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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전후 처리와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

6-1단원 1차시
  • 저필자
    설혜민(부천북고 역사 교사)

전후 처리와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
일본의 패전
전후 평화 체제의 성립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

전쟁 초기에는 영·미를 주축으로 하는 연합국이 독·이·일에 고전
1942년부터 전쟁 주도권이 연합국으로 넘어감
→ 몇 차례 국제 회담을 통해 전후 처리 논의
  • 카이로 회담(1943)
  • 얄타 회담(1945)
  • 포츠담 회담(1945)

국제 회담을 통해 전후 처리 논의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과 국제 회담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선언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과 국제 회담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에서의 전쟁과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유럽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유럽전선의 경우 1942년 가을경부터 연합군이 반격하고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이후,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선의 경우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과 이듬 해 2월 과달카날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것을 고비로 두 지역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주도권을 연합군이 장악하였다. 국제사회는 이즈음부터 세계대전을 어떻게 마무리하며,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
연합국이 추축국의 공격에 본격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8월 대서양헌장 때부터였다. 대서양헌장 후 미국과 영국은 독일의 침략을 받은 소련을 원조하였다. 1942년 1월 26개 연합국은 워싱턴에 모여 대서양헌장을 지지하고 향후 공동으로 행동할 것을 선언한 ‘연합국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연합국이 전쟁의 전체적인 진행방향,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처리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는 사실상 1943년 들어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연합국은 카이로회담에서 구체적인 대일 처리방침을 처음으로 확정하였다. 즉, 적절한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한반도에 대한 전후처리의 기본방향이 처음으로 결정한 것이다. 또 카이로회담에서는 미․영․중 3국이 일본의 침략을 응징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때와 달리 전승국의 영토를 확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장악한 태평양 일대의 섬들도 전부 반환받고, 남양군도, 만주, 대만, 펑후제도 역시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방침은 테헤란회담 도중에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공식 제안하였고 두 나라 정상간 비밀회의에서 참여조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에 따라 루스벨트와 처칠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본토를 향한 공격방향을 중국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태평양으로부터 북상하기로 전쟁전략을 확정하였다. 또한 소련군은 서부전선에서 미군과 영국군이 동진하면서 동부 전선에서의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기자 1944년 7월경부터 본격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테헤란회담은 카이로회담과 달리 유럽에서의 전쟁전략과 전후처리를 둘러싸고 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즉 회담에서 미․영․소의 수뇌가 미국과 영국 등의 북부 프랑스 상륙작전, 유럽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작전을 벌이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과 영국군은 1944년 4월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성공한 이후 동진하였고, 이즈음 우크라이나에서 서진하고 있던 소련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테헤란회담에서는 독일의 전후처리문제와 동유럽문제에 대해 3국 수뇌가 서로의 의중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많은 시간을 토론했지만 결정된 사항이 없었다. 이 문제는 1945년 2월 미, 영, 소의 수뇌가 만난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다.
얄타회담이 열린 시점은 이미 전황이 연합국측으로 기울어 있었고, 독일과 일본이 전세를 뒤집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독일과 일본의 항복시점이었다. 따라서 연합국은 전후처리에 관해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상황이었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은 독일이 항복한 날로부터 2~3개월 이내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여한다는 합의사항을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소련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개입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소련은 참전 대가로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여 잃은 영토 즉, 사할린 섬, 쿠릴열도의 섬들을 되돌려 받기로 하였다. 연합국이 외몽골의 독립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스탈린으로서는 과거 러시아의 지배권을 넘는 요구를 무리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미국으로서는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전에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으므로 관동군을 견제하는데 소련군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보아 이렇게 타협한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 전후 질서를 운영하는 방향에 대한 이와 같은 합의에서 한반도는 공백지대였다. 한반도 문제는 전후처리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카이로회담 이후 논의되지 못하고 여전히 공백지대의 공간처럼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마무리하는데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마무리한 회의가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발표된 포츠담선언(7.26)에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일본의 영토 확정과 비무장, 민주주의 이행 등을 결정함과 더불어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큐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라고 명시하여 한국의 독립방침은 다시 확인되었다.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카이로 회담(1943.11)

