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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 읽기

문답으로 풀어본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적 기원과 역할

야스쿠니신사는 언제 누가 왜 만든 것일까요?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이후 일본은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측과 도쿠가와 막부측으로 나뉘어 대립합니다. 막부가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에 굴복하자 근왕파를 자처하는 쵸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薩摩藩)의 활동가들은 막부 타도를 내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막부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다. 이에 두 번(藩)은 각지에 초혼사(招魂社)를 세워 막부에 의해 희생된 자기 번(藩) 사람들만을 ‘국사순난자(國事殉難者)’로 후하게 제사지냈다. 초혼사의 목적은 자기 편 희생자만을 제사지내는 것을 통해 그 죽음이 의미가 크다고 높이 떠받듦(‘顯彰’)’으로써 자기 편 활동가들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막부측과 근왕파의 대립은 격렬한 내전으로 이어지는데 1869년 5월 막부군의 최후의 거점이었던 하코다테(函館)가 함락되고, 내란은 막부군의 패배로 끝을 맺게 됩니다. 같은 해 6월 28일 내전에서 사망한 일왕측 관군 3,588명을 제사지내기 위해 도쿄초혼사가 건립됩니다. 내란으로 인한 분열을 수습하고 자신들이 승리한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 야스쿠니신사의 전신인 도쿄초혼사였습니다. 야스쿠니신사의 건립 목적은 추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승리를 정당화시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도쿄 초혼사는 1879년 군(軍)의 요청에 의해 야스쿠니신사로 명칭이 바뀝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1894년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 각지를 침략합니다. 이러한 침략전쟁에서 사망한 일본 군인들의 죽음을 일왕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고 높이 떠받드는 곳이 야스쿠니신사였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의병 전쟁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다 사망한 일본인 군인과 군속 205명도 ‘폭도를 진압하다 사망’했다는 이유로 야스쿠니신사의 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가 일본의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사자 제사에 관한 일본의 전통은 원한을 품고 죽은 적이 해코지를 하지 않도록 후하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통해 평온과 번영을 기원 하는 ‘어령신앙(御靈信仰)’과 죽은 자는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원친평등(怨親平等)’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즉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의 전통이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전통에 불과한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전쟁 당시 일왕은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왕의 명령에 의해 시작된 전쟁은 전부 다 성스러운 전쟁(聖戰)이고 그 전쟁에서 죽는 것은 일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명예로운 일이라고 국민을 교육하는 곳이 야스쿠니신사였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유족들에게는 당신들의 아버지나 아들이 전쟁에서 죽었어도 일왕이 참배하는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으니 슬퍼할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서 야스쿠니신사에서 만나자는 미명하에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국민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전사 → 야스쿠니신사 합사 → 일왕이 참배 → 교육→ 징병 → 전사 …)은 식민지에서도 요구되어 집니다.
야스쿠니신사가 죽음으로 내몬 일본 병사들은 240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2000만 명이 넘는 아시아 민중들이 학살됩니다.
야스쿠니신사는 도쿄 구단사카 위에 있습니다. 이 신사는 일왕을 위해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봄(4월 30일)과 가을(10월 23일)의 제삿날에는 칙사를 보내시고, 임시대제에는 일왕 황후 양 각하가 직접 방문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왕을 위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을 이렇게 신사에 모시고, 정중하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일왕폐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들은 폐하의 깊은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여기에 모셔져 있는 분들을 본받아 일왕폐하를 위해 국가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전 : 초등과 ≪수신(修身)≫ 2(1941년)
 
황송하게도 일왕폐하께서 친히 참배하시는 모습을 엎드려 보았을 때 우리 같은 천한 산골 출신 사람들은 설령 칠팔십까지 살았더라도 병 따위로 죽어도 산속의 너구리도 울어주지 않는데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일왕폐하까지 참배해주시는 것을 보고 감전된 것처럼 기쁨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 후로는 괴로운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자식들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밝아졌다

출전 : ≪主婦の友≫(1944.1)
 
