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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문물 전파와 교류의 증대

2-1단원 3차시
  • 저필자
    박성기(하남고 역사 교사)

문물전파와 교류의 증대

인구 이동과 문물 교류
문화의 공유
국경을 넘나든 사람들

문물전파와 교류의 증대

1. 인구 이동과 문물 교류
  1. 철기(무기,농기구)
    중원 → 한반도 북부.남부 → 일본 열도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쓰기도 함.
  2. 농업 기술
    • 한족의 강남이주로 선진농업기술 전파 → 강남의 농업생산력 증대
  3. 벼농사
    •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전래
    • 야마토 시대에 수리.관개 기술 전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 베이스”
일본 ‘高麗신사’ 홈페이지
진한 지역의 철 생산
이 기사는 일찍부터 한반도 남쪽에서 철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기원전 1세기의 유적인 김해의 패총이나 웅천 패총에서 이미 다량의 철기들이 도구화해서 나타나고 있다.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도 많은 鐵鋌이 보이고, 또 日本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文獻의 기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변한과 진한에서 철이 유명해서 弁辰의 鐵이 유명해서 韓·濊·倭에 공급하였다는 이 기사는 고고학의 처지에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철기유물은 일반적으로 토광묘에서 주로 나타나며 그 뒤에는 신라, 가야의 고분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철정은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이것은 화폐의 용례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유물들은 일본 고분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문헌에 나타난 기록들과 일치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 베이스”

양쯔강 이남에서 사용하였던 삽과 高麗신사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하였던 한족에 의하여 중원지역의 관개기술이 전해졌다. 양쯔강 이남은 비옥한 지역이었으나, 화북 지역에 비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었다. 강남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화북의 기술을 이 지역에 맞게 응용하였다. 양쯔강 유역의 토질은 화북에 비해 점성이 강했다. 이러한 땅에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화북지역에서 사용하던 삽에 비해 좁고 길게 제작되었다.
농경기술의 일본 전파
716년 무사시노(현재의 도쿄 근처)의 넓은 땅에 1,799명의 고(구)려인이 이주하여 땅을 개발하에 되었으므로 야마토 조정은 이 지역을 고(구)려군이라고 칭하고, 고려왕 약광을 수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고려’는 과거 조선반도에서 중국 대륙에 걸친 땅을 가진 고구려를 의미합니다. 668년 멸망한 고구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와 정착했습니다. 고려왕이 죽은 후 지역 사람들은 그 덕을 기리고 靈碑를 건립하여 고려명신이라 하여 숭배했습니다.
일본 ‘高麗신사’ 홈페이지
 
주 057
각주 057) 일본 열도
(진한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예·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열전
“삼국지” 위서 동이열전“삼국지” 위서 동이열전“삼국지” 위서 동이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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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58
각주 058) 선진농업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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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59
각주 059) 관개 기술 전래
716년 무사시노(현재의 도쿄 근처)의 넓은 땅에 1,799명의 고(구)려인이 이주하여 땅을 개발하에 되었으므로 야마토 조정은 이 지역을 고(구)려군이라고 칭하고, 고려왕 약광을 수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일본 ‘高麗신사’ 홈페이지
일본 ‘高麗신사’ 홈페이지홈페이지홈페이지高麗신사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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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물전파와 교류의 증대