  • 시기: 1943년 9월 이탈리아 항복 직후
  • 참가국 : 미ㆍ영ㆍ중
  • 논의 내용
    •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 요구
    • 일본의 식민지를 독립시키거나 반환하기로 결정
    •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 (한반도에 관한 전후 처리의 기본 방향이‘독립’으로 가닥을 잡았음을 밝힌 첫 문건)
  • 의의 : 아시아ㆍ태평양전쟁의 종결 방식을 처음으로 합의

일본에 무조건 항복 요구
일본의 식민지를 독립시키거나 반환하기로 결정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과 국제 회담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선언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과 국제 회담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에서의 전쟁과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유럽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유럽전선의 경우 1942년 가을경부터 연합군이 반격하고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이후,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선의 경우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과 이듬 해 2월 과달카날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것을 고비로 두 지역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주도권을 연합군이 장악하였다. 국제사회는 이즈음부터 세계대전을 어떻게 마무리하며,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
연합국이 추축국의 공격에 본격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8월 대서양헌장 때부터였다. 대서양헌장 후 미국과 영국은 독일의 침략을 받은 소련을 원조하였다. 1942년 1월 26개 연합국은 워싱턴에 모여 대서양헌장을 지지하고 향후 공동으로 행동할 것을 선언한 ‘연합국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연합국이 전쟁의 전체적인 진행방향,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처리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는 사실상 1943년 들어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연합국은 카이로회담에서 구체적인 대일 처리방침을 처음으로 확정하였다. 즉, 적절한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한반도에 대한 전후처리의 기본방향이 처음으로 결정한 것이다. 또 카이로회담에서는 미․영․중 3국이 일본의 침략을 응징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때와 달리 전승국의 영토를 확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장악한 태평양 일대의 섬들도 전부 반환받고, 남양군도, 만주, 대만, 펑후제도 역시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방침은 테헤란회담 도중에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공식 제안하였고 두 나라 정상간 비밀회의에서 참여조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에 따라 루스벨트와 처칠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본토를 향한 공격방향을 중국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태평양으로부터 북상하기로 전쟁전략을 확정하였다. 또한 소련군은 서부전선에서 미군과 영국군이 동진하면서 동부 전선에서의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기자 1944년 7월경부터 본격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테헤란회담은 카이로회담과 달리 유럽에서의 전쟁전략과 전후처리를 둘러싸고 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즉 회담에서 미․영․소의 수뇌가 미국과 영국 등의 북부 프랑스 상륙작전, 유럽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작전을 벌이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과 영국군은 1944년 4월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성공한 이후 동진하였고, 이즈음 우크라이나에서 서진하고 있던 소련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테헤란회담에서는 독일의 전후처리문제와 동유럽문제에 대해 3국 수뇌가 서로의 의중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많은 시간을 토론했지만 결정된 사항이 없었다. 이 문제는 1945년 2월 미, 영, 소의 수뇌가 만난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다.
얄타회담이 열린 시점은 이미 전황이 연합국측으로 기울어 있었고, 독일과 일본이 전세를 뒤집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독일과 일본의 항복시점이었다. 따라서 연합국은 전후처리에 관해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상황이었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은 독일이 항복한 날로부터 2~3개월 이내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여한다는 합의사항을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소련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개입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소련은 참전 대가로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여 잃은 영토 즉, 사할린 섬, 쿠릴열도의 섬들을 되돌려 받기로 하였다. 연합국이 외몽골의 독립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스탈린으로서는 과거 러시아의 지배권을 넘는 요구를 무리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미국으로서는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전에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으므로 관동군을 견제하는데 소련군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보아 이렇게 타협한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 전후 질서를 운영하는 방향에 대한 이와 같은 합의에서 한반도는 공백지대였다. 한반도 문제는 전후처리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카이로회담 이후 논의되지 못하고 여전히 공백지대의 공간처럼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마무리하는데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마무리한 회의가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발표된 포츠담선언(7.26)에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일본의 영토 확정과 비무장, 민주주의 이행 등을 결정함과 더불어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큐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라고 명시하여 한국의 독립방침은 다시 확인되었다.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주 315
각주 315) 카이로 회담
카이로선언
루스벨트 대통령, 장제스 대원수, 처칠 수상은 .. 아래의 일반적 성명을 발표한다.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국으로부터 제1차 세계전쟁의 개시 이후에 있어 일본국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에 있어서의 일부의 도서를 일본국으로부터 박탈할 것과..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정..
-조선경제연보,1948-
사진자료 링크주소사진자료 링크주소카이로선언
-조선경제연보,1948-카이로선언카이로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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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1945.2)

