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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바람을 일으킨 조선통신사

 
 

◆ 조선통신사를 보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를 도쿠가와 막부 또는 수도인 에도(오늘날의 도쿄)의 이름을 따 에도 막부라고 합니다. 막부란 무사들이 차지한 정권을 말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임진왜란으로 틀어진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사절단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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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정부를 대표하여 일정한 임무를 띠고 외국에 파견되는 사람들

을 다시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은 대규모의 문화 사절단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믿음을 나눈다’라는 의미에서 ‘통신사(通信使) [주019]
각주 019통신사(通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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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고도 한다. 조선이 1403년(태종 3)에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그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 장군도 책봉을 받자, 중국·조선·일본 간에는 사대·교린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대등한 처지의 교린 국가가 되고, 조선 국왕과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일본국왕으로 칭함)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신사란 용어는 대등한 국가간에 신의(信義)를 통(通)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과의 사절 왕래가 많아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에 달하였고,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이 71회에 달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의 호칭을 갖지는 않았으며, 이 중 장군에게 간 것은 8회 뿐이다. 예를 들면 명칭도 회례사·회례관·보빙사·경차관·통신사·통신관 등 일정치 않았고, 목적과 편성도 다양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조건과 목적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장군(국왕)에게 파견된다. 둘째, 일본 국왕의 길흉 또는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을 갖는다. 셋째,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국서와 예단을 지참한다. 넷째, 사절단은 중앙의 고위관리인 삼사 이하로 편성한다. 다섯째, 국왕사의 칭호도 갖는다.
〈출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라고 하였습니다.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역사관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의 약 200여 년간 12번에 걸쳐 일본에 보내졌습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중 국서 부분(ⓒ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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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행렬도 중 국서 부분(ⓒ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9권)


 
 
생각열기
부산문화재단, 시모노세키 바칸 마츠리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문화사업

 

 ○ 조선통신사는 무엇인가요? 통신사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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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후 일본에 보내진 문화 사절단입니다. 통신사라는 이름에는 ‘믿음을 나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조선통신사는 총 몇 번에 걸쳐 보내졌나요?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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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부터 1811년까지의 약 200여 년간 12번에 걸쳐 일본에 보내졌습니다.

 

조선통신사를 보낸 이유는?

 

조선은 7년간의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엉망이 되고, 백성들의 생활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다 중국의 청나라가 강성해지자 남쪽의 일본과 안정적인 관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통신사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최초의 3회는 일본의 사절단 파견에 대한 답례의 표시로 보낸 사절단이었습니다. 통신사들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한편, 일본은 새로운 지배 세력인 도쿠가와 막부가 자신들의 권위와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장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조선통신사 행렬과 구경을 나온 일본인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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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행렬과 구경을 나온 일본인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9권)


 

 ○ 일본이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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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새로운 지배 세력인 도쿠가와 막부가 자신들의 권위와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조선통신사의 여행길을 따라가요

 

조선통신사는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이었습니다. 통신사를 인솔한 정사와 부사, 종사관을 비롯해 그림을 그리는 화원, 의술을 펼치는 의원, 통역을 담당한 역관,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의 수도 한성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까지 왕복 약 3,000㎞의 긴 여행길이었습니다. 반 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사절단이 도착하면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거리는 북적거렸습니다. 조선 사신들이 지은 시나 글을 받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서기도 했습니다. 긴 여행길에 통신사들은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시를 써 주고받았으며, 여러 가지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곤 했답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국가의 귀한 손님(국빈)으로 예를 갖추어 대우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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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의 여행길


 

 ○ 조선통신사의 여행길을 따라가 보세요.
어디에서 출발했나요? 또 어디 어디를 거쳐 갔는지 주요 도시 몇 곳을 써봅시다.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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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에서 출발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 거쳐 도쿄까지 갔습니다.

 

 ○ 조선통신사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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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단이 도착하면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거리는 북적거렸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국가의 귀한 손님(국빈)으로 예를 갖추어 대우했습니다.

