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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중국

개혁·개방정책 이전과 이후

1. 중국 : 개혁·개방정책 이전과 이후

1) 사회주의에서 개혁·개방으로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10월 1일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한다. 건국 당초 정치를 담당한 것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였다. 이 단계에서는 공산당 독재체제는 확립되지 않았고, 신민주주의론 하에서 공산당, 중국민주동맹, 중국농공민주당,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등의 여러 세력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이루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직후는 구 국민당, 부유층 등에 의한 반공·반정부 운동이 계속 발생했다. 이에 따라 반혁명활동 진압지시가 내려져 중국의 해방군출판사에서 출판된『國情手冊』에 의하면 1953년까지 약 71만 명이 처형되고, 129만 명이 체포, 123만 명이 구속되었다고 한다. 한편 ‘3반운동’과 ‘5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3반이란 정부의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3가지, 즉 독직·낭비·관료주의를 반대하는 것이고, 5반이란 이러한 부패의 원인을 자본가 계급에게 돌려 뇌물수수행위, 탈세, 국가자재 절도, 부실공사, 국가경제정보 유출을 규탄하는 것이다.
1950년에는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고 한국전쟁에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하는 등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자세를 선명히 했다. 다만1954년 네루·저우언라이[周恩來] 회담에서 평화5원칙을 제시하고,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반드시 소련 일변도는 아니었다. 또한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회 대회에서 후루시초프가 제기한 ‘스탈린 비판’에 대해서 중국공산당은 스탈린을 옹호하면서 이후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중소논쟁은 물론 중소국경 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국내적으로는 스탈린 사망 후 사회주의 국가의 동요에 대해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斉放百家争鳴)이라 하여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방침에 고무되어 일제히 발언을 하기 시작했고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지식인으로부터 비판이 일자 중국공산당은 ‘언자무죄’의 방침을 무시하고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반우파 투쟁을 개시하여 전국에서 50만 명 이상을 실각·투옥시켰다.
1958년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을 개시하고 대대적으로 인민공사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무계획적으로 추진되었던 대약진운동은 대량의 아사자를 낳고 실패로 끝났다. 그 후 류샤오치[劉少奇]가 경제조정을 계획하지만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류샤오치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치무대에서 추방했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전개되면서 정치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전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청소년에 의해 결성된 홍위병이 ‘조반유리(造反有理: 반란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탈권투쟁(奪權鬪爭)에서 각 학교·당·정부기관의 실권파 타도에 앞장섰다. 1969년 중국공산당 제9차 전국대회는 문화대혁명의 승리를 선언했으나, 정국은 내란상태와 다름없었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종결되었다. 그 후 일단 화궈펑[華國鋒]이 뒤를 이었으나 실각하고 덩샤오핑이 정권을 장악했다.
중국은 1978년 3중전회(三中全會)에서 ‘사상을 해방하고 사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일치단결하여 앞을 보자(解放思想, 實事求是, 團結一致向前看)’라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여 당의 노선과 정책은 대폭적으로 시정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친 근대화가 일정한 궤도에 올랐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주 004
각주 004)
후야오방[胡耀邦] : 1964년 공산주의청년단 제9기 중앙상임위원 겸 제1서기 등으로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공산주의청년단 업무를 맡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서기처가 해산되고 홍위병의 비난을 받고 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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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망한 후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빈번히 발생했다. 5월 13일 이후에는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의 시위를 일으켰다. 5월 17일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텐안먼광장에 운집했다. 이에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하고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중국공산당은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 27군을 동원, 무차별 발포로 톈안먼광장의 시위군중을 무력 진압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되어 유혈사태로 마감된 톈안먼사건은 군의 발포로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종결되었다. 텐안먼사건의 무력진압은 중국공산당이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경제는 개방해도 공산당 지배는 변하지 않는다”는 강한 메시지를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소련에서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페레스트로이카)·개방(글라스노스트)을 내걸고 경제의 자유화뿐만 아니라 정치의 자유화까지 추진하고 있었던 반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경제에 한정되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 중에서도 정치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그 연장선상에 텐안먼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텐안먼사건 이후 개혁의 파고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었지만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주 005
각주 005)
남순강화(南巡講話)는 덩샤오핑이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우한[武漢],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상하이[上海] 등을 시찰하고 중요한 담화를 발표한 것을 가리킨다. 덩샤오핑이 제창한 개혁·개방정책이 10년을 맞이한 1989년 톈안먼 사건이발생하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자 중국 내부에는 개혁·개방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심화됐다. 이에 덩샤오핑은 남쪽 지역을 순례한 뒤 담화를 발표한다. 담화의 주된 내용은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는 것으로, 중국 내부에서 제기된 이념논쟁(姓資姓社 :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남순강화 후 톈안먼 사건으로 일시 중단됐던 개혁·개방정책은사영기업 육성, 400여 가지의 규제완화 등을 통해 가속도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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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다시 개혁·개방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남순강화는 개혁·개방을 다시 점화시켰다는 것 외에 사영기업을 본격 양산해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경제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남순강화 이후 국무원은 경제활동에 대한 400여 가지의 규제를 철폐했다. 중국인들은 개혁·개방이 기치를 올린 것은 1978년 11기 3중전회지만 정작 중국 사회를 바꾼 것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라고 말할 정도다.