2. 문화의 공유
  1. 인구이동을 따라 활발한 문물 교류가 이루어 짐
    → 동아시아 세계가 한자.율령.유교.불교등 공유
    → ‘동아시아 문화권
  2.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지 당
    • 장안은 세계문화의 경연장이자, 용광로, 이곳에서 융합된 문화가 다시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
다호리 고분의 중원 왕조 유물과 한반도
흔히 동아시아의 공동요소를 이야기할 때 한자. 유교. 율령. 불교를 이야기한다. 한반도 지역에 언제 한자가 전래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경남 창원의 다호리 고분에서는 당시 중국과 관련한 교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상남도 창원군 다호리에 있는 고대국가 형성기의 고분이다. 구릉지와 저습한 평지의 지형관계로 목제품 유물의 보존이 가능한 지형이다.
1호 목관묘에서 보이는 나무널은 지름 1m의 통나무를 세로로 쪼개어 속을 파서 만든 구유 모양으로, 우리나라 서북지방 나무널과 차이가 난다. 출토유물은 동검, 중국거울(한경)을 비롯한 청동기와 오수전, 철검, 손칼, 부어 만든 도끼(주조철부), 두드려 만든 판상철부 등 철기제품이 나왔다. 또한 칼집, 활, 화살, 합, 붓, 부채, 칠기와 민무늬토기, 와질토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거울인 성운경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이 출토되어 다호리 고분이 서기 1세기 후반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의 유적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양한 철기와 중국계 유물의 출토로 보아, 이 지역의 철 생산을 바탕으로 중국·낙랑과 교역한 세력의 지배자 무덤으로 보여진다.
다호리 고분은 한국고대사의 공백기인 고대국가 형성시기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통나무를 파내고 만든 목널의 출토는 나무널에 대한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였으며, 문자 생활의 증거인 붓과 가야금의 원조인 현악기 등이 나왔으며, 한편 오수전, 성운경을 통해 중국·낙랑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당시 문화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일본서기의 기록은 한반도 국가를 거쳐 일본에 한자와 천자문이 전래된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應神天皇 15년 가을 8월에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치니 아직기에게 말을 돌보게 하였는데, 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兎道稚郎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천황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하고 물으니, 아직기가 '왕인이라는 사람이 뛰어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불렀으며, 오진천황 16년 봄 2월에 왕인이 오자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 여러 경전과 서적을 배웠는데 막힘이 없었다. 왕인은 書首등의 시조이다.
“일본서기”

왕인의 어느 시기의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를 5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계와 함께 하는 도시 장안
수의 뒤를 이어 중원을 다시 통일한 당의 생산력은 크게 발달하였다. 화북지방에서 2년 3모작이 가능해졌고, 차가 재배되어 해외로 수출되었다. 비단길을 통한 무역이 활발했고,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바탕과 함께 대외개방적인 성격으로 당은 번성할 수 있었다.
장안성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쪽의 궁성은 황제· 제후· 왕비·태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궁성의 남쪽인 황성은 정부 관리들의 사무를 보는 곳이며, 나머지 지역은 백성.관리들의 주택과 상업지역이다. 둘레가 약 37킬로에 이르는 지역으로 동서로 뻗은 열 네갈래의 길로 나뉘어 균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길에 의해 나뉘어진 각 지역을 방(坊)으로 표시하며, 각 지역에는 주택과 사원, 명승지, 시장등이 위치한다.
당나라의 장안은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상공업에서도 상당한 번영을 이루었다. 상업은 동시(東市)와 서시(西市)에 집중되어 있었다. 동일한 점포 조직을 행이라고 불렀는데, 동시에는 220행이 있었고, 금시라고도 불렀던 서시에는 보물을 수집하는 호상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많았다. 고고학자들은 여기서 술집과 음식점 그리고 도자기 매매 장소와 흔적을 많이 발견했다.
정연하게 잘 계획된 장안성의 구조는 일본 헤이죠쿄(平城京), 발해 上京城, 신라 경주의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국경을 넘나든 사람들
신찬성씨록
고대 일본의 왕족과 귀족의 계보가 적힌 책으로 9세기 경에 편찬되었다. 전체적으로 1,000개가 넘는 성씨 중에서 약 30%가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이주한 도래인의 성씨로 나타난다.