  • 시기 :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시 된 시기
  • 참가국 : 미·영·소
  • 논의 내용
    • 독일을 미·소·프·영의 4국이 분할 점령
    • 소련의 대일 참전에 대한 비밀 협정 체결
  • 의의 : 유럽과 동아시아에서의 전쟁 수행과 전후 처리에 관한 주요 사항 합의

소련의 대일 참전에 대한 비밀 협정 체결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과 국제 회담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선언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과 국제 회담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에서의 전쟁과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유럽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유럽전선의 경우 1942년 가을경부터 연합군이 반격하고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이후,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선의 경우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과 이듬 해 2월 과달카날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것을 고비로 두 지역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주도권을 연합군이 장악하였다. 국제사회는 이즈음부터 세계대전을 어떻게 마무리하며,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
연합국이 추축국의 공격에 본격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8월 대서양헌장 때부터였다. 대서양헌장 후 미국과 영국은 독일의 침략을 받은 소련을 원조하였다. 1942년 1월 26개 연합국은 워싱턴에 모여 대서양헌장을 지지하고 향후 공동으로 행동할 것을 선언한 ‘연합국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연합국이 전쟁의 전체적인 진행방향,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처리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는 사실상 1943년 들어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연합국은 카이로회담에서 구체적인 대일 처리방침을 처음으로 확정하였다. 즉, 적절한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한반도에 대한 전후처리의 기본방향이 처음으로 결정한 것이다. 또 카이로회담에서는 미․영․중 3국이 일본의 침략을 응징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때와 달리 전승국의 영토를 확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장악한 태평양 일대의 섬들도 전부 반환받고, 남양군도, 만주, 대만, 펑후제도 역시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방침은 테헤란회담 도중에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공식 제안하였고 두 나라 정상간 비밀회의에서 참여조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에 따라 루스벨트와 처칠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본토를 향한 공격방향을 중국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태평양으로부터 북상하기로 전쟁전략을 확정하였다. 또한 소련군은 서부전선에서 미군과 영국군이 동진하면서 동부 전선에서의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기자 1944년 7월경부터 본격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테헤란회담은 카이로회담과 달리 유럽에서의 전쟁전략과 전후처리를 둘러싸고 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즉 회담에서 미․영․소의 수뇌가 미국과 영국 등의 북부 프랑스 상륙작전, 유럽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작전을 벌이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과 영국군은 1944년 4월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성공한 이후 동진하였고, 이즈음 우크라이나에서 서진하고 있던 소련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테헤란회담에서는 독일의 전후처리문제와 동유럽문제에 대해 3국 수뇌가 서로의 의중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많은 시간을 토론했지만 결정된 사항이 없었다. 이 문제는 1945년 2월 미, 영, 소의 수뇌가 만난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다.
얄타회담이 열린 시점은 이미 전황이 연합국측으로 기울어 있었고, 독일과 일본이 전세를 뒤집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독일과 일본의 항복시점이었다. 따라서 연합국은 전후처리에 관해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상황이었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은 독일이 항복한 날로부터 2~3개월 이내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여한다는 합의사항을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소련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개입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소련은 참전 대가로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여 잃은 영토 즉, 사할린 섬, 쿠릴열도의 섬들을 되돌려 받기로 하였다. 연합국이 외몽골의 독립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스탈린으로서는 과거 러시아의 지배권을 넘는 요구를 무리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미국으로서는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전에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으므로 관동군을 견제하는데 소련군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보아 이렇게 타협한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 전후 질서를 운영하는 방향에 대한 이와 같은 합의에서 한반도는 공백지대였다. 한반도 문제는 전후처리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카이로회담 이후 논의되지 못하고 여전히 공백지대의 공간처럼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마무리하는데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마무리한 회의가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발표된 포츠담선언(7.26)에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일본의 영토 확정과 비무장, 민주주의 이행 등을 결정함과 더불어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큐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라고 명시하여 한국의 독립방침은 다시 확인되었다.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주 316
각주 316) 얄타 회담
얄타 선언

