 일반적인 누정의 역할을 하였음을 고려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대동문은 조선중기에 지어졌지만 그 공포형식은 조선시대 초기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보통문의 공포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기둥은 배흘림형식으로 하면서 모서리 기둥은 중간 기둥보다 조금 높여 안쏠림을 주었다. 내부는 통기둥을 세워 시원하게 틔워 놓았다.본래 전면에 마루를 깔고 2층에도 마루를 놓았으나 현재 1층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남겨 놓고, 그 둘레에 계자각 난간을 돌렸다. 문루에 오르내리는 계단은 문 양쪽에 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와 용두 등 장식이 있으며, 추녀(사래) 끝에는 토수가 끼워졌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대동문 문루에 평양종이 걸려 있어 시각을 알리는 기능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능은 평양성의 내성 남문으로의 대동문이 고려 개경의 내성 문루인 남대문과 같이 종루의 기능을 겸하였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점으로 내성이 가지는 기능이 도시생활의 중심 혹은 경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본_연광정과 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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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박물관 소장본_연광정과 대동문

송암미술관 소장본_연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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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미술관 소장본_연광정

송암미술관 소장본_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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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미술관 소장본_대동문

3D복원_연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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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복원_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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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D복원_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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