야스쿠니신사 대제도(大祭圖)
이번에 兩人의 戰死는 帝國軍人으로서 戰死한 點으로 一段의 意義가 높흔바이다. 생각건대 兩人은 應當 靖國神社에 合祀되여 護國의 英靈으로 길히 그 芳名이 國家와 함께 無窮할 것이다.
……(중략)……
帝國軍人으로서 國家에 몸을 바치어 戰死하면 그 位牌는 길히 靖國神社에 合祀되는바 아모리 그 級位가 나질지라도 한결가치 護國의 靈이 되는 것이다.(중략) 반듯이 그 芳名은 一柱로 鎭坐하야 惶悚하옵께도 天皇陛下의 親拜의 下賜를 奉仰하는 榮光을 입게된다.

출전 : 매일신보 1939.7.13 2면 1단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야스쿠니신사에는 어떤 사람들이 신으로 모셔져 있나요?
야스쿠니신사 신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전쟁에 나가서 죽었냐는 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일왕=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가 죽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사람은 약 246만 명입니다. 이 중에는 내란에서 사망한 사람들도 있는지만 이들은 전체의 1%도 안 됩니다. 99%는 청일전쟁 이후 침략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과 군속들입니다.
그리고 도쿄재판에서 침략전쟁을 주도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거나 판결전 에 사망한 A급 전범도 14명도 합사되어 있습니다.
BC급 전범도 신으로 모셔져 있는 데 그 가운데는 바타비아 법정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동원한 죄로 금고 10년을 언도 받았던 아오치 와시오(青地鷲雄)라는 민간인 업자도 있습니다.
이밖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피난을 가다가 선박이 침몰하여 숨진 어린 아이도 있고. 강제로 동원되었다가 희생당한 한국인 21000명, 대만인 28000명도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 합사자수
- (전쟁별, 2004년 10월)
  • 구분
  • 전쟁명칭
  • 합사자 수(누계)(1972.10)
  • 합사자 수(누계)(2000.10)
  • 합사자 수(누계)(2004.10)
  • 백분율(%)
  • 1
  • 명치유신(明治維新)
  • 7,399
  • 7,751
  • 7,751
  • 0.31%
  • 2
  • 서남전쟁, 내전(西南役前後)
  • 7,292
  • 6,971
  • 6,971
  • 0.28%
  • 3
  • 청일전쟁(日清戦役)
  • 13,619
  • 13,619
  • 13,619
  • 0.55%
  • 4
  • 대만, 조선 침략사건 (台湾事件・朝鮮事件)
  • 1,375
  • 1,130
  • 1,130
  • 0.05%
  • 5
  • 의화단 사건(北清事変)
  • 1,256
  • 1,256
  • 1,256
  • 0.05%
  • 6
  • 러일전쟁(日露戦争)
  • 88,243
  • 88,429
  • 88,429
  • 3.59%
  • 7
  • 1914-20년 전쟁(大正3‐9年戦役)
  • 4,850
  • 4,850
  • 4,850
  • 0.20%
  • 8
  • 제남사변(済南事変)
  • 157
  • 185
  • 185
  • 0.01%
  • 9
  • 만주사변(満州事変)
  • 17,137
  • 17,175
  • 17,176
  • 0.70%
  • 10
  • 중일전쟁(支那事変)
  • 187,288
  • 191,218
  • 191,250
  • 7.75%
  • 11
  • 태평양전쟁(大東亜戦争)
  • 2,115,569
  • 2,133,760
  • 2,133,915
  • 86.51%
  •  
  • 합계
  • 2,444,185
  • 2,466,344
  • 2,466,532
  • 100.00%

야쿠자 같은 자라도 전쟁에서 죽으면 이전의 죄는 전부 말소되어 신이 된다. 전쟁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좀 나쁜 짓을 해도 관계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염려는 없는가. 적어도 전쟁에서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야쿠자 같은 자를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떠받드는 것은 적어도 평화시대의 양민을 훈도(薰陶)하는 길은 아니다

출전 :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中央公論』1920년 12월호
 
 
지금의 야스쿠니신사는 전쟁 당시와는 그 성격이 다르지 않나요?
야스쿠니신사는 전쟁 당시에는 육해군성이 관리하는 국가시설로, 헌병이 보초를 서는 군사시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야스쿠니신사는 종교법인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국가와의 공적인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일본 헌법 제20조


