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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베트남

3. 베트남

1) 베트남전쟁을 딛고 도이모이로
본 단원의 ‘분단과 전쟁’ ‘전후처리와 국교회복’에서 다루었듯이 베트남은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일반적으로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연이어 치르며 30년간을 전쟁 속에서 보냈다.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장에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북베트남이 남북을 통일하여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한 이후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와 함께 1여 년간의 남북통일 준비작업을 끝내고 1976년 4월 25일 30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최고 권력기구인 남북단일 국민의회(492석)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로 인구 10만 명당 1석을 기준으로 하는 배분원칙에 따라 북베트남에서 249석, 남베트남에서 243석을 선출했다. 18세 이상의 유권자들이 참가한 총선은 남북 베트남의 사회주의 정권이 전국의 노동자·농민·여성·산악부족 및 그 밖의 소수인종에서 선정한 후보자 중에서 국민의회 대표들을 선출했으며 야당후보는 없었다.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남북 베트남 단일 국민의회는 1976년 7월 통일 베트남 수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북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인 똔 득 탕(Ton Duc Thang)을 선출했다. 수도는 하노이로 정하고,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호치민 시로 개칭했다.
1980년대 극심한 저발전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가장 가까운 우방국이자 경제의존율이 높았던 구 소련에서 19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페레스토로이카·글라스노스트라는 개혁·개방노선을 채택하자, 베트남은 1986년 12월 제6차 베트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구엔 반 린(NguyenVan Linh)이 서기장에 취임한 뒤, 전시형 대외의존 경제에서 탈피하여 자조자립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베트남식 개혁·개방정책인 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였다. 또한 공산당은 1990년 3월 중앙위원회에서 동유럽식 다당제 채택을 거부하는 1당 지배체제 원칙을 고수하고 부정부패 척결, 당 체질 개선,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당 건설 등 구체적인 쇄신방안을 채택하였다.
1991년 6월 제7차 전당대회에서 도이모이 추진에 중심 역할을 해 온 도 므어이(Do Muoi)가 서기장으로 선출되면서 도이모이 노선의 지속적 추진을 재확인하였고, 1992년 9월 제9기 국회에서는 레 둑 안(Le Duc Anh)을 주석에 선출하고 보 반 키에트(Vo Van Kiet) 총리 등 개혁파 각료들을 유임시킴으로써 경제개혁 가속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경제개혁 추진 과정에서 이권개입·밀수 등 공직사회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자, 베트남 정부는 1992년 부패방지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대대적인 부정추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베트남은 1996년 6월의 제8차 전당대회에서도 도이모이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했다.
1997년 7월 총선에 이어 9월 새로 개원한 의회는 트란 둑 루옹(Tran DucLuong) 부총리를 국가주석으로, 판 반 카이(Phan Van Khai) 부총리를 총리로 선출했다. 2002년에는 트란 둑 루옹 국가주석이 국회의원 97%의 찬성으로 재선되었다.
2001년 4월 제9차 전당대회에서 농 득 마인(Nong Duc Manh)이 당서기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농 득 마인은 2006년 4월 제1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유임되었다. 그러나 65세 이상 원로들을 전면에서 후퇴시켜 과감한 세대교체를 이루어냈다. 자진 은퇴 형식을 빌린 세대교체는 지도자그룹의 나이를 65세 상한선으로 하고 대의원은 신임의 경우 55세 이하로 했다. 그 결과 당 서열 5위 이내의 최고지도자 중 농 득 마인을 제외한 4명이 모두 물러나는 파격적인 결과를 보였다. 정치국원 15명 중에서도 6명만이 남았다.
2011년 1월에는 제11차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치솟는 물가와 동화(베트남화폐) 평가절하 압력 상승 등 경제난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개최된 전당대회는 과감한 개혁보다는 공산당 일당 지배라는 기존 틀 내에서 점진적인개선책을 강구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특히 2011년 전당대회에서는 응웬 떤 중(Nguyen Tan Dung) 총리가 유임됨으로써 360만 여명의 당원을 대표하는 1,377명의 대의원들은 지난 25년 동안 추진해 온 도이모이 정책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함께 이의 지속과 촉진의 필요성에 인식을 함께 했다. 또한 사회주의 노선 고수와 이를 위한 공산당 일당 지배 체제 유지를 재확인함으로써 다당제를 통한 정치 변화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일축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는 지난 2006년의 제10차 전당대회에서 강경보수파의 반대로 무산됐던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이 허용되었다.
2) 정치체제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는 베트남공산당이다. 헌법상 공산당은 국가와 사회를 영도하며 정부, 국회의 활동을 지도하도록 되어 있어서 실질적인 최고권력 기관이다. 2011년 현재 당원은 약 360만 명에 이른다.
