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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축조시기

축조시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552년(양원왕 8년)에 장안성을 축조하기 시주 001
각주 001)
築長安城 『三國史記』. 卷19 고구려본기 7 양원왕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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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하여, 586년(평원왕 28년)에 천도를 단행주 002
각주 002)
移都長安城 『三國史記』. 卷19 고구려본기 7 평원왕 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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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하였다는 간략한 기사만이 전한다. 이로 인해 장안성의 구체적인 축성과정이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각자성석을 통해 연구가 진행되었다.
장안성에서는 지금까지 5개의 각자성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주 003
각주 003)
『刻字城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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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① 기축년 5월 28일 처음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서쪽으로 향하여 11리 구간은 소형(小兄) 상부약모리(相夫若牟利)가 쌓는다. (제1석)
② 기유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12리 구간은 물구(物苟) 소형 배수백두(俳須百頭)가 맡는다. (제2석)
③ 기축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쪽으로 내려가면서 2리는 내부(內部) 백두(百頭) 상위사(上位使) 이장(尒丈)이 맡아서 공사한다. (제3석)
④ 병술년 12월에 한성(漢城) 하후부(下後部)의 소형 문달(文達)이 여기서부터 서북 방향을 맡는다. (제4석)
⑤ 괘루개절(卦婁盖切) 소형 가군(加群)은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돌아 위쪽으로 □리 4자(尺)를 쌓는다. (제5석)
 
〈제1석〉은 출토지점이 전하지 않으며, 〈제2석〉과 〈제3석〉은 외성 남벽에서 출토되었고, 〈제4석〉과 〈제5석〉은 내성의 동벽과 남벽에서 출토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내성의 축조시기는 내성 동벽에서 발견된 〈제4석〉의 간지가 ‘병술년’으로 확인되므로, 늦어도 566년(평원왕 8년)에는 시축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만 12월이라는 시기상 시축연대보다는 필역(畢役)연대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므로, 566년에 내성이 완공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안성의 시축연대로부터 14년이 지난 566년에 내성이 완공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나, 그로부터 586년의 천도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어 완공시기로만 단정 짓기도 어렵다.
외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제2석〉, 〈제3석〉의 간지를 살펴봄으로써 추단할 수 있는데, 먼저 〈제2석〉의 ‘기유년’은 589년(평원왕 31년)으로 비정되고, 〈제3석〉의 ‘기축년’은 569년(평원왕 11년)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제2석〉과 〈제3석〉은 모두 외성의 남벽에서 발견되었으므로, 둘 사이의 시간 차이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본래 〈제2석〉의 ‘기유년’은『평양속지』(平壤續志)이래 ‘기축년’으로 판독되어 왔으나, 원석과 탁본에 대한 재조사를 통해 기유년으로 판독되고 있다.
이로 인해 〈제2석〉의 간지를 기존의 판독대로 기축년으로 보아, 외성이 569년부터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제2석〉의 간지를 기유년으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제3석〉의 기축년도 기유년의 잘못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제3석〉의 경우에는 실물이 전하지 않은 채 석문(釋文)만 전하기 때문에, 기축년과 기유년 가운데 어느 한 해로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외성은 늦어도 589년에는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이들 각자성석 외에도 “본성(本城; 장안성)은 42년 만에 완공하였다.”주 004
각주 004)
舊城底有石刻曰本城四十二年畢役
『平壤續志』. 城址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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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석각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석각 자료는 조선 숙종 40년(1714)에 시행된 복구공사 때 성 바닥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각자성석과 같은 각석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이를 바탕으로 장안성의 완공시기를 552년(양원왕 8년)으로부터 42년 뒤인 593년(영양왕 4년)으로 파악하는 데 별다른 이견은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 장안성은 왕궁을 방어하는 내성이 먼저 축조되고 그 뒤에 시가지를 두르는 외성이 축조되었으며, 42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려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천도가 결정되고 터 설정과 정비가 시작된 뒤 14년 만인 566년(평원왕 8년)에 내성이 축조되었으며, 외성은 기축년인 569년(평원왕 11년)과 기유년인 589년(평원왕 31년) 가운데 어느 한 시기에 축조되어, 593년(영양왕 4년)에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내성과 외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대체적인 복원이 가능한데, 문제는 중성 남벽의 축조시기에 대한 이견이 아직 많다는 것이다. 중성 남벽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고구려시기 축조설과 고려 초기 축조설이 대립하고 있다.
고구려시기 축조설에서는 중성 남벽의 축조형식이 내성 및 외성과 동일한 점, 그리고 중성 남벽의 정양문과 함구문이 외성 안의 고구려시기 대로와 통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반면 고려 초기 축조설에서는 중성의 남벽 밑에서 고구려시기 초석 2개가 발견된 점을 들어 고구려보다 후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거나, 외성 안의 가로구획이 함구문에서 주작문에 이르는 중성의 남쪽 평지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을 들어 중성과 외성이 고구려시기에는 본래 하나의 성곽을 이루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때 중성 남벽은『고려사(高麗史)』태조(太祖) 5년(922)의 서경성(西京城) 수축 관련 기사주 005
각주 005)
冬十一月 是歲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高麗史』. 世家 太祖 5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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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922년에 축조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중성 남벽의 축조시기를 고구려시기로 보느냐, 아니면 고려 초기로 보느냐에 따라 장안성의 성곽구성이나 전체적인 도상이 달라지므로, 이 문제는 앞으로 면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북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북성을 동천왕대에 이도(移都)하였다는 평양성(平壤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장안성의 입지조건상 북성이 내성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내성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평양성 내성 글자 새긴 성돌1
평양성 내성 글자 새긴 성돌2

  • 각주 001)
    築長安城 『三國史記』. 卷19 고구려본기 7 양원왕 8년 바로가기
  • 각주 002)
    移都長安城 『三國史記』. 卷19 고구려본기 7 평원왕 28년 바로가기
  • 각주 003)
    『刻字城石』 바로가기
  • 각주 004)
    舊城底有石刻曰本城四十二年畢役
    『平壤續志』. 城址條 바로가기
  • 각주 005)
    冬十一月 是歲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高麗史』. 世家 太祖 5년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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