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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북성 : 모란봉과 최승대

■ 모란봉과 최승대

  • 송암본은 ‘牛馬城’으로 표기되어 있는 반면, 육군본은 ‘馬牛城’으로 표기되어 있음. 서울대 박물관 소장본 등에도 ‘牛馬城’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牛馬城’이 맞는 것으로 생각됨.
  • 성벽의 성가퀴와 모란봉 등 전체적인 지형이 육군본이 보다 상세하므로, 모란봉 주변은 육군본에 의거해 복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됨.

최승대
최승대는 고구려시대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다시 지은 누정으로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모란봉에 있다. 모란봉은 문봉이라고도 하는데 금수산의 봉우리들 가운데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그 생김새가 모란꽃이 피어오르는 듯하다고 하여 모란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금수산에서 전망이 좋은 곳으로는 을밀대를 꼽을 수 있으나 평양성의 전체 경치를 내려다보는 데는 최승대가 더욱 좋다. 최승대가 있는 자리는 본래 고구려 6세기 중엽에 쌓은 평양성 북성의 북쪽 장대터였다. 이후 조선 후기 1714년(숙종40)에 수축공사를 하면서 10m 가량 돋우어 이 자리에 봉화대를 설치하였다. 1716년(숙종42)에는 산마루에서 약 60m 가량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 오승대란 누정이 세워졌다. 누정은 1849년(헌종 15) 중건되었으며, 청류정의 이전과 함께 최승대도 1940년경 봉화대의 위치였던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으며, 최근까지 수차례의 보수작업이 있었다. 최승대는 높은 축대 위에 성가퀴를 돌리고, 그 안에 세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겹처마 팔작집이다. 원형의 주좌를 돋음새김한 화강석 초석위에 배흘림 원기둥을 세우고 공포는 1출목 2익공을 얹었다. 구조는 5량가이며 부재의 나무 조각이 연꽃무늬 등으로 비교적 세련된 수법이다. 천장은 반가가 없는 서까래와 보가 그대로 노출이 되는 연등천장으로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1716년경부터 지금 평양종의 전신인 큰 동종을 여기에 설치하고 운영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화려하고 날렵한 지붕의 누정은 이 일대의 진달래, 매화, 측향나무, 소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절경을 자아낸다.
송암미술관 소장본_모란봉과 최승대
육군박물관 소장본_모란봉과 최승대
3D복원_최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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