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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급격한 인구 증가

4-3단원 1차시
  • 저필자
    황지숙(신림고 역사 교사)

급격한 인구 증가

명‧청 대의 인구 증가
에도 시대의 인구 증가
조선 후기의 인구 증가

급격한 인구 증가

1. 명‧청 대의 인구 증가
  1. 배경
    • 토지 개간 : 저습지‧임야 개발, 제방‧수리 시설 개선 → 경지 면적의 확대
    • 농업 기술 발달 : 품종 개량, 2모작‧3모작 확대 → 단위 면적당 생산량의 증가
    • 사망률 감소 : 온난한 기후 , 의료 기술 발달, 오랜 평화
    • 구황 작물 유입 : 아메리카 대륙에서 옥수수‧감자‧ 고구마 등 유입
명‧청대 인구 증가의 배경
- 단위 면적당 생산량의 증가 : 단위 면적당 곡물 생산량을 늘리는 데는 집약적 농업의 심화가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그 방법은 바로 비료 사용의 증가와 품종 개량이었다.
청대에는 작물의 성장을 저해하는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 살충제를 사용하였다. 또한 비료가 다양하게 개발되었고, 시비법이 개선되었으며, 퇴비 제조법이 발전하여 각종 유기질‧무기질 비료가 등장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돼지 등의 가축의 증가로 분뇨(똥과 오줌)가 더 많이 생기면서 비료 사용 또한 증가하였다.
* 보충 : 비료에 대한 인식이 높아서 생산량 증가에 비료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 비료가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는 점, 토질에 따라 각기 다른 비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 작물을 심기 전에 뿌리는 비료는 토양을 개량시키는 작용을 하고 추가 비료는 작물의 싹을 키우는 작용을 한다는 점, 시비는 반드시 심경과 함께 해야 효과가 있다는 점 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종래 알려진 유기질 비료 외에 다양한 무기질 비료와 퇴비 제조법을 발달시켰다. 그 결과 벼농사에 필요한 노동량과 비료량을 합한 총 투하량 중에서 비료 투하량의 비율이 명대 27%에서 청대 50%로 증가했다.
품종 개량에 있어서, 벼 품종의 개발도 단위 면적당 곡물 생산량의 증가에 한 몫을 담당했다. 성숙 기간에 따라 50일벼, 60일벼, 80일벼, 100일벼, 120일벼 등의 다양한 벼 품종을 다른 잡곡들과 결합하여 1년 2모작, 2년 3모작 등의 경작 패턴 개발하여 곡물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 사망률의 감소 : 전통시대는 출생률의 증가보다 사망률의 감소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망률 감소의 요인으로는 18세기라는 평화로운 시기와 의학이나 위생의 개선 등을 꼽는다. 한 예로 중국에서는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16세기에 이미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개발한 것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이를 통해 역병에 의한 사망자수가 약간 줄었을 것이다.
- 오랜 평화 : 삼번의 난과 타이완의 정성공 세력을 진압한 이후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 청조의 위대한 세 황제(강희, 옹정, 건륭)가 만들어낸 평화시대였다.
- 신대륙 작물의 전래 : 옥수수, 고구마, 감자 등 신대륙 작물은 식량생산을 확대시켜 인구증가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신대륙 작물은 산지나 구릉지 등 이전에는 버려두다시피 했던 땅의 이용률을 높여 식량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옥수수는 곡물재배가 어려운 해발 1000~2000m 정도의 고산 지대나 건조한 땅에서도 재배가 가능하였고, 고구마는 구릉지와 건조지, 혹은 모래땅에서 재배가 가능하였다. 감자 역시 토양이 척박하고 기온이 낮아 다른 주곡 작물의 재배가 어려운 고랭지에서 재배가 가능하였다.

