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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 이중하(李重夏)가 청국에 공문을 통해 양 국의 경계설정을 명확히 해줄 것을 요청

 
  • 발신자李重夏
  • 발송일1885년 11월 29일(음)
 ○ 조선국(朝鮮國)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전(前) 예조참의(禮曹參議) 행(行)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 겸(兼)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 이(李)가 조회(照會) [주618]
편자주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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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관청에서 아래 관청에 공문을 송달하는 것을 말한다.

한 일
 이번에 감계(勘界)는 스스로 결단하여 [주619]
편자주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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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거행(自下擧行) : 윗 사람의 승낙이나 결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나감이다.


 의논을 정하지(議定) 않았습니다. 각각의 도본(圖本)과 비문(碑文)을 갖추고 함께 조회(照會)해서 보내니 장차 이것으로 품복(稟復)하여 대황제(大皇帝)의 성지(恩旨 : 聖旨)를 공손히 기다립니다. 본래 일의 처음에는 약속을 숨기는 것이 없었고 또한 귀국(貴局)에서 직접 가서[躬履] 답감(踏勘)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산을 내려온 이래로 서로 비교하는 말 한마디가 없었습니다. 어제 귀국에서 기록하여 보낸 것에 각 절이 사람을 매우 심하게 의심스럽게 합니다. 관계된 것은 자세하지 않았고 회담에 나가서는 비록 자세한 것은 상관할 것이 아니지만 자리에 나아가면 비록 대략 아뢰는 바가 있어도 오히려 자세하지 못함이 있다면 이에 조목 조목 밝혀서 아뢰겠습니다. 귀국의 논의 중에 예부(禮部)가 정계(定界)를 정한 안권(案卷)이 없어서 의지하여 믿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신(敝使)이 지난 번에 이미 보낸 임진년(壬辰年, 712) 정계(定界)를 할 때에 오라총관(烏喇摠管) [주620]
편자주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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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청나라 측에서 보낸 관리로 이름은 목극등(穆克登)이다.

의 주문(奏文)을 등초(謄抄)한 1본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른 날 혹시 구안(舊案)을 펴 볼 수 있다면 서로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국의 의론에서 말하기를, ‘이 비석이 후대 사람들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 아니면, 곧 이 일이 있는 바로 그 해의 착오(錯誤)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이 있는 바로 그 해의 착오라면 곧 아직 단론(斷論)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이 거짓으로 만들었다면 만에 하나라도 이치에 가깝지 않습니다. 지금 이 비석에 한 글자의 만주어가 없다 [주621]
편자주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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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만주족(滿洲族)은 나라를 건국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그 이후로 이전에 쓰던 만(滿)이라는 글자는 오랑캐를 폄하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는 것이 의심할 만하다고 말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황제께서 청나라 조정을 개국(開國)한 초기부터 우리나라와 왕래(徃來)한 숨김없는 자취에 일찍이 한 글자의 만주어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광주(廣州) 삼전도(三田渡) [주622]
편자주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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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중대면(中垈面) 송파리(松坡里)에 있던 나루.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가 1637년에 이곳에 수항단(受降檀)을 쌓고 임금이 청 태종(太宗)에게 항복(降伏)하였다.

지방에 태조황제(太祖皇帝)께서 병자년(丙子年 : 1636년)에 세운 동정비(東征碑) [주623]
편자주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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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三田渡碑)를 의미한다. 즉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로 청이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 있는데, 그 비석의 앞·뒷면에도 역시 만주어는 한 글자도 없습니다. 하물며 이 비석은 강희 성조(康熙聖朝) [주624]
편자주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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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康熙帝 1654. 5. 4 ~ 1722. 12. 20) 청(淸)나라 4대 황제(黃帝) 성조(聖祖)의 칭호(稱號). 세조(世祖)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현엽(玄燁)이다. 문무를 장려(奬勵)하여 학술(學術)을 진흥(振興)시키고 운하(運河)를 정비(整備)하였으며, 조세(租稅)를 덜고 제국(帝國)의 기초(基礎)를 확립(確立)하였다. 『강희자전(康熙字典)』, 『패문운부(佩文韻府)』는 당대의 찬서(撰書)이다.