소ㆍ미ㆍ영 3국의 지도자는 .. 소련이 다음 조건에 의하여 연합국에 참가하며 대일전에 참가할 것을 협정하였다.
1.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의 현상을 유지한다.
2. 1904년 일본의 … 공격에 의하여 침해한 소련의 제권리를 회복한다.
1) 사할린-남부 및 이에 인접하는 일체의 섬들을 소련에 반환한다.
3. 쿠릴-열도를 소련에 인도한다.
소련은 … 중국 국민정부와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한다.
-『시사자료 광복30년사』, 세문사, 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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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자료 광복30년사』, 세문사, 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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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회담(1945.7)

  • 시기 : 독일의 항복 후
  • 논의 내용 : 독일에 대한 처리 문제, 일본에 대한 전쟁 수행 방침 → 일본에 관한 연합국의 결정은 포츠담 선언으로 발표
    - 카이로 선언의 이행
    - 일본 영토를 열도와 작은 섬으로 국한
    -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 권고

카이로 선언의 이행
일본의 무조건 항복 권고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과 국제 회담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선언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과 국제 회담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에서의 전쟁과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유럽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유럽전선의 경우 1942년 가을경부터 연합군이 반격하고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이후,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선의 경우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과 이듬 해 2월 과달카날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것을 고비로 두 지역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주도권을 연합군이 장악하였다. 국제사회는 이즈음부터 세계대전을 어떻게 마무리하며,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
연합국이 추축국의 공격에 본격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8월 대서양헌장 때부터였다. 대서양헌장 후 미국과 영국은 독일의 침략을 받은 소련을 원조하였다. 1942년 1월 26개 연합국은 워싱턴에 모여 대서양헌장을 지지하고 향후 공동으로 행동할 것을 선언한 ‘연합국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연합국이 전쟁의 전체적인 진행방향,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처리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는 사실상 1943년 들어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연합국은 카이로회담에서 구체적인 대일 처리방침을 처음으로 확정하였다. 즉, 적절한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한반도에 대한 전후처리의 기본방향이 처음으로 결정한 것이다. 또 카이로회담에서는 미․영․중 3국이 일본의 침략을 응징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때와 달리 전승국의 영토를 확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장악한 태평양 일대의 섬들도 전부 반환받고, 남양군도, 만주, 대만, 펑후제도 역시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방침은 테헤란회담 도중에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공식 제안하였고 두 나라 정상간 비밀회의에서 참여조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에 따라 루스벨트와 처칠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본토를 향한 공격방향을 중국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태평양으로부터 북상하기로 전쟁전략을 확정하였다. 또한 소련군은 서부전선에서 미군과 영국군이 동진하면서 동부 전선에서의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기자 1944년 7월경부터 본격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테헤란회담은 카이로회담과 달리 유럽에서의 전쟁전략과 전후처리를 둘러싸고 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즉 회담에서 미․영․소의 수뇌가 미국과 영국 등의 북부 프랑스 상륙작전, 유럽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작전을 벌이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과 영국군은 1944년 4월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성공한 이후 동진하였고, 이즈음 우크라이나에서 서진하고 있던 소련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테헤란회담에서는 독일의 전후처리문제와 동유럽문제에 대해 3국 수뇌가 서로의 의중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많은 시간을 토론했지만 결정된 사항이 없었다. 이 문제는 1945년 2월 미, 영, 소의 수뇌가 만난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다.
얄타회담이 열린 시점은 이미 전황이 연합국측으로 기울어 있었고, 독일과 일본이 전세를 뒤집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독일과 일본의 항복시점이었다. 따라서 연합국은 전후처리에 관해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상황이었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은 독일이 항복한 날로부터 2~3개월 이내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여한다는 합의사항을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소련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개입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소련은 참전 대가로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여 잃은 영토 즉, 사할린 섬, 쿠릴열도의 섬들을 되돌려 받기로 하였다. 연합국이 외몽골의 독립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스탈린으로서는 과거 러시아의 지배권을 넘는 요구를 무리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미국으로서는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전에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으므로 관동군을 견제하는데 소련군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보아 이렇게 타협한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 전후 질서를 운영하는 방향에 대한 이와 같은 합의에서 한반도는 공백지대였다. 한반도 문제는 전후처리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카이로회담 이후 논의되지 못하고 여전히 공백지대의 공간처럼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마무리하는데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마무리한 회의가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발표된 포츠담선언(7.26)에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일본의 영토 확정과 비무장, 민주주의 이행 등을 결정함과 더불어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큐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라고 명시하여 한국의 독립방침은 다시 확인되었다.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주 317
각주 317) 포츠담 회담
포츠담 선언
1. 3대 연합국(미·중·영)은 수억 국민을 대표하여 협의한 결과, 일본에 대하여 지금의 전쟁을 종결할 기회를 줄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2. 미·중·영의 거대한 육·해·공군은 서방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크게 증강하여 일본에 대하여 최종적 타격을 가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사진자료 링크주소사진자료 링크주소포츠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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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패전