온난한 기후
명‧청대 중국의 기후는 어땠을까? 명대는 이른바 소빙기에 속하기 때문에 기후가 대체로 한랭했다. 중국의 저명한 기후학자 축가정의 연구에 따르면 16세기에 양쯔강 하류 지역인 태호는 물론이고 동정호까지 결빙되었다. 또한 명 중엽 이후 광동이나 운남 지방에 많은 눈이 내렸다는 기록은 확실히 명대의 기후가 한랭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랭한 기후는 벼농사에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선 봄 서리는 올벼에 냉해를 입히며, 가을 서리는 2차 작물에 피해를 준다. 둘째 초봄의 기온이 섭씨 15도 이하로 내려가면 모내기를 늦춰야 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2차 작물의 경작을 고려해야만 했다. 끝으로 한랭한 기후는 가뭄을 유발할 수도 있다. 차가운 공기가 북태평양에서 생성되는 아열대 고기압의 정상적인 이동을 방해하여 여름에 비를 몰고 오는 계절풍의 도래를 지체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주로 중국 남부지역에서 발생했다.

고구마
16세기에 중국에 전래된 고구마는 구릉지와 건조지, 혹은 모래땅에서 재배할 수 있으며, 맛이 좋고 다른 작물과 달리 무성번식이라서 재배가 쉽고 단위면적당 수확량도 많았다.
고구마의 이런 장점 때문에 옥수수와 달리 명말 중국에 전래되자마자 중국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고구마가 전래된 직후부터 지방관들은 고구마 재배를 적극 권장했고, 그 결과 고구마는 18세기 중엽부터 감숙과 서북 변경을 제외한 중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특히 양쯔강 이남에서는 지역에 따라 서민의 5~6개월 치 식량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고구마를 쌀만큼 중요시했다.
 
주 237
각주 237) 온난한 기후
오늘날에도 수확기의 성숙기간이 하루 감소할 때마다 수확량은 1헥타르당 63킬로그램이 감소하며, 여름의 평균기온이 1도 내려가면 북유럽에서는 곡물이 자랄 수 있는 성장기간이 약 30일이나 감소한다. 17세기에는 오늘날보다 농업기술이 더 원시적이었고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불모지도 더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감소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파커 교수(일리노이 대학) -
- 파커 교수(일리노이 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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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38
각주 238) 고구마
고구마는 척박한 땅이나 모래땅에서도 경작할 수 있다. …… 처음 복건에 들여왔을 때 마침 복건에 기근이 들었는데, 이것이 있어 서민들이 1년 동안 살 수 있었다. 고구마는 오곡과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척박하고 짠 땅에서 잘 자란다. …… 천주 사람들은 1근에 1전도 안 되는 가격에 팔기 때문에 2근이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노인이나 어린이, 그리고 거리의 걸인, 심지어 닭과 개까지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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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인구 증가

1. 명‧청 대의 인구 증가
  1. 인구 변화
    • 17세기 초(명대 후기) 1억 4천만 명 → 18세기 말 3억 명 → 19세기 중엽 4억 명 초과
  2. 인구 증가로 인한 부작용
    • 1인당 경지 면적 축소 → 실업자 유민 증가로 인한 계투, 농민 반란 확산
    • 환경 파괴, 물가 상승, 값싼 노동력으로 인한 기술 발전 정체
명‧청대 인구 증가 그래프
17세기 초에 한 사람이 차지하던 공간에 1850년에는 약 여섯 명이 살게 되었다(그래프에서 1600년과 1850년을 보면 1.4 à 4.2로 약 3배 증가). 그래프를 보면, 송대인 11세기에는 약 1억 명을 초과했으나, 몽골의 정복과 지배 아래에서 다시 줄어들었다. 그 후 17세기 초기와 중기, 즉 명에서 청조로 바뀌는 교체기에 농민반란, 전쟁 등으로 인구의 감소가 나타났다가(그래프에서 1600년과 1650년을 보면 1.4 à 1.3으로 감소) 청의 지배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인구 증가 부작용
태평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평화로운 시기가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니 그 기간이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호구는 30년 전에 비해 5배가 증가하였으며 60년 전에 비해서는 10배가 증가하였다. 백 년 혹은 백 수십 년 이전보다 20배가 증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구가 고조 혹은 증조 할아버지 당시에 10간의 집과 1경(頃)의 경작지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결혼을 해서 2인이 될 경우 그 두 사람이 10간의 집에 살며 1경을 경작하므로 상당히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 부부가 아들 셋을 두어 이들이 각각 부인을 얻는다면 2대(代)에 이르러서는 가족이 모두 8명이 될 것이다. 가족이 8명에 이르면 고용인[傭作]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식구는 10명 이상이 될 것이다. 10인이 10간의 집에서 1경을 경작하게 되면 주거 공간과 식량에 여유가 없을 것이다. 결혼한 자식이 다시 손자를 낳고 그 손자가 다시 아내를 얻으며 그 사이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져도 손자대의 가족 수는 20명 이상이 될 것이다. 비록 그 가족이 절약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전 가족의 부양이 불가능할 것이다.” - 홍량길, 치생(治生) 중 -
해제 : 홍량길(1746-1809)은 1746년(건륭10년)에 태어나 1809년(가경13년)에 사망했는데, 중국의 사회경제가 최전성기에게 점차 쇠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할 때를 살았다. 18세기는 중국 인구사에서 인구 증가가 가장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인구가 급증하자, 중국에서는 많은 인구가 국세(國勢)의 원천이며 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낙관적인 견해가 점차 과잉인구 우환론으로 변화되었다. 홍량길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당시의 급격한 인구팽창을 목도하고 인구과잉과 자원부족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출하여 ‘중국의 맬서스’라고 불린다. 그의 과잉인구 우환론은 인구 증가속도에 비하여 경작지의 증가속도가 훨씬 느리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불균형은 결국 1인당 경지면적으로 감소시키며, 가용자원이 고갈되면서 생겨난 수많은 실업자가 사회기강을 해이하게 만들고 사회불안을 고조시킨다고 보았다. 본 사료는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치생>편의 일부이다.

