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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발굴조사

발굴조사

정식 발굴조사는 아니지만 1954년 김책공업대학청사의 기초공사를 하던 중 도로유구가 드러나자 중앙력사박물관 현지조사대가 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 도로유구가 드러난 곳은 외성 동문인 고리문에서 서문인 다경문을 통하던 동서대로였다. 도로 겉면에는 20cm 정도의 두께로 강자갈이 깔려 있었으며, 도로의 폭은 12.6∼12.8m였고, 도로의 좌우측에는 약 60∼70cm 폭의 검은색 감탕흙층이 뻗어 있었는데, 도로 옆에 판 도랑자리로 보였으며, 좌우 측의 도랑까지 합한 폭은 약 13.8∼14m였다고 한다. 또 전후복구 건설시기에 고리문과 다경문을 연결하는 동서대로에서 드러난 도로유구에서 북쪽의 중성벽까지의 길이는 695m∼700m였다고 한다. 전기 평양성에서는 안학궁성 가운데 남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남북대로와 이와 교차하는 동서대로가 있어, 이들 십자로가 기본도로였다. 특히 남북대로는 장안성, 평성경, 동경성의 주작대로를 연상시킨다. 후기 평양성의 도로는 배수구를 포함한 대로 약 14m, 중로 약 5m, 소로 약 1.6m 정도였다. 소로는 전자형 안에 만든 십자로로서 골목길인데, 전기 평양성과 신라왕경에서도 나타난다. 대로는 리와 리 사이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고, 고리문과 다경문을 연결하는 동서대로, 함구문과 정양문을 연결하는 남북대로, 동서대로에서 차피문 사이에만 존재하였고, 중로는 방로에 해당된다. 이처럼 대로가 성문쪽으로 연결된 것은 통행량을 고려한 당연한 설계라고 하겠다. 백제 사 도성의 남북대로는 배수구를 합친 폭은 약 10.75m(고구려척 30척)이었고, 남북대로와 교차된 동서소로의 폭은 3.9m(고구려척 11척)이었으며, 건물사이에 난 좁은 남북소로의 폭도 약 4m였다. 이 남북대로는 전기 평양성의 남북대로와 기능이 유사하다고 하겠다. 신라왕경에서는 국립경주박물관 전시 및 수장고 건립 예정부지에서 확인된 남북도로의 폭은 23m나 되었으며 이와 교차되는 동서도로의 폭도 15∼16m였고, S1E1구획에서의 방로의 폭은 대체로 소로 5m 내외, 중로 10m 내외, 대로 15m 이상이었고, 선덕녀자상업고등학교 교사증축부지의 남북도로는 약 10m내외, 동서도로는 8m이상이었다. 또 동천동 7B/L내 도시유적인 경우 방로는 6.5m 정도였고, 위치에 따라서는 7∼8m에 가까운 곳도 있었고, 월성 외곽의 석교지 북편의 남북도로의 폭은 9m였다. 이처럼 후기 평양성의 도로폭 중 1구획(전자형)의 사이를 통하는 중로(삼무로)의 폭은 신라왕경의 방로의 폭과 비슷하나, 대로는 신라왕경에 비해 좁았다. 즉, 전체적으로 보아 신라왕경보다 도로의 폭이 좁은 편인데, 이러한 현상은 백제의 사비도성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후기 평양성과 사비도성은 외성이 둘려져 있어 제한된 속에서 도시설계를 하였기 때문으로 보여지며, 이에 반해 신라왕경은 이러한 제약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비교적 넓은 도로시설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전기 평양성에서는 강자갈로 포장된 도로 흔적이 드러났고, 후기 평양성의 도로에서도 20㎝ 정도의 두께로 강자갈이 깔려 있었으며, 사비도성의 남북대로의 노면도 납작납작한 판돌 조각 등으로 깔았다. 역시 신라왕경에서도 잔자갈을 이용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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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자료번호 : ispy.d_0003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