최치원 [崔致遠, 857~?]
857년 경주에서 태어난 인물로,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868년에 중국의 당에 유학을 떠났다. 874년 빈공과에 합격하여, 876년 관직을 시작하였다. 당 말기에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최치원은 당에서 17년동안 머무르다 귀국하였다. 귀국 후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유교.불교.도교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시문을 남겨 한문학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698~770)
일본 나라시대의 인물로, 717년 9차 견당사와 함께 당으로 유학하였다. 당 태학에서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당 조정에서 근무하면서 다수의 당 시인과 교유하였으며, 그에 관한 작품이 남아있기도 하다. 당의 고위관직을 역임하였으며, 760년에는 안남도호부의 도호를 역임하였다. 당의 고위관직으로 종 2품까지 올랐다. 일본에 귀국을 원했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770년에 사망했다.
 
주 060
각주 060) 인구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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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61
각주 061) 문물 교류
-다호리 고분-
한국고대사의 공백기인 고대국가 형성시기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통나무를 파내고 만든 목널의 출토는 나무널에 대한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였으며, 문자 생활의 증거인 붓과 가야금의 원조인 현악기 등이 나왔으며, 한편 오수전, 성운경을 통해 중국·낙랑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당시 문화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청 홈페이지”“문화재청 홈페이지”“문화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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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62
각주 062) 한자
몽골
천황은 아직기에게 ‘당신보다 우수한 학자가 있는가?’하고 물었다. 아직기는 ‘왕인이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우수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왕인을 초빙하였다. 왕인이 오니 태자가 그를 스승으로 맞았다.
“일본서기”
Wiki자료: hppt://문화재청 링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3270000,38Wiki자료: hppt://문화재청 링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3270000,38“일본서기”“일본서기”“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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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63
각주 063) 문화의 중심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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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64
각주 064) 각국에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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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물전파와 교류의 증대

3. 국경을 넘나든 사람들
  1. 삼국통일전쟁 이후 지역 세계의 안정으로 교류 증가
  2. 당으로 건너간 사람들
    • 신라인:장보고, 최치원, 혜초
    • 일본인:엔닌, 아베노 나카마로
    • 베트남:크엉 꽁 푸, 크엉 꽁 푹
  3. 일본으로 간 사람들
    • 도래인:신찬성씨록에 많이 기록
    • 당인:감진
    • 고구려인:혜자.담징
바닷길
아라비아, 바다를 타고 일본까지
오랜 옛날 동아시아 지역은 하나의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1만년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동아시아 지역에는 바다가 형성되었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황해가 생기고, 육지와 연결되었던 일본 지역은 바다에 의해 섬으로 분리되었다.
그런데,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바다를 건넜다.
한무제의 군대의 樓船(장군)이 제(齊)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우거를 치려하였다. 수·당대에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대가 이동하기도 하였다. 왜는 현해탄을 건너 수시로 신라의 변경을 약탈하였고, 때로는 대규모의 병력으로 도읍지인 금성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백제와 결합하여 고구려의 서쪽 해안을 침략하는 길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긴 시기 바다는 사람들의 이동하면서 평화로운 문명 교류가 이루어졌던 길이기도 했다. 중국과 한반도의 바다는 불교와 한자를 비롯한 대륙의 문화를 전해주는 주요 항로였다. 한반도의 청동기, 철기, 벼농사 문화가 일찍부터 쓰시마를 거쳐 일본 지역으로 건너갔다. 낙동강 하류 지역 가야에서 생산되는 철은 바다 건너 일본 지역과 낙랑에 수출되었다.
통일신라 이후 본격적으로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면서 원양항해가 가능해졌다. 중국 동남지방과 한반도 남해안을 거쳐 일본 지역으로 가는 길이 가동되었다. 당·신라·일본 세 나라의 사신과 승려·유학생이 이동하였고, 물품이 교역되었으며,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뱃길은 실크로드가 중국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이어지는 길이기도 했다.
아라비아를 비롯한 서역과 남방의 문화들이 바닷길을 통해 신라에 유입되었으며,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다.