2) 정치체제
중국의 현행헌법은 1982년에 제정된 것으로써 1954년·1975년·1978년의 헌법에 이어서 4번째 헌법이다(1988년·1993년·1999년, 2004년에 일부 개정). 현행 헌법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유경제가 보장된 ‘사회주의 시장경제 발전’을 전문에 새로 포함시켰다.
헌법 제1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을 지도계급으로 하는 노농동맹(勞農同盟)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 전정(專政)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에도 입법·사법·행정기관은 존재한다. 단 삼권분립의 원칙은 없다. 공산당이 군·행정·입법·사법기구 위에 군림하는 권력구조를 갖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창당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중국공산당은 현행 당 규약에 맑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행동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주석으로 불리던 공산당 최고 직위는 1981년 6월 후야오방 때부터 총서기로 바뀌었다. 당의 일상 업무는 중앙정치국이 맡는다. 17기 중앙정치국원은 25명이다. 이들 중에서 9인의 상무위원회가 구성된다. 당 서열9위까지의 상무위원들이 최고 권력을 분점한다. 중앙위 사무국 역할은 6명으로 구성된 중앙서기처가 담당한다. 당원의 태도와 기율을 감독하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와 군부를 지휘하는 11인의 중앙군사위원회가 있다. 중국공산당 조직은 성, 자치구, 현, 시 등 지방 단위에도 당위원회의 명칭으로 존재한다. 학교, 직장 등 거의 모든 조직에 372만 개의 당위원회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공산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18세 이상으로, 당원 2명의 추천과 당 기관의 심사와 비준이 필요하다.
중국의 입법기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다. 헌법에 따르면 국가기관 중 최고 권력기관이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 서방 언론이 전인대를 ‘고무도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전인대는 성, 직할시, 자치구 및 군대에서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다. 2008년 3월 시작된 11기 전인대 대표는 총2,987명(20%는 여성)이다. 각 소수민족도 각각 적당수의 대표(전체의 13% 정도)를 갖고 있다. 임기는 5년이며 매년 3월 한 차례 대회를 연다. 전인대는 국가 주석과 부주석, 국무원 총리 선발권도 갖는다. 2002년 11월 전인대에서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의 뒤를 이어 후진타오[胡錦濤] 공산당 총서기를 국가주석으로 하는 이른바 4세대 지도부가 출범했다. 2007년 3월 전인대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재선출 됨으로써 2011년 현재 후진타오 제2기 정부가 정권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은 군을 ‘인민해방군’으로 부른다. 군사 최고 권력기관은 중앙군사위원회다. 형식적으로는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와 국가 중앙군사위원회로 나뉘지만 구성원은 같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선출하고, 주석이 구성원 인선을 결정한다.
중국의 최고 국가 행정기관은 국무원이고, 현재 대표는 원자바오[溫家寶]총리다. 국무원은 전인대의 집행기관이다. 전인대에 책임을 지며 활동을 보고한다. 산하에 부·위원회, 직속특설기구, 직속기구, 사무기구 등이 있다. 국무원 임기는 전인대와 동일하며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은 3선이 금지돼 있다.
사법기관 역시 당의 지도를 받는다. 사법권의 독립은 기본적으로 없다. 최고인민법원 원장은 전인대에서, 지방인민법원(고급, 중급, 기층) 원장은 지방인민대표대회에서 선발한다.
3) 사회문화
(1) 세계 1위 인구대국
중국의 민족은 총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과 국가가 인정한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다. 인구 100만 명을 넘는 소수민족은 좡·후이·위구르·이·먀오·만주·티베트·몽골·투쟈[土家]·부이[布依]·조선·둥·야오·바이[白]·하니[哈尼] 등 15개 민족이며, 이 가운데 좡족은 1000만 명이 넘는다.
중국은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을 내세워 영토적 일체성과 국민적 통합을 강조한다. 중국은 공산혁명 이후에도 소수민족의 전통에 대한 보호책으로 자치구나 자치주를 설정하여 각 민족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이러한 정책은 한편으로는 소수민족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시킴으로써 한족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양면성을 지닌다. 한민족(韓民族)인조선족(朝鮮族)은 약 192만 명으로 소수민족 중 14번째로 많고 소수민족의 2.6%를 차지한다. 조선족은 둥베이[東北] 3성인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랴오닝성[遼寧省] 등에 분포한다.