(1항) 종교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된다. 어떤 종교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또는 정치적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3항) 국가 및 그 기관은 종교교육 기타 어떠한 종교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일본 헌법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참화를 반성하는 정신을 토대로 만들어 졌는데, 일본이 무력을 사용하여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는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을 일본의 독립을 지키고 아시아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미화ㆍ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가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약 99%는 청일전쟁 이후 침략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과 군속들인데, 야스쿠니신사는 이들이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의 이러한 주장은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반성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인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물론 평화헌법의 이념을 부정하는 것으로, 전쟁 당시와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전쟁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일본의 독립을 굳건히 지키고 평화로운 나라로서 주변의 아시아 나라들과 함께 번영하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변과 전쟁에서 존엄한 생명을 바치신 많은 분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전몰자로서 모셔져 있습니다.

출전 : 야스쿠니신사 제작ㆍ배포 한국어 팸플릿
 
제2차 세계대전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가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엇이 승리했는지에 대한 진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세대는 도쿄의 유슈칸이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민족을 서방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시작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중략) 이 박물관에서 가르치고 있는 역사는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지 않으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출전 : 2006.9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야스쿠니신사문제와 관련하여 개최한 청문회에서 헨리 하이드 위원장
 
러일전쟁의 승리는 세계, 특히 아시아 사람들에게 독립의 꿈을 안겨주었고 많은 선각자가 독립, 근대화의 모범으로서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나 후에도 아시아 민족에게 독립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아시아의 독립이 실현된 것은 대동아전쟁 초반에 일본군에 의해 식민지 권력이 타도된 뒤였다. 일본군 점령 하에서 한 번 타오른 불길은 일본이 패배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어 독립전쟁 등을 거쳐 민족국가가 차례로 탄생했다.

출전 :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의 독립(유슈칸 전시실 15(대동아전쟁) 설명문)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각국 독립
-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각국에 대하여 한국과 대만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음
그림출처 : 靖国神社, ≪遊就舘図録≫(2008)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논란

한국인 합사 문제
어떻게 야스쿠니신사에 강제동원 피해자인 한국인이 합사되었나요?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전쟁이 장기화 되자 1938년부터 지원병제도라는 명목으로, 1944년부터는 징병제를 통해 60만이 넘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합니다. 이렇게 동원된 사람들 중에 사망한 사람은 일본 정부의 공식기록으로도 21,000명이 넘습니다.
1945년 해방 이전에 한국인의 국적은 일본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방과 더불어 한국인들은 한국 국적을 회복합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신사가 합사 대상자를 검토하는 회의에 육군성과 해군성의 업무를 인계한 후생성 관계자를 출석시켜 한국인 합사에 대해 함께 모의를 합니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 합사에 필요한 신상자료 20,727명분을 한국 정부나 유족의 동의도 없이 야스쿠니신사에 제공합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이 자료를 근거로 1959년 10월부터 ‘전사했을 때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당연히 일본인’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약 2만 1천명의 한국인을 합사했습니다.
유수명부
- 동그라미 : 합사제(合祀濟)(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경위 및 합사자명부 진상조사(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지상규명위원회, 2007.8.31)
해군군속신상조사표
- 동그라미 : 야스쿠니신사 1959.7.31 합사 수속 완료
네모 : 1959년 10월 17일 합사 완료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경위 및 합사자명부 진상조사(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지상규명위원회, 2007.8.31)
 