연합국의 공습 강화, 일본 상륙 준비
일본의 저항 지속
원자폭탄 투하, 소련 참전 결정
일본의 무조건 항복(포츠담 선언 수용)
일본의 패전
-『동아시아 근현대사』, 우에하라 카즈요시, 옛오늘 - 일본의 무조건 항복(포츠담 선언 수용)일본의 무조건 항복(포츠담 선언 수용)
일본의 패전
1945년 7월 26일 미․영․중에 의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이 선언에는 천황제 존속에 대해서도 원폭사용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8월 6일 미국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거부한 것을 구실로 삼아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고 이어서 9일에는 나가사키에도 투하하였다. 이에 소련은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9일에는 만주 국경을 돌파하였다.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일본 지배층은 천황제 존속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자. 9일부터 이틀간에 걸친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천황의 성단이라는 형태로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고, 14일 국체호지를 조건으로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였다.
-『동아시아 근현대사』, 우에하라 카즈요시, 옛오늘 - 

전후 평화 체제의 수립

정치 : 국제연합(UN) 창설
경제:국가 간 교류 확대
  1. 대서양 헌장(1941.8)
    → 전후 국제연합 창설의 이념적 지표(미,영)
  2.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 군비 축소, 국제 교류와 협력 증진을 담당할 수 있는 국제 평화 기구
  1. 브레튼 우즈 협정
    -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과 국제 통화 기금(IMF) 창설(1945)
    -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1947)
    → 미국 중심의 국제 경제 질서 확립
대서양 헌장(1941.8)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국제 연합의 탄생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 동북아역사재단 -
대서양 헌장(1941.8)
미국과 영국은 대서양헌장을 통해 반추축국 세력, 곧 연합국이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전쟁 목적을 명확히 내세움으로서 서로 결집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대서양헌장은 영토불확대, 영토와 주권에 관한 민족자결, 무역과 자원의 기회균등, 항해의 자유, 군비축소와 국제기구 재건 등을 내용으로 한 선언문으로써 이후 반주축국 세력의 정신적 매개물이었고, ‘일반적 안전보장의 항구적인 제도를 수립’한다고 하여 전후 국제연합 창설의 이념적 지표가 되었다.
-『동아시아사 교과서 집필 안내서』, 동북아 역사재단 -
국제 연합의 탄생
국제연합의 창립은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4.25~6.26) 과정에서 현실화되었다. 당시 51개국이 모여 전쟁을 방지하고 인권 및 민족의 권리를 수호하겠다는 공동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
제1장 목적과 원칙
제2조 1. 국제연합은 모든 회원국의 주권 평등 원칙에 기초한다.
2. 이 헌장의 어떠한 구절도 본질상 한 국가의 내정에 속하는 사안에 간섭할 권한을 국제연합에 부여하지 아니하며, 그런 종류의 사안을 이 헌장에 명시된 절차와 규정에 따라 해결하도록 회원국을 강제하지도 아니한다.…
제7장 평화에 대한 위협과 평화의 파괴 및 침략행위에 관한 조치
제41조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정사항을 집행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연합 회원국에 대해 이러한 조치의 실행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조치에는 경제관계의 완전 또는 부분적 단절 및 철도, 항만, 항공, 우편, 전신, 무선통신 및 기타 교통․통신 수단의 전부 또는 일부의 중단과 외교관계의 단절이 포함될 수 있다.
제42조 안전보장이사회는 제41조에 예고된 조치가 불충분하다고 추정되거나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된 경우,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 또는 회복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행동, 즉 육․해․공군을 동원한 무력 사용에 들어갈 수 있다.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 동북아역사재단 - 