엔닌(794~864)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로 당에 들어가 불법을 공부하고, 불교와 관련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일본에 귀국하였다. 당에 머무르는 동안 신라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에 머무르는 9년 6개월 세월동안의 기록이 ‘입당구법순례기’에 남아있다. 당의 사회상 뿐 아니라, 신라 적산원등 신라인의 모습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그가 이동한 해상교통로는 중국 산둥반도 적산포에서 충청도 앞바다를 거쳐 쓰시마, 규슈로 항해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동 경로는 당시 장보고 선단의 항로로 추정되고 있다.
입당구법순례기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번역문 제공 http://db.history.go.kr/url.jsp?ID=ds
해상왕 장보고 홈페이지. https://www.changpogo.or.kr/Default.asp
 
주 065
각주 065) 엔닌
귀하를 직접 뵌 적은 없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에 들었기에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만 갑니다…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도 대사께서 세우신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을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입당구법순례기” 중에서…
Wiki자료: hppt://www.mmm.com/abc/defWiki자료: hppt://www.mmm.com/abc/def“입당구법순례기” 중에서…“입당구법순례기”“입당구법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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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물전파와 교류의 증대

문물 교류
동아시아 문화
국경을 넘은 사람들
  1. 철기:무기,농기구
    중원 → 한반도 → 일본 열도
  2. 농업 기술
    화북 → 양쯔강 이남
  3. 벼농사
    한반도 → 일본 열도
  1. 문화의 공유:
    한자.불교
    유교.율령
  2. 국제 도시 장안:
    세계의 문화가 이곳으로 모이고 이곳에서 융합된 문화가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
  1. 당으로 간 사람들
    장보고, 최치원, 혜초, 엔닌,아베노 나카마로, 크엉 꽁 푸, 푹 형제
  2. 일본으로 간 사람들
    도래인,감진,혜자,담징

  • 각주 057)
    일본 열도(진한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예·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열전
    “삼국지” 위서 동이열전“삼국지” 위서 동이열전“삼국지” 위서 동이열전 바로가기
  • 각주 058)
    선진농업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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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9)
    관개 기술 전래716년 무사시노(현재의 도쿄 근처)의 넓은 땅에 1,799명의 고(구)려인이 이주하여 땅을 개발하에 되었으므로 야마토 조정은 이 지역을 고(구)려군이라고 칭하고, 고려왕 약광을 수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일본 ‘高麗신사’ 홈페이지
    일본 ‘高麗신사’ 홈페이지홈페이지홈페이지高麗신사위치 바로가기
  • 각주 060)
    인구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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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1)
    문물 교류-다호리 고분-
    한국고대사의 공백기인 고대국가 형성시기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통나무를 파내고 만든 목널의 출토는 나무널에 대한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였으며, 문자 생활의 증거인 붓과 가야금의 원조인 현악기 등이 나왔으며, 한편 오수전, 성운경을 통해 중국·낙랑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당시 문화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청 홈페이지”“문화재청 홈페이지”“문화재청 홈페이지” 바로가기
  • 각주 062)
    한자몽골
    천황은 아직기에게 ‘당신보다 우수한 학자가 있는가?’하고 물었다. 아직기는 ‘왕인이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우수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왕인을 초빙하였다. 왕인이 오니 태자가 그를 스승으로 맞았다.
    “일본서기”
    Wiki자료: hppt://문화재청 링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3270000,38Wiki자료: hppt://문화재청 링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3270000,38“일본서기”“일본서기”“일본서기” 바로가기
  • 각주 063)
    문화의 중심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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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4)
    각국에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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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5)
    엔닌귀하를 직접 뵌 적은 없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에 들었기에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만 갑니다…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도 대사께서 세우신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을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입당구법순례기” 중에서…
    Wiki자료: hppt://www.mmm.com/abc/defWiki자료: hppt://www.mmm.com/abc/def“입당구법순례기” 중에서…“입당구법순례기”“입당구법순례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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