한국인을 합사한 게 왜 문제가 되나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강제로 일본의 침략전쟁에 끌려가서 사망한 피해자들입니다. 그런데 죽은 후에도 ‘일왕=일본국’을 위해 사망했다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아버지와 오빠, 형을 끌고 간 전범들을 신으로 모시는 곳에,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서 돌아가신 분들을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었으니 신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가족을 자신의 종교로 모시고 싶은 유족의 종교적 권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데, 자신의 부모나 형제를 신으로 모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 헌법은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의 정신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일본의 강제동원은 불법이었다고 판결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일본을 위해 싸우다 희생되었다며 일방적으로 합사한 야스쿠니신사의 논리는 우리 헌법과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한국인 합사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있었나요?
유족은 야스쿠니신사가 갖고 있는 명부에서 가족의 이름을 빼라는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는 한 번 합사하면 다시 원상태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자신들의 교리이고, 영새부에서 이름을 빼는 것도 교리상 불가능하다며 유족들의 주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에 한국인 유족들은 2001.6.29, 2007.2.26, 2013.10.22 도쿄지방법원에 한국인 야스쿠니신사 합사에 관여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고 야스쿠니신사 합사 명부에서 친족의 이름을 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했습니다.
2001년 소송은 대법원(2011.11)에서 기각되었고, 2007년 소송은 고등법원(2013.10)에서 기각되었습니다. 2013년 소송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일본 법원이 소송을 기각한 이유는 일본 정부의 정보 제공 행위를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특별한 지원으로 판단하기 어려우며, 원고의 종교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한 야스쿠니신사 합사에 대해서는 관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협력 없이는 한국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될 수 없었으며,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시설인 야스쿠니신사에 강제로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한국인을 합사한 것이 유족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일본 총리 참배 문제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요?
일본 정부는 정치 지도자가 자국의 전몰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추도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말합니다.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 국가를 위해 싸우다 고귀한 목숨을 희생당한 영령에 대해, 애도의 마음을 바침과 동시에, 존숭(尊崇)의 뜻을 표하고, 영혼 편안하도록 명복을 빌었습니다.

출전 : 아베 신조 총리담화(2013.12.26)
 
어떻게 위령할 것인가는 일본인이 정할 국내문제로, 외교문제가 되는 것이야 말로 절대적으로 비정상적이다.

출전 :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정조회장(2012.4.23)
 
일본 정부는 1963년부터 매년 8월 15일 전국전몰자추도식을 개최하고 있는데 이것을 비판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즉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자국의 전몰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추도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침략전쟁의 정신적 기반이었으며, 유슈칸의 역사인시과 A급 전범 합사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지금도 여전히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시설이기 때문입니다.
1985년 5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나치 SS 친위대 대원도 매장된 독일 비트부르크 묘지를 참배했다가 미국 의회는 물론 유럽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국가 지도자가 전범이 포함된 시설을 방문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상식입니다.
이기철 주네덜란드 대사의 말을 인용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일본 침략의 희생자인 주변국에 대한 무감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독일 총리가 히틀러 무덤(존재한다고 가정)을 참배한 후 네덜란드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네덜란드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출전 : 폴크스크란트(Volkskrant, 네덜란드 유력일간지, 2014.1.29)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질문에 “일본 국내 정치에 관한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일반적으로 모든 나라는 20세기의 끔찍한 사건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정직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꼬집어 말했다.

출전 :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대변인 슈테펜 자이베르트 기자회견(2013.12.30)
 
 
A급 전범이 합사된 것이 왜 문제인가요?
아베 총리는 2013년 4월 13일 국회에서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려고 한 남군(南軍) 병사도 모셔져 있지만, 대통령은 노예제도를 긍정해서 (참배하러) 가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숭고한 영혼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며,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와 야스쿠니신사의 다른 점
알링턴 국립묘지는 신도라는 종교의 시설인 야스쿠니신사와는 달리 특정한 종교만을 강요하는 시설이 아닙니다. 또 안장 여부도 국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족의 의사를 존중하여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A급 전범 합사가 왜 문제가 되는 걸까요? A급 전범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심판한 도쿄재판에서 침략전쟁을 주도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1951년)에서 도쿄재판의 판결을 수락(제11조)하기로 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했습니다. A급 전범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곳에 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자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한 전제 및 그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A급 전범은 한국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A급 전범이 도쿄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1928년 이후 침략전쟁에 관한 건으로 식민지에서의 강제 동원이나 잔학행위와 관련된 문제는 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 중 조선 총독으로 창씨개명 등 황민화정책, 징병ㆍ징용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国昭)와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는 한국 입장에서 볼 때도 중대한 범죄자였습니다. 도쿄재판 개최 당시부터 한국 사회는 이 3명의 전범에 대해서는 한국과 직접 관련된 문제로 인식하고 관심을 표명하였습니다.
侵略元兇輩를 斷罪 東條 等 七名 絞首刑 東京戰犯裁判 言渡//小磯國昭·南次郞 等은 終身刑 韓國關係 三名도 包含