주 318
각주 318) 국제연합(UN)
제1조(목적)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 … 효과적인 집단 조치를 취하며…
제42조(평화 유지) …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데 필요한 육·해·공군의 행동을 취할 수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http://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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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319
각주 319) 브레튼 우즈 협정
브레튼 우즈 체제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에서 45개국이 참가한 통화 금융 회의에서 탄생. 통화 가치 안정, 무역 진흥, 개발 도상국 개발을 목적으로 함.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황폐화된 국가들의 재건 비용을 조달해주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빈곤 상태의 국가들을 구제하기 위한 역할도 수행.

국제 통화 기금(IMF)
회원국의 요청이 있을 때 기술 및 금융 지원 제공. 국제통화협력 육성, 재정상황 안정, 국제무역 촉진 등을 위해 노력.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세계무역기구 체제 이전의 국제 경제 체제. 회원국들간에 관세 등의 무역 장벽을 제거하거나 낮추어 자유무역의 확대를 추구.
http://ko.wikipedia.org/wikihttp://ko.wikipedia.org/wiki브레튼 우즈 체제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
국제 통화 기금(IMF)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브레튼 우즈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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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의 동아시아 정책

1.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
전후 국제 질서는 영·프의 영향력 쇠퇴 → 미·소 중심으로 재편
  • 중국 : 중국 국민당 중심으로 체제 정비
  • 일본 : 철저한 민주화와 비무장 조치
  • 한국 : 연합국이 공동으로 신탁 통치 실시하려 함

미·소 중심으로 재편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과 중소우호동맹조약
-『동아시아 근현대사』, 우에하라 카즈요시, 옛오늘 - 신탁 통치신탁 통치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과 중소우호동맹조약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후처리 구상은 미소의 대립을 배경으로 일본이 패전했을 때 가능한 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방침에 의해 세워졌다. 일본에 대해서는 소련의 홋카이도 북부 점령 요구를 거절하여 소련을 배제하는 방침이 관철되었다. 중국에 대해서는 친미적인 국민정부에 의한 통일과 안정을 꾀하고자, 국민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소련에게 인정시키고,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중ㆍ소 우호 동맹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신탁통치라는 막연한 합의가 얄타회담에서 성립되었다.
소련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책은 동쪽 국경지역에서 소련의 안전보장을 확보한다는 점에 있었다. 신속한 대일 참전, 구 만주 점령, 한반도로의 진주를 소련이 이 방면에 세력권을 확보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품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소려의 대외정책은 무엇보다도 동유럽에 중점을 두었다. 또 자국의 전후 경제부흥과 안전보장을 확보하는 일이 각 지역 민중의 동향보다 우선되었다. 따라서 미국과의 충돌을 가능한 한 피하고자 하였다. 한국에서의 군사경계선의 묵인과 중ㆍ소 우호 동맹조약의 체결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분할 점령만은 면할 수 있었지만 대신 한국이 분할 점령되었다.
-『동아시아 근현대사』, 우에하라 카즈요시, 옛오늘 -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