공산당의 주요 의사결정기구로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정치국, 중앙집행위원회가 있다. 국가주석은 임기 5년으로 국회의원 중에서 국회에서 선출되고 국가원수로서 대내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한다. 국회의원은 공산당이 선출하며, 국가의 주요정책은 전권을 가진 공산당 정치국이 결정한다. 베트남공산당은 1930년 공산당 창립 이래 집단주의 지도체제의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베트남공산당 최고의 기관은 전당대회이다. 전당대회는 5년마다 열리는데 여기에서 당의 중요한 정책의 인준, 정책노선의 결정, 새로운 당 규약의 채택이 이루어지게 된다.
현재 베트남 권력구조는 베트남 공산당 당서기장, 국가주석,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데, 당서기장이 최고 실권자이며 국가주석은 군사, 외교권을 행사하고 총리는 정치, 경제 전반을 관장하는 방식이다. 도이모이정책이 본격화됨에 따라 행정부와 의회의 기능 및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지만, 베트남의 정치는 여전히 공산당과 당의 지역조직인 인민의회에 의해 실행되고 있다. 또한 2006년 4월 개최된 제10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보수 원로들이 퇴진하고 개혁성향의 인사들이 등장하면서 국가주석과 총리의 권한이 강화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권력의 중심은 당서기장에 있다.
유일한 입법기관인 국회는 국가의 모든 활동에 대한 최고감사권을 행사한다(헌법 83조)고 규정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회가 독자적으로 국가정책을 입안하지는 못하며, 당의 정치노선과 주장, 정책을 그대로 수행해야 한다. 국회의원 수는 550명이고 임기는 5년이며, 정기국회는 1년에 2번 개최한다. 국회 상무위원회 또는 국회의원 1/3 이상이 찬성하면 임시 국회를 개원할 수 있다.
베트남 국회는 일부 극소수의 무소속 의원이 있기는 하지만, 공산당 1당에 의한 국회이기 때문에 여야의 개념이 없다. 그리고 정기국회는 1년에 단두 번 열리기 때문에 평상시 국회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베트남 국회에는 상무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 상무위원회는 사실상 베트남 국회의 모든 활동을 주관하는 기구로 국회의장과 부의장이 각각 상무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는다. 상무위원회는 국회가 열리고 있지 않을 때에는 선전포고를 포함하여 수상을 비롯한 정부인사의 임명과 해임 등 국회의 거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행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행정구역은 59개 성과 5개 직할시로 이루어져 있다. 직할시는 성과 같은 급으로 수도인 하노이를 포함하여 껀터, 다낭, 하이퐁, 호치민시이다.
3) 사회문화 : 도이모이 정책
장기간의 전쟁 이후인 1975년과 1986년 동안에 베트남은 전후의 황폐함, 사회문제, 대규모 난민의 발생, 캄보디아와의 분쟁 그리고 자연재해 등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했다. 또한 미국과 유럽의 고립정책과 무역금지 정책이 베트남의 상황을 한층 악화시켜, 1986년에는 774.7%에 달하는 최악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내외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베트남 정부는 1986년에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도이모이 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도이모이 정책은기본적으로는 경제의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정책이지만, 이와 함께 베트남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추방하기 위한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도이모이 정책을 통해 베트남의 경제는 개방되었으며 중앙계획적인 방식에서 시장지향적인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모든 재정의 중심이 예산 균형과 수출증대에 맞추어졌다. 식량부족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잉여수확물을 분배하는 방식을 허용함으로써 벼농사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1989년 이후에 베트남은 쌀을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이후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여 현재는 세계3위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인플레이션도 1990년에는 67.4%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정치와 치안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외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어 무역금지와 고립화를 벗어나 무역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나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1년에서 1998년 사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에 달했으며,1999년에 자연재해로 인해 GDP 성장률이 4.5%로 주춤했으나, 2000년에는 다시 GDP 6.7%의 성장을 보이며 급속한 발전을 이어 나가고 있다.
도이모이 정책이후 외교는 러시아와의 동맹관계가 기조를 이뤘으나 경제실리 위주로 전환하였다. 1979년 전쟁까지 치렀던 중국과는 캄보디아문제, 국경분쟁 등으로 한때 멀어졌으나 1991년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졌으며,1994년에 미국의 대 베트남 경제제재의 해제 등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1995년에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에 가입하였고, 1964년 이래 단절되었던 미국과의 국교도 정상화했다. 1998년에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 Asian Pacific Economic CooperationConference)에 가입하였으며, 2007년 1월에는 WTO의 150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베트남은 모든 국가와 우방관계를 수립한다는 정책을 전개하여 현재까지 160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UN과 UN산하 기구의 중요한 국제기구에 거의 대부분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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