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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등록

정계비가 위치한 지역을 둘러본 후 수봉(竪峯)으로 내려옴

  • 날짜
    년도 미상 10월 18일(음)(10월 18일)
 ○ [10월 18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30리를 가니 이것이 바로 새로 개척한 길이었다. 삼나무와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서 마치 바늘이 찌르는 것과 같이 사람 얼굴을 난타하였다. 나뭇가지를 구부리거나 꺾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들이 기울어지고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여 겨우 겨우 발을 떼어가면서 나아가 삼포(杉浦)에 도착하였다.
 이 곳은 바로 토퇴(土堆)주 556
편자주 556)
1712년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때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석퇴(石堆), 토퇴(土堆), 목책(木柵)을 세웠는데, 여기서 이중하가 말한 토퇴가 당시 세운 토퇴를 가리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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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끝나는 곳이고 도랑이 처음 넓어지는 곳이었다. 진영(秦煐)과 가원계(賈元桂)에게 형편을 알려주고 다시 왼쪽 산록의 협곡을 따라 올라갔다. 여기에서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 높이 올라갈수록 산길이 점점 가파르고 쌓인 눈은 더욱 깊었다. 삼포부터 위로는 개울가에 흙무더기를 쌓아 놓았기 때문에 이를 증표로 삼아 길을 간 것이다. 30리를 가서 이석포(裡石浦)의 엽막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이 날 밤 청국 관원 두 사람이 상의하여 우리에게 요구하기를, 삼경(三更)주 557
편자주 557)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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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밥을 지어 먹고 민정(民丁)으로 하여금 먼저 식량과 마초를 싣고 길을 열어 출발하게 하고 청국 관원들과 우리 일행이 뒤따라 출발하면 곧바로 백산(白山 : 백두산)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지금 상황을 보건대, 쌓인 눈이 정강이까지 차고 여기서 백산(白山)까지 거리가 60리나 된다. 깊은 밤에 길을 가는 것은 사람의 목숨과 관계되어 매우 불가하다.”고 하니, 저들이 크게 화를 냈다. 대개 그 뜻은 처음부터 감계에는 마음이 없었고 내게 행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여 스스로 우리가 가는 계획을 정지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내가 최두형(崔斗衡)과 상의하여 마침내 한밤중에 밥을 짓고 말에게 꼴을 먹이고 일제히 산에 올랐다. 때는 차가운 눈이 흩날리고 달빛이 비쳤다 가렸다 하였다. 눈을 뚫고 길을 열어서 대각봉(大角峯) 북쪽 낭떠러지를 따라 올라갔다. 그 옆은 천 길이나 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골짜기가 있어서 한 번이라도 혹 발을 헛디디게 된다면 생사의 여부를 알 수 없었다. 앞에서 걸어가는, 짐을 짊어진 역부(役夫)가 이렇게 몹시 추운 날씨 속에서 배는 고프고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추위에 얼어 쓰러질까 매우 염려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며 나무를 베고 산을 뚫고 눈을 뚫어 길을 내는데, 마치 싸움터에 임하여 적을 대하는 기세와 같이 어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그 정성은 더욱 감탄할 만하였다.
 내가 몇 리를 걸어 가다가 눈이 깊어서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오위장(五衛長) 최오길(崔五吉)의 말에 올라타 눈을 뚫고 절벽을 따라 전진하였다. 말이 더러는 넘어지고 더러는 엎어지니 그 고생이 가지가지였다. 오직 춘길(春吉)과 이돌(利乭)만이

 나를 뒤따르며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말 위에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남아의 관직생활 도모하기 어려우나     男兒宦役摠難謀
 이 먼 곳 유람할 줄 어찌 꿈에도 생각했던가  夢想那期此遠遊
 삼백 리 길 눈 쌓인 텅 빈 산을        積雪空山三百里
 오경(五更)주 558
편자주 558)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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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말 몰아 산봉우리에 오르네   五更驅馬上峯頭
 