2. 소련의 동아시아 구상
소련에 대해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데 중점

-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북과 만주 지역 외에는 뚜렷한 거점 확보 실패

→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함
→ 미국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 정부와 중소 우호 동맹 조약 체결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과 중소우호동맹조약
-『동아시아 근현대사』, 우에하라 카즈요시, 옛오늘 - 38도선38도선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과 중소우호동맹조약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후처리 구상은 미소의 대립을 배경으로 일본이 패전했을 때 가능한 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방침에 의해 세워졌다. 일본에 대해서는 소련의 홋카이도 북부 점령 요구를 거절하여 소련을 배제하는 방침이 관철되었다. 중국에 대해서는 친미적인 국민정부에 의한 통일과 안정을 꾀하고자, 국민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소련에게 인정시키고,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중ㆍ소 우호 동맹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신탁통치라는 막연한 합의가 얄타회담에서 성립되었다.
소련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책은 동쪽 국경지역에서 소련의 안전보장을 확보한다는 점에 있었다. 신속한 대일 참전, 구 만주 점령, 한반도로의 진주를 소련이 이 방면에 세력권을 확보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품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소려의 대외정책은 무엇보다도 동유럽에 중점을 두었다. 또 자국의 전후 경제부흥과 안전보장을 확보하는 일이 각 지역 민중의 동향보다 우선되었다. 따라서 미국과의 충돌을 가능한 한 피하고자 하였다. 한국에서의 군사경계선의 묵인과 중ㆍ소 우호 동맹조약의 체결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분할 점령만은 면할 수 있었지만 대신 한국이 분할 점령되었다.
-『동아시아 근현대사』, 우에하라 카즈요시, 옛오늘 - 
주 320
각주 320) 중소 우호 동맹 조약 체결
중·소 우호 동맹 조약(1945.8.14)
제1조 조약국은 다른 연합국과 공동으로 최후의 승리를 획득할 때까지 일본과 싸운다.
제5조 … 평화가 회복된 후 쌍방의 주권과 영토의 존중, 아울러 내정 불간섭의 원칙 아래 긴밀한 우호 협력 관계를 발전시킨다.
교환공문1 2. 다롄, 뤼순의 항만(조차)과 중국 창춘 철도의 공동 경영에 관하여 협의하는 가운데, 소련 정부는 동삼성이 중국의 일부이고 중국이 충분한 주권을 가진 것을 존중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표명함과 동시에 영토와 행정의 보전을 승인함도 다시 표명한다.

※ 동삼성 : 만주 일대에 걸쳐 있는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을 가리킴.
중·소 우호 동맹 조약(1945.8.14)
소련 정부는 동삼성이 중국의 일부이고 중국이 충분한 주권을 가진 것을 존중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표명함과 동시에 영토와 행정의 보전을 승인함도 다시 표명한다.다롄위치뤼순위치창춘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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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처리와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
전후 평화 체제
미·소의 동아시아 정책
- 승리가 가시화 되면서 연합국의 전후 처리 구상이 이루어짐
  1. 카이로회담(1943)
  2. 얄타 회담(1945)
  3. 포츠담 회담(1945)
    -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제2차 세계 대전 중 대서양 헌장 채택 → 국제 연합 창설
- 브레튼 우주 협정으로 국제 부흥 개발 은행과 국제 통화 기금 창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체결
  1. 미국
    - 중국 : 중국 국민당 중심으로 체제 정비
    - 일본 : 민주화, 비무장 조치
    - 한국 : 연합국이 공동으로 신탁 통치
  2. 소련
    - 중·소 우호 동맹 조약 체결

