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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등록

청국에서 파견된 진영(秦煐)·덕옥(德玉)·가원계(賈元桂)가 감계사 이중하(李重夏)에게 빨리 회동할 것을 요청

  • 발신자
    秦煐, 德玉, 賈元桂
  • 수신자
    李重夏
  • 발송일
    1885년 9월 18일(음)(乙酉九月十八日)
□ 대청국(大淸國) 흠가오품함상대화령주파독리길림조선상무회판변방영무처(欽加五品銜賞戴花翎奏派督理吉林朝鮮商務會辦邊防營務處) 겸(兼) 도문강감계사의분발보용현정당(圖們江勘界事宜分發補用縣正堂) 진영(秦煐), 흠가이품함상대화령혼춘좌익협령(欽加二品銜賞戴花翎琿春左翼協領) 겸(兼) 이변무교섭승판처(理邊務交涉承辦處) 겸(兼) 도문강감계사의박기파도로(圖們江勘界事宜博奇巴圖魯) 덕옥(德玉), 위판혼춘초간총국(委辦琿春招墾總局) 겸(兼) 도문강감계사의오품정대부경력함후선종구(圖們江勘界事宜五品頂戴府經歷銜候選從九) 가원계(賈元桂)가 조회(照會)하는 일주 482
편자주 482)
『조회등초(照會謄抄)』(규장각 소장 마이크로필름 M/F75-103-19-K)에는 제목 앞에 문서의 성격을 나타내는 ‘청국 관원[華員]의 조회[照會]’라는 제목이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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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무국(商務局), 승판처(承辦處), 초간국(招墾局)을 통해 독판장군(督辦將軍), 방판부수(幫辦副帥)의 지시를 받들어 파견되어 조선국왕이 파견한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와 회동하고 나란히 도문강(圖們江) 교계지방(交界地方)에 나아갔는데 마침 감계지(勘界址)는 이미 방판부수를 통해 함경북도(咸鏡北道)에 조회하였고, 현재 본국처 등은 이미 본월(9월-역자주) 16일에 회령부(會寧府) 대안(對岸)인 화룡(和龍) 계곡 지역에 나란히 모여 신설한 상무국(商務局) 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응당 부사께서는 신속히 오셔서 회동하여 상의하고 감판(勘辦)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무산(茂山)에서 출발하여 회령부에 도착하실 때에는 즉시 회령부(會寧府)에서 대화하거나 화룡 계곡에서도 좋겠습니다. 부사께선 몇일에 출발하는지, 아울러 몇일에 도착할 수 있는지를 모두 먼저 조복(照覆)하기를 바라며, 별도의 문서로 함경도에 조회를 대신하는 것 이외에 마땅히 글을 갖추어 조회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귀 부사께 조회하니 번거롭더라도 조회를 살피시기를 요청하며, 문서를 보고 절실하게 시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안변주 483
편자주 483)
남서부는 마식령산맥과 태백산맥이 추가령(楸哥嶺, 752m)에서 서로 합쳐져 있어 지세가 높고 험하며, 백암산(白巖山, 1,220m)·저두산(猪頭山, 1,340m)·추애산(楸愛山, 1,530m)·풍류산(風流山, 1,024m)·황룡산(黃龍山, 1,268m) 등이 솟아 있다. 풍류산 동쪽의 안부(鞍部)에는 철령(鐵嶺, 685m)이 있어 예로부터 천연의 요새로 유명하며, 남북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마식령산맥과 태백산맥이 합쳐지는 곳에는 남북으로 단층곡인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이 발달했으며, 곳곳에 현무암이 분출되어 대지(臺地)를 이룬다. 이곳에서 발원한 남대천(南大川)이 북류하면서 상류에는 삼방(三防) 같은 기승지를 만들고, 중·하류에는 비교적 넓은 안변평야를 전개시키며 영흥만(永興灣)으로 들어간다. 또한 노인치(老人峙)에서 발원해 북동류하는 학천(鶴川)은 배화면에서 작은 지류들을 합치며 유역에 비옥한 충적평야를 전개시키고 영흥만으로 들어간다.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봉산리에서 청동기시대 포함층이 확인되었으므로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이 군에 사람이 거주했음이 확실하다. 남옥저에 속해 있다가 56년(태조왕 4) 태조왕의 정복으로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고구려 때 비열홀군(比列忽郡) 또는 천성군(淺城郡)이라고 하였다. 556년(진흥왕 17) 진흥왕이 이곳을 점령해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어 통치했으며, 757년(경덕왕 16) 삭정군(朔庭郡)으로 바꾸었다.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자 이곳의 골암성(結巖城)에 웅거하고 있던 윤선(尹瑄)이 내부하였다. 이에 동북경 방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금필(庾黔弼)을 이곳에 파견해 발해시대부터 이 방면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회유 또는 토벌하며 이곳을 다시 고려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골암진을 설치해 등주(登州)라 칭하고 동북경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다.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 안변도호부로 고쳤다.
 고종 때 정평(定平) 이남의 여러 성이 몽골병의 침공을 입어 이곳의 읍치를 양주(襄州)로 옮겼으며, 재차 간성(杆城)으로 옮겼다가 1298년(충렬왕 24) 본성(本城)을 돌려받았다. 1403년(태종 3) 조사의(趙思義)의 난으로 감무(監務)로 강등되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32년(세종 14)에 호구는 1,030호, 3,997명이었다. 세조 때 진이 설치되었고 1471년(성종 2)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509년(중종 4) 다시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침공해 이 군도 유린당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의 일부인 몽골병이 함경도를 거쳐 철수했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당시 방리(坊里)는 세청사(世淸社) 등 13사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6,216호, 3만5503명이었다.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안변읍지』에는 역시 13사에 호구 5,216호, 3만2038명으로 인구가 감소하였다. 1895년 5월 부·군제를 실시할 때 함흥부 안변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고칠 때 함경남도 안변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은 안변 등 7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군청 소재지는 안변면 문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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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주 484
편자주 484)
『조회등초(照會謄抄)』에는 ‘조선국 정3품 통정대부 전 예조참의 행안변도호부사 병마절제사 토문감계사 이(李)’라고 전 관직명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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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하에게 조회(照會)주 485
편자주 485)
상위 관청에서 아래 관청에 공문을 송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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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광서(光緖) 11년(1885, 고종 22) 9월 18일

