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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사상계의 동향

2. 사상계의 동향

구미열강으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아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의 길을 걸어온 일본에 있어서는 정부나 지식인 사이에 일찍부터 개인의 권리, 자유와 함께 국가의 독립과 국권의 확장이 근대국가 형성과정에 있어서 국민적 과제로서 자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메이지 초년부터 나카에 조민, 오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 등이 프랑스식의 천부인권론에 근거한 자유민권사상을 전파했지만 거기에는 국권론의 요소가 크게 포함되어 있었다.
1880년대 말부터 정부가 그때까지 추구해온 구화정책이 껍데기뿐이라고하고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민간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도투토미 소호[德富蘇峰]는 1887년 민우사(民友社)를 설립하고 그해 잡지『국민의 벗(國民之友)』,1890년에는『국민신문(國民新聞)』을 창간하고 야마지 아이산[山路愛山], 다케고시 요사부로[竹越與三郞] 등과 함께 평민적 구화주의를 주창했다. 이것은정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구화주의를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적극적으로 서양문화를 섭취하는 것으로 영국적인 의회정치와 사회정책도 주장했다. 한편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 스기우라 주고[杉浦重剛], 구가가쓰난[陸羯南],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昂] 등의 정교사(政敎社)의 그룹은 잡지『일본인(日本人)』과 신문『일본(日本)』에서 서양문화의 무비판적 모방을 반대하고 일본의 고유한 전통 속에서 가치의 기준인 진선미를 찾아 그것을 기초로 국민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른바 국수보존주의를 주장했다. 어째든 국민을 기초로 한 내셔널리즘의 입장에 서서 위로부터의 국가주의에는 비판적이었지만 청일전쟁을 계기로 점차 비판적인 입장은 사라지고 도쿠토미의 국가주의로의 변신에서 보이는 것처럼 국가주의에 동화되어 갔다. 또 1900년쯤에는 열강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형태로 다카야마 초규[高山樗牛]는 잡지『태양(太陽)』에서 일본주의(日本主義)를 주창했다.
청일전쟁 후에는 일본의 대외팽창, 대륙진출과 그것을 지탱하는 국가주의가 사상계의 주류가 되었다. 가토 히로유키,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등 제국대학의 학자가 중심이 되어 독일식의 국가주의와 사회유기체론을 수용하여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강하게 주장했다. 또 사회진화론이 가토 등에 의해 확산되는 가운데 이것을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 적용하여 국제사회에 있어서 우승열패, 약육강식을 긍정하는 사고방식이 강화되었다. 국가주의 사상은 전통적인 유교도덕과 결합되어 일본을 천황을 정점으로하는 대가족으로 보고 ‘충효일치’ ‘충군애국’의 정신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가족국가관은 메이지 시대 말기에는 정부에 의해 국정 도덕교과서에 들어가 의무교육의 보급과 국민도덕론의 전개와 더불어 널리 국민 사이에 국체관념으로 뿌리를 내리고, 천황제 국가의 사회질서를 내면에서부터 지탱하는 강력한 도덕적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에 반하는 사고방식이나 학문 연구에 대해서는 종종 강한 핍박이 가해졌다. 신도의 실증적 연구「신도는 제천의 고속(古俗)」이란 논문을『사학잡지(史學雜誌)』에 발표한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신도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제국 대학 교수를 사임하고 기독교의 입장에서 교육칙어에 대한 배례를 거부한 제일고등중학교의 촉탁 교원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가 학생과 저널리즘의 비난을 받고 이에 동조한 학교당국에 의해 교단으로부터 쫓겨났다. 또 초등학교용 역사 국정교과서에 남북조 병립설을 집필한 기다 사다키치[喜田貞吉]가 남조를 정통으로 삼는 입장으로부터 격렬하게 공격을 받아 편수관을 휴직하는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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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의 동향 자료번호 : edeah.d_0005_0050_0030_0020