출전 : 동아일보(1948.11.1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小磯, 南 等 戰犯 韓國서 嚴罰要求

출전 : 동아일보(1948.11.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南次郞, 小磯國昭의 처단

출전 : 자유신문(1948.11.1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급 전범만 야스쿠니신사에서 빼면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요?
A급 전범은 침략전쟁을 주도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A급 전범을 빼더라도 앞에서 지적한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한반도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의병을 탄압하다 살해된 일본인 군인ㆍ헌병 등이 폭도를 진압하다 희생되었다는 이유로 합사되어 있습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한국인 약 2만 1천명도 ‘일본을 위해 싸우다 희생되었다’는 이유로 합사되어 있습니다. A급 전범을 빼더라도 이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방안 모색

독일의 국립 중앙 전쟁희생자 추도소(노이에·바헤)가 주는 교훈
독일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2차대전을 일으킨 국가였지만, 전쟁희생자를 추도하는 방식은 일본과 매우 다릅니다.
독일의 전쟁희생자와 나치에 의한 모든 희생자를 추도하는 시설인 국립 중앙 전쟁희생자 추도소(노이에·바헤)는 새로운 추도시설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곳은 독일의 침략전쟁과 나치의 정책에 의해 학살된 모든 사람들을 추모하는 곳으로, 독일 침략을 받았던 프랑스와 러시아의 대통령 등 외국 정상들도 이곳을 공식으로 참배했습니다.
노이에·바헤는 야스쿠니신사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할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노이에·바헤 추도문
노이에 바헤는 전쟁과 폭력지배의 희생자를 추도하고
기념하는 장소이다.

우리는 추도한다.
전쟁에 의해 고통 받은 여러 민족을.
우리는 추도한다, 박해를 당하고 목숨을 잃은 그 시민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세계 전쟁의 전몰병사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전쟁과 전쟁의 결과에 의해
고향에서, 또 포로가 되어
그리고 추방당하여 목숨을 잃은 죄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살해당한 수백 만 명의 유대인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살해당한 신티와 로마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혈통이나 동성애 때문에
혹은 질환이나 병약함 때문에
살해당한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살 권리를 부정당하고
살해당한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신념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폭력지배의 희생자가 되어
죄 없이 죽음을 맞이한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폭력지배에 맞서 저항하고
그 목숨을 희생당한
여자들과 남자들을.
우리는 기린다.
양심을 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추도한다.
1945년 이후에 전체주의적 독재에 저항하다가 박해받고, 그리고 살해당한
여자들과 남자들을.
노이에·바헤 전경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추도문
노이에·바헤 내부
- 내부에는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의 ‘죽은 자식을 끌어안은 어머니상’과 ‘전쟁과 폭력 지배의 희생자들에게’라는 글귀만이 놓여 있음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중지
야스쿠니신사를 총리가 참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 문제로 인한 동북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 총리가 참배를 그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베 총리는 2013년 12월 26일 야스쿠니신사 참배 후 발표한 담화에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한 역대 수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격을 존중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중국, 한국에 대해 경의를 갖고 우호관계를 구축해나가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던 다른 총리를 내세워 자신의 참배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1985년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해 물의를 일으켰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는 그 다음해에는 “자국의 국민감정과 더불어 세계 여러 국민들의 국민감정에도 깊은 고려를 하는 것이 평화우호ㆍ평등호혜ㆍ상호신뢰ㆍ장기안정의 국가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가의 현명한 행동의 기본원칙”이라는 점을 내세워 참배를 중단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카소네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중단 이유