 

조선통신사는 무슨 일을 했나?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역사관는 조선 국왕의 외교 문서를 전달하는 사신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의술, 도자기 기술, 유학 등 조선의 선진 문물을 전하는 문화 사절단 역할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군사적인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이유가 이전에 조선의 군사적으로 중요한 비밀을 일본 사신이나 첩자들이 빼 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본 사절단들이 오면 왜관(일본인이 조선에서 무역을 하던 무역처)에만 머물도록 하여 조선의 정보가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반대로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상황을 살피고, 군사적 정보를 얻어오기도 하였습니다.

 

 ○ 조선통신사는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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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의 외교 문서를 전달하는 사신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의술, 도자기 기술, 유학 등 조선의 선진 문물을 전하는 문화 사절단 역할도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을 열광시킨 한 마상재

 

마상재 [주026]
각주 026마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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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구처럼 말 타는 기술을 닦기 위한 군사훈련 종목이기도 했으며, 흔히 말놀음 ·곡마·말광대라고 불렀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행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362년 7월에 이성계가 원군과 싸울 때 적장이 찌르는 창을 다음에 설명하는 마상재의 다섯 번 째 동작으로 피했다고 하므로, 고려 때 이를 행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1635년(인조 13)에는 일본 정부의 간청에 의해 마상재에 뛰어난 장효인과 김정이 사절단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재주를 보였으며, 그 뒤로는 사절단에 반드시 마상재인이 동행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마상재 재주에 경탄한 나머지 이것을 모방하여 다이헤이본류라는 승마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마상재에는 다음의 여섯 가지 종목이 있었다. 말 위에 선 채로 달리는 동작, 말 등 넘나들기, 말 위에서 거꾸로 서는 동작, 말 위에 가로눕는 동작, 말에 몸 숨기기, 뒤로 눕는 동작이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말 타는 기술로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입니다. 말 타는 기술을 익히기 위한 군사 훈련 종목이기도 합니다.
마상재는 일본 막부의 요청에 의해 통신사절단에 포함되었습니다. 무예를 중시했던 일본인들은 마상재는 보고 열광하였다고 합니다. 말 위에 선 채로 달리기, 말 등 넘나들기 등 갖가지 재주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감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와 비슷한 ‘다이헤이본류’라는 승마의 한 종목을 만들기도 하였답니다.

마상재를 구경하고 있는 일본 무사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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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상재를 구경하고 있는 일본 무사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9권)


 

주 019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고도 한다. 조선이 1403년(태종 3)에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그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 장군도 책봉을 받자, 중국·조선·일본 간에는 사대·교린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대등한 처지의 교린 국가가 되고, 조선 국왕과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일본국왕으로 칭함)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신사란 용어는 대등한 국가간에 신의(信義)를 통(通)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과의 사절 왕래가 많아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에 달하였고,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이 71회에 달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의 호칭을 갖지는 않았으며, 이 중 장군에게 간 것은 8회 뿐이다. 예를 들면 명칭도 회례사·회례관·보빙사·경차관·통신사·통신관 등 일정치 않았고, 목적과 편성도 다양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조건과 목적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장군(국왕)에게 파견된다. 둘째, 일본 국왕의 길흉 또는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을 갖는다. 셋째,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국서와 예단을 지참한다. 넷째, 사절단은 중앙의 고위관리인 삼사 이하로 편성한다. 다섯째, 국왕사의 칭호도 갖는다.
〈출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주 026
격구처럼 말 타는 기술을 닦기 위한 군사훈련 종목이기도 했으며, 흔히 말놀음 ·곡마·말광대라고 불렀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행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362년 7월에 이성계가 원군과 싸울 때 적장이 찌르는 창을 다음에 설명하는 마상재의 다섯 번 째 동작으로 피했다고 하므로, 고려 때 이를 행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1635년(인조 13)에는 일본 정부의 간청에 의해 마상재에 뛰어난 장효인과 김정이 사절단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재주를 보였으며, 그 뒤로는 사절단에 반드시 마상재인이 동행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마상재 재주에 경탄한 나머지 이것을 모방하여 다이헤이본류라는 승마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마상재에는 다음의 여섯 가지 종목이 있었다. 말 위에 선 채로 달리는 동작, 말 등 넘나들기, 말 위에서 거꾸로 서는 동작, 말 위에 가로눕는 동작, 말에 몸 숨기기, 뒤로 눕는 동작이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사절단
국가나 정부를 대표하여 일정한 임무를 띠고 외국에 파견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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