계투
이주자와 토착민 사이의 갈등과 분쟁이 제일 큰 문제였다. 외부의 인구를 유인할 만한 요소들이 있는 지역이라도 신사나 유력자들의 대토지 소유, 세금 부담의 불합리 같은 사회적 모순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이런 모순이 더욱 첨예화되었다.
먼저 세역 부담의 모순이 있었다. 명조가 호적의 원적지 등재 입장을 고수하면서 이주자들은 이주지에서 세금도 내지 않고 토지를 개간해서 경작할 수 있었다. 반면 토착민은 과중한 세금부담으로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그래서 오히려 토착민 일부가 몰락하고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는, 인구의 대류현상을 초래함으로써 그 동안 유지되어온 기존의 사회질서를 허물어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수리시설 수축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이 있었다. 이주민이 무분별하게 침점하고 개간한 토지는 종래의 유수지를 축소시켜 수해의 위험을 높였다. 호남의 호수 주변지역에서는 이주민이 만든 제방이 날로 높아져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은 토착민의 제방은 홍수피해를 입는 일이 빈번했다. 또 산간지역의 논에서는 수량이 풍부하지 못한 계곡물을 이용하여 당, 언, 패 등을 만들면서 토객 간의 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주민의 횡포도 큰 문제였다. 객상들 역시 장사를 한답시고 고리대를 놓거나, 가격을 조작하거나, 도량형을 속이고, 심지어 몰락한 토착민의 토지를 차지하고 인신을 장악하는 일도 서슴지 않아 토착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주자와 이주자, 이주자와 토착민 사이에 폭력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이주자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사회질서를 뿌리째 뒤흔들기도 하였다. 청대 사천, 섬서, 호북의 3성 접경지대에서 폭발한 백련교도의 반란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환경 파괴
- 비옥한 토양의 유실 : 새로운 토지를 개간할 때는 주로 나무를 채벌하고 소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면 처음 몇 년간 처녀지의 토양은 풍작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방식은 종종 자연환경을 심하게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토양침식에 대해 거의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수직으로 열을 지어 옥수수나 고구마를 심었기 때문에 비가 내리면 비옥한 표토가 그냥 씻겨 내려갔다. 그러면 정주민들은 새로운 경사면으로 옮겨가야 했다. 화전농경으로 점차 숲이 줄어들자 비가 내리면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고, 산비탈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강바닥을 높여 계곡 주변에 홍수를 일으키게 되었다. 또 이주자들이 농업용수를 확보하려고 산비탈의 계곡을 막아 만든 소규모 제방은 폭우가 쏟아지면 쉽게 무너지곤 했다. 그러나 복구가 어려운 관계로 무너진 제방은 계곡에 그대로 방치되는 일이 많았고, 그러면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 받은 물줄기가 엉뚱하게 농경지를 침수시키기도 하고 토양을 쓸어내려 가면서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 삼림자원의 고갈 : 대부분의 이주자는 구릉지대의 불모지를 경작하는 것으로는 생계를 거의 유지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시장에 원자재를 내다팔아 미미한 수입을 보충했다. 즉, 목재는 산간지역에 풍부했고 동부초생달지역에서는 건축자재, 땔감, 제지원료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변경의 초기 이주자들은 임업에 종사하며 구릉의 삼림을 벌목하여 하천의 하류로 통나무를 띄워 보냈다. 이주 초기에 행해진 집중적인 벌목 때문에 국토의 삼림자원은 급속히 고갈되었고 산은 황폐해졌으며 고지대의 토양유실은 가속화되었다.
 
