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전쟁의 전개과정

2. 전쟁의 전개과정

1) 기습남침과 연합군의 참전
1950년 6월 25일 새벽부터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고, 북한군 기동부대는 서해와 내륙에서, 유격대와 육전대는 강원도와 동해안 지역에서 남하하였다. 북한군의 주력부대인 제1군단은 서울로, 제2군단은 춘천과 강릉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당시 한국군은 오랫동안의 비상경계령이 불과 하루 전인 월 24일(토) 해제되었고,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외박을 나갔기 때문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소련제 T34전차와 SU76자주포로 무장한 북한군에 비해 한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국군의 방어 전선은 곧 붕괴되었고, 이승만 대통령과한국군 주력부대는 서울을 포기하고 남하하였다.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에 진주하였다.
북한군의 남침 소식이 미국 워싱턴에 전달된 시각은 6월 25일(토) 오후 9시 밤이었다.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해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은 전쟁의 성격을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규정하고, 이는 곧 극동과 일본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며 국제사회에 대한 도전으로써 이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곧바로 UN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어서 UN 한국임시위원단으로부터 ‘한국정부가 전복될 수 있다’는 비관적인 보고서를 받고, UN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결의안 82호’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미군의 투입과 UN 회원국들이 한국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UN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안보리는 7월 7일 UN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은 UN군 작전의 전권을 위임받고, UN군사령부를 통해 모든 UN군의 지휘 및 통제를 담당하게 되었고, 동경에 있는 극동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초대 UN군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이 결의는 UN이 최초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 지휘기구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일명, 스미스 부대)가 부산에 상륙하였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었다(오산 전투). 맥아더 사령관은 스미스부대에 이어 미 제24사단 제34연대 등을 보내고, 미 공군의 화력을 활용해 북한군의 전력을 적극적으로 소모시키면서, 일단 전선을 안정시킨 후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려고 계획하였다. 한반도에서 미군이 상륙하고 UN군부대의 지휘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UN군 사령관에게 위임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 한국군과 연합군은 개전 한 달여 만인 8월 1일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였다. 한국군과 UN군은 북한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마산·대구·경주 축선을 고수하며 부산을 근거지로 전세를 전환할 수 있기 기회를 기다렸다. 북한군의 남침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넘긴 UN군은 9월 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하고 대반격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마련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미 제10군단은 9월 18일부터 서울을 향해 진격, 전쟁 발발 3개월 만인 9월 27일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하였다.
한국군과 UN군은 9월 말까지 38선 남쪽의 북한군을 격멸하고 사실상 전쟁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였다. 그 후 한국군과 UN군이 38선을 돌파할 것인지 여부가 최대의 관심사항으로 부상하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북진을 계속하여 통일을 달성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 내 신중론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의식하여 확전을 우려한 나머지 38선 돌파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미국은 전세를 활용하여 UN군의 작전목표를 북한의 군사력을 무력화 시키는 데 두기로 하고, 영국을 비롯한 8개국은 한반도의 인위적인 분단을 해소하고 UN의 권능을 확립한다는 기조 위에 미국이 작성한 결의안을 UN총회에 상정하였다. 그리고 결의안은 10월 7일, UN총회에서 압도적인찬성으로 가결되었다. 그동안 한국군의 선두부대가 10월 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시작하였고, 10월 9일부터 한국군과 연합군의 전면적인북진작전이 시작되었다. 10월 19일, 한국군 제1사단이 평양에 최초로 입성하였다. 1950년 10월 하순에 이르면서 한국군과 UN군은 추수감사절(11월 23일)까지는 전쟁을 종료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자 맥아더 사령관은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의 속도로 압록강과 두만강선까지 진격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과 명령은 예상치 못한 중국인민지원군주 976
각주 976)
당시 신생국이었던 중국은 미군의 만주공격을 우려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규군이 아닌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닫기
의 참전으로 빗나갔고, 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았다.
2) 중국인민지원군 참전과 연합군 후퇴
연합군의 공세로 거의 괴멸 상태에 놓인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스탈린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Rodion Yakovlevich Malinovsky) 원수 휘하의 소련 극동군 소속 50만 병력의 투입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미국 등 연합군과의 확전을 우려한 스탈린은 직접적 참전을 회피하는 대신, 중국의 참전을 독려하였다.
당초 중국은 북한군이 남진할 때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1950년 7월 초부터 자체 판단과 소련의 권고에 따라 동북(東北)지역의 안전과, 필요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동북변방군’을 조직하였다. 그런데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붕괴되고 한국군과 UN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자 공공연히 전쟁 개입 의사를 밝히기 시작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직후인 10일 1일, 소련과 북한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 요청을 접수한 중국은 10월 3일 참전을 결정하고, 10월 8일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동안 출전태세를 갖추어 온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으로 개편(개칭)하고 출병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그 사실을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개입은 북한지역이 미국에 의해 점령된다면 적대국가와 국경을 마주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며, 소련으로부터 경제 및 군사 원조를 획득하고, 당시 중국 내 정치·사회적 불안과 압박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도 반영된 것이다.