  • 편자주 482)
    『조회등초(照會謄抄)』(규장각 소장 마이크로필름 M/F75-103-19-K)에는 제목 앞에 문서의 성격을 나타내는 ‘청국 관원[華員]의 조회[照會]’라는 제목이 삽입되어 있다.바로가기
  • 편자주 483)
    남서부는 마식령산맥과 태백산맥이 추가령(楸哥嶺, 752m)에서 서로 합쳐져 있어 지세가 높고 험하며, 백암산(白巖山, 1,220m)·저두산(猪頭山, 1,340m)·추애산(楸愛山, 1,530m)·풍류산(風流山, 1,024m)·황룡산(黃龍山, 1,268m) 등이 솟아 있다. 풍류산 동쪽의 안부(鞍部)에는 철령(鐵嶺, 685m)이 있어 예로부터 천연의 요새로 유명하며, 남북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마식령산맥과 태백산맥이 합쳐지는 곳에는 남북으로 단층곡인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이 발달했으며, 곳곳에 현무암이 분출되어 대지(臺地)를 이룬다. 이곳에서 발원한 남대천(南大川)이 북류하면서 상류에는 삼방(三防) 같은 기승지를 만들고, 중·하류에는 비교적 넓은 안변평야를 전개시키며 영흥만(永興灣)으로 들어간다. 또한 노인치(老人峙)에서 발원해 북동류하는 학천(鶴川)은 배화면에서 작은 지류들을 합치며 유역에 비옥한 충적평야를 전개시키고 영흥만으로 들어간다.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봉산리에서 청동기시대 포함층이 확인되었으므로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이 군에 사람이 거주했음이 확실하다. 남옥저에 속해 있다가 56년(태조왕 4) 태조왕의 정복으로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고구려 때 비열홀군(比列忽郡) 또는 천성군(淺城郡)이라고 하였다. 556년(진흥왕 17) 진흥왕이 이곳을 점령해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어 통치했으며, 757년(경덕왕 16) 삭정군(朔庭郡)으로 바꾸었다.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자 이곳의 골암성(結巖城)에 웅거하고 있던 윤선(尹瑄)이 내부하였다. 이에 동북경 방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금필(庾黔弼)을 이곳에 파견해 발해시대부터 이 방면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회유 또는 토벌하며 이곳을 다시 고려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골암진을 설치해 등주(登州)라 칭하고 동북경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다.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 안변도호부로 고쳤다.
     고종 때 정평(定平) 이남의 여러 성이 몽골병의 침공을 입어 이곳의 읍치를 양주(襄州)로 옮겼으며, 재차 간성(杆城)으로 옮겼다가 1298년(충렬왕 24) 본성(本城)을 돌려받았다. 1403년(태종 3) 조사의(趙思義)의 난으로 감무(監務)로 강등되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32년(세종 14)에 호구는 1,030호, 3,997명이었다. 세조 때 진이 설치되었고 1471년(성종 2)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509년(중종 4) 다시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침공해 이 군도 유린당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의 일부인 몽골병이 함경도를 거쳐 철수했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당시 방리(坊里)는 세청사(世淸社) 등 13사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6,216호, 3만5503명이었다.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안변읍지』에는 역시 13사에 호구 5,216호, 3만2038명으로 인구가 감소하였다. 1895년 5월 부·군제를 실시할 때 함흥부 안변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고칠 때 함경남도 안변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은 안변 등 7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군청 소재지는 안변면 문내리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484)
    『조회등초(照會謄抄)』에는 ‘조선국 정3품 통정대부 전 예조참의 행안변도호부사 병마절제사 토문감계사 이(李)’라고 전 관직명이 기재되어 있다.바로가기
  • 편자주 485)
    상위 관청에서 아래 관청에 공문을 송달하는 것을 말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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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에서 파견된 진영(秦煐)·덕옥(德玉)·가원계(賈元桂)가 감계사 이중하(李重夏)에게 빨리 회동할 것을 요청 자료번호 : gd.k_0001_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