주 239
각주 239) 인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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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40
각주 240) 인구 증가로 인한 부작용
평화로운 시기가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니…… 호구는 60년 전에 비해서는 10배가 증가하였다. 한 가구가 증조부 당시에 10간의 집과 1경의 경작지가 있었다고 하자. 결혼해서 부부가 아들 셋을 두고 각각 부인을 얻는다면 2대에 이르러서는 가족이 8명이 되고 고용인의 도움을 받으면 식구는 10명 이상이 되겠다. 10인이 10간의 집에서 1경을 경작하게 되면 주거 공간과 식량에 여유가 없을 것이다. - 홍량길, 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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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41
각주 241) 계투
중국에서 마을이나 종족 상호 간에 무기를 가지고 벌이던 싸움을 일컫는다. 비밀 결사와 농민 반란의 출현이 빈번해지면서, 산간이나 변경 지대로 인구가 이동하는 일이 늘어 현지인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 심해져서 계투가 더욱 만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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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42
각주 242) 환경 파괴
산민들은 수목을 잘라내고 죽은 나무의 그늘에 작물을 재배한다. 1, 2년간은 토질이 좋아 두 배의 수확을 올릴 수 있다. 4, 5년이 지나면 토양은 이미 패고 척박해지며 산은 경사가 가팔라서 여름과 가을에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도처에 돌의 뼈다귀밖에 남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야 한다. 본래의 땅은 방치된 채 점차 풀이 자라고 ……
- 19세기 초 지방관 엄여익
- 19세기 초 지방관 엄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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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인구 증가

2. 에도 시대의 인구 증가
  1. 배경
    • 영주의 개간 장려와 개간, 개발 확대 → 경작지 증가
    • 농업 기술 발달, 금비 사용 확대, 상품 작물 재배 확대 → 농업 생산량 증가
    • 출생률 증가, 사망률 감소( <-생활 수준과 의료 수준의 향상)
    • 소농 중심의 집약적 농업 발달 → 식량자급률 증가
에도 시대 인구 증가의 배경
- 금비 사용 확대 : 임야에서 자라는 풀과 나뭇잎 그리고 인분을 비료로 사용하던 것에서 깻묵, 호시카(기름을 짜고 남은 정어리를 말린 것) 등을 상품작물 생산지에서 이용했다. 임야 자체가 경지화 됨에 따라, 비료 특히 잡초의 획득이 어려워져 곤란이 생기자 종래의 비료공급원에 대한 의존도가 저하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등장했던 것이 말린 정어리, 말린 청어 등의 비료였다. 이것들은 모두 시장에서 상인을 통해 구입하는 비료(에도 시대에는 금비라고 했다)였다. 에도 시대 목화재배를 중심으로 말린 정어리와 깻묵 등 금비의 사용이 많아지고, 그 후 일반 논에도 금비를 사용하게 된다. 금비사용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그 결과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증대되었다.
- 소농 중심의 집약적 농업 : 일본에서는 17세기에 인구증가가 두드러졌는데, 농가가 가부장적인 확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하면서 소농 중심의 집약적 농업이 발전했던 것은 그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더 작은 가족단위가 더 빠른 인구성장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낮은 결혼률이 낮은 출산율을 초래하고 사망률과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결혼율이 높아지면서 출산율도 높아지고, 게다가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사망률(특히 유아사망률)이 병행적으로 감소되면서 농촌 인구의 증가는 연 1%를 넘어섰다.