전후 40년이 지났다고는 하나 불행한 역사의 상처는 아직도 특히 아시아 주변 여러 나라의 국민들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침략전쟁의 책임자인 특정 지도자가 모셔져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귀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민감정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이를 피하려고 금년은 야스쿠니신사 공식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고도의 정치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곤란한 결단에 직면하더라도, 자국의 국민감정과 더불어 세계 여러 나라 국민들의 국민감정에 대해서도 고려를 하는 것이 평화우호ㆍ평등호혜ㆍ상호신뢰ㆍ장기안정의 국가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정치가의 현명한 행동의 기본 원칙이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출전 : 나카소네 총리가 중국 후야호방 공산당 총서기에게 보낸 편지(1986.8.15)
 
 
한국인 야스쿠니신사 합사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문제는 동 신사가 영새부 등 모든 명부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더 이상 한국인 피해자들을 야스쿠니신사의 신으로 모시지 않는다고 선언할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가 종교법인의 외피를 쓰고 종교적 교의를 내세워 이를 거부하는 한 사실상 해결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일본 정부도 야스쿠니신사가 종교시설이기 때문에 정부가 간섭하는 것은 헌법의 정교분리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해결을 방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일본 정부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끼친 것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면 합사철폐는 불가능할 지라도 다음과 같은 일들은 가능할 것이다.


첫째, 야스쿠니신사가 일본 정부의 협력 없이 한국인을 동 신사에 합사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은 명백하게 밝혀진 사실입니다. 합사에 대한 최종결정은 야스쿠니신사가 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이 일본 정부가 제공한 자료를 근거로 했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유족의 동의 없이 피해자의 신상자료를 야스쿠니신사에 제공, 그 결과 유족의 의사에 반하여 피해자가 동 신사에 합사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이 일본을 위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라는 사실을 교육하고 전시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시베리아 억류자와 은급 결격자, 일본인 유족, 일본인 전상병자(戰傷兵者)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한 시설들은 있으나 일본의 가해나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기 위한 시설은 없습니다. 야스쿠니신사의 왜곡된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한 시설을 정부가 건설하는 것이야 말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스쿠니문제 관련 기초지식



Q
야스쿠니(靖國)란 무슨 뜻인가요

A
야스쿠니(靖國)란 중국 고서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 “이로써 국가를 편안하게 한다(吾以靖国也)”는 뜻입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는 일본 젊은이들을 침략전쟁으로 내몰았고 그 결과 동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국민들마저 편안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Q
야스쿠니신사에 위패나 유골이 있나요?

A
야스쿠니신사에 위패나 유골은 없습니다. 본전이라는 곳에는 야스쿠니신사가 신으로 모시고 있는 246만 명을 상징하는 거울과 검이 있습니다. 영새부봉안전이라는 곳에는 동 신사가 신으로 모시는 246만 명의 명부(영새부)가 있습니다.


Q
합사란 무슨 뜻인가요?

A
신도(神道) 용어로 하나의 신사에서 복수의 신을 모시는 것 또는 어떤 신사의 신을 다른 신사에서 함께 모시는 것을 의미하는 데, 야스쿠니신사 합사라고 할 경우는 전자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을 야스쿠니신사의 신으로 모시는 것을 합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Q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A급 전범이란?

A
연합국은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을 개최하는데, 극동국제재판소 조례 5조는 전쟁범죄를 A항 ‘평화에 대한 범죄’(침략전쟁 계획·모의, 준비, 개시, 수행), B항 ‘통상적인 전쟁범죄’(전쟁 법규나 관례 위반), C항 인도(人道)‘에 대한 범죄’(살인, 섬멸, 노예적 학대, 추방, 기타 비인도적 행위) 등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A, B, C는 범죄의 경중이 아니라 범죄의 성격에 따른 구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B항과 C항을 위반한 범죄를 일반적으로 BC급 전범이라고 합니다. 도쿄재판에서는 ‘평화에 대한 범죄’(침략전쟁 계획·모의, 준비, 개시, 수행) 위반 혐의로 28명이 기소되어 병사(病死) 2명과 면소(免訴) 1명을 제외한 2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1978년 10월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등 교수형을 당한 7명과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병사한 5명, 판결 전에 병사한 2명 등 총 14명을 합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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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으로 풀어본 야스쿠니 신사 자료번호 : iscol.d_0005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