 수십 리를 가니 길은 더욱 험하고 눈도 더욱 깊이 쌓였다. 앞서 간 최두형(崔斗衡)과 수행원 여러 사람이 모두 말에서 내려 눈 속에 섰다. 나도 말에서 내려서 백성(民丁)으로 하여금 먼저 길을 내라고 하였다. 이윽고 출발하려는 때에 저 청국 관원들의 코고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아 조금도 움직일 마음이 없었다. 우리 일행이 일제히 출발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밥을 지었다. 천천히 좇아오는 것이 마지못해 하는 모습이어서 또한 가소로웠다.
 또 수십 리를 위로 올라가는데 삼나무도 점점 드물어졌다. 마침내 산꼭대기에 도달하니 풀 한 포기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공활하고 눈빛(雪色)은 한결 같아서 흰 것을 깔아 놓은 것 같았다. 이 때는 하늘의 빛깔(天色)이 아직 밝지 않아 향배(向背)를 분간할 수 없었다. 얼마 후에 산의 모습이 점점 분명해지고 동쪽은 이미 밝아졌다. 그런데 차가운 바람(陰風)이 사방에서 불어와 온 하늘이 흐릿하고 어두우니 백두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정말로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계비가 있는 곳도 역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산 사람인 이종려(李宗呂), 김이헌(金利憲), 황학채(黃學采) 등은 평소 산길에 익숙하다고 일컬어져서 처음 출발부터 정성껏 앞에서 인도하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민부(民夫) 등과 더불어 방황하며 길을 찾는데 혹은 동쪽 혹은 서쪽으로 헤매다가 마침내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
 저들과 우리 일행이 모두 산 위에서 말을 세우고 있는데, 눈보라가 몰아쳐 안주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마음이 절박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뭇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수레바퀴 같이 둥근 붉은 해가 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백두산이 짧은 순간에 얼굴을 드러내어서 언덕, 골짜기를 낱낱이 볼 수 있었다. 이 때 마치 술에 취했다가 깨어난 것 같기도 하고 눈이 멀어졌다가 밝아진 것 같기도 하니 모두 하늘과 신의 조화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경이로워서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한 겨울 왕명 받아 백두산에 오르노라    大冬持節白頭山
 눈보라 앞을 가려 지척 분간 어렵더니    風雪難分咫尺間
 잠깐 사이 탁 트이어 하늘이 개이니     頃刻豁然天宇霽
 수레바퀴 같은 붉은 해 산 위에 걸렸도다   一輪紅日着山顔
 