일본 전국 경지 면적의 변화
인구 증가로 토지가 부족해지자 새로운 논밭이 개간되고, 심지어 경작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산비탈에까지 밭과 계단식 논이 들어섰다. 17세기 다이묘들은 농민에게 세금 혜택을 주거나 어떤 경우 농경지를 확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특정한 신분인 향사(鄕士; 농촌사무라이)를 부여함으로써 농민의 토지개간을 장려했다.
“대개발 시대” : 에도 막부는 1643년 전후의 대기근을 계기로 농업을 장려하고 생산 기반을 확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영주는 이전까지 개발되지 않았던 대지를 인부를 동원해 개간했다. 그리고 재력 있는 상인 및 토호들도 용수로를 파서 수전을 만들었다. 농민들도 소규모지만 서서히 경지를 확대해갔으며, 이로 인해 새로운 촌락이 형성되었다. à 에도 시대 초기에 163만 정보였던 경지 면적이 18세기 초기에 300만 정보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개발은 비료용 풀을 채취하는 산야의 이용과 용수를 둘러싼 분쟁을 발생시키고, 또 하천을 자주 범람하게 했다. 때문에 17세기 말에는 개발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농업 기술의 발달 - 농경 도구 그림
경지의 확대가 포화상태에 이를 무렵부터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노력은 투하노동력과 농업 기술의 향상에 집중되었다. 소농 경영은 가족 노동력을 최대한 투하하는 집약적 농업을 발전시켰고 이것이 농기구의 변화도 가져왔다. 이제까지 경작용구의 주류는 소나 말이 끄는 쟁기였으나 이러한 쟁기를 조작하려면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했고, 또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심경이 어려워서 소가족의 농업경영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에도 시대 농기구는 소형화하여 인간의 완력으로 이용 가능한 경운 농구가 발달하였다.
* 에도 시대 농기구들
- 나락훑기 : 적당량의 벼를 쇠꼬챙이 사이에 넣어 훑어내 추수한다. 당시의 탈곡용구에 비해 이 나락훑기는 10배 이상의 능률을 보였다.
- 빗추괭이 : 심경용 도구 즉, 밭을 깊이 갈 때 사용하는 도구로 소형농기구인 괭이가 개량된 것인데, 심경이 용이하고 좁은 경지에 다량의 노동력을 투입할 수 있게 한다.
- 풍구 : 선별 조정구인 풍구로, 손으로 돌려 바람이 불게 해서 현미, 쭉정이, 검불 등을 선별한다. 그 결과 탈곡, 선별작업의 효율이 크게 향상되었다.
- 답차 : 양수 도구로 용골차를 대체하여 간편한 답차가 점차 보급되었는데, 발로 밟아 용수로를 통해 물을 논으로 보내는 도구
 
주 243
각주 243) 경작지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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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44
각주 244) 농업 기술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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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인구 증가

2. 에도 시대의 인구 증가
  1. 인구 변화
    • 17세기 이후 인구 급증(“폭발의 시대”) : 17세기 초 1700만 명 → 18세기 초 2700만 명 → 이후 인구 증가 정체
  2. 인구 증가의 정체
    • 18세기경 영주의 수탈
    • 자연재해에 따른 흉작‧기아‧전염병 등 빈번
일본의 인구 변화 그래프
17세기에 일본의 인구는 성장률이 연1%에 이를 정도로 늘어나는 ‘폭발의 시대’를 경험하였다. 일본의 인구증가가 중국과 다른 점은, 18세기에 급격한 인구증가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8세기는 일종의 인구 증가의 조절기라고 볼 수 있다. 기존에 가장 도시화되고 경제적으로 앞선 지역들은 인구의 안정화 또는 심지어 감소를 보인 반면, 덜 ‘발전했던’ 지역들은 계속해서 인구가 증가했다. 즉 지역차가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중앙으로부터 서남 지역은 에도 시대에도 경제적 발전과 인구증대는 계속되지만, 동부지역은 인구가 감소하였다.

텐메이 대기근
1732~1733년에 기상이변에 더하여 곤충 떼의 습격으로 일부 지역에서 미곡의 거의 절반이 유실되었고, 관련 당국자들은 사망자가 부지기수이고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 수백만 명이라고 보고했다.
1783년에는 화산(아사마 산)이 폭발하여 화산재가 비옥한 토지를 뒤덮고 인근 마을들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뒤이은 기상악화(극심한 냉해)는 일본 동북부지역의 벼농사를 거의 망쳐 놓았다. 이런 재해는 필연적으로 해당 지역에 대규모 기아와 인구감소를 초래했다. 텐메이 대기근 당시 아이즈 지방의 참상을 묘사한 것이다.
 