의 문치가 성대히 일어난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비문(碑文)의 자획(字劃)이 하나도 문드러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이것이 의심할 만하다고 합니다.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의 금석문(金石文)은 오히려 진한(秦漢) 시대의 옛 유적이 남아 있는데 지금 이 비석은 불과 170여년의 유적입니다. 자획(字劃)이 문드러지지 않은 것이 어찌 의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연강(沿江)에 퇴(堆)를 설치하고 그 위에 수목(樹木)이 무성하게 났는데, 왕왕 크게 자라 한아름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 ‘동쪽이 토문(土門)이 된다’는 뜻은 의심할 만하다고 말합니다. 비석 동쪽의 구덩이의 흙벼랑[土崖]이 깊고 길어 문(門)처럼 서있습니다. 옛날부터 토문(土門)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지금은 강을 사이에 떼고 있으니 지명(地名)이 어떻게 서로 속일 수 있겠습니까? 동쪽이 토문이 되는 뜻은 본래 부합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류(下流)가 북쪽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오늘의 의론이 있는 것입니다.
 귀국의 논의는 또 이 비석은 저절로 소백산(小白山)의 남쪽 분수령(分水嶺)의 위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마도 허항령(虛項嶺) [주625]
편자주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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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402m. 마천령산맥 북단에 가까운 소백산(小白山 : 2,174m)과 북포태산(北胞胎山 : 2,289m) 사이에 위치한 안부(鞍部)이다. 혜산과 무산을 잇는 국도가 지나며 산정에 용암류에 의한 언색호(堰塞湖)인 삼지연(三池淵)이 있다. 삼지연은 경승지이며, 온천이 분출하므로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고개(嶺)는 동서(東西)로 물의 근원지의 거리가 서로 70여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만약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한다면 이치에 합당하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지금 비석을 세운 곳이 분수령이면, 동서쪽은 몇 발자국 길이가 않되고 대택(大澤) [주626]
편자주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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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天池)를 말한다.

아래는 양 가장자리의 큰 골짜기가 시작하여 열릴 것입니다. 천하의 큰 강은 셋이 있는데 압록강(鴨綠江)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 수원(水源)은 대택(大澤)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고금(古今)의 지도와 책(圖籍)을 살피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627]
편자주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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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를 든다면, 이유원(李裕元)도 압록강의 근원이 백두산의 대택(大澤)에서 나온다고 설명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제13권, 「水之宗十二」, “十一曰, 鴨綠江, 源出白頭山之大澤”).

만약 원근(遠近)을 계산하지 않고, 영역의 한계를 살피지 않고 단지 고개(嶺)를 지나다 내려와서 좌우를 바라본다면 어떤 곳인들 압록강(鴨綠江)과 도문강(圖們江)의 수원(水源)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 고개(嶺)와 백두산(白山) 비석이 세워진 곳이 거리가 130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두산의 반은 조선(朝鮮)에 속해 있는데 동방(東方)에 황무지를 개척한 이후로 지금까지 1,100여년 동안 대대로 이어져 전하였는데, 또한 천하도지(天下圖誌) [주628]
편자주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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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인지 미상. 여기서는 특정한 책을 지칭하기보다는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나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같은 지리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귀국(貴局)에서 논한 바와 같다면 백두산은 당연히 조선(朝鮮)의 강역(壃域) 밖에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이러한 이치가 있는 것입니까?
 귀국(貴局)의 논의는 홍토산수(紅土山水) 한 구절에서 더욱 귀국의 생각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저희의 의론은 본래 중간의 두 강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송화강(松花江)의 머리와 꼬리(頭尾)를 잘라 없애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이 물과 토퇴(土堆)의 거리가 40~50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무슨 늘이거나 줄이려는 논의가 있겠습니까?
 지난 번에 귀국 측의 조회(照會)에서 말하기를, ‘봉퇴(封堆) 이남은 귀국의 경계이고, 봉퇴(封堆) 이북은 천조(天朝 : 청국)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역시 하나의 거리낌 없는 시원스러운 논의였습니다. 지금 아울러 봉퇴(封堆) 이남과 함께 감히 억지로 끌어들여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것입니까? 종성(鍾城) [주629]
편자주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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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에 있는 군(郡) 이름이다.