 비로소 멀리 백두산 전체를 보니 아침 해가 쌓인 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밝게 빛나고 조용한데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다.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가득 어우러져 하늘에 솟아 있으니 마치 수정으로 만든 궁전 같고 옥으로 지어진 세계 같아 사람의 마음과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또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아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며 공경하게 하고 삼가하여 두렵게 만들었다.
 드디어 서로 정계비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나아가는데 높은 산과 골짜기가 매우 많았다. 하늘에서 부는 바람이 눈을 날려 곳곳에 쌓여 있는데, 쌓인 것이 몇 천 년을 계속 내려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매번 이 계곡에 올 때마다 마치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 같아 사람들이 모두 안으로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말이 쓰러지고 사람이 넘어져 끝없이 괴로운 곳이 또 몇 군데인지 모르겠다. 옛날의 험하고 꼬불꼬불한 비탈길을 말로 모는 것도 이것에 비하면 오히려 편안히 다닐 수 있는 길이라 하겠다.
 내가 너무 피곤하여 춘길(春吉)과 이돌(利乭)이 좌우에서 부축하였다. 그들도 힘이 빠지게 되자 중군 최두형(崔斗衡)이 또 부축하여 나는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정계비가 있는 곳은 눈으로 바라다 보이는 거리인데도 30리 거리였다. 정계비가 세워져 있는 곳에 이르니 이 곳은 공중의 세계로 사방이 훤히 탁 트였고 오직 운무(雲霧)만이 깔려 있을 뿐 다시 어떤 사물도 그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 없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하늘과 산꼭대기 지척으로 나누이니       天際峯頭咫尺分
 하늘나라 선악이 들리는 것 같고         瑤坮仙樂若將聞
 겹겹 바위 천년설 계속 쌓여 있는데        層巖仍積千年雪
 하계에 만리운 길게 깔려 있네          下界長鋪萬里雲
 기자(箕子)주 559
편자주 559)
중국 상(商) 태정제(太丁帝)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성(姓)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余). 기(箕, 지금의 山西 太谷)에 봉(封)해져서 기자(箕子)라고 한다.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간언(諫言)하다 유폐(幽閉)되었다. 공자(孔子)는 기자를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함께 상(商)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평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기자가 조선에서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를 세워(箕子東來說) 동방에 교화를 이룩하였다는 사실을 믿어서 단군보다는 기자를 더 존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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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옛 나라가 조그맣게 펼쳐 있고   箕子舊邦開小域
 강희의 남긴 글은 비석에 있네          康熙短碣記遺文
 복파의 동주(伏波銅柱)주 560
편자주 560)
서역(西域)을 정벌한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이르러서 한 나라의 국경선을 획정하기 위해 세운 구리 기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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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끝내 헤아릴 수 없으니  伏波銅柱終無計
 칼 어루만지며 서풍 속에 저녁 노을 보내네     撫釰西風送夕曛
 
 봉우리는 사각(四角)인데 들으니 가운데 커다란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나 된다고 한다. 매양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못 가운데에서 피어 올라 하늘에 가득 차니 대개 산 연못의 변화가 끝이 없다.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10여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는데, 바람과 눈이 하늘에 가득해 올라가 볼 수 없어서 매우 유감스러웠다.
 동쪽 봉우리 셋째 산기슭을 따라 계곡을 지나니 땅이 조금 평평해지며 양쪽으로 커다란 계곡이 나누어 전개되었다. 서쪽은 바로 압록강(鴨綠江)주 561
편자주 561)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지방(東北地方 : 滿洲)과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이다. 길이는 790km, 유역 면적은 3만 1,739km2, 가항 거리는 698k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水色如鴨綠]”고 하여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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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근원이고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니 참으로 분수령(分水嶺)이다.주 562
편자주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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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수령 가운데에 조그만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 위에는 가로로 대청(大淸) 두 글자가 씌어 있고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경의 경계를 조사하고자 이 곳에 이르렀다.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康熙) 51년(1712) 5월 15일 필첩식(筆帖式)주 563
편자주 563)
청(淸)대의 관명(官名)이다. 원래 만주어(滿洲語)로 사자관(寫字官)을 뜻하며, 청(淸)나라 이후 각 아문(衙門)에 두어 번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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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주 564
편자주 564)
번역과 통역을 맡아보던 사람. 통사관(通事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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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二哥) 조선 군관(朝鮮軍官) 이의복(李義復), 조태상(趙台相), 차사관(差使官) 허량(許樑), 박도상(朴道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瀗), 김경문(金慶門).
 