주 245
각주 245) 인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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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46
각주 246) 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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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인구 증가

3. 조선 후기의 인구 증가
  1. 배경
    • 경지 면적의 확대, 이앙법과 시비법의 확산, 온난한 기후, 의학 발달로 사망률 감소(동의보감) 등
  2. 인구 변화
    • 16세기 대략 1천만 명 추정 → 17세기 전후 전쟁으로 감소 → 17세기 중반 이후 증가 추세 → 1670년 경신대기근으로 감소 이후 다시 증가, 18세기 중반 1,800만 명 정도 추정
조선 후기의 인구 변화 그래프
국가에 등록된 호구 기준으로 실제 인구보다는 낮게 잡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호구 통계 자료는 3년마다 실시하는 호적 자료에 근거한 통계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호구통계는 실제 인구수를 반영하는 통계가 아니라 군역 등 각종 역역자(力役者)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절대치보다는 변화 추이를 살피는 데 유용하다.
조선 시대 인구 추정치에 따르면, 건국 초기에 약 500만 명 → 16세기 중반 1천만 명을 초과 → 17세기 전후(임진, 병자전쟁) 급격한 인구 감소 → 17세기 중반 이후 증가 추세 → 18세기 중반 1800만 명? 1400만 명? 정확하지 않지만 15세기에 비하여 18세기 조선의 인구는 2~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 보충
- 조선 시대 호적 자료에 의한 인구통계 : 각 호에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면 관에서 이를 수합하여 전체 통계를 내는 방식으로 작성하였다. 즉 관의 주도하에 조사한 것이 아니라 각 가호에서 자율적으로 신고한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호적의 충실도는 낮았다. 호적 조사의 충실도가 낮은 원인은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10세 미만의 아동들은 호적에 올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 조선 시대 인구에 대한 추정치에 따르면, 조선 초기 약 5백만에서,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1천만을 돌파하고, 18세기 중반에는 약 1천 8백만까지 이르렀다가, 19세기 초에 다시 1천 2-6백만으로 하락하였다). 하지만 18세기에 과연 인구가 그렇게까지 증가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며, 18세기 중반에 1천 4백만을 돌파한 이후 다시 19세기 초에 1천 2백만 전후의 인구로 내려갔을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또한 19세기 중엽의 인구에 대해서도 1천 6백만으로 보는 관점부터 8천 만 명으로 보는 관점까지 존재할 정도로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조선의 인구가 1천만 명을 돌파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결국 15세기에 비하여 18세기 조선의 인구는 2-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신대기근
1670년과 1671년에 걸쳐 일어난 기근을 보통 경신대기근이라 부른다. 당시 약 100만 명 정도가 죽었다는 보고가 있는데 그것은 자연재해와 함께 정부의 진휼 정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참상이었다.
 
주 247
각주 247) 인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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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48
각주 248) 경신대기근
헌납 윤경교가 상소하기를, 수재와 한재가 재앙이 되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굶주려 죽는 참상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더욱이 전염병이 크게 돌아 구걸하며 얻어먹던 무리들은 진휼이 그친 뒤에 남김없이 죽었습니다. 온 나라에서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농민들까지 합하면 거의 백만에 이르고, 한 마을 전체가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임진년 전란의 참혹함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현종개수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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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인구 증가

3. 조선 후기의 인구 증가
  1. 인구 분포의 변화
    • 인구압 증가
    • 삼남 지방(충청도‧전라도‧경상도) → 17세기 이후 평안도 중심으로 북부 지방 개발과 인구 유입
인구 분포의 변화
인구 분포의 변화 : 17세기 후반 이후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북부 지방이 개발되면서 인구의 분포에 변화가 나타났다. 17세기 초반의 경우 전체 인구가 삼남에 약 68%, 중부에 14%, 북부에 18% 정도가 거주했는데, 17세기 후반에는 삼남에 53%, 중부에 19%, 북부에 28% 정도가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난다.(교학사, 동아시아사)
18-19세기에는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이 50% 정도, 삼북(三北: 황해도․평안도․함경도)이 30% 정도, 중부지방(경기도․강원도)이 20% 남짓의 인구분포를 유지하였다.(천재교육, 동아시아사)
 