90리의 땅의 경우는 200년 동안 교역을 하다가 정폐(停廢)된 것이 겨우 4년입니다. 다시 어찌 구구하게 증거를 제시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총괄하면 우리 사신은 귀국(貴局)에서 나라에 봉사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굳게 쓰고 있다는 것을 진실로 깊이 알고 있습니다. 다시 어찌 반드시 번거롭게 군더더기를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지금 귀국(貴局)에서 조사하여 아뢰라는 한 마디 말은 곧 만 백성의 명맥(命脈)에 관계된 바가 가깝고 공사(公事)에도 관계된 바 매우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십분 명확하게 하여야만 이에 글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공무를 처리하는 체제이니 또한 우리 사신이 매우 바라는 바입니다. 마땅히 문서를 갖추어 조회하였으며 이 조회한 것을 귀국(貴局)에서 살펴보시고 시행해주실 것을 청합니다.
 이상은 조회(照會)
 흠가오품함상대화령주파독리길림조선상무회판변방영무처(欽加五品銜賞戴花翎奏派督理吉林朝鮮商務會辦邊防營務處) 겸(兼) 도문강감계사의분발보용현정당(圖們江勘界事宜分發補用縣正堂) 진(秦 : 秦瑛)
 흠가이품함상대화령혼춘좌익협령(欽加二品銜賞戴花翎琿春左翼協領) 겸(兼) 이변무교섭승판처회판도문강감계사의박기파도로(理邊務交涉承辦處會辦圖們江勘界事宜博奇巴圖魯) 덕(德 : 德玉)
 위판혼춘초간총국총판위원회판도문강감계사의오품정대부경력함후선종구(委辦琿春招墾總局總辦委員會辦圖們江勘界事頂戴府經歷銜候選從九) 가(賈:賈元桂)
 광서(光緖) 11년(1885년, 고종 22) 11월 29일

 
주 618
상위 관청에서 아래 관청에 공문을 송달하는 것을 말한다.
주 619
자하거행(自下擧行) : 윗 사람의 승낙이나 결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나감이다.
주 620
1712년 청나라 측에서 보낸 관리로 이름은 목극등(穆克登)이다.
주 621
참고로 만주족(滿洲族)은 나라를 건국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그 이후로 이전에 쓰던 만(滿)이라는 글자는 오랑캐를 폄하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주 622
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중대면(中垈面) 송파리(松坡里)에 있던 나루.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가 1637년에 이곳에 수항단(受降檀)을 쌓고 임금이 청 태종(太宗)에게 항복(降伏)하였다.
주 623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의미한다. 즉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로 청이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 624
강희제(康熙帝 1654. 5. 4 ~ 1722. 12. 20) 청(淸)나라 4대 황제(黃帝) 성조(聖祖)의 칭호(稱號). 세조(世祖)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현엽(玄燁)이다. 문무를 장려(奬勵)하여 학술(學術)을 진흥(振興)시키고 운하(運河)를 정비(整備)하였으며, 조세(租稅)를 덜고 제국(帝國)의 기초(基礎)를 확립(確立)하였다. 『강희자전(康熙字典)』, 『패문운부(佩文韻府)』는 당대의 찬서(撰書)이다.
주 625
높이 1,402m. 마천령산맥 북단에 가까운 소백산(小白山 : 2,174m)과 북포태산(北胞胎山 : 2,289m) 사이에 위치한 안부(鞍部)이다. 혜산과 무산을 잇는 국도가 지나며 산정에 용암류에 의한 언색호(堰塞湖)인 삼지연(三池淵)이 있다. 삼지연은 경승지이며, 온천이 분출하므로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주 626
백두산 천지(天池)를 말한다.
주 627
일례를 든다면, 이유원(李裕元)도 압록강의 근원이 백두산의 대택(大澤)에서 나온다고 설명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제13권, 「水之宗十二」, “十一曰, 鴨綠江, 源出白頭山之大澤”).
주 628
어떤 책인지 미상. 여기서는 특정한 책을 지칭하기보다는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나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같은 지리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주 629
함경도에 있는 군(郡)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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