중국은 부동의 세계 1위 인구대국이다. 중국의 인구조사는 10년 주기로 이루어지는데 가장 최근의 조사에 해당하는 2000년 제5차 조사에서는12억 9,533만 명으로 집계됐고, IMF의 중장기 인구전망에 의하면 2010년 중국 인구는 13억 4,141만 명으로 예측된다. 중국은 많은 인구로 인하여‘1가구 1자녀’만을 허용하는 인구증가억제책을 전개하고 있다. 이 같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이 2000년 16.12명으로 줄었고, 2005년에는 여성 1명이 평균 1.73명의 자녀를 낳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년간 추진해 온 산아제한운동이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지역정부가 현지 경제사정을 감안하여 두 자녀까지 출산을 허용하는 내용의 가족법 개정안을 고려하고 있다.
(2) 개혁·개방정책의 성과와 폐해
중국은 1978년 3중전회(三中全會)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1982년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라는 원칙을 천명하면서 급격히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농촌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혁명 이후 지속되어온 사회주의의 자취가 점점 사라졌다.
1980년대 초 농업은 탈집단화(脫集團化) 또는 사영화 되었으며, 과거 인민공사에 의한 집체농업(集體農業)은 개별 농가에 의한 개체농업(個體農業)으로 전환되어 혁명 이전의 상태와 유사한 자작소농체제로 바뀌었다. 1984년이 후 이러한 개혁은 도시까지 확대되어 국유기업이나 집체기업들이 임대되거나 주식회사가 되기도 하고 사적 소유기업도 등장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경제안정과 정치력에 힘입어 개방·개혁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더욱이 1997년 영국으로부터의 홍콩 반환, 1999년 포르투갈로부터의 마카오 반환은 개혁·개방을 가속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중국은 2001년에는 WTO에 가입하고,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2010년에는 상하이 엑스포와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 등 경제성장에 따른 성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제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한편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라 그에 따른 부작용도 심각하다. 우선 농촌과 도시의 소득격차, 극심한 빈부격차와 이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을 들 수 있다. 개혁 이후 급속한 도시화는 도시 노동자들 간의 소득 및 생활수준의격차를 심화시켰으며, 농촌 역시 다양한 사영경제활동의 결과로 소득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농촌의 잉여노동력이 도시로 몰리고 있고, 도시와 농촌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도 다시 벌어지게 되어 이촌향도(離村向都)의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동부지역의 급속한 성장과 산업화를 가져왔지만, 중서부 내륙 농촌의 상대적 빈곤을 심화시켰다.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나온 농민공들은 저임금 노동력으로, 도시빈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편 사영기업가들은 인민대표대회나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게 되었고, 경제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능력이 있는 새로운 엘리트로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급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원칙이 손상되었다. 최근에는 개혁·개방과정에서 사회범죄도 늘어나, 이른바 6해(六害)라고 하여 매춘·포르노·인신매매·마약·도박·사기 및 살인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중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며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섰지만 이로 인한 환경파괴도 심각하다. 중국은 전력의 80%를 화력발전소를 통해 충당하고 있다. 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아황산가스는 중국 대기오염의 주원인이다. 또한 중국의 산업용수 사용량은 중국의 경제성장률과 같은 수치로 증가하고 있어 이에 따른 수질오염이 심각하다.
한편 1994년 12월 중국은 홍수와 전력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계획으로 싼샤[三峽]댐 공사를 시작했다. 싼샤댐의 발전량은 남한 전체 발전량과 맞먹는다. 그러나 중국 개발의 상징인 싼샤댐은 2백만 명이 넘는 이주민을 발생시켰고, 양쯔강 오염과 벌목은 더욱 심각해졌다. 서해로 유입되는 담수의 80%를 차지하는 양쯔강을 가로막는 싼샤댐은 바다로 유입되는 담수의 양을 크게 줄여 동아시아의 해양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 각주 004)
    후야오방[胡耀邦] : 1964년 공산주의청년단 제9기 중앙상임위원 겸 제1서기 등으로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공산주의청년단 업무를 맡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서기처가 해산되고 홍위병의 비난을 받고 실각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남순강화(南巡講話)는 덩샤오핑이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우한[武漢],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상하이[上海] 등을 시찰하고 중요한 담화를 발표한 것을 가리킨다. 덩샤오핑이 제창한 개혁·개방정책이 10년을 맞이한 1989년 톈안먼 사건이발생하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자 중국 내부에는 개혁·개방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심화됐다. 이에 덩샤오핑은 남쪽 지역을 순례한 뒤 담화를 발표한다. 담화의 주된 내용은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는 것으로, 중국 내부에서 제기된 이념논쟁(姓資姓社 :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남순강화 후 톈안먼 사건으로 일시 중단됐던 개혁·개방정책은사영기업 육성, 400여 가지의 규제완화 등을 통해 가속도가 붙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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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료번호 : edeah.d_0006_004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