 비석의 동쪽 가의 계곡을 따라 둔덕을 쌓았는데 돌로 쌓기고 하고 흙으로 쌓기도 하여 삼포까지 90리에 끊이지 않았으니, 생각건대 옛 사람이 힘쓴 것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비석의 표면은 얼음이 얼어붙어서 깎아도 떨어지지 않아 불을 때어 녹여서 세 장을 인출(印出)하여 한 장은 진영(秦煐)에게 주고 두 장은 품 안에 넣었다.
 이 때 음습한 바람이 더욱 심해지고 눈꽃이 어지럽게 흩날려 잠시도 머무를 수 없었다. 서둘러 일어나 길을 되돌아가는데 겨우 수 십 보를 가자마자 길이 희미해져 찾을 수가 없었다. 되돌아가서 가차을봉(可次乙峯)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어두컴컴하고 망망하여 마치 큰 바다 한 가운데 있으면서 그 끝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각자 길을 찾아갔는데 멀리서 그 행렬을 바라보니 마치 어부가 새벽에 개펄에 들어가는 것 같아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하였다. 더러는 남쪽으로 몇 리를 가서 낭떠러지와 계곡으로 막히고 끊어져 망연히 돌아왔고 더러는 동쪽으로 몇 리를 가서 등성이와 언덕이 아득히 넓어 두려워서 되돌아왔다.
 다만 보이는 것은 자욱한 안개뿐이고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므로 위아래가 모두 혼몽하여 향할 곳을 알 수 없었다. 하늘은 어느덧 점점 어두워졌다. 일행의 인마가 하루 낮과 밤 동안 굶주리고 피곤한 나머지 갈수록 마음이 더욱 두려워지고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청국 관원 가원계(賈元桂)도 두려워 떨면서 손에 나침반을 들고 단지 통사(通詞)주 565
편자주 565)
조선시대에 통역을 맡았던 이속(吏屬)으로 사역원(司譯院)에 소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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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흥조(權興祚)을 불러서, “어느 쪽이 동남쪽인가?” 하며 끝임없이 물어보았다. 통사도 입과 입술이 마를 정도로 초조하여 중군 최두형(崔斗衡)을 향하여 말하기를, “영감! 영감! 내가 어찌 해야 합니까?” 하였다. 많은 인부들은 다만 통사가 앞에 가는 것만 믿고 따라가는데 통사도 걸음걸음이 힘들고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이 때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길을 찾는다는 것은 감히 바랄 수 없고 다만 원하는 바는 수목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불을 때며 밤을 넘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을 닦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 그루의 나무도 보이지 않으니 진실로 막다른 골목이었다. 각자 하늘에 절규하고 아버지를 부를 뿐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동남쪽에서 하늘빛이 잠깐 열려 몇 개의 봉우리가 반 쯤 드러났다. 길을 잃은 지 반나절이 지나 비로소 산의 모습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기뻐하고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를 살렸는가, 산신령이 우리를 살렸는가?” 하며 말끝마다 감탄하였다. 비로소 생기가 돌아 통사로 하여금 방향을 분간하게 하니 말하기를, “이제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하여 마침내 수봉(竪峯)을 향하여 내려갔다. 눈이 깊어 거의 무릎 위까지 찼으나 살 길을 찾았기 때문에 괴로움을 알지 못하였다. 이리저리 찾아서 수봉 엽막에 도착하였는데 날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
 이 날 백여 리를 갔다. 사람과 말이 모두 허기졌는데도 모두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바로 왕령(王靈)주 566
편자주 566)
왕조의 위덕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조선 역대 선왕들의 신령한 도움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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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켜주신 것이다. 내가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눈은 빈 강에 가득차고 달은 하늘에 가득한데  雪滿空江月滿天
 표연히 말을 타고 백두산 마루에 섰도다    飄然立馬白山巓
 사람의 힘으로 이 곳에 올 수 없으니      殆非人力能來此
 오로지 왕령에 의지하여 앞을 향해 갔네    全仗王靈直向前
 영토 이목(李牧)주 567
편자주 567)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 나라의 북쪽 변방을 지켰던 명장. 그가 흉노(匈奴)와 진(秦) 나라를 칠 때에 그의 위엄에 눌려 적의 군마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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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한 이 없고          拓地于今無李牧
 근원 찾는 장건(張騫)주 568
편자주 568)
한 무제(漢武帝) 때 서방 대월지국(大月氏國)과 동맹을 촉진할 목적으로 사신으로 떠나 서역(西域)을 두루 돌아다니며 동서(東西) 교역의 길을 열었다. 봉호는 박망후(博望候)이며 그가 황하의 근원지를 밝히려고 뗏목을 타고 가다가 하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왔다는 전설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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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말했지        窮源從古說張騫
 임금 계신 궁전은 이 밤 얼마나 추울까    玉樓是夜寒何似
 머리를 돌리니 저편 궁궐이 아득하구나    回首觚稜杳一邊
 
 또 시 한 수를 지어서 신의 도움에 감사를 드렸다.
 