급격한 인구 증가

명‧청 대
에도 시대
조선 후기
  • 배경 : 경지 면적 확대, 생산량 증가, 사망률 감소, 구황작물 도입 등
  • 부작용 : 1인당 경지 면적 축소, 농민 반란, 환경 파괴, 기술 정체 등

  • 배경 : 집약 농업 발달, 영주의 개간 장려, 출생률 증가 → 17세기 인구 폭발
  • 18세기 인구 증가의 정체 : 영주의 수탈, 흉작‧전염병‧재해‧대기근 등

  • 배경 : 경지 면적 확대, 이앙법과 시비법 확산, 온난한 기후, 의학 발달 등
  • 북부 지방의 인구 증가 : 인구압 증가 → 삼북 지방으로 인구 유입


  • 각주 237)
    온난한 기후오늘날에도 수확기의 성숙기간이 하루 감소할 때마다 수확량은 1헥타르당 63킬로그램이 감소하며, 여름의 평균기온이 1도 내려가면 북유럽에서는 곡물이 자랄 수 있는 성장기간이 약 30일이나 감소한다. 17세기에는 오늘날보다 농업기술이 더 원시적이었고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불모지도 더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감소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파커 교수(일리노이 대학) -
    - 파커 교수(일리노이 대학) - 바로가기
  • 각주 238)
    고구마고구마는 척박한 땅이나 모래땅에서도 경작할 수 있다. …… 처음 복건에 들여왔을 때 마침 복건에 기근이 들었는데, 이것이 있어 서민들이 1년 동안 살 수 있었다. 고구마는 오곡과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척박하고 짠 땅에서 잘 자란다. …… 천주 사람들은 1근에 1전도 안 되는 가격에 팔기 때문에 2근이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노인이나 어린이, 그리고 거리의 걸인, 심지어 닭과 개까지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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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39)
    인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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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40)
    인구 증가로 인한 부작용평화로운 시기가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니…… 호구는 60년 전에 비해서는 10배가 증가하였다. 한 가구가 증조부 당시에 10간의 집과 1경의 경작지가 있었다고 하자. 결혼해서 부부가 아들 셋을 두고 각각 부인을 얻는다면 2대에 이르러서는 가족이 8명이 되고 고용인의 도움을 받으면 식구는 10명 이상이 되겠다. 10인이 10간의 집에서 1경을 경작하게 되면 주거 공간과 식량에 여유가 없을 것이다. - 홍량길, 치생 바로가기
  • 각주 241)
    계투중국에서 마을이나 종족 상호 간에 무기를 가지고 벌이던 싸움을 일컫는다. 비밀 결사와 농민 반란의 출현이 빈번해지면서, 산간이나 변경 지대로 인구가 이동하는 일이 늘어 현지인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 심해져서 계투가 더욱 만연해졌다. 바로가기
  • 각주 242)
    환경 파괴산민들은 수목을 잘라내고 죽은 나무의 그늘에 작물을 재배한다. 1, 2년간은 토질이 좋아 두 배의 수확을 올릴 수 있다. 4, 5년이 지나면 토양은 이미 패고 척박해지며 산은 경사가 가팔라서 여름과 가을에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도처에 돌의 뼈다귀밖에 남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야 한다. 본래의 땅은 방치된 채 점차 풀이 자라고 ……
    - 19세기 초 지방관 엄여익
    - 19세기 초 지방관 엄여익 바로가기
  • 각주 243)
    경작지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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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44)
    농업 기술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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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45)
    인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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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46)
    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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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47)
    인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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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48)
    경신대기근헌납 윤경교가 상소하기를, 수재와 한재가 재앙이 되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굶주려 죽는 참상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더욱이 전염병이 크게 돌아 구걸하며 얻어먹던 무리들은 진휼이 그친 뒤에 남김없이 죽었습니다. 온 나라에서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농민들까지 합하면 거의 백만에 이르고, 한 마을 전체가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임진년 전란의 참혹함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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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인구 증가 자료번호 : edeao.d_0004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