마침내 중국은 인민지원군 12개 사단 26만 명을 압록강 북부로 집결시켰다. 이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특사인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이에 계속된 회담에서 50만의 중국군을 전선에 파병하기로 합의하여, 10월 중순경 펑더화이[彭德懷] 휘하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북한과 남한간의 내전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미국과 연합군의 참전을 통해 전쟁 전의 상황을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침내 중국군의 참전과 소련의 적극적 후원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양 진영 간의 전면전, 즉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중국군은 10월 25일부터 본격적인 공세작전을 감행하였다. 중국군의 제1차 공세로 한국군과 연합군 부대들은 중국군의 포위망에 고립되었다. 갑작스런 중국군의 출현으로 철수하기 시작한 미 제8군이 청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를 단행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인 25일, 중국군도 30개 사단 30만 명을 투입한 2차 공세를 시작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한국군과 UN군은 큰 충격과 피해를 입고 결국 흥남을 통해 긴급하게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 연말부터 중국군은 대공세를 전개하였고 연합군과 한국군은 38선과 수도권 북부를 포기하고 한강 이남에서의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대거 후퇴하였다. 이로써 1951년 1월 4일 중국군과 북한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은 미국 수뇌부가 연합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한국 정부요인과 군경 및 가족 약 100만 명을 제주도, 또는 사태가 더욱 심각할 경우 태평양의 외딴 섬으로 이전시킨다는 계획까지 검토할 만큼 긴박하였다.
한편 당시 미국은 중국군 개입에 따른 대처방안도 반드시 UN의 집단안전보장조치를 통해 강구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UN군의 전략은 38도선에서 휴전하여 현상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미국의 수뇌부는 전쟁의 열세를 만회하고 전세를 역전시킬 새로운 전략을 검토하는 한편, 한반도에서의 전선이 38선 이북으로 다시 확대되는 것은, 중공뿐만 아니라 소련의 개입까지 초래하여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였다. 새로운 전략이란 국방성과 극동사령부가 중심이 되어 수립한 핵무기사용 계획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은 전세를 재역전하고 중국군을 한반도 밖으로 축출하기 위해서는 압록강 이북 지역 즉 만주 지역에 대한 핵무기 사용까지 적극 검토하였다.
이에 대해 나토(NATO) 회원국들을 대표하여 영국의 애틀리(Clement R. Attlee)수상이 즉시 워싱턴을 방문하여 이루어진 영·미 정상회담에서, 양측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면전을 회피하고 전쟁 이전의 38도선을 토대로 전투행위를 종결짓겠다는 결론에 합의하였다. 나중에 미국정부는 확전을 주장하는 맥아더 장군에게 주의를 주고 아울러 적에게 최대의 피해를 가하면서 진지를 방어하되, 인력과 물자의 손실을 최대한 피하라는 지침을 하달하였다. 여기에는 결코 한국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동시에 확전을 억제하고 휴전정책을 통해 전쟁을 종료한다는 의지도 담겨있었다. 영·미 영수회담에서 합의된 현상유지정책에 기초한 지침이었다.
3) 교착과 휴전협상
UN군은 몇 차례에 걸친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를 격퇴시켰으나 완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며, 공산군도 그동안 전투에서의 손실로 더 이상 승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런 가운데 북진과 확전을 주장했던 맥아더 사령관이 결국 1951년 4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다. 후임으로는 제8군사령관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이 임명되었고, 지휘관이 교체됨에 따라 전쟁 자체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전선이 1년 만에 다시 38도선 부근에서 교착되자 양측은 군사적인 작전이라기보다 정치적 논리에 의한 휴전을 위한 작전을 검토하게 되었다. 이 무렵 UN군이 휴전회담에 착수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UN군이 평양, 원산까지 진격할 경우 중국과 소련이 휴전회담에 응하지 않을 것이고, 또 다시 북진할 경우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와 함께 병참선이 길어져 군사적으로 불리할 수 있다는 점, 둘째, 미국이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20만 명의 정규군과 최소 9억 달러 이상의 전비가 필요한 데 의회와 국내 여론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는 점, 셋째, 1951년 6월말 미군의 전사자가 21,300명에 달하는 등 인명피해가 너무 크다는 점.