 짙은 안개와 구름이 만겹으로 덮으니    密霧陰雲鎖萬重
 깊은 산에 날은 저물고 길 잃어 버렸네    深山日暮失歸蹤
 하늘 문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열리니    天門忽闢東南角
 여러 봉우리 드러나서 길을 밝게 가리키네  指路分明露數峯
 
 막사가 매우 좁고 춥기가 노천이나 다름없어 불을 때고 밤을 보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신무충(申武忠) 엽막에 도착하였다. 죽 거쳐 지나는 길이 평탄하였는데 이를 천평지방(天坪地方)이라 하였다. 여기가 바로 백두산 전면의 명당자리였는데, 너비가 거의 100리가 되었고 수목이 울창하였다. 만일 거칠고 춥고 서리가 일찍 내리는 땅이 아니라면 하나의 큰 도시를 건설할 만한 곳이었다.
 산 속의 여러 갈래의 물이 끊기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하는데,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대개 이 산의 많은 물이 모두 돌 밑으로 흐른다는 말은 오히려 거짓말이 아닌가 보다. 이 엽막은 중국인(彼人) 동씨(董氏) 성을 가진 사람의 막사였는데 지어진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엽막에 비하여 상당히 정밀하고 깨끗하여 휴식을 취할 만하였다.

  • 편자주 556)
    1712년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때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석퇴(石堆), 토퇴(土堆), 목책(木柵)을 세웠는데, 여기서 이중하가 말한 토퇴가 당시 세운 토퇴를 가리키는 것 같다.바로가기
  • 편자주 557)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다.바로가기
  • 편자주 558)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이다.바로가기
  • 편자주 559)
    중국 상(商) 태정제(太丁帝)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성(姓)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余). 기(箕, 지금의 山西 太谷)에 봉(封)해져서 기자(箕子)라고 한다.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간언(諫言)하다 유폐(幽閉)되었다. 공자(孔子)는 기자를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함께 상(商)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평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기자가 조선에서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를 세워(箕子東來說) 동방에 교화를 이룩하였다는 사실을 믿어서 단군보다는 기자를 더 존숭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560)
    서역(西域)을 정벌한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이르러서 한 나라의 국경선을 획정하기 위해 세운 구리 기둥이다.바로가기
  • 편자주 561)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지방(東北地方 : 滿洲)과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이다. 길이는 790km, 유역 면적은 3만 1,739km2, 가항 거리는 698k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水色如鴨綠]”고 하여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나왔다고 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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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자주 563)
    청(淸)대의 관명(官名)이다. 원래 만주어(滿洲語)로 사자관(寫字官)을 뜻하며, 청(淸)나라 이후 각 아문(衙門)에 두어 번역을 담당하게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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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과 통역을 맡아보던 사람. 통사관(通事官).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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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 통역을 맡았던 이속(吏屬)으로 사역원(司譯院)에 소속되어 있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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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조의 위덕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조선 역대 선왕들의 신령한 도움을 의미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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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 나라의 북쪽 변방을 지켰던 명장. 그가 흉노(匈奴)와 진(秦) 나라를 칠 때에 그의 위엄에 눌려 적의 군마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다.바로가기
  • 편자주 568)
    한 무제(漢武帝) 때 서방 대월지국(大月氏國)과 동맹을 촉진할 목적으로 사신으로 떠나 서역(西域)을 두루 돌아다니며 동서(東西) 교역의 길을 열었다. 봉호는 박망후(博望候)이며 그가 황하의 근원지를 밝히려고 뗏목을 타고 가다가 하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왔다는 전설도 회자되고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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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비가 위치한 지역을 둘러본 후 수봉(竪峯)으로 내려옴 자료번호 : gd.k_0001_0720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