  • 각주 315)
    카이로 회담카이로선언
    루스벨트 대통령, 장제스 대원수, 처칠 수상은 .. 아래의 일반적 성명을 발표한다.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국으로부터 제1차 세계전쟁의 개시 이후에 있어 일본국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에 있어서의 일부의 도서를 일본국으로부터 박탈할 것과..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정..
    -조선경제연보,1948-
    사진자료 링크주소사진자료 링크주소카이로선언
    -조선경제연보,1948-카이로선언카이로선언 바로가기
  • 각주 316)
    얄타 회담얄타 선언

    소ㆍ미ㆍ영 3국의 지도자는 .. 소련이 다음 조건에 의하여 연합국에 참가하며 대일전에 참가할 것을 협정하였다.
    1.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의 현상을 유지한다.
    2. 1904년 일본의 … 공격에 의하여 침해한 소련의 제권리를 회복한다.
    1) 사할린-남부 및 이에 인접하는 일체의 섬들을 소련에 반환한다.
    3. 쿠릴-열도를 소련에 인도한다.
    소련은 … 중국 국민정부와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한다.
    -『시사자료 광복30년사』, 세문사, 1973 -
    사진자료 링크주소사진자료 링크주소얄타 선언
    -『시사자료 광복30년사』, 세문사, 1973 - 바로가기
  • 각주 317)
    포츠담 회담포츠담 선언
    1. 3대 연합국(미·중·영)은 수억 국민을 대표하여 협의한 결과, 일본에 대하여 지금의 전쟁을 종결할 기회를 줄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2. 미·중·영의 거대한 육·해·공군은 서방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크게 증강하여 일본에 대하여 최종적 타격을 가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사진자료 링크주소사진자료 링크주소포츠담 선언 바로가기
  • 각주 318)
    국제연합(UN)제1조(목적)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 … 효과적인 집단 조치를 취하며…
    제42조(평화 유지) …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데 필요한 육·해·공군의 행동을 취할 수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http://ko.wikipedia.org/wiki 바로가기
  • 각주 319)
    브레튼 우즈 협정브레튼 우즈 체제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에서 45개국이 참가한 통화 금융 회의에서 탄생. 통화 가치 안정, 무역 진흥, 개발 도상국 개발을 목적으로 함.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황폐화된 국가들의 재건 비용을 조달해주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빈곤 상태의 국가들을 구제하기 위한 역할도 수행.

    국제 통화 기금(IMF)
    회원국의 요청이 있을 때 기술 및 금융 지원 제공. 국제통화협력 육성, 재정상황 안정, 국제무역 촉진 등을 위해 노력.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세계무역기구 체제 이전의 국제 경제 체제. 회원국들간에 관세 등의 무역 장벽을 제거하거나 낮추어 자유무역의 확대를 추구.
    http://ko.wikipedia.org/wikihttp://ko.wikipedia.org/wiki브레튼 우즈 체제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
    국제 통화 기금(IMF)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브레튼 우즈위치 바로가기
  • 각주 320)
    중소 우호 동맹 조약 체결중·소 우호 동맹 조약(1945.8.14)
    제1조 조약국은 다른 연합국과 공동으로 최후의 승리를 획득할 때까지 일본과 싸운다.
    제5조 … 평화가 회복된 후 쌍방의 주권과 영토의 존중, 아울러 내정 불간섭의 원칙 아래 긴밀한 우호 협력 관계를 발전시킨다.
    교환공문1 2. 다롄, 뤼순의 항만(조차)과 중국 창춘 철도의 공동 경영에 관하여 협의하는 가운데, 소련 정부는 동삼성이 중국의 일부이고 중국이 충분한 주권을 가진 것을 존중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표명함과 동시에 영토와 행정의 보전을 승인함도 다시 표명한다.

    ※ 동삼성 : 만주 일대에 걸쳐 있는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을 가리킴.
    중·소 우호 동맹 조약(1945.8.14)
    소련 정부는 동삼성이 중국의 일부이고 중국이 충분한 주권을 가진 것을 존중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표명함과 동시에 영토와 행정의 보전을 승인함도 다시 표명한다.다롄위치뤼순위치창춘위치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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