한편 중국과 북한은 1951년 6월 무렵 대체로 휴전을 희망했지만,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물자와 장비만을 추가로 지원할 테니 전쟁을 계속하라고 독촉하였다. 중국군은 1951년 춘계공세에서 입은 약 10만 명의 막대한 인명피해로 사기가 저하되었고 화력의 절대적 열세 때문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1951년 전선 상황과 내부적으로 전쟁을 지속할 형편이 못 된다는 점, 그리고 체제 위기와 함께 또 다시 UN군의 상륙작전이 감행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휴전협상을 재촉하였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휴전협상에 반대하였으나, 1951년 6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소·북한 영수회담에서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소련은 한국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38선을 경계로 휴전이 성립된다는 전제 하에 배후에서 이를 조종하려고 하였다.
6월말 경 미·소 양국은 상호 간에 협상의지를 내비치고 비밀접촉을 한 후 휴전회담을 시작하는 데 합의하였다. 휴전협상은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휴전회담을 위한 쌍방의 연락장교회담이 개최되어 쌍방의 정부대표 명단을 교환하고, 본회담 개최 장소를 개성으로 결정하였다. 이윽고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UN측 협상 수석대표는 미국의 해군제독 토너 조이(Turner Joy) 중장이었고, 공산 측 수석대표는 북한인민군 총참모장 남일(南日)이었다. 한국군의 백선엽 소장 등도 참여했으나 발언권이 없는 옵서버 자격이었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본회담이 시작되고, 10월에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다.
휴전회담의 주요 쟁점은 UN 측의 ‘선 휴전·후 협상’ 대(對) 공산 측의‘선 협상·후 휴전’에 대한 공방, 군사분계선을 38도선 북방의 어느 한 선 대38도선으로 하느냐, 북한 내 비행장 복구문제에 관한 설전, 전쟁포로 처리문제 등이었다. 이 가운데 전쟁포로 처리문제는 최대의 쟁점이었는데 공산측은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 따른 ‘전원 자동송환’을 주장한 반면, UN측은 개인권리 불가침을 내세워 ‘개별적 자유송환’을 주장하였다.
특히 전쟁포로의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에 대해 양측이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하였기 때문에 회담은 두 차례에 걸쳐 총 9개월간이나 중지되기도 하였다. 양측이 서로 협상의 주도권을 차지하고 상대방을 압박할 수단으로써 협상 중에 또는 협상이 중단된 시기에는 특히 치열한 고지탈환 전투와 대규모 폭격, 기습작전 등을 계속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상호 간의 피해가 더욱 늘어나고 해당 국가들의 국내 사정이 열악해지자, 195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미국과 소련의 리더십 변화에 따라 새로운 접근방법들이 모색되었다.
4) 휴전
1953년 1월 20일 민주당의 트루먼 대통령이 물러나고 공화당 출신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대통령이 취임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이 장기화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현실적인 제안과 새로운 압박을 구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것은 휴전회담의 최대 쟁점인 포로송환 문제에 관해 부상포로의 즉시 교환을 제안함과 동시에 핵무기 사용에 대한 언급이었다.
마침 중국도 오랜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와 경제발전 계획이 지지부진한 데 대한 부담 등으로 휴전회담을 빨리 종결짓고자 하였으나, 스탈린으로부터 확실한 언질을 받지 못하며 시간만 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3월 5일 스탈린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저우언라이는 모스크바를 다녀온 후 3월30일 포로인도 문제에 관한 새로운 제안을 함으로써 휴전회담이 급진전하였다. 이후 휴전회담은 다소의 우여곡절을 통해 어느덧 막바지 국면에 접어들었고, 1953년 6월 8일 UN군과 공산군 측 회담대표들은 회의 의제의 마지막 관문인 포로교환 협정에 합의하였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줄곧 휴전에 반대하였으며 UN군의 지속적인 북진과 한반도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UN군과 공산군 측의 포로교환 협정 합의 소식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승만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전국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포로 27,000여 명을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전격적으로 석방하여 미국과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반공포로를 공산군에 넘겨줄 수 없으며 반공포로들의 자유세계에 대한 열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측면과 북진통일을 향한 한국민의 의지를 과시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휴전회담과 미국에 대해 극단적인 조치로써 항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중국군의 철수, 미국에 대한 한미방위동맹의 체결 및 군사·경제면에서 한국 원조 등을 요구하였다. 자칫 한국정부의 포로석방으로 휴전회담이 무산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경제원조 등을 시사하며 한국 측을 안심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휴전회담 개시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서명자는 제3대 UN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북한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그리고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였다.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회담이었다. UN군과 북한은 종전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라 정전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는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일시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1953년 정전협정 이후한반도는 정전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정전협정에 의해 설치된 군사정전위원회는 이의 이행여부를 감시하게 되었다.

  • 각주 976)
    당시 신생국이었던 중국은 미군의 만주공격을 우려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규군이 아닌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전쟁의 전개과정 자료번호 